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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채널예스 :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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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도서관에서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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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하영/11학번/피아노학과, 이지수/11학번/컴퓨터공학과, 이경민/11학번/영어영문학과,
이임경/11학번/국어국문학과, 배세영/11학번/통계학과, 정윤경/11학번/간호과학과, 김수영/11학번/간호과학과

전국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TOP3에 드는 실력을 자랑하는 ESAOS는 보통의 동아리처럼 유흥을 즐기기 위한 모임이 아닌,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인 동아리. 음악 전공자들은 아니지만 오디션을 통해 기본 실력을 검증 받았고, KBS <불후의 명곡>과 같은 프로그램에 백그라운드 뮤지션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평소 기다렸던 공연이 개막하면 함께 단체관람을 하고, 타 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의 교류도 적극적이다. 통계학과 11학번 배세영 양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곡들을 몇 달간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에 올릴 때, 그 벅찬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문화생활 함께 공유하며 우정 쌓는 동아리

보통 여대에서는 연합동아리를 선호하는데 ‘ESAOS’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이지수_ 여자들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 동아리이기 때문에 동아리 구성원 사이의 정이 특히 끈끈하거든요. 함께 연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얻는 보람이 큰 것 같아서 ESAOS에 들게 되었어요.

정하영_ 저희 동아리는 연습을 정말 열심히 해요. 다들 아마추어니까 처음에는 많이 힘들지만, 점차 실력이 늘어나는 모습을 볼 땐 정말 뿌듯해요. 다들 음악 전공자가 아닌데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연습하고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에세이오스의 자랑이에요.

정윤경_ 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오케스트라에 들어오고 싶었어요. 만약에 이대에 오케스트라 동아리 없었다면 이대에 안 들어왔을 수도 있어요.

배세영_ 다른 학교 동아리를 보면 힘 쓰는 일은 보통 남자들이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다들 여자니까 모든지 스스로 해요. 독립적인 힘이 저절로 길러지는 것 같아요(웃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무엇인가요?

정하영_ 저희가 3월 달에 연주할 곡인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서울시향이 연주한다고 해서 단원들과 다같이 보러 갔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동아리 친구들과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본 것도 좋았어요.

이경민_ 단원들과 함께 연주해야 할 곡들의 공연을 자주 보러 가는 편이거든요. 예술의전당에 자주 가는데, 함께 공연을 감상한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기쁜 일인 것 같아요.

평상시 독서를 좋아하는 편인가요? 대학생이 되고 나서 독서습관이 변한 부분이 있나요?

이지수_ 책을 읽을수록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바쁜 와중에도 나에 대해서나 주변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데 큰 도움이 돼요.

정윤경_ 책을 읽어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할 일이 없으면 책을 꺼내서 읽는 게 제 독서습관인 것 같아요.

이임경_ 대학에 들어온 후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보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도서관에 자주 와요. 서점에서 신간들도 자주 살펴보는 편이고, 인기 있는 책을 반드시 읽어보진 않더라도 트렌드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요. 요즘 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은 『레 미제라블』이에요. 늘 예약이 꽉 차있더라고요.




이 책만큼은 다른 대학생들도 꼭 읽어봤으면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김수영_ 우연히 서점에서 『버킷리스트』라는 책을 보게 됐는데 선 자리에서 후다닥 완독할 정도로 흥미로웠어요.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이 너무 소중해 지는 계기를 갖게 됐어요. 『나무 심는 사람』도 좋아해요. 초등학교 6학년때 읽었고 최근에 한 번 더 읽었는데, 그때는 막연히 아름답다라고 느꼈던 내용이 이제는 정말 훌륭하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고요.

정윤경_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알고 있었던 내용도 있었지만 실제로 글로 적혀있는 걸 읽고 나니 새롭게 와 닿았고 실천해보려는 노력이 생긴 계기를 만들어줬어요.

이임경_ 박민규의 『카스테라』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 좋았어요. 『카스테라』는 작가 박민규가 가진 독특한 소재와 그에 따른 이야기의 서술이 돋보이는 책이었고, 문체가 재미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어요. 『두근두근 내 인생』은 주인공 아이에게 몰입되어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시간에 읽을 수 있었고 맘껏 울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김애란 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요.

정하영_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진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 책이에요. ‘꿈은 크게 꾸어라’와 ‘불평하지 마라, 그저 노력해라’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단순한 교훈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에겐 크게 다가왔던 부분이에요. 음악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늦게 시작해서 자신감도 없었고, 신체적인 조건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책을 읽고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 일이니 무조건 열심히 했다고 마음먹게 되었어요.

이경민_ 최근은 아니고 『모모』라는 작품을 좋아해요. 읽을 때 마다 새롭게 느끼는 바가 있는데,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날카롭게 꼬집는 부분이 있어서 교훈도 얻을 수 있어요.

내 인생의 공연이라고 손꼽을 만한 작품이 있나요?

정하영_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공연 <카르멘>을 관람했는데 3층 꼭대기 거의 맨 끝자리에서 봤지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좋은 음악과 연기, 무대예술을 한번에 관람한다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니잖아요. 오페라 티켓이 워낙 비싸서 자주 갈 수 없기도 하고요. 음악들도 좋았지만 스토리가 매우 흥미로웠어요. 앞으로 오페라를 자주 보러 다닐 생각이에요.

이지수_ 뮤지컬 <명성황후>는 내 생애 최고의 뮤지컬이에요.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공연으로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한정된 무대 공간에서 다양한 장면을 연출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특수 효과들 그리고 배우들의 노래까지 정말 좋았어요.

정윤경_ <난타>를 좋아해요. 지금까지 몇 년을 걸쳐 총 5번 정도는 본 것 같은데 매번 연기자들이 바뀌다 보니 다시 보러 가도 새롭기만 해요. 대사도 음식 이름 같은 간단한 단어만 몇 마디 하다 보니 외국사람들이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인 친구들에게 소개할만한 작품이에요.

김수영_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를 인상 깊게 보았어요. 혁명이라는 주제로 황태자 신분의 루돌프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나 대단했어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하면서도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낸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배세영_ 마리스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첫 내한공연이 기억에 남아요. 티켓이 비싸서 합창석에 앉아서 봤는데 오케스트라 뒤에서 공연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악보가 보이고 지휘자의 표정이 보이는 시야였는데, 특히 현들이 한 사람이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이 깔끔했던 기억이 나요.

이경민_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작품은 뮤지컬 <Wicked>에요.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에 등장한 선과 악을 뒤집어서 내용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시각적으로 굉장히 화려해서 아이들도 좋아할 수 있고 어른들도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스토리인 것 같아요.




타블로, 다이나믹 듀오, 브로콜리 너마저… 좋아해요!

좋아하는 음반을 소개한다면?

정하영_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음반인데 에픽하이의 타블로와 프로듀서인 페니가 함께 만든 <이터널 모닝(Eternal Morning)>이라는 앨범이에요. 이 앨범에는 ‘Soundtrack to a lost film’이라는 부제가 붙어있고 랩이나 노래가 거의 없는 Instrumental 음악들로 구성되어있어요. 2007년 겨울에 발매된 음반인데, 새로운 학교생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했던 제게 위안이 됐던 음악이에요.

김수영_ 리차드 용재오닐의 솔로 앨범은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음반이에요. 비올라를 연주하고 처음으로 갖게 된 비올라 앨범이거든요. 평소에 존경하는 음악가이기도 하고 이 앨범을 제게 준 사람의 마음도 너무 특별했어요.

배세영_ 다이나믹 듀오의 4집 <Last Days>.에이브릴 라빈의 <Under My skin>. Far East Movement의 <free wired>.전 곡이 다 제 스타일이에요(웃음).

이임경_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 앨범 <보편적인 노래>. 담담하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목소리가 인상 깊었고 가사도 구구절절 아름다워서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아요.

이경민_ 뮤지컬 <레미제라블 OST>. 수 년 전에 구매했는데 1번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듣고 있으면 공연을 다시 보는 기분이 들어요.

평소 좋아하는 작가나 음악가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이임경_ 은희경 작가를 좋아해요. 은희경 그녀만의 발칙한(?) 문체가 글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 하게 만들어 줘요. 또한 흡입력 또한 높아서 책을 읽을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이경민_ 미하엘 엔데의 책을 읽을 때 마다 이 작가의 끝없는 상상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어요. 소설의 내용이 독자로 하여금 환상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줘요.

김수영_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너무 좋아해요. 평소에는 완전한 고전풍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저에게 특별한 영감을 줘요. 피아노 한음 한음의 특색을 너무 잘 나타내서 들을 때마다 감동이에요.

정윤경_ 앨런 멘켄을 좋아해요. 디즈니의 유명한 타이틀 곡들의 주인공인 작곡가인데, 언제나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그의 음악을 들으면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요. 스트레스 받고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심정이 들 때 저는 앨런 멘컨의 앨범을 들어요.

또래나 선후배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정하영_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원자력 르네상스의 실체와 에너지 정책의 미래)』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어요. 평소에 환경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이후 읽은 책이에요. 원전이 실제로 정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값싸고 친환경적인 에너지인지, 대안은 없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요. 내용이 많이 어렵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정하영_ 『트와일라잇』시리즈를 정말로 강추하고 싶어요. 비록 판타지 소설이지만 특히 여자 선후배들 중 아직 안 읽었다면, 바로 책을 가져다 주고 싶을 정도로 추천하는 작품이에요.

이지수_ 김두식 교수의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서 정확히 꼬집어 줘서 당시에 충격을 받았어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주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배세영_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꼭 한 번씩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스크루지 영감은 정말 개과천선 했을까?! - 『헬로 미스터 디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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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올리버 트위스트』등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각종 매체를 통해 그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덕분이다. 2012년은 그가 태어난 지 200주년(1812년 2월 7일)이었던 해다. 디킨스 탄생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다양하고 다채로운 행사와 이벤트가 영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있었다. 9명의 한국 작가들도 그에 동참했다. 디킨스의 탄생과 작품을 기리기 위해 헌정 소설집을 내놓은 것. 『헬로, 미스터 디킨스』(이음 펴냄)가 그것이다. 찰스 디킨스 테마 소설집으로 9명의 작가들이 디킨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30년 이상 당대 최고 작가로 활동하면서 사회 비판과 풍자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았던 디킨스였다.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데이비드 코퍼필드』, 『리틀 도릿』, 『위대한 유산』등 14권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크리스마스 캐럴』를 비롯한 중단편 소설과 <미국 인상기>등 여러 산문을 남겼다.




디킨스, 문을 열다

롤랜드 데이비스 영국문화원장이 『크리스마스 캐럴』일부를 먼저 낭독했다. 그는 낭독한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그에 관해 말할 때면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왜 이 부분을 낭독했는가?

개인적으로 나이 들수록 크리스마스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고, 크리스마스 직전 『크리스마스 캐럴』을 재해석한 영화를 봤다. 제목이 <머펫스 크리스마스 캐럴>인데, 여러분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여전히 사람들이 디킨스 작품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 사람들은 디킨스를 얼마나 좋아하나?

여전히 디킨스를 좋아한다.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드라마로 (그의 작품이) 계속 옮겨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여전히 많이 팔린다. 우리집 아이들도 TV드라마 등을 통해 디킨스가 하고자 한 진짜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디킨스를 읽는 방법

첫 주자, 김경욱 작가다. ‘김’ 씨 성을 가진 그는 어디서든 거의 첫 주자로 나섬을 말하면서 긴장을 푼다. 반면 『헬로, 미스터 디킨스』에서 그의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은 마지막에 서 있다. 디킨스의 동명 소설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정치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K가 언제 사형집행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내용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세 정령이 찾아온다. 이 세 정령에 이끌려 K가 과거, 현재, 미래를 본다.”그는 현재의 정령을 따라가는 내용을 낭독한다.

“K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폭도, 간첩, 빨갱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본다. (중략) 여기는 김치찌개의 밤, 라면의 밤, 누룽지의 밤”(p.286~288)

감옥에 갇힌 K가 누군지도 궁금한데, 그를 생각하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쓴 이유는 뭔가?

어떤 소설을 쓸까 고민 중이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전직 대통령이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굉장히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 그때 읽은 책 목록 중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있더라. 그걸 발견한 순간, 머리에, 가슴에 뭉글뭉글 떠오르더라. 그 생각을 따라서 썼다. 한계상황에서 K가 어떤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었을까 상상하면서 써봤다.

어떻게 이 사람이 힘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다.

소설에 잘 썼는데, 전달이 안 됐나? (웃음) 소설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편인데, 작품에 대해 덧붙이자는 부탁을 받으면 난감하다. 모든 걸 쏟아 부어서. 여러분이 읽고 느꼈으면 좋겠다.

다시 낭독의 시간. “K는 무릎을 꺾는 한기에 눈을 뜬다. 눈앞에는 회색 벽이 서 있다. (중략) 그에 관해 말할 때면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p.290~292)

맨 마지막에 찰스 디킨스의 것과 똑같은 문장을 쓴 이유가 궁금하다.

이 문장을 내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한계 상황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마음. 그리고 두려움을 상상했고, 그것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키는 용기에 대해 이 문장을 바치고 싶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유령들」의 최제훈이다. 디킨스의 것에서 스크루지를 교화했던 유령들이 다시 등장한다. 재밌는 것은 스크루지의 개과천선 이후를 다뤘는데, 최제훈은 유령들이 결국 교화에 실패한 것으로 가정했다. 스크루지는 유령 잡는 사람을 부른다. 낭독을 한다.

“문 고리쇠로부터 시작해 침대기둥으로 끝나는 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그의 얼굴은 부패가 진행되는 것처럼 점점 거무죽죽해졌다. (중략) 그의 손등을 두드려주고 가방에서 장비들을 꺼내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p.247~249)

스크루지가 착한 일을 하다가 실패했다. 문제가 생긴 거다. 인간을 신뢰할 수가 없게 된 거다. 좋은 일 해봤자 나만 손해 아냐?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만 한다. 개인의 결심이 사회를 신뢰할 수 없는 순간 깨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소설가가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소설을 쓰면서 다시 원전을 읽어봤다. 200년 전이지만 스크루지가 지금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인물 같았다. 인물 이상이지. 자선을 베푼다는 것이 선의에 기반한 장식적인 행동이라면, 자본주의 시스템에 기반한 선의는 굉장히 약할 수밖에 없다. 스크루지 영감이 자선을 이용하는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원 상태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최제훈이 낭독 모드를 취했다.

“나는 채찍을 풀어 바닥에 늘어뜨린 채 스크루지 영감을 향해 다가갔다.(중략) 오늘 중으로 바다로 나가려면 서둘러야 했다.”(p.265~266)

디킨스는 낭독의 대가였다. 듣는 이들이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구를 정도였다. 그는 연재소설도 많이 썼는데, 사람들이 다음 회를 무척 기다렸다고 하더라. 마지막 장면에 대해 듣고 싶다.

마지막에 유령이었다는 것은 반전이 아니고, 탐욕 자체가 유령이었다. 원고를 다 쓰고 보내고 나서 디킨스에게 좀 미안하더라. 탄생 200주년 기념 작품집인데, 개과천선한 스크루지를 원 상태로 돌려서 실어놓으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 자리를 통해 심심한 유감을 표하고 싶다. (웃음) 그래도 문학이 그런 거니까, 디킨스도 흔쾌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날씨 이야기」의 윤성희가 작품을 소개한다.

“이 소설은 『크리스마스 캐럴』과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세 정령들을 떨어트리고 스크루지만 소설 속 인물로 데려오면 어떨까 생각했다. 과거를 끌어안고 살아서 유령처럼 사는 여자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는 스크루지가 못됐다는 것보다 어쩜 이렇게 고독하게 살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 면을 주인공 마음에 담고 싶었다. 주인공은 유령처럼 살아가고 모든 사물도 주인공 눈에는 유령처럼 산다.”

윤성희의 낭독이다.

“잘못 배달된 엽서를 받고서야 언니는 지금까지 진심으로 누굴 미워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중략) “내가 미쳤니?” 언니가 말했다”(p.231~233)

가족들이 보기에 주인공은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으로 설정돼 있다. 주인공 이야기를 듣고 싶다. 불구경 간 이야기도 함께.

주인공은 스스로 유령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산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인과 어긋나지 않을까, 그렇게 여겼다. 주인공이 미쳐가지만 서서히 미쳐가는 과정 중의 하나? 가족을 잃고 고독해지면서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안간힘을 쓰는 제스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한국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보면, 스크루지가 잘 살 수 있을까 생각하듯, 이 주인공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에 동생이 언니에게 거울을 선물해 준다. 사실, 이 부분을 놓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거울은 흔한 것일 수 있는데, 언니에게 뭔가를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표현하고 언니도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그런 의도가 있었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디킨스를 읽는 방법

김중혁은 「픽포켓」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썼다. 이 제목, 사연이 있다. 그는 처음 『올리버 트위스트』를 떠올렸다. ‘픽포켓(Pickpockeㆍ소매치기)’으로 제목을 정했다. 헌데 함께 작업하는 작가들을 보니, 윤성희가 있었다. 김중혁, 생각했다. 아, 소매치기는 윤성희가 전문이지. 그래, 다른 이야기를 쓰자. 『두 도시 이야기』를 토대로 쓰기로 했다. 문제는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픽포켓」, 그대로 쓰기로 했다. 김중혁 답다.

‘부산’을 배경으로 썼다.

소설 쓸 때 지명을 잘 안 쓰는데, 여기에 나오는 부산은 가상의 부산이라고 보면 된다. 디킨스가 런던을 좋아하는데, 런던 뒷골목과 한국 뒷골목 이야기를 닿게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썼다. 즉, 이것은 골목이야기다.

김중혁이 읊는다. 나름 고저를 넣어서.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중략) 기민지도 땅을 보면서 계속 걸었다. 어딘가 분필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p.75~77)

소설 속에서 여가수가 사라진다. 골목이야기로 도시를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해 말해 달라.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골목이다. 골목을 지나가는 아이들, 골목을 지나가는 기민지가 있는 것이다. 골목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싶었다.

이날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들에 비해 피곤한 기색의 백가흠. 디킨스로부터 파생된 그의 단편은 「수도원 오르는 길-더 송The Song 4」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정혜윤 PD가 물었다.

어젯밤 뭐했기에 그렇게 힘들어하나?

‘클라우드’라는 음악 카페가 있다. 어제 강정마을을 후원하는 인디뮤지션 음악회를 하면서 낭독회도 열었는데, 공연이 3시간을 넘어갔다. 유명인들이 많이 왔더라. 요조도 처음 봤고, 시와 등 유명인사들이 많았다. 공연은 참 좋았는데 뒤풀이 때문에 힘들었다(웃음).

배경이 아테네와 광주다.

아테네에 간 적이 있다. 그리스가 긴축재정에 들어가면서 고난에 처해 있을 겨울에 두 달 정도 있었다. 뭘 좀 써봐야겠다 생각하면서 한국에 돌아왔는데, 마침 이 소설을 쓸 기회가 왔다.


백가흠이 읊는다.

“그가 본 것은 방안의 작은 창과 창밖으로 내려앉은 어둠과, 그것을 밤새 환하게 비추던 하얀 눈이 전부였다.(중략) 몸이 불편하니 자기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지도 금세 까먹었다.”(p.147~148)

이왕주는 어떻게 이왕주가 됐을까?

요즘 연작을 쓰고 있는데, 7개의 주제가 비슷하다. 과거의 기억이 치유되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순간 그것이 발현되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광주라는 도시를 소재로 소설을 쓰자니, 정면으로 응시하기가 힘들더라. 어쨌든 좀 비켜나서 보고 싶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잊은 듯 보고 싶고, 그런 것들이 내게도 있었다. 아테네 풍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과거 혁명에 실패한 상처를 품고 30년이 지난 때, 즉 이것을 치유하지 않고 어떤 때가 오면, 소설 속 맹목적인 이왕주처럼 그런 것이 생겨나지 않을까. 디킨스의 소설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나온 예언자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할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환경이나 시스템이 인간을 인간적이지 못하도록 제약을 가할 거라는. 역사의 도시, 두 도시의 풍경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콤플렉스가 문학의 주요 소재였다면 언제부터인가 트라우마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6.25, 광주, IMF 등이 그렇다.

그리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 우리가 1998년에 겪은 일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이 지금 지키려고 하는 건, 우리가 복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다시 한국을 되돌아보니, 우리는 뭔가 이상한 것을 극복하려고 십 몇 년 동안 애써온 것이 아닌가 싶더라.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뭔가 극복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극복한 것이 없다. 어떤 나라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우리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거지, 혁명이라는 것.

듣고 보니, 생각이 나는데, IMF때 그 많았던 금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안다. 기업들이 사들였다. 지금 은행에 있다. (국민들이) 뭔가 해보자 했는데, 한쪽에선 그걸 큰 기회로 삼았던 거지. 결국, 서민들만 엄청 희생한 셈이다. IMF 이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청난 희생으로 그걸 메운 것이지, 극복이라고 보기 어렵다. 소설에서 14살 먹은 아이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는 건, 겁이 나서 동생이 죽은 것을 사실대로 부모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이 부모마저 잃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 모든 것이 이 14살 먹은 아이의 잘못 때문인가? 그것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밥 짓는 이야기」를 들고 나온 박솔뫼에게 바통이 이어졌다.

소설에 대해 소개해 달라.

이 소설, 읽은 사람들이 귀엽다고도 하는데, 서늘한 부분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리 못했던 것 같다. 내 소설집에 실을 땐 잘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진한 부분이 있었는데, 여기 실을 때는 몰랐다. 이건 의뢰 같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 있는 거지. 디킨스와 다소 연관이 있을만한. 두 도시와 혁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썼다. 그냥 그 정도다.

“남자는 씻은 쌀과 적당한 물을 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르고 나는 여전히 이불을 덮은 채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뭐가 더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중략) 이불 속에서 무얼 먹어? 오늘은 무얼 먹어? 하고 질문들끼리 따뜻하게 감기고 그러면 이불은 서걱거리며 된장찌개야 하고 말해주지만 그걸 누가 알아듣나.”(pp.177~178)

영화 <레미제라블>의 흥행으로 혁명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박솔뫼 작가가 쓴 혁명은 이불 속에서 이뤄진다. 왜 혁명적이라고 느꼈을까?

혁명 이야기가 생각한 만큼 쓰진 못했다. 실제로 이런 꿈을 꿨다. 크게 가난하거나 부유하지도 않은, 그러나 크게 행복하지 않고 착취당하는 비슷한 나잇대 사람들이 사는 우주가 있다. 그건 싸워서 쟁취한 우주다. 그런데 그 우주를 만든 것이 너희 세대라고 말하는 할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 지금 나라는 사람이 사는 걸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살지만, 어떤 식으로든 압박감 같은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 사람들이 성취해보고 싶은 우주가 그런 우주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꿈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9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그 무렵엔 한국이 뭔가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신기한 한편으로 내가 부잣집에서 산 것처럼 그걸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순간순간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 순간과 감정을 소설에 쓰고 싶었다.


소설에선 맨 처음 나오는 「두 여자 이야기」는 하성란의 작품이다. 하 작가는 이날,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이 소설을 소개해 달라. 광주에 뭔가를 두고 왔다는 것을 부채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나?

D-city. 광주를 떠올릴 수 있고, 소설 속 두 여자는 결국 한 여자다. 이 사람이 광주에 간 것은 그 일이 있기 전이다. 산속을 헤매면서 평화로운 도시를 발견했고, 나중에 이 도시가 난장판이 되리라는 것을 몰랐던 거지. 밤에 오줌을 지리면서 오줌을 묻은 이불을 빨고 너는 도시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주인공 여자가 오인 받는 오인영이라는 여자가 있다. 주인공은 오인영을 자신이 산속에 놓고 온 반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산에 남아 있다가 보름 뒤 그 일이 벌어지는 도시에 나타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성란의 낭독이다.

“재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식이 끝나고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중략) 단맛 뒤에는 늘 비릿한 피 냄새가 뒤따랐다.”(p.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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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미스터 디킨스김경욱,김중혁,박성원,박솔뫼,배명훈,백가흠,윤성희,최제훈,하성란 공저 | 이음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문학을 이끌어가는 아홉 명의 한국 작가들이 디킨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신작 단편들을 모았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두 도시’를 주제로 글을 쓴 다섯 편의 소설(김중혁, 박솔뫼, 배명훈, 백가흠, 하성란)과, 『크리스마스 캐럴』을 기상천외하게 리바이벌한 세 편의 소설(김경욱, 윤성희, 최제훈), 그리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아 소년이 등장하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느슨한 변주 소설 한 편(박성원)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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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 요금제가 없어도 LTE는 잘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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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빠르게 변하는 걸 하나만 고르면 무선 통신이다. 10년 전 만해도 휴대폰으로 사진을 전송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제는 사진은 물론이고 대용량 동영상도 주고 받는다. 원한다면 기다릴 필요 없이 빠르게 접속할 수 있는 시대. 우리는 LTE(Long Term Evolution) 시대에 살고 있다.




LTE 속도로 정리하는 한국 이동 통신의 역사

현재를 잘 살펴보면 미래가 보인다.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종일은 2013년 모바일 트렌드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 이동 통신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이동통신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6년에 전세계 최초로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를 상용화한 것이다. 당시에는 유럽식의 TDMA(Time Division Multiplex Access)와 북미의 CDMA 방식이 경쟁하고 있었다. 하지만 TDMA 방식의 경우 유럽 휴대폰의 강자 노키아가 꽉 잡고 있었고, 결국 한국은 북미 시장 진출을 위해서 CDMA를 선택하게 되었다. 결과는 좋았다. 이후 CDMA 단말기와 관련 장비를 해외로 수출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WCDMA(Wideband 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소위 말하는 3G 서비스가 시작했다. WCDMA가 도입된 이후 삼성과 LG 등, 휴대폰 제조사의 수출이 증가했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주파수, 같은 통신 방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휴대폰 수출이 용이해진 셈이다. 반면 외국 휴대폰은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WIPI때문이었다.

WIPI(Wireless Internet Platform for Interoperability)는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플랫폼으로 장점과 단점을 고루 가지고 있었다. WIPI의 장점은 플랫폼의 통일이었다. WIPI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개발사가 각 통신사 별로 프로그램을 3개나 만들어야 했으나, WIPI 탑재 의무화 이후 개발사는 하나의 프로그램만 만들면 되었다. 서비스의 효율이 상승한 셈이다. 하지만 WIPI는 한국 이동 통신의 갈라파고스화를 초래한 단점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WIPI가 탑재되지 않은 휴대폰의 판매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즉, 한국에서는 공용 OS인 심비안이나 IOS가 설치된 휴대폰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용 OS가 큰 인기를 끌면서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2009년 4월에 WIPI 탑재 의무화가 폐지되었다. 당시에는 WIPI 탑재 의무화가 폐지할 경우 외국산 단말기에 밀려 한국 단말기 시장이 크게 축소되리란 견해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한국 모바일 시장의 갈라파고스화 또한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WIPI 탑재 의무화 폐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009년 9월, 애플의 아이폰이 드디어 한국에 출시됐다. 아이폰 출시는 통신사의 헤게모니를 부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에 통신사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설치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휴대폰 단말기를 팔고 WIPI플랫폼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유통했다. 하지만 아이폰은 네트워크만 통신사에 의존했다. 단말기는 애플이 판매했고, IOS 플랫폼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유통했다. 아이폰의 도입으로 소비자의 모바일 이용 행태도 크게 변화했다. 이전까지는 전화와 문자가 핵심이었지만, 아이폰이 도입되면서부터 데이터 사용량이 증가하였다. 아이폰으로 촉발된 데이터 증가를 해소하기 위해서 KT는 와이파이라는 해결책을 꺼내 들었다. KT는 경쟁사인 SKT보다 와이파이 서비스가 뛰어남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와이파이는 유선과 무선이 결합된 서비스이기에, 유선 서비스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KT가 SKT보다 우세했다.

와이파이와 아이폰을 내세운 KT에 대항해서 SKT가 내놓은 해결책은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와 삼성의 갤럭시S였다. 당시에는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가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회의적인 의견도 많았지만, 결국 성공했다. 스마트폰으로 데이터를 활용하고 싶은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해 줌과 동시에, 데이터 사용으로 인한 요금 과다 청구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신사 입장에서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는 양날의 칼이었다. 가입자를 유치하기에는 좋았지만, 가입자당 매출액은 감소했다. 결국 데이터 폭증 시대의 승리자는 누구일까? 박종일은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삼성전자”라고 말한다. 삼성전자는 아이폰과 IOS의 대항마로 시작한 갤럭시S와 안드로이드 플랫폼이 성공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삼성전자의 약진은 주가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옴니아가 온갖 혹평을 받고 있을 무렵 삼성전자의 주가는 70만 원 수준까지 하락했지만, 지금은 160만 원에 육박한다.

와이파이와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에 힘입어 모바일 서비스와 모바일 플랫폼이 활성화 되었다. 이제는 전국민의 필수 어플리케이션으로 자리잡은 카카오톡이 대표적이다. 카카오톡의 시작은 무료 채팅 서비스였지만, 이제는 막대한 사용자를 바탕으로 게임과 쇼핑까지 제공한다. 모바일 서비스가 모바일 플랫폼으로 진화한 가장 극적인 예이다.


LTE는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사람들은 이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친구와의 연락은 카카오톡으로 하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검색한다. 어제 놓친 예능 프로그램도 스트리밍 동영상을 이용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데이터 트래픽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이다. 박종일은 LTE가 답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LTE가 가장 효과적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속도다. LTE는 무선 서비스이지만 유무선의 결합 서비스인 와이파이보다 빠르다. 통상적으로 유선 통신이 무선 통신보다 10년 정도를 앞서 나감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LTE의 보급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우선 소통 방식이 변한다. 과거의 커뮤니케이션은 1대1이었다. 통화가 대표적인 예였다. 이제는 SNS를 이용한 1대多 혹은 多대多 방식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더 나아가 화상 통화도 본격적으로 자리잡는다. 과거 3G 기반에서도 화상 통화는 가능했지만, 통신 속도의 문제로 다소의 불편을 감소했다. 하지만 LTE를 기반으로 하는 화상 통화는 빠른 반응 속도를 바탕으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해준다.

구매 방식도 변한다. 이미 모바일 뱅킹은 보급화 되었다. 모바일 뱅킹을 이용하는 인구는 3천만 가량으로 추산된다. 이는 경제 인구의 대부분이 모바일 뱅킹을 사용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는 모바일 뱅킹에서 더 나아가 모바일로 쇼핑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쇼핑몰은 다양한 혜택을 앞세워 소비자를 모바일 쇼핑으로 이끈다. 또한, 오프라인과 모바일 쇼핑이 결합하는 형태도 등장한다. 고객이 지하철 등에 붙어있는 상품 바코드를 찍어서 쇼핑몰로 전송하면, 쇼핑몰에서 상품을 집으로 배달해주는 방식이다.

LTE의 보급은 클라우드 서비스와 빅 데이터 수집을 본격적으로 가능하게 해준다. 클라우드 서비스와 빅 데이터는 LTE 보급 이전에도 존재했던 개념이지만, LTE의 보급과 함께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가 되었다.


중요한 건 ‘모바일의 유통 방식’

『LTE 신세계』는 한 파트를 모바일의 유통 방식에 할애하고 있다. 박종일은 모바일 유통 방식이 LTE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휴대폰 보조금은 이런 저런 논란이 많지만, 분명한 사실은 휴대폰 보조금 때문에 LTE 단말기가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박종일은 휴대폰 보조금은 통신사와 단말기 제조사 그리고 소비자의 욕구가 맞물려서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통신사는 최대한 비싼 요금제를 도입하고 싶었고, 단말기 제조사는 최대한 비싼 휴대폰을 팔고 싶었으며, 소비자는 최신의 스마트 폰을 가지고 싶었다. 단말기 보조금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켜준다.

하지만 이런 모바일 유통 방식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우선 휴대폰 단말 자급 제도, 속칭 블랙리스트 제도가 도입되었다. 과거에는 화이트리스트 제도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통신사에서 인증한 단말기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파수만 맞으면 어떤 휴대폰이든 사용할 수 있다. 이제는 휴대폰을 반드시 대리점을 이용해서 구매할 필요가 없다.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를 통해서도 구매할 수 있고, 인터넷에서는 이미 활성화 되어있는 중고 시장을 이용해도 된다.

MVNO (Mobile Virtual Network Operator) 사업도 본격적으로 활성화 된다. MVNO는 기존 MNO (Mobile Virtual Operator)에게 망을 임대해서 수익을 얻는 사업자를 뜻한다. 이제 소비자는 기존 통신 3사에서 벗어나 다양한 서비스와 단말기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박종일은 MVNO 서비스를 통해서 수익을 얻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고 말했지만, 규모의 경제를 구축한다면 수익 창출이 가능할 수 있다는 단서도 덧붙였다.




박종일이 말하는 2013년 모바일 트렌드

1. 무제한 요금제가 없어도 LTE는 잘 나간다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가 없어도 LTE는 잘 나간다. 이미 총 데이터 사용량은 LTE가 3G를 뛰어 넘었다. 3G에는 데이터 무제한이 있지만, LTE가 단위 시간당 데이터 사용량이 많기 때문에 데이터 사용량이 더 많다. 지금 통신 3사는 미국 버라이즌의 서비스를 주목하고 있다. 버라이즌은 통화와 문자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요금제를 선보였다. 다만 데이터 사용량에 제한을 두고, 데이터 사용량이 늘어날 때 마다 추가 요금을 받는 형식이다. 이제 중요한 건 통화가 아니다. 데이터다. (덧붙이는 말: 모바일 트렌드는 정말로 급박하게 변한다. 강연 당시만 하더라도 LTE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가 없었다. 하지만 기사를 작성할 때는 통신 3사가 LTE 무제한 요금제를 발표한 후였다)

2. 중국을 주목하라

중국의 성장이 무섭다. 고사양 6인치 패블릿 폰이 발매될 정도다. 중국산 휴대폰은 성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가격이 국산 휴대폰의 절반 정도다. 내수 시장 또한 탄탄하다. 한국의 경우 안드로이드로의 종속이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구축한 생태계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플은 다소 위험하다. 주가도 떨어지고, 신용등급도 하락했다. 애플은 신흥 시장에서 IOS의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저가형 아이폰을 생산한다는 루머가 있다. 일단 애플은 부정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3. 모바일 플랫폼이 강화된다

이제 모든 휴대폰에 카카오톡이 깔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카오톡은 가입자 수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모바일 플랫폼으로 작동할 것이다. 하지만 모바일 플랫폼에는 양면성이 있다. 이제 카카오톡을 경유하는 개발사는 구글과 통신사는 물론이고, 카카오톡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포도청이 한군데 더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카카오톡이 잘 나가고 있기 때문에 개발사 입장에서는 숟가락을 얻을 수 밖에 없다.

4. 구글의 넥서스X

구글이 모토롤라를 통해서 넥서스X를 개발하고 있다. 뛰어난 성능과 저렴한 가격을 동시에 잡을 경우, 모바일 시장을 석권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구글의 최대 파트너였던 삼성전자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삼성도 구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 타이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해외에서는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폰이 개발되고 있으며, 아마존에서는 킨들 파이어의 뒤를 잇는 킨들 폰도 발매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건 휴대폰을 어떻게 보급하고 어디서 사느냐의 문제다. 편의점에서 10만 원이면 휴대폰을 구매할 수 있다. 넥서스7처럼 대형마트를 통해서 발매될 수도 있다. 중국산 휴대폰도 비슷한 방식으로 유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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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e 신세계박종일,김현구,주영현,편석준,임정선 공저 | 미래의창

LTE는 우리 삶의 대대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이고 모든 비즈니스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 트렌드가 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하다는 것, 무제한의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즐길 수 있다는 것. 휴대폰과 TV, 컴퓨터를 번갈아 막힘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기업과 소비자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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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이 제일 필요한 시기는 중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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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버텨내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잘 해내야 한다. 어쩌면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을 수시로 들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고3이라는 기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부모건 아이건 한번쯤은 거쳐야 하는 개별적인 고통의 시기이자, 회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됐든 맞는 말이다. 이왕에 피할 수 없는 시기라면 제대로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다. 대입의 과정은 20여 년이 된 수학능력시험과 더불어 내신, 논술, 입학사정관제 등 다양한 갈래로 얽혀있다. 웬만한 고교선생들도 진학지도에 두 손을 들어버리는 것이 최근의 현상이다. 자칫 잘못하면 아이도, 부모도 수험 스트레스에 치여 감정의 골만 깊어질 수 있다. 이에 두 딸의 고3 기간을 슬기롭게 보낸 소광숙 씨와 교육평론가 이범 씨가 현명한 해법을 제시했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부모의 절절한 심정까지 감싸 안는 소광숙 씨의 감성 해법과 현실적인 대입 전략과 준비법을 제시하는 교육평론가 이범 씨의 이야기는 많은 학부모와 예비 고3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사진 일기로 고3 딸 응원한 엄마

살을 베는 듯 한 칼바람이 기세를 떨치는 저녁 무렵,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연장에 모인 학부모와 예비 고3들의 눈에는 기대감이 서려있다. 최근 고3 딸을 응원하며 1년 간 찍은 사진과 글을 모아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라는 책으로 엮은 엄마 소광숙 씨와 교육평론가 이범 씨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행사의 제목 역시 ‘힐링타임’이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소광숙 씨가 찍은 딸 채영이의 사진이 화면에 소개되며 그 시작을 알렸다. 해맑게 웃고 있는 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다시 불이 켜진 후 앞으로 나선 소광숙 씨가 어색함을 감추며 인사를 건넸다.

“제 딸의 고3 1년 동안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엄마 소광숙입니다. 아이들은 참 예쁜 존재인 것 같아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다,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지만 그냥 자는 모습만 봐도 예쁜 존재죠. 그런데 그 이상으로 아이들은 참 부모를 힘들게 하고 내 맘대로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해요. 어쨌든 고3 때는 진짜 대학이 목표일 수밖에 없더군요”

밝고 명랑한 딸 채영이가 고3을 앞두고 있을 때 소광숙 씨의 마음 한편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아직은 철없어 보이는 딸, 그러면서도 ‘이제 좀 긴장을 하겠지’하며 내심 기대를 했다고. 하지만 1월 1일이 되고, 3월이 되도 딸에게 긴장의 기색을 느끼기란 어려웠다. 소광숙 씨는 조바심에 전전긍긍했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한번은 아이가 너무 외롭다고 하더군요. 결국 자기 혼자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대요. 그렇게 고3답게 행동하라고 몰아쳤는데, 자기 입으로 고3이라고 하니까 제 가슴이 내려앉더군요. 그러면서도 내심 ‘이제 좀 다른 생활을 하겠지’하고 기대를 했어요. 그런데 아이들 생각은 역시 그 순간인 것 같아요. 항상 휴대폰이 원흉이었죠(웃음). 마음 좋은 아이 아빠도 휴대폰을 없애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부모의 눈에 비쳐지는 고3 딸의 생활은 공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친구 문제, 이성 문제로 시시콜콜한 문자를 주고받는 통에 휴대폰을 끼고 사는 아이를 볼 때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내리 눌러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엄마가 바라는 모습만 있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소광숙 씨. 아이와의 실랑이는 흡사 연애의 그것과 같았다.

“아이들도 어른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일상을 겪는다는 걸 알았죠. 그러면서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재수 시키지 않고 전문대학을 보내겠다’는 등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고 공부시키려고 별말을 다 도 결국 그때뿐이고 다시 원상복구 되더군요. 한번은 채영이가 남자친구와 연애하며 ‘밀당’을 어떻게 하는지를 말해준 적이 있어요. 고3 아이와 엄마와의 관계가 바로 그 ‘밀당’의 시기더군요. 평소에는 이 나라 대학입시를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나,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도 결국 내 딸 문제로 돌아오면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제 마음과도 밀당을 하게 되고 아이와도 끊임없이 밀당을 해야 하더군요.”


그러나 고3 기간은 부모에게나 아이에게나 버거운 스트레스를 안기게 마련,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평소 아이와 대화가 되는 엄마임을 자부한 소광숙 씨의 자신감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일이었다.

“수능을 한 200일 정도 남겨 놓았을 때 저는 ‘아직 안 늦었어. 지금부터라도 하면 돼’라고 생각하며 조바심을 억누르고 있는데, 아이의 생활이 계속 눈에 걸리는 거예요. 친구와 문자하고 아니면 잠만 자고…. 결국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아이의 휴대폰을 보고 말았어요. 알고 보니 친구와 공부하러 간다고 한 날 영화를 보러갔더군요. 거실에 나가보니 마침 채영이가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더라고요. 도저히 못 참겠더군요.”

소광숙 씨는 당장 자는 아이를 깨워 가위를 주며 늘 눈에 거슬렸던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엄포를 놓았다. 엄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을 감지한 듯 채영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욕실로가 머리를 자른 후 목 놓아 울었다.

“머리를 길러서 찰랑거리는 게 너무 보기 싫었어요. ‘잘라야 된다는 만큼 자르라’고 했는데 귀 아래까지 잘라버린 거죠.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잘랐다 싶었는지 울더라고요(웃음). 순간 ‘사진을 찍기에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싶었는데 실제로 찍진 못했어요. 우는 아이를 보니 평소 열린 엄마라고 생각했던 제가 초라해지더군요.”

시간이 지난 후에 채영이는 그날을 떠올리며 ‘엄마 덕분에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외로운 길을 가야하는 고3 아이에게 누군가 자신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함께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 것이다. 소광숙 씨는 단지 아이 곁에 있는 것만이 아닌 엄마 역시 다른 목표를 가지고 함께할 것을 주문했다.

“고3 엄마, 사실 바쁘지 않아요. 혼자 낮에 누워있으면 ‘나는 왜 그렇게 아이에게 해줄게 없을까’ 그런 생각 많이 하시죠? 제가 고3 때 야간자율학습하고 돌아오면 집에 가족들은 이미 다 잠든 뒤였어요. 엄마만 겨우 일어나 밤참을 챙겨주시는 정도였죠. 저는 그때 진짜 외로웠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 이 깊은 밤에 나 혼자 깨 있어야 하는구나’ 그게 30년도 넘었는데 기억에 나거든요. 그래서 전 큰 아이 때도 그렇고 채영이 때도 다른 목표를 설정해 함께했어요. 아이에게 ‘나만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엄마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고3 학부모님들, 지금 힘들고 어려운 시간 보내시겠지만 아이 옆에 항상 있어주는 부모가 됐으면 좋겠어요.”

끝날 것 같지 않던 고3 기간은 지나갔고 결국 채영이는 원하던 미대생이 됐다. 엄마 소광숙 씨 역시 자신이 목표로 했던 책을 출간하게 됐다. 하지만 엄마와 딸은 이제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있을 터였다.




고3과 학부모를 위한 교육평론가 이범 특강

소광숙 씨가 실제 고3 딸들을 키우면서 느낀 고충과 깨달음을 감성적으로 전달했다면, 두 번째 파트를 담당한 교육평론가 이범 씨는 실질적인 고3 전략에 대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10년 전 대치동 학원가에서 소득랭킹 2순위에 이르는 스타강사였던 그는 사교육 중심의 한국교육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은퇴, 이후 무료 강의와 함께 교육평론가이자 상담가로 살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교육관련 저술과 함께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을 역임하기도 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가 ‘세계에서 제일 복잡한 우리나라 대입에 임하는 전략’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수시 전형은 점차 다양해지고 계속 변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입학사정관제도 도입됐고요. 결과적으로 복잡하게 됐죠. 학생들이 챙겨야 할 게 너무 많고 자기 상황에 비췄을 때 어떤 전형을 선택해야하는지도 굉장히 곤란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일 간명한 것은 수능 위주의 전형과 내신 위주의 전형입니다. 내신은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것이고 수능은 벌써 20년이 된 제도니까요. 나올만한 문제 유형은 다 개발돼 있는 상태에요. 문제는 논술로 넘어갔을 때 머리가 아파진다는 거죠.”

신뢰성 있는 논술 모의고사가 존재하지 않고 학교에서 논술지도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많은 학부모와 고3 학생들이 학원가에 의존하는 것이 현재 논술 준비의 전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보기에 논술에 도전할만한 학생의 유형은 정해져 있다는 것. 첫째가 글을 잘 쓰는 학생, 둘째가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학생, 셋째가 신문이나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다. 단, 이과의 경우는 사실상 수학과 과학문제를 설명하는 논술유형이 많은 만큼, 문제를 풀어내는 과정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이 유리하다.

입학사정관제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명료하다. 스펙에 치중한 현재의 방식은 방향을 잘못 잡은 상태라는 것. 모든 스펙을 완벽하게 갖춘 백화점형 스펙 인재는 입학사정관에게 어필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다.

“예를 들어 대원외고 고3인데 아버지가 변호사에요. 이 아버지 말로는 상상가능한 모든 스펙을 다 갖췄다더군요. 그런데 서울대 수시에서 떨어졌어요. 아버지는 우리 애가 왜 떨어졌는지 납득시켜달라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스펙이 너무 많아서 떨어진 거예요. 백화점식 스펙 나열은 돼 있지만 아무런 스토리가 없어요. 입학사정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런 자기소개서는 대개 이력서식이 되버리죠. 반대로 입학사정관제로 꽤 괜찮은 대학에 간 학생이 있는데 스토리가 뚜렷했어요. 이 학생은 중학교 때 게임폐인이었습니다. 성적은 중하위권 부모는 맞벌이였죠.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공부를 해서 고려대를 갔어요. 이 아이의 스토리를 보면 좌절한 상태에서 공부에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고등학교 1학년 올라갈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컴퓨터와 친하다보니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요. 그렇게 공부를 한 거죠. 입학사정관들이 좋아하는 그래프가 성적이 꾸준히 올라가는 그래프거든요.”


교육평론가 이범의 대입 전략

전형 선택에 전략이 필요하다_ 무슨 전형으로 대학을 갈 것인지 2개 정도를 정하고 집중해야 한다. 현재의 대입은 한 종류의 전형만으로는 지원하기 힘든 상황이다. 자신이 유리한 전형을 선택해 일 년간 밀고 나갈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

자기를 진단하며 공부하라_ 학원에 의존한 공부 방식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노트정리와 시간계획을 세워 관리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공부시간은 늘었지만, 기성세대보다 공부요령이 퇴보한 상태. 이는 결국 자기 진단능력의 부재를 불러온다. 고3에 올라가는 학생들은 자신이 가장 취약한 과목의 순위를 정하고 우선순위를 중심으로 보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학교는 물론 학원 역시 개별적인 우선순위를 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할 것.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라_ 수능의 범위는 매우 넓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밑 빠진 독이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이론에 따르면 1주일 후 인간의 기억에 남는 것은 25% 뿐이다. 짧은 인터벌로 복습을 하고 중요도가 아닌 ‘잘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를 기준으로 체크를 해 복습을 반복해야 한다. 매일 체크한 것을 복습하면서 새로운 공부를 이어간다면, 시간은 더 걸리지만 기억에 남고 자신감이 생긴다.

진도를 조절해라_ 학교와 학원, 과외의 진도가 제각각인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복습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진도를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의지력이 강한 학생이라면 학원 대신 인터넷 강의를 통해 진도를 조절할 수 있다. 공부는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자기 것으로 만들었냐가 더 중요하다.

Q&A

감성과 이성을 오간 두 강연이 끝난 후에는 강연장을 채운 독자들과 강연자들 사이에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아이와의 감성적인 교감 방법을 비롯해 공부법에 대한 부모들의 질문은 꼬리를 물었다.


선행학습은 어디까지 해야 할까요?

(이범)고3이라면 선행학습은 의미가 없죠. 선행학습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학생입니다. 이과로 갈 가능성이 높은 중상위권 이상 학생이죠. 고교에 올라가기 전 1년 분정도 선행학습이 돼 있으면 유용합니다. 문과 수능수학 범위는 옛날보다 좁아요. 고1 수학이 양이 굉장히 많은데 수능에서 빠졌거든요. 이과는 상대적으로 수능 범위가 넓거든요. 더구나 중상위권 이상의 학생이면 논술 전형으로 갈 가능성이 있는데, 어느 정도 진도를 나가 놓고 논술준비를 해야 할 경우가 있어요.

공부를 잘하지만 자기주도성이 떨어지는 강남 아이들과 강북 아이들을 비교했을 때 10년, 20년 후에는 어느 쪽이 더 잘나갈까요?

(이범)최근에 국내 최대 기업인 S그룹에서 이상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강남출신 서울대 연고대 나온 사람을 뽑을 때는 특별히 주의하라는 지침이 생겼다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 내부 사람한테 물어봤어요. 부서별로 쿼터가 있는 경우도 있다더군요. 그런 정책을 펴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통계조사 때문이랍니다. 통계조사를 해보면 스펙은 좋은데 5년 뒤에 성과를 보니까 별거 아니라는 거죠. 들어올 때 스펙과 5년 뒤 성과를 통계를 내서 상관관계를 본 거에요. 들어올 때 명문대 스펙 좋아서 뽑았더니 나중에 성과는 별로라는 거죠. 사실 이것은 기성세대가 살면서 경험한 사실입니다. 스펙이 좋다고 능력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아주 확연한 통계가 또 있는데요. 강남출신 서울대 연?고대 나온 그룹이 5년 내 이직률이 제일 높답니다. 이직은 기업 입장에서는 손실이거든요. 비난할 수는 없죠. 평생직장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기업 입장에서는 그 계산을 하는 거예요. 제가 만든 말인데, 저는 이런 인재형을 ‘도련님 공주님형 인재’라고 하거든요. 그 정체에 대해서 기업들이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죠. 전체적 사회적 흐름을 봤을 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분야를 선택하던 간에 창의력, 남들이 안 해 본 생각, 안 해 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어학능력인 것 같아요. 꼭 영어를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10년이 지나면 중국어를 잘하는 게 더 필요한 분야도 있을 거니까요.

아이가 학원을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하는데 계획 세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범)일단 일간 계획부터 세우세요. 매일 11시가 되면 그 다음날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날 실제 어떻게 했는지를 써보는 거죠. 일간 계획이 어느 정도 수립되면 주간계획을 세우세요. 일요일 밤 11시에 계획을 세우는 거죠. 주간 계획보다 긴 주기의 계획은 안세우거나 세운다고 할지라도 자세히 세우지 않는 것이 좋아요. 모두 월간 계획에 실패한 경험이 있으시잖아요(웃음). 유연하게 자기가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면서 세울 수 있는 계획은 주간이 한계인 것 같아요.

소광숙 선생님은 엄마로서 하지 않았어야할 말을 해서 후회가 된 적은 없으세요? 혹은 고3 엄마로서 이건 하지 말라고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소광숙)고3이 인생의 끝은 아닌데, 정말 몰아칠 때가 많았거든요. 굉장히 겉으로는 우아하고 사려 깊은 엄마이고 싶어서 잘해봐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공부더라고요. 아이에게도 이게 다가 아니라고 끝없이 이야기하면서도 공부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힘들었고요. 그리고 한 가지 절대로 하지 않아야 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요. ‘너는 여기서 끝일거야’와 같이 믿어주지 않는 말이요. 대신 ‘잘 될 거야’라고 해주세요. 애들은 안 듣는 것 같지만 듣더라고요.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악역을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경우에는 저였죠(웃음). 대신 남편은 채영이가 수시에 떨어지는 와중에도 ‘채영이를 안 뽑는 대학교가 문제’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 말을 들을 때는 애들과 함께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주는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모두 몰아치기 보다는 한사람은 끝까지 믿어주는 역할이 필요하죠. 남편은 한 게 없다고 하지만 여유부리고 아이들과 이야기해준 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아이의 수능성적이 많이 안 좋아서 올해 다시 혼자 인터넷으로 공부를 해서 재수를 하겠다고 하는데 예측이 되는 어려움을 조언해 주신다면?

(이범)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관리 능력이에요. 자기관리 능력이 있는 아이들은 재수가 아니라 심지어 자퇴하고도 대학을 가요. 자기관리능력이 일정이상이면 인터넷 강의가 더 효과적이죠. 하지만 자신이 없는 학생들은 재수 종합반을 다니는 게 더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던 방법대로 공부해 보라고 하세요.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상을 가지고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재수했을 때 성공 실패가 갈리는 듯합니다.

고3 예비 부모입니다. 1년이란 시간이 긴데, 그 시간동안 공부만 하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이와 엄마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있나요.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은 편이라 조심스럽네요.

(소광숙)고3이라고 해서 거실에 TV를 치우는 집이 있잖아요. 저는 그거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하던 것을 없앤다고 없어지는 건 아닌 거 같아요. 큰 애도 그렇고 작은 애도 그렇고 전 아이들 데리고 자주 나가는 편이에요. 영화보고 밥 먹고 오는데 다섯 시간 정도 걸리죠. 얼마 전에 채영이가 그러더라고요. 고3일 때 엄마랑 몇 번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남는다고요. 그건 제 확신이었어요. 그 시간 공부 안한다고 큰 영향 없다 싶었거든요. 한편으로 더 효과적이라는 계산도 있었고요. 약간의 여유를 만들어주는 것, 애들 얼굴에서 무슨 고민 있을 것 같으면 이야기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 같아요.

(이범)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도 좋다는 겁니다. 운동은 그 자체로서도 재미있고 스트레스 해소도 되지만, 실제로 뇌 혈류량 증가에 도움이 된다고 밝혀졌습니다. 여러 연구에서 운동 이후 학습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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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소광숙 저 | 오마이북
고민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을 담은 포토 에세이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가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 '채영이 엄마'는 고 3딸의 하루하루를 흑백사진과 간결한 글로 기록해왔다. 고3이기 이전에 사랑스러운 열아홉 살 소녀인 딸에 대한 시선은 지나치게 감성적이지도 않고 교육적이지도 않다. 평범한 고3 딸의 일과를 담담히 담아낸 사진과 글 속에서 엄마와 딸 사이에 오가는 섬세한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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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집값 상승한다’ 발표가 허구인 이유 - 서화숙 『민낯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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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격주로 연재되는 ‘서화숙 칼럼’ 앞에는 ‘우리 시대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곤 한다. 서화숙 선임기자의 글은 외모에서 풍기는 친근하고 온화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예리하고 직선적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직구로 정면 승부하는 투수를 연상시킨다. 서화숙 선임기자는「한국일보」에 게재했던 칼럼과 TBS서울교통방송을 진행하며 썼던 원고를 모아 『민낯의 시대』라는 칼럼집을 출간했다. 기득권층이 맨얼굴을 드러내고(‘민낯의 시대’ 2009.2.12. 88p) 커밍아웃을 하는 세상(‘커밍아웃의 시대’ 2012.3.30. 189p),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논의가 가능해진’ 세상이 되었으니 이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저자의 마음이 담긴 책이다. 그는 책의 머리말에서 “언론이 해묵은 문제라고 덮어두는 현실, 사소해 보여서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문제들에도 많이 천착한 것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지난 1월 23일,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잡은 강연 주제 역시 ‘칼럼 쓰기, 새로운 소식과 해묵은 문제들 사이에 균형잡기’였다.




왜 새로운 소식인가, 왜 해묵은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는가

기자는 ‘News’ 즉 ‘새로운 것들’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소식’이어야만 주목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칼럼을 쓸 때는 단순히 새로운 소식만으로는 안 된다. 서화숙 선임기자는 언제나 ‘해묵은 문제들’에 주목한다. “늘 해묵은 문제가 우리 사회를 어렵게 하고 있고, 그런 것에 주목하는 것이 바로 신문이나 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장 후보 이동흡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떠올려보라. 사실 특정업무경비 문제는 늘 있어왔던 일이다. 감사과가 있었지만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문제가 없다고 했다가 다시 문제가 있다며 흥분하고 있는 ‘4대강 문제’ 같은 이슈도 그렇다. 건설업자들, 교수들, 관련 공공 기관, 모두가 이해관계로 물리고 물려 있는데 어떻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이런 해묵은 문제를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다뤄서 주목 받게 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런 문제를 칼럼으로 다루어왔다.”


‘새롭게’ 쓰려면 ‘뉴스’를 담아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라

해묵은 이야기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서화숙 선임기자의 표현대로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공자님 말씀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하는 이야기, 자신의 삶과는 괴리된 ‘비판을 위한 비판’은 전혀 새롭지 않다. 그는 ‘바보를 키우려고 기를 쓰네’(2009.10.8. 133p)라는 칼럼을 예로 들면서 칼럼은 “논평이 아니라 뉴스를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2009년 10월 31일 충북대학교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전국국어문화원연합회가 주관한 대학생 토론왕 선발대회의 주제는 ‘4대강 정비사업, 시급히 해야 한다’였다. ‘시급히 해야 한다’라는 말 속에는 이미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토론’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이런 주제를 가지고, 그것도 국가 예산을 들여 진행했다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던 칼럼이다. 다른 기자가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뉴스’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것이다.

“2006년 9월에는 고려대 앞에 주민들이 반대하는 재개발하는 지역이 있는데 신문이 다루지 않고 있어 그 내용을 가지고 ‘주택가를 덮친 괴물’이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칼럼은 스트레이트 뉴스를 다룰 때 제일 주목 받는다. 해외 유명 신문의 칼럼니스트들도 대개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의 뉴스를 발굴해 칼럼의 주제로 삼는다.”

서화숙 선임기자는 뉴스가 아닌 논평을 할 때는 반드시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커밍아웃의 시대’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전문가가 4대강 사업을 지지하며 정부 고위직으로 들어가고 진보의 기치를 내세우며 활동해온 이들이 보수 정부의 선전논리를 만들어주는 일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들이 ‘커밍아웃’ 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오히려 이 부분에서 희망을 봤다. 겉으로는 진보적 가치와 공동체를 지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질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자료와 논리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는 것이 오히려 전선을 흐리게 하고 싸움을 어렵게 한다. 우리는 지금 약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인류사적 싸움을 하고 있다. 커밍아웃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논평할 때 우려만 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만들거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채소 가격이 오르면 온 나라 매체가 너도나도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관련 기사를 쏟아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식료품 물가가 아무리 올라도 그 비용이 집값만큼은 아니다(‘오르는 채소 가격, 내리는 집값’ 2012.8.31. 222p). 사실 우리나라에서 서민을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는 채소 가격이 아니라 집값이다. 하지만 집값을 떨어뜨리는 경제정책이 나오면 한국 경제가 망한다고 난리가 난다. 신문이 배추 값 폭등에는 호들갑을 떨면서 정작 큰 문제인 집값 문제가 나오면 왜 이렇게 쓰는 것일까. ‘새롭게 쓰기’란 바로 이런 의문을 갖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건에 묻힌 것을 드러내라, 무지를 일깨워라

잘 보이지 않는 사실과 무지해서 발생한 일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을 하는 것. 새로운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다. ‘마을이 죽으면’(2010.3.10. 166p)이라는 칼럼은 서화숙 선임기자가 사건의 배경에 숨어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 글이었다. ‘김길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김길태가 숨어 있었던 부산 사상구 덕포1동이라는 지역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지역은 재개발 예정지 즉, 빈집이 많은 곳이었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후 덕포1동의 약 500가구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많이 살았을 때는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니 그게 가로등 역할을 해주고, 집에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으니 아이들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김길태 같은 범죄자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사람들을 사라지게 한 ‘재개발’이 있었다. 결국 서화숙 선임기자가 이 칼럼을 쓴 직후 재개발 지역의 안전 문제가 모 유력 일간지 1면 톱기사로 다루어졌다. 숨겨진 이면의 사실을 발견하는 눈. 칼럼을 쓰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에피소드다.

또한 칼럼은 무지를 일깨워야 한다. 언론은 용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몰라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문지식을 알려주고 국제표준과 비교해주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집값, 떨어지길 믿자’(2009.11.5. 139p)라는 칼럼을 예를 들어보자.

“나는 재개발이나 집값 문제에 많이 천착하고 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힘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합뉴스」가 집값을 전망하는 기사를 배포하면서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발표한 ‘2010년 건설 부동산 경기전망’이라는 자료를 인용한 적이 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공신력 있는 공공기관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 연구원은 건설업체들의 협회가 만든 것이다. 집을 지어서 팔아야 먹고 사는 건설업체가 만든 이곳의 연구 결과가 거의 ‘늘 집값은 올라간다’인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이 칼럼을 통해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만든 자료의 허구를 밝혔다.”

서화숙 선임기자는 어떤 자료를 끌어들여 글을 쓸 때 반드시 국제표준과 비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2012년 7월, 인사청문회를 앞둔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3년 동안 외부특강을 하고 1300만 원을 받은 것이 알려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알바 뛰는 고위공무원’ 2012.7.6. 210p). 언뜻 생각하면 고위공무원이 외부 특강을 하고 돈을 받은 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표준과 비교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유럽의 행정부 고위직 복무규정 첫 번째 항목을 보면 ‘공무원들은 돈과 상관없이 어떤 외부활동도 하면 안 되고, 칼럼을 써도 고료를 받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 있다. 공무원들은 ‘공무’를 하기 때문에 세금으로 월급을 준다. 강의가 ‘공무’에 해당한다면 그냥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국제표준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돈은 1인당 국민소득과 비교해서 수치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밖에도 새로운 방식으로 글을 쓰기 위한 방법들이 여러 가지 있다. 읽는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생활 밀착형 글을 쓴다거나(‘오래 가는 꽃’ 2009.4.23. 103p), 올바른 말이라고 생각된다면 말을 돌리지 않고 쓰는 것이다. 때로는 “나쁘면 나쁘다고 대놓고 이야기 하는 것”도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가 될 수 있다. 칼럼 스타일 자체를 새롭게 바꾸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사실 칼럼은 어떤 방식으로 써도 무방하다. 패러디 형식의 풍자 칼럼으로 썼던 ‘핵심관계자 대 미네르바’(2008.11.20. 67p)라는 글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칼럼에는 특별히 ‘사실관계를 밝힌 기사가 아니라 패러디 형식의 풍자칼럼임을 밝힙니다’라는 편집자주를 글 앞에 달아야 했다.


예리하게, 정확하게, 하지만 삐딱하게

‘새로운 글쓰기’는 예리하고 정확한 관찰, 그리고 다소 삐딱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약자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 생각하고 써야 한다. 무엇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구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서화숙 선임기자는 ‘당신 곁의 불의’(2012.11.8)라는 칼럼을 미국의 존경 받는 갑부 빌 게이츠를 ‘까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엄청난 기부금을 내고 있는 빌 게이츠도 결국은 거의 독점에 가깝게 사업을 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빌 게이츠가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부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그는 기업가의 자선 활동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아르바이트도 스펙이다’(2012.10.11) 같은 글도 우리나라 교육계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한다. 공교육을 성실히 따라가면서 공부하고 땀 흘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입학이나 취업 경쟁에서 부모 잘 만난 아이들에게 밀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결국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부모의 ‘스펙’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스펙’이 되는 교육계의 구조.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해보아야 한다. 선진국을 보거나 과거 역사의 흐름을 짚어보면서,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예측하는 것도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반박에 대비해야 한다. “기사를 쓰면서 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응수할지 생각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 그래서 80~90% 압도적으로 상대방을 누를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글을 써야 한다.” 정확한 데이터와 상황 파악,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무장한 자기 논리가 뚜렷하고 확실한 글. 결국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런 글이 필요하다.




여러분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독자와의 만남’ 시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를 언급하며 마무리되었다. 글을 쓰고,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화숙 선임기자는 “글이 세상을 바꿀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결국 “거대한 욕망의 흐름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는 “못 가진 사람은 내가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고, 내 이익을 지켜야 한다. ‘성공하라, 돈 많이 벌어라’라는 이야기에 휩쓸리지 않고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자라는 판단이 들어 탐욕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주변의 불의를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내 주변의 불의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법을 지키지 않는 동료를 눈감아주고 있기도 하다. 내가 뭔가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 ‘가진 사람’이라면 특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불안정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해야 하는 대학의 시간 강사들, 공부하기 어려운 학생이 아닌 학점이 좋은 학생들에게만 돌아가는 불합리한 장학금 제도 같은 것들은 ‘내 주변의 불의’에 민감한 교수들이 존재한다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 이효리, 김여진 같은 우리 사회의 소셜테이너들이 스태프들과 임금을 합리적으로 나누자는 이야기를 해준다면 스태프들의 열악한 상황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른다.

서화숙 선임기자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모두에게 “지식인이 되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지식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면 연예인이나 정치인이고, 메시지에 주목하게 하면 지식인이다.” 이효리가 유기견 캠페인에 참여할 때, 김여진이 홍대 청소 노동자들을 위해 함께 싸울 때, 그들은 연예인이 아닌 지식인인 셈이다. 그는 “못 가진 사람들은 모든 이들이 지식인이 되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학자는 프랑스에서 혁명이 난 이유가 프랑스에 ‘각성한 계층’인 부르주아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산계급이 철저하게 강했기 때문에 영국의 자본주의가 발달했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우리나라도 각성한 인간들이 많아야 지식인 숫자가 많아질 수 있다. 많이 배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각성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동흡을 용인하는 박근혜 당선인의 현재까지의 모습은 실망스럽다. 하지만 박근혜 당선인은 여러 가지 복지 정책도 공약으로 내걸었고, 공동체 지향적인 정책도 많이 제안했다.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게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끊임없이 무섭고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지명도를 얻는 방법이 현실과는 다른 구조다. 여러분 모두가 지식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려면 우전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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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의 시대서화숙 저 | 클(퍼블리싱컴퍼니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정론직필의 칼럼니스트인 한국일보 선임기자 서화숙의 첫번째 칼럼집이다. 지난 5년간 한국 사회의 감춰진 ‘민낯’을 구석구석 살피고 파헤친 칼럼들과 방송원고를 모았다. 사안마다 핵심을 꿰뚫는 서화숙의 예리한 문제의식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도 분명하게 짚어주어 앞으로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과제를 제시한다.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문장으로 그 어떤 권력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할 말 다 하는’ 서화숙 칼럼은 독자들에게 오랜만에 속 시원한 글 읽기의 맛을 선사할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배용준 일본 팬들, 왜 한국에 오면 효재 선생을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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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효재’를 찾았다. 『효재, 아름다운 나라에서 천천히』출간 기념 효재와의 만남 때문이다. 효재로 가는 길, 성북동 주택가를 걸으며 다양한 집들과 골목을 만났다. 사색을 하며, 걷고 또 걷다보니 길상사가 나온다. 법정스님이 떠오르지만, 그보다 앞서 백석과 김영한을 떠올린다. 이승에서 못다 한 그들의 사랑. 눈이 쌓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길상사,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대형 요정이었다. 김영한은 이곳의 주인장이었고 백석의 연인이었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줬다. 그녀는 이곳을 법정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했고, 길상사가 만들어졌다. 사람들, 그녀에게 물었다. 7천여 평 1천억 원의 부지, 그렇게 기부하면 아깝지 않아? 그녀의 짧은 답, 마음을 아리게 한다. 1천억도 그 사람의 詩 한 줄만도 못해. 백석의 詩를 일컬음이다.

두 사람이 만났을 당시, 백석은 스물여섯의 영어교사였고, 김영한은 몰락한 가문출신의 스물 둘 기생이었다. 그들, 뜨겁게 사랑했다. 그러나 백석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집안의 반대가 잠잠해지면 다시 합칠 요량으로 백석은 러시아로 떠났다. 그것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영영 이별.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백석은 북한으로 갔고, 김영한은 서울에서 평생 혼자 살면서 요정을 운영했다.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그대. 그때 저는 평생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그대를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이십대에 만난 평생 한 사람만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김영한은 여든 셋에 세상을 떠났다. 효재로 오르는 계단, 길상사가 보인다. 효재에 살포시 쌓인 눈 때문일까. 그녀를 위해 백석이 지었다는 詩(「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흰 눈 때문에 더욱 빛난다. 효재, ‘본받는 집’에서 떠올리는 이 사랑.

눈과 나타샤를 떠올리는데, 효재 선생이 화사하게 반긴다. ‘효재의 여행과 나눔에 관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온다. 효재 선생, 책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낸다. 그녀가 지구 물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돌과 책이란다. 그녀의 신조, 뚜렷하다. 책 읽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지독히 책을 안 읽는 시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책부터 읽을 것을 권한다.

“나는 글을 사랑한다. 맏딸로 크면서 책을 통해 성장했다. 글은 밤하늘 별 같아서, 사라지지 않는다. 외롭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효재처럼』 1권이 천 일 동안 쓴 일기다. 이 책이 10만부 팔리면서 <인간극장>에 나가고, 팬들이 생겼다. 나는 TV강의를 하지 않는다. 에너지 소모가 심한데다 남편에게 욕 먹이면 안 되니까. 나는 인생을 노동자로 살겠다고 신에게 맹세하고 어떤 여행도 안 갔다. 그래서 TV에 나오는 건 일하러 가는 거다(웃음).”참고로, 효재 선생의 남편은 음악가(풍류피아니스트) 임동창 선생이다.

“처음 <굿모닝 대한민국>의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아, 집에서 일만 하는 나에게 신께서 보너스로 여행을 보내주시나 보다. 오케이!’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고 시작한 여행이 나를 바꿔주었다. 내 조국, 우리나라가 어찌나 구석구석 예쁜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노래를 하다가 그렇게 또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 좀 느리게 느리게, 푸르게 푸르게 지켜갈 수 있다면, 그동안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와 함께 발견하고 아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6)
『효재, 아름다운 나라에서 천천히』는 그렇게 나왔다. 이번 책, 인세 전액이 환경재단에 기부돼 네팔 어린이와 네팔의 오지 마을을 돕는데 사용된다.




일본 팬과의 만남, 눈물겹다!

빈대떡과 고구마가 간식으로 준비됐다. 녹차도 마련됐다. 효재 선생이 마련한 간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 눈 쌓인 겨울날의 오후가 주는 즐거움이다.

“우리 집 음식이란 게 그렇다. 사람도 자연이라 음식도 ‘자연에서 난 것이 제일’이라 여기기에, 특별히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음식 맛 그대로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p.196)
효재 선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3년 전 이야기. 밤 12시, 한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욘사마 일본 팬들이 한국에 왔고 ‘효재 선생, 효재 선생’하면서 찾는데, 알려줘도 되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배우 배용준(욘사마) 덕분이었다. 배용준이 낸 책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에 효재가 소개됐다. 덕분에 일본 관광객들에게 ‘효재’ 방문은 필수 코스처럼 됐다. 이튿날, 일본 여인들이 효재를 찾아왔다. 집으로 들였다. 간식을 먹였다. 너무 많은 사람이 왔고, 이들을 접대하느라 효재 선생, 지쳤다.

“너무 힘들어서 앉았는데, 한 여자가 설거지를 하더라. 키도 크고 미스코리아 머리를 하고. 배우 이태란처럼 예쁘더라. 난 예쁜 여자면 다 좋아해(웃음). 예쁜 여자가 슬프면 아름다워. 통역이 마침 도착해서 왜 안 가고 설거지를 하는지 물어봤다. 43세인데, 암 걸려서 죽는대. 죽기 전, 욘사마를 보려고 왔고, 주변에서 효재 선생 효재 선생하기에 효재가 하는 걸 보고 싶어 왔다더라.”

그리고 그 여자는 일본에 돌아갔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지난 7월 전화가 왔다. 암에 걸렸던 여성, 아사다가 투병 중인데, 효재 선생을 만난 게 가장 자랑스럽다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효재 선생 일본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비행기 표가 없었다. 아사다는 효재 선생이 온다는 생각에 안 죽고 버틴 터였다. 효재 선생, 스케줄도 빡빡했지만 죽어도 가야했다. 8월 10일, 간신히 표를 구해서 갔다.

찾아갔더니 이 아름다운 여인, 해골처럼 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이외수 선생이 효재 선생을 위해 쓴 詩(이외수, 「효재처럼」)에 남편이 곡을 붙인 노래를 일본어로 불렀다.


여자로 태어나
사는 일 버겁거든
풀꽃처럼 구름처럼
효재처럼 살 일이네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8월 29일, 일본인 여행객들이 다녀갔다. 궁금해서 일본에 전화했다. 아사다가 별일 없냐고 물었다. 별일 없다며 끊었다. 이튿날, 경주에 전통음식 강연을 가는 중 KTX에서 전화를 받았다. 울고 있었다. 아사다가 죽었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어제 왜 전화했었냐며 효재 선생이 무섭다며 울고 있었다. 3시 54분, 아사다는 효재 선생 사진을 보면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아사다 남편의 연락이었다. 마침 아사다가 숨을 거둔 8월 29일, 욘사마의 생일이었다.

“이 여자, 욘사마 얼굴을 보고 죽으려고 했는데, 욘사마 생일에 죽었다. 아사다라는 詩를 썼다. 이번 달 말에 『시가 있는 효재 밥상』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거기에 詩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은 벼락 맞듯 다가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이 쌓여서 일어난다.”


네팔 어린이, 동자승과의 만남

효재 선생, 네팔에 다녀온 이야기를 잇는다. 네팔 어린이에게 태양광전지를 달아주러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카트만두에 갔다. 그곳에 가니, 어린 시절에 갔던 소풍 때의 풍경이 펼쳐졌다. 소똥이 있고, 비포장도가 있었다. 아침에 출발,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타고 3시간을 갔다. 벼랑 같은 꼬불꼬불한 길을 타고 올라갔다. 1,900미터의 고산지대에 마침내 도착했다. 해가 저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님이 왔다며 나팔을 불고 축하를 해줬다. 눈물이 펑펑 흘렀다. 무사히 도착한 안도감에 울고, 그들의 환대가 고마워서 울었다.

“세 살짜리 애들이 맨발로 어디를 올라가고 뭘 만들 때 우리만 쳐다보는 거야. 거기선 열다섯이면 시집을 보내는데, 키가 안 커. 그리고 인도에 팔려가기도 하고. 우리는 거기에선 거인이야. 그런데 거기선 가슴이 안 아파. 더 놀라운 건, 태양판 전구를 달아달라며 자신들의 마을에서 4일을 내려와서 우리에게 온 거였던 거야.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다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네팔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네팔 귀신이 붙어서 뭐만 하면 눈물이 나오는 거야.”

아사다 그리고 네팔과의 만남. 그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러한 때 아침방송이 일정이 잡혔다. 1월 1일. 괴산 무심사에 고아 동자승을 만나고 오는 것이었다. 어묵 국물을 우리고 빵을 들고 산타할머니처럼 동자승을 만나러 갔다.

“네팔, 아사다를 넘어서 충격이더라.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있었다. 네팔은 가난해도 부모가 있는데, 부모가 삶을 위해 버린 아이들이 28명이나 있는 거야. 펑펑 울었다. 아이들이 잘 먹어도 울고, 못 먹어도 울고. 너무 가슴이 아파. 네팔의 아이들을 보곤 가슴이 아팠는데, 이건 슬퍼. 이 아이들 보니 너무 슬퍼. 한 해 동안 강타를 세 번 맞은 거야. 7월부터 해서.”




좋은 일에 쓰이길 바라는 마음

효재 선생은 소녀 같다. 50대라는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다. 집을 보면 사람이 보이는데, 효재는 효재 선생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효재 선생 그 자체라고 봐도 되겠다. 예쁜 것을 유독 좋아하는 효재라는 소녀가 효재 안에 있다. 행주에도 예쁜 꽃수를 놓는 이 여자의 마음은 건너편 길상사에 묻은 자야 김영한의 마음과도 통한다. 사랑 없이 살지 못할 두 여자의 마음이 동네를 감싸고 있다. 마당에 살포시 쌓인 눈이 시리도록 하얗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따뜻하게 감싼다. 좋은 일에 내가 쓰였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 오십 넘어서 세상에 드러난 효재 선생의 굳은 다짐이다. 소녀 같은 효재 선생의 삶이 앞으로도 크게 바뀔 리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네팔에 다녀온 이야기를 이 책의 2부로 쓸 생각이다.

“두 번째 책도 사회에 기증하고 이런 모습으로 살다가 가려고. 막 살면 족 팔리잖아(웃음). 우리, 덕담하는 문화를 만들자. 우리말엔 부정적인 게 너무 많다. 옥의 티 같은 거. 티가 옥이 되었다, 이런 말을 책에 박아 놓았다. 마당 있는 집엔 꽃 사오지 말고, ‘책 선물하기 운동’을 하자. 돈 만원에 대화가 바뀌고 품위 있게 선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믿어라. 자기 이름 앞에 ‘훌륭한’이라는 수사를 붙여라. 그러면 훌륭하게 산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책을 읽음으로써.”

그녀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 보검 하나를 마음에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녀, 책 읽는 사람들은 신중해진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꽃 하나를 배치할 때도 수고로움이 있는데, 주말여행을 생각한다면 이 책 아무 페이지나 펴서 여행을 간다면 좋겠다고 권한다. 가족끼리 가고 싶은 곳을 골라서 가는 재미를 느껴보라고 한다.

“미국엔 마사 스튜어트, 일본의 하루미, 한국의 효재라고 한다. 나는 스티브 잡스가 밉다. (스마트폰에 빠져서) 독서를 안 하게 만들었거든. 서점에 가서 책을 그득히 사면 스스로 멋있어진다. 옷을 예쁘게 입고 다니면 다른 사람과 상대적으로 비교가 된다. 그런데 나는 아예 기워 입으니까 비교 대상이 없어(웃음). 지금 입고 있는 옷도 30년 된 쪼가리를 모아 만든 거다. 더 이상 비교한들, 내가 만족스러울까? 내가 기운 이 옷은 곧 나를 디자인한 것이다. 오늘 이후 선물 목록을 책으로 바꿔라. 남의 집에 갈 때 책을 선물해라.”

효재 선생이 보기에, 인간은 누구나 천재다. 긍정과 부정, 그것을 바꾸는 것에도 천재다. 인간이 부정(긍정)을 가지면 한없는 부정(긍정)을 가진다. 긍정과 부정, 그것은 한 끗발 차이다. 한 끗발만 옮겨도 긍정이 되고, 부정이 된다. 따라서 이 만남도 쉽지 않은 만남임을 새기게 된다. 60억분의 1로 태어났고, 우린 만났고, 거룩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훌륭하고 거룩한 존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쓰는 언어는 거의 오답이다. 내가 쓰는 말에 대해 정리를 해보라.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 말은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말을 교정하면서 산다. 지나가는 말이라고 함부로 쓰면 안 된다. 글과 말이 사는데 힘을 실어준다. 언어를 작게 바꾸면서 삶을 바꿀 수 있다. 언어도 디자인하는 것이다. 각자 생활의 디자이너가 돼 보라. 기계를 믿지 말고. 말을 해야 한다. 말을 하면 내 스스로 그렇게 만든다.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단점을 가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삶이 바뀐다. 지구의 에너지는 이제 기쁨이다.”

그녀는 지금 동화책을 쓰고 있다. 아이들뿐 아니라 외국인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함이다. ‘살림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기증하려고 책도 모으고 있다. 그녀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살림술사’다. 효재 선생은 이날, 보자기로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보여준다. 한 인간이 평균 200그루의 나무를 사용하는 통계가 있는데, 우리는 더 이상 산림에 누를 끼치지 말자며 보자기의 다양한 이용법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겐 패션이 되고, 누군가에겐 쇼핑백이 되며, 누군가는 배낭처럼 사용되는 보자기. 좋은 에너지의 발산이다. 좋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소통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내 남편에게는 음악이며 글이고, 나에게는 음식이자 보자기이다.” (p.196)
이날 엄마를 따라 이 자리에 온 아이는 좋은 에너지를 받았을 것이다. 이 두 시간여의 짧은 시간이 그 아이가 자라는데 있어서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임에 분명하다. 그 아이는 네팔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어느 자리에서 네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때를 떠올릴 것이다. 또래와 다를 것이다. 지구의 좋은 에너지를 받았다.

효재. 본받는 집. 이날의 만남, 이름값을 한다. 우리는 본받고 간다. 길상사에서도 효재에서도 모든 것에서 본받는다. 2013년 1월이 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효재 선생의 마무리 멘트를 되새겨본다.

“내게 일어나는 작은 기적을 적어본다. 그러니 매일이 기적이더라. 어릴 때 아버지가 나가지도 못하게 해서, 나는 매일 가출을 꿈꾸고, 다방 레지가 되게 해달라고, 우리 집이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까 아버지 사랑이 느껴지더라. 일상이 별 다른 게 없는 거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좋은 것 얻어갔으면 좋겠다. 자신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인생은 큰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사소한 것을 통해 바뀐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밝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사실 남편과 나의 삶이 언론에 제법 조명되어 이제 꽤나 유명인이 되었고, 또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비춰지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의 사는 방법이란 건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p.195)
인생을 멋있게 살고 싶다는 욕망, 누구나 있다. 그렇다고 이 글, 효재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다. 멋있게 산다는 것,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는 것 이대로가 멋있는 일이지 않을까. ‘효재’에서 나눈 이야기는 그것을 알려준다. 지금 여기에서 즐겁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멋있는 인생이라는 것. 백석이 사랑한 자야는 멋있는 인생을 살았다. 살면서 사랑했고, 사랑하면서 살았으니까. 효재에서 바라본 길상사가 아름답다. 길상사에서 바라본 효재도 그렇다. 삶은 천천히 살수록 아름답다. ‘천천히’를 통해 타인과 똑같지 않은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갖게 된다. 효재가 그것을 알려준다. 나는 효재를 감탄한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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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재, 아름다운 나라에서 천천히이효재 저 | 시드페이퍼(seed paper)
라이프스타일, 보자기 아트, 서정성이 넘치는 글로 여성들에게 인기를 받아온 효재의 첫 여행 에세이. 2009년, 배용준의 저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우리 문화 컨텐츠를 자문하며 배용준이 한국의 문화와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게 한 일등공신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기록하고 독자들에게 그녀의 행적을 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 2011년 KBS 2TV 프로그램 「굿모닝 대한민국」의 ‘효재처럼 사는 법’을 통해 보여줬던 아름다운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아름다운 모습에 느리게 천천히 살아가는 그녀만의 감성과 철학을 통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윤형주 “‘라라라’는 해수욕장에서 만난 여학생을 위해 만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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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주의 재기를 도와준 노래 ‘바보’

“저는 앞으로도 할 일이 창창합니다. 다 산 사람처럼 에세이를 쓰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쓰지 않으면 평생 쓰지 않을 것 같아서 썼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참 두려운 일입니다. 세시봉 콘서트가 아니라 제 이름을 건 콘서트도 두렵습니다. 그래도 사랑 받는 다는 것. 기억되고 있다는 건 축복 받은 일입니다.”

콘서트의 첫 곡은 ‘비의 나그네’였다. ‘비의 나그네’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곡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라디오에서 틀지 못한다고 한다. 윤형주는 노래와 관련된 일화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비가 와도 너무 많이 오던 날. 무슨 무슨 주의보란 주의보는 다 발령되는 날. 당시 동아방송에서 라디오 DJ를 맡고 있던 이장희가 ‘비의 나그네’를 틀었다.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주룩주룩 내려라
끝없이 내려라
윤형주-「비의 나그네」
비가 계속 오기를 바란다는 가사가 문제였다. 담당 PD가 전원 시말서를 쓰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그 이후로는 비와 관련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비 오는 날에는 틀 수 없는 그런 노래가 되었다.

윤형주의 노래는 친숙하다.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만든 노래가 아닌 예전부터 흘러내려 오는 노래로 착각하곤 한다. 대표적인 노래가 '라라라'다. 우리에게는 ‘조개 껍질 묶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라라라’는 윤형주가 대천 해수욕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다. 자리를 떠나려는 여학생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비록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지만, 윤형주가 부르는 ‘라라라’는 경쾌했다. 관객석에서는 자연스럽게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 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지 않네
윤형주-「라라라」
1970년대 가요계를 강타한 대마초 파동의 여파는 컸다. 크게는 한국 통기타 문화의 맥이 끊겼고, 작게는 여러 가수가 잊혀졌다. 윤형주 또한 대마초 파동에서 빗겨나갈 수 없었다. 이후 윤형주는 CM송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가수로 복귀하고 싶은 열망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윤형주의 재기를 도와준 곡이 ‘바보’다. ‘바보’는 큰 인기를 끌며 MBC에서 5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다. 최근에는 KBS <불후의 명곡>에서 F(x)의 루나가 다시 한번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곡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마친 윤형주는 노래했다.

설마 나를 두고 갈까
다신 못 만날까
내가 그렇게도 좋아
이 세상이 모두 내 것 같다더니
윤형주-「바보」



윤형주의 별명은 ‘조영남 잡는 사람’

윤형주하면 트윈 폴리오가 떠오르고, 트윈 폴리오 하면 윤형주의 파트너 송창식이 떠오른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트윈 폴리오의 재결합을 원한다. 아쉽게도 윤형주의 말을 들어보면 트윈 폴리오의 재결합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송창식과의 재결합을 원하지만 어렵습니다. 우선 둘이 생각하는 연습의 개념이 다릅니다. 송창식은 새벽 5시까지 연습을 하고 6시에 잠에 듭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일어나죠.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전에 돕니다. 구들장이 패일 정도로 돕니다. 아마 오늘도 돌았을 겁니다. 송창식은 음악 속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정상적이지는 않잖아요? 제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럽니다. 송창식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송창식하고 45년 동안 친구를 하고 있는 윤형주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윤형주의 괴짜 친구 중에는 이장희도 있다. 언젠가 윤형주가 이장희의 초대로 미국을 갔을 때였다. 미국을 너무 잘 아는 이장희는 윤형주를 색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라스베거스의 사막 어딘가에 있는 온천이었다. 본래 인디언들이 목욕을 하는 장소였는데, 그곳에서 윤형주와 이장희는 알몸으로 함께 물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런 이장희가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곳은 울릉도다. 이장희는 울릉도에 연못을 만들어 놓고 물고기를 낚는 재미로 산다고 한다.

MBC <놀러와>에서 한 세시봉 특집 이후 윤형주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바로 조영남 잡는 사람이다. 세시봉 콘서트에서 윤형주가 조용히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왜 조영남을 공격하지 않냐며 아쉬움을 표할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윤형주는 조영남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영남의 출판 기념 콘서트에 자발적으로 가서 백 코러스를 해주는 열의도 보였다. 다만 자신의 출판 기념 콘서트에 조영남이 오지 않았다며 귀엽게 툴툴대기도 했다.




윤동주는 신앙 시인이다

윤형주의 아버지 윤영춘은 가족보다는 자신의 제자에게 더욱 따뜻한 사람이었다. 제자를 챙기느라 바빠 가족에게는 변변한 유산조차 남겨주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받은 윤형주가 받은 유일한 유산은 책이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2만 5천 여권의 장서는 윤형주에게 피와 살이 되었다.

윤영춘은 뛰어난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런 윤영춘이 아꼈던 시인은 자신의 조카였던 윤동주였다. 자신이 학비를 내어 윤동주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윤영춘은 윤동주의 시를 사랑했고 시인으로 존경했다. 윤동주가 일본에서 죽었을 때 그 시신을 수습한 것도 윤영춘이었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민족 시인, 투쟁 시인, 저항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윤형주는 윤동주를 신앙 시인으로 바라본다. 윤형주의 말에 따르면 윤동주는 역사를 성경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사람이며, 세상 모든 일을 성경에 따라서 행동하려 한 사람이다. 그래서였을까? 윤동주는 사소한 일에도 부끄러움을 가지는 인물이었다. 윤형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를 기타 반주를 곁들여 낭송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별 헤는 밤」
윤형주는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한참 가수로써 인정받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신이 곡을 만들면 큰 인기를 끌 수 있으리란 속내도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고 싶다는 윤형주의 말에 윤영춘은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시도 노래다”라는 말을 던졌다. 잘못 하다간 시를 망칠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충고였던 셈이다. 결국 윤형주는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윤동주에 대한 애틋한 마음만큼은 간절해서 그를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당신의 하늘은 무슨 빛이었길래
당신의 바람은 어디로 불었길래
당신의 별들은 무엇을 말했길래
당신의 詩들이 이토록 숨을 쉬나요
윤형주-「윤동주님께 바치는 노래」

여전히 젊은 그대에게

콘서트는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윤형주는 말했다.

“올해가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입니다. 저는 가장 싱싱한 젊은이입니다.”

절대적인 숫자로 본다면 윤형주도, 이날 콘서트를 찾아온 관객들도 젊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젊음이란 객관적인 숫자가 아니라 주관적인 마음 가짐에 달린 것은 아닐까?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기에 윤형주와 그의 팬들은 여전히 젊다. 윤형주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밤 하늘의 별 만큼이나
수 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테요
윤형주-「우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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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윤형주 저 | 삼인
가수가 자본으로 만들어 낸 ‘기획 상품’이 아니라 가수 스스로 주체가 되어 대중과 감수성으로 소통하고 교감하며 이야기하듯 노래를 만들고, 함께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60~70년대 통기타와 포크송으로 발현한 청년 문화를 말할 때 그 대표적인 선두주자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트윈 폴리오’다. 이 책은 트윈 폴리오의 한 축이자 한평생 기타를 놓아본 적 없이 살아온 윤형주의 이야기다. 책에는 방송인으로, 가수로 밟아온 길과, 그 목소리처럼 맑아 보이기만 하던 그의 인생에 드리워졌던 힘겨운 고비, 그리고 속앓이를 겪고서 다시금 환한 삶을 펼쳐 나간 과정이 ‘열 가지 풍경’으로 그려진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히틀러와 친일파, 어쩌면 당신이 될 수도 있다 - 원종우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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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와 한겨레, 위즈덤하우스가 주최한 ‘아름다운 책 이야기’에서 원종우 씨를 만났다.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유럽편』을 쓴 그는 현재 딴지일보 논설위원으로, 책의 내용도 원래는 딴지관광청(현 노매드 21)의 ‘파토의 유럽 이야기’에 기고했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근대성을 고민했다는 저자의 고백답게, 이 책은 절반 이상을 근대에 할애했다.

 

록 뮤지션, 인디레이블 개척자 등 다양한 이력으로 활동한 원종우 씨인 만큼 책의 내용도 ‘믿거나 말거나’ 식, 가십 위주일 것이라는 추측은 금물. 이 책이 서술하는 유럽 역사는 상식 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스 사상과 로마법 체계로 흥하던 유럽이 교조화된 기독교를 만나 암흑시대인 중세로 접어든다. 중세는 이전 시대보다 발전한 면도 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퇴보한 시기였다. 그러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독립을 지향한 근대가 시작된다. 근대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인종주의 등 어두운 역사도 근대 이면에 존재했다는 게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유럽편』의 내용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책이 꽤 딱딱해 보이지만, 중간 중간에 저자만의 시선과 재미있는 이야기(어떤 교황은 여성으로 추정된다, 마녀 사냥에서 죽은 사람 중 많은 수가 남자다 등)를 추가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512쪽이라는 두꺼운 책임에도 역사와문화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책 출간을 기념하여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열린 이날 강연에서 원종우 씨는 크게 2가지 주제로 나누어 강의를 진행했다. 자신이 역사를 공부한 이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역사를 공부한 이유는 한국 사회가 촌스러워서

 

록 뮤지션으로도 활동했던 저자는 학창 시절부터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가 좋아했던 노래 중에 영국 밴드 퀸(Quu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있다. 당시 세계적으로 명곡으로 인정받고,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 곡은 한국에서 1989년까지 금지곡이었다. 가사 중에 ‘just killed a man’이라는 구절 때문이다.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제는 고려하지 않고, 가사 중 일부가 살인을 표현한다는 점만으로 금지곡으로 정한 것이다. 퀸의 노래 외에도 당시에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금지곡이 된 노래가 많았다. 원종우 씨는 이런 모습을 보고 한국 사회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회가 촌스러우니 학교도 촌스러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 모임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자유롭게 말하라고 했다. 당시 반장이었던 그는 교복 착용과 두발 단속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나갔다. 학생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자유롭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자리였다. 저자는 이런 촌스러움이 한국사회가 전근대적이라서 생겼다고 믿었다.

 

캐나다에서 2년, 영국에서 4년 살기 전까지 저자는 백인사회를 막연하게 동경했다. 선진국이니 우리 사회에 있는 촌스러움보다는 세련되었을 거라는 기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곳에도 전근대성은 있었다. 천국이라 생각하던 벤쿠버에서 저자는 인종차별 발언을 듣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전근대성의 다른 말은 맹목성이고, 다름에서 오는 공포를 맹목적인 증오로 표출하는 게 인종차별이다. 보통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은 몽매한 상태에서 앎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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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은 독립이다

 

‘전근대성’이라는 말의 대립항은 ‘근대성’이다. 저자가 유럽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성은 서구 유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 근대성을 다르게 정의하지만 원종우 씨는 근대성을 ‘독립’으로 이해한다.

 

“근대성이란 인간의 독립이다. 여기서 독립은 신, 자연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한다. 독립이 정복, 부정은 아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독립할 때를 생각해보자. 부모님을 정복하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지 않나. 마찬가지다. 신, 자연으로부터 독립이라고 해서 이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권위를 빌리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게 독립이다.”

 

인간이 홀로 설 수 있기를 지향한 게 근대성이고, 근대성은 유럽이 만들었다. 그렇다면 유럽의 역사는 근대성을 확립한 역사일까. 여기서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럽이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를 추구했지만 역사는 근대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잘 이해가 안 가는 말일지 모르나,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양차 세계대전, 식민지에 가해진 백인제국의 폭력 등 근대에 이루어진 비이성적인 사건을 떠올린다면, 원종우 씨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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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히틀러처럼 될 수 있다

 

이어서 저자는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역사를 공부하면 인류사가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탄생했다. 삼황오제 시기를 동경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이나, 역사는 발전이 아니라 순환이라 생각한 고대 인도의 역사관이 이를 증명한다. 핵으로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는 현대는 역사의 쇠퇴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시대다.

 

“역사를 보면 3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둘째,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셋째, 인간이 만든 모든 사상은 훌륭하지 않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좌절과 실패를 수없이 목격한다. 인류가 좌절하고 실패했을 때, 이에 대한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슬픔까지 느끼는 게 중요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도 제국주의자, 인종주의자가 될지 모른다. 히틀러, 친일파를 나쁜 놈으로 몰아버리면 끝일까? 그들 중 일부는 확신범이었다.”

 

저자는 12월에 치러진 대선을 경험하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지난 대선은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양쪽으로 진영이 갈린 선거였다. 각자 주장이 다르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데, 두 진영 간 벌어진 틈이 너무 길고 깊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역사를 공부한다고 해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상대방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역사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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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원종우 저 | 역사의아침

딴지관광청(현 노매드21)에 〈파토의 유럽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약 5년 동안 연재된 내용을 보완하고 정리한 이 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유럽(인류)의 역사는 시간순으로 발전하고 진화했는가?’ ‘나폴레옹은 위대한 영웅이고 히틀러는 독재자였나?’ ‘영국의 명예혁명은 정말 명예로웠는가?’ ‘우리는 근대를 지나 현대에 살고 있는가?’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 미국의 자유와 평화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는 유효한가?’ 등 우리의 역사적 상식에 물음표를 던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왜 사람들은 장미꽃을 고르지 않고 버섯, 생강을 골랐을까 - 김윤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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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의 북 콘서트장에 들어서자 온갖 향기들이 후각을 자극한다. 꽃과 계피, 몰약과 유향 등이 한 데 어우러져 뿜어내는, 달큰한 듯 톡 쏘는 향이 온 몸을 감싼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어지고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작가가 명상에 향기를 접목시켜 ‘향기명상법’을 개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향기에는 힘이 있다. 굳어버린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기분까지 산뜻하게 바꾸는, 순간의 마법을 부리는 힘을 갖고 있다. 그녀의 명상 강의에 참가한 많은 이들이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놀랍지만은 않은 이유다.




상처에서 피어난 향기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살립니다

김윤탁 작가는 ‘고도원의 아침편지 깊은산속옹달샘’ 명상 치유센터의 전임강사로 활동하며 차(茶)명상과 자연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삶에 지치고 사람에 상처받은 많은 이들이 그녀 곁에 머물렀다. 아로마테라피스트인 그녀는 따뜻하고 향기 어린 손길을 건넸다. 향기와 명상의 만남, 향기명상 강의의 시작이었다.

“처음 ‘옹달샘 명상센터’를 건립할 때 고도원 이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바람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그만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그래도 다시 한 번 힘을 내볼까’ 하고 힘을 얻고 가는 장소였으면 좋겠다고요. 그 바람대로 많은 분들이 쉼을 얻고 되돌아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굉장히 가슴이 따뜻했습니다.”

이제 그만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살아보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더 이상 함께하고 싶지 않다던 사람들은 두 손을 꼭 잡고 함께 되돌아갔다. 김윤탁 작가의 향기명상 강의를 들으며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난 것이었다. 물론 좋은 향기를 선물하는 것으로 저절로 치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향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북 콘서트를 찾아 온 독자들을 위해 작가가 준비한 ‘향기의 이야기’는 유향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강의를 시작하며 모든 이들에게 유향 하나씩을 선물했다. 그것은 유향나무의 눈물이었다. 상처가 난 곳을 보호하기 위해 유향나무가 흘린 액체가 굳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이 유향을 채취해 통증을 제어하는 데 사용해왔다.

“유향 나무에 상처가 생기지 않았으면 이 유향이 생겼을까요? 아니겠죠. 상처에서 향기가 피어납니다. 상처에서 피어난 그 향기는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살리는 데 역할을 합니다.”

상처 많은 나무에 생명이 깃들어있는 이치를 그녀는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는 결코 상처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심오한 그 사실을 들려주기 위해 작가는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를 쓰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찬양하는 아름다운 꽃도, 씨앗의 껍질이 깨지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과 몰아치는 비바람, 가뭄을 견뎌내지 않았다면 꽃을 피울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만을 바라보지요.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향기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깨어지는 아픔과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 이런 것들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한 송이 꽃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향기를 가진 존재입니다

상처를 딛고 살아남아 유향을 선물하는 유향나무처럼, 껍질이 깨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꽃을 틔우는 씨앗처럼, 자신 안에 있는 상처가 다른 이에게 향기로써 치유가 되기를 바라며 독자들은 김윤탁 작가와 함께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내 안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지 않고 마주보는 명상의 끝에는 화해가 있다. 그것은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과 그 안의 사람들과 화해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다.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에는 그러한 화해의 명상들, 그 모든 과정과 그 결과 얻게 된 깨달음이 담겨있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덤덤하게 들춰 보인다. 그녀 스스로가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상처받고 아파했던, 분노하기도 하고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화해했던, 지난 시간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우리는 상처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합니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면 그 상처가 언제까지고 내 안에 있습니다. 딱지가 앉았다가도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 마디에 다시 피를 철철 흘리고 곪아갑니다. 여러분께서 용기를 가지고 그 상처를 마주하셨을 때 비로소 그 상처는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용기를 갖고 마주한다는 것은 망각하는 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그것이 내게 상처만이 아니었음을 인정해 주었을 때 그것은 내게서 꽃으로, 향기로 피어납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로 나아가는 방법,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두 번째 선물을 건넸다. 그녀가 직접 준비한 다양한 꽃과 채소들을 나누어주며 저마다의 직감에 따라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선택하기를 권했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할 만한 장미꽃이 있는가 하면, 호불호가 확실히 나뉠 것 같은 향을 가진 계피와 생강도 있었고, 요리의 재료가 되는 것 외에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은 표고버섯과 깻잎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장미꽃을 고르지는 않았고 누군가를 버섯을, 또 누군가는 생강을 골랐다. 작가는 왜 장미꽃만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이것들은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습니다. 꽃은 꽃대로 채소는 채소대로, 다 각각의 특성이 있죠. 생강에게 ‘너 왜 이렇게 향이 고약해, 너도 장미꽃 같은 향을 내 봐’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을까요? 그런 분이 있다면 바보라고 하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가야 할 영혼의 길이 있는데 나를 투사시킵니다. 장미꽃이 좋으니 생강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생강은 장미꽃 향을 낼 수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절망하게 됩니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꽃보다 향기로운 당신

절망하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멀리 있지도,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아’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어떤 모습으로 바뀌지 않아도 본래 모습 그대로 당신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한 송이 꽃도, 심지어 사물조차도 하나같이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게 되고 자존감이 생겨난다.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고 내가 나인 것을 사랑스럽고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 때에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나 자신을 먼저 용서하고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를 할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작가와의 마지막 명상은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처음일지 모를 자신과의 대화. 그래서 김윤탁 작가와의 명상은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시작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감사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축복합니다. 나는 이 순간 평화롭습니다. 나는 이 순간 자유롭습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명상을 마치며, 그녀는 독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많은 향기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에게 가장 향기로운 것은 엄마이고요, 엄마에게 가장 향기로운 것은 아기의 냄새이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 그 향기가 이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꽃보다도 향기롭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상처가 향기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따금씩 나의 시선이 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타인을 바라보듯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타인의 체취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체취는 맡을 수 없는 것처럼, 눈앞의 다른 이보다 더욱 보기 어려운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때때로 우리는 타인보다 자신에게 더 까다롭고 빡빡한 잣대를 들이댄다.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라는 말로 남을 위로하면서, 자신에게는 ‘왜 그랬어, 바보같이’라는 비난과 질타를 서슴지 않는다. 다른 이를 안아주는 따뜻한 품으로 정작 자신은 안아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라는 아이는 언제나 남들보다 더 외롭고 추울지도 모른다. 내 안의 작은 아이를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싶다면 그 화해의 시작을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와 함께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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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김윤탁 저 | 미르북컴퍼니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현대인이나 더 열심히 뛰라고 말하는 이 시대의 가치관과 정반대의 뜻을 전하는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명상치유센터 “고도원의 아침편지 깊은산속옹달샘”의 최고 인기 강사 ‘향지 김윤탁’의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이다. 저자는 이 시대가 더 많이 가지라고 할수록, 더 바쁘게 움직이라고 독려할수록 나를 비우고 돌보고 내려놓으라고 강조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이완된다. 일상에 평온이 찾아오고 마음이 치유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신의 물방울이라는 와인, 편안하게 민낯으로 만날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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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마켓 삼킨별’ 2층에서 이루어진 와인토크는 소박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보통날의 와인』을 쓴 박찬일 씨였다. 그는 등장과 함께 금양인터내셔널에서 준비한 오늘의 와인 ‘꼬든 네그로 브뤼 (Cordon Negro Brut)’를 땄다. 초청받은 손님들은 환호했다.와인에 어울리는 디저트와 잔을 채운 스파클링한 화이트 와인이 이날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행사의 부제는 ‘박찬일 작가와의 힐링 캠프’였고, 그는 부제에 관한 이야기로 독자와 만남을 시작했다.

“오늘 이 시간에 힐링을 하겠다고 오신 분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누가 누구를 힐링하겠어요. 텔레비전에 힐링이라는 말이 대세잖아요. 요즘 우리는 참 치료받고 싶어하죠. 맞아요, 이 한잔의 와인으로는 힐링을 해줄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와인값을 보면 힐링이 되진 않거든요. (웃음) 하지만, 와인을 통해 친구도 만나고, 조금 마음을 열 수는 있겠죠.”

댓글을 직접 꼼꼼히 읽어본 박찬일 작가. 그는 와인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좀더 와인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모르는 분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와인과 어떻게 하면 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지요. 특히 우리나라처럼 와인에 로망을 가지거나 높은 벽을 느끼는 분이 많을수록 친해지기 힘들어요. 작 요즘, 집 근처 에서도 흔히 와인을 살 수 있는데도요. 이 책은 편견을 깨고 더 많은 분들과 와인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던, 『와인스캔들』의 개정판이예요.”




와인과 친해지기 첫 번째,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
‘우리 와인에는 물도 탄다.’


저자가 처음으로 와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본 첩보영화였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멋있게, 그리고 맛있게 마시던 술에 대한 호기심, 그뿐이었다. 본격적인 요리 수업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요리를 공부하면서 ‘술’도 반드시 함께 공부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탈리아에서 박찬일 씨는 현지인에게 와인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 그랬더니, “우리는 와인에 물도 탄다.”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배웠던 와인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부딪힌 거죠. ‘우리 와인에는 물도 탄다. 우리들은 그렇게 마신다.’라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우리는 바로 와인을 마시고 즐기는 평범한 소비자예요.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안 마시잖아요. 사고의 전환인 셈이었죠.”

그는 와인을 불편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와인에 대한 불편한 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내려, 와인을 술이 아니라 거창한 무언가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의 태도를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와인 문화는 일본에서 많이 들어왔어요. 일본은 근대에 메이저 유신으로 최초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 과정에서 서양문물에 가진 로망도 함께 키워나갔죠. 지금도 일본의 호텔에 가면 빅토리아 시대의 메이드복(하녀 복장)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그걸 그대로 흡수했고요. 와인잔을 제대로 들지 않으면, 0.5도의 미묘한 온도가 맛을 변하게 된다는 지식? 물론,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탈리아에 가면 와인잔이 아닌 잔으로도 많이 마십니다. 그런 경우엔 어떻게 와인을 즐겨야 하는 걸까요? 결국, TV나 소위 와인 전문가가 말하는 정보가 평소에 와인을 마실 소비자 대상이 아니라 와인을 공부하는 전문가들을 위한, 굉장히 전문적인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매번 와인을 마실 때, 그런 점을 기억하고 실행해 보세요. 와인은 멀고, 불편한 녀석이 되는 거죠.”




와인과 친해지기 두 번째, 마실수록 더 알고 싶어진다.
‘와인은 무궁무진한 매력덩어리.’


‘옆 사람과 함께 한잔 하시죠.’라며 저자는 강연 중간중간에 와인을 권했다. 박찬일 씨의 취미는 여러가지 술을 마셔보는 음미하는 것이다. 소주도 좋아하지만 그에게 와인은 공부할 것이 많은 흥미로운 술이다.

“와인은 어떤 술일까요? 와인은 참 매력적인 술이에요. 다른 술에 비해 차분해지는 술이지만, 분위기를 살짝 흥분시키기 때문에 연애할 때 안성맞춤인 술이기도 하죠. 와인을 마시다 상대방 손을 잡으면 전류가 이렇게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 따뜻한 술이기도 하구요. 소주는 친해지다가도 너무 많이 먹으면 주먹을 부르기도 하고, 맥주는 좀 친해질 만하면 화장실을 가게 되잖아요. 그런점에서 와인은 생각이 다른 사람과 서로 융화되기 가장 좋은 술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와인을 융화되기 좋은 자연스러운 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조화’다. 와인은 ‘음식과의 조화’가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지는 술이다. 와인은 자극적인 음식도, 가벼운 디저트와도 잘 어울린다.

“외국에 나가면 와인 한잔이 우리나라 돈으로, 300원 하는 곳도 있어요. 서양에서는 기름진 음식이 많고 그만큼 와인이 일상적이고, 곁에서 음식과 함께 잘 어울리는 술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국물이 있는 요리보다는 전이나 갈비찜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도 충분히 맛있지요. 다만, 양념이 진한 음식에는 고급 술이 어울리지 않아요. 고급 술은 섬세하게 자신을 표현하는데, 음식의 향신료나 양념에 묻힐 수 있거든요.“




와인과 친해지기 세 번째, 어떻게 와인을 알아갈 것인가.
‘책으로, 잔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알아가는 와인’


이날 독자와 만남에서는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다.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게시판 코너가 한쪽에 마련되었고, 많은 독자가 정성스레 메모를 붙였다. 강연 중간중간에 저자는 질문을 뽑았고, 그에 대해 답했다. 독자들은 와인과 어떻게 하면 친해질까 궁금해했다.

박찬일 씨는 와인 마시는 친구를 만들라고 권한다. 모든 취미는 좋아하는 교집합이 있는 사람과 함께 할 때 더 깊숙이 빠지는 법이다. 조금 어려운 방법이지만 와인산지로의 여행도 추천했다. 책에서만 보던 와인재배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면, 와인의 매력에 더욱 빠지게 된다. 쉽게 집에서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음식에 따라 와인 고르기, 나만의 와인 마시는 법 만들기 등이 있었다.

“처음 시작하는 와인으로 무엇이 좋을까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저는 화이트와인, 가벼운 것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레드와인도 좋지만 약간 무겁고 씁쓸한 맛이 처음에 불편하게 다가오니깐요. 지금 마시고 있는 꼬든 네그로 브뢰, 이런 와인도 좋아요. 2만 원대 정도의 스파클링 와인도 요즘엔 괜찮은 것을 많이 찾아볼 수 있죠. 이 와인에는 어떤 음식을 같이 먹으면 잘 어울릴까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고, 자기만의 방법을 찾는 것도 정말 좋아요. 어떤 분을 보니 가끔 탄산수나 생수를 1:1 비율로 넣어서 먹기도 해요. 저는 무척 더운 여름날엔 얼음을 넣기도 하거든요. 얼음 3개 정도를 좀 센 화이트 와인과 섞어서 마셔 보세요. 맛도 있고, 얼음이 서서히 녹는 걸 느끼는 것도 재미가 있어요.”

이날 행사에서 그는 와인을 마실 때마다 자신에게 요리를 잘 가르쳐주고 소박했던 요리학교 할머니 선생님을 추억했다.

“요리학교에 계시던 할머니 선생님은 뵐 때마다 늘 포근하셨어요. 우리 할머니가 손주들이 멀리서 오면 이것저것 없는 것 있는 것 다 꺼내놓으시는 것처럼, 할머니도 항상 좋은 와인이나 좋은 음식이 있으면 아낌없이 꺼내주시곤 하셨어요. 그분을 보면서 좋은 요리사가 어떤 사람인지 배웠죠. 어디에는 뭐가 유명하니까 꼭 그걸 써야 하고 그게 없으면 안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좋은 요리사는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료와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요리하고 싶고요.”

먹고 살려고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 박찬일 씨. 줄을 세워 기다린 끝에, 주머니 탈탈 털어 남이 해준 음식을 먹었는데도, 집에서 먹던 음식 만하지 못하다는 불평을 하다 스스로 요리사 길로 접어 들었다. 저자는 이번 친한 선배와 함께 청담동에서 새로운 요리로 사람들을 찾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천편인률적인 요리가 아니라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요리사 일을 하면서 가끔 양념을 재다 보면 30%의 소금으로 70%의 나머지 음식이 썩지 않을 때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 10명중에 3명의 사람이 똑바르게 산다면 나머지 7명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아름답구나 하고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소금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저 역시 아름다운 세상에 보탬이 되고자 계속해서 요리하고 싶네요.”


박찬일 작가가 추천했던 그날, 그 와인
꼬든 네그로 브뢰(Cordon Negro Brut)

“검은병에 담긴 샴페인과 같은 고급 스파클링 와인”이라는 의미로 프레시넷의 대표 까바이자 미국에서 사랑받는 No.1의 스파클링와인이다.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들에게 사랑받아 널리 알려졌으며, 신선한 산도와 함께 다시한번 입안에서 느껴지는 상큼한 스파클링, 그리고 매혹적인 과일 향이 어우려져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운을 남기는 고혹적인 매력의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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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날의 와인박찬일 저 | 나무수
와인을 술이라기보다 일종의 국물로 해석하는 서양 요리사 박찬일. 그가 한국인의 잘못된 와인 지식을 바로잡아 올바른 와인 상식을 알려주고 일상 속 ‘보통날에 와인 마시는 즐거움’을 전한다. 와인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와인에 대한 불편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와인을 마시는 법을 알려주는 이 책은 2007년 출간된 『와인 스캔들』의 완전개정판이다. 5년 동안 달라진 와인 정보와 더불어 작가의 장점인 요리와 와인 분야를 강화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울대 나와도 힘든 취업 현실, 도쿄대 학생들은 상상 못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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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진을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면 피해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건 있었다’라는 거다. 2만 가지 죽음에 각각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곧 발생 2년에 다다를 일본 ‘3ㆍ11’대지진. 일본의 배우 겸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한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말했었다. 이것은 ‘태도’다. 죽음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태도. 2만 건의 죽음에는 2만 건의 진실이 있고, 사연이 있으며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태도.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태도가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것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대부분의 우리, ‘3ㆍ11’에 대해 하나의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를 취했을지 모른다. 인간에 대한 태도를 잃은 자세.

강상중 교수(도쿄대), 『살아야 하는 이유』를 통해 ‘태도’의 문제를 새삼 거론한다.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로서 이 ‘태도’를 가장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지금 가장 중요하게 재검토해야 하는 것은 ‘태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사회 도는 시장 원리 앞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 ‘태도’를 획득하는 일일 것입니다.” (p.175~176)

그것, 태도라는 가치에 대한 (세상을 향한) 질문이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효율적인가 비효율적인가, 유효한가 무효한가’에만 골몰하는 세상은 과연 바람직한가. 사소해도 한 사람의 존엄을 소중히 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것 아닌가. 강 교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 사고도 거론한다. 원전 사고 직후 반짝였던 성찰적 태도는 이내 사그라졌다. 지금, 원전을 향한, 세계의 파국을 향한 성장주의자들의 뜀박질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1월 26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난 강상중 교수의 고민은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이유

“당시의 나는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른바 ‘김대중 사건’(1973년)이 있어났을 때, 나는 스트라이크를 하고 있었다. 그 스트라이크 중에 처음으로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을 느꼈다. 수십 년 뒤 나는 도쿄대 교수가 됐고, 대통령 퇴임 후 도쿄대로 초청해 김대중 강연을 들었다. 정말 감개무량했었다. 1973년 사건에 대해 김대중은 일기에 쓰고 있다. 그 일기에는 일본이 부럽다는 말이 있다. 긴자 거리에는 네온이 빛나고 자유롭게 산보를 하는데, 한국은 야간통행금지에 군정독재 체제하임을 감안하면 일본이 부럽다는 것이었다.”

강 교수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건, 1972년이었다.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재일동포로서 그도 일본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던 그때, 한국이 이렇게 변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공식적으로 한국은 ‘G20’의 일환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이자 선진국으로 불린다. 그가 보기에도 이것은 놀랍다.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 전쟁을 겪고 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 경제성장 등을 이룬 한반도 역사는 극단적인 역사이다. 일본인이 서울에 오면, 도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분단국이고 아직 식민지 상처도 남아 있고, 그럼에도 포스트모던한 건축물도 있고, 한반도에는 그런 100년의 역사가 압축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반도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가 쓴 책이자 미국의 학생을 위한 한국 역사책인 『한국현대사』의 말미엔 이런 말이 있다. 한반도 휴전선 이남의 사람들은 많은 것을 획득해왔고, 반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분단 현실에서 북한이 변화하면 한국엔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북한을 방문했는데, 당시 내게 한 말이 남한 인구가 5천만이 안 된다. 통일이 되면 7천만으로 독일 인구 규모와 비슷해서 경제적 번영을 위해선 최소한의 규모가 된다며, 그런 규모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통일에 관심이 없다. 강 교수는 최근 만난, 한국 젊은이들의 통일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호주의 한 연구원 이야기를 꺼낸다. 연구원은, 통일이 되면 오히려 불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조사 결론을 내렸다. 강 교수, 이런 결과는 통일에 관심이 없다기보다 자기 일로 머리가 터지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을 구할 수도 없고, 비정규직 비율이 5할을 넘어서는데다 정규직이 돼도 불안정함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장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기도 힘든 상황. 그러니 통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것은 무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강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1979년에 구서독에 있었다. 당시 독일 대학생들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독일 대학생들, 천년이 걸려도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통일할 필요도 없고, 동독은 자신과 다른 나라라고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10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이 됐다. 처음 독일이 통일 됐을 때 힘든 일이 많았으나 유럽 경제가 침체돼도 지금 독일은 여전히 풍요로운 국가로 남아 있다.

“김대중처럼 한국에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도 한국은 여전히 분단국이다. 일본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은 뭐가 다른가를 자주 생각한다. 20년 변화가 너무 대단해서 한국과 일본 학생 사이에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런 공통점도 한 꺼풀 벗기면 굉장히 다르다. 병역문제도 남학생에게 부담이고, 여학생도 일본보다 심한 경쟁에 처해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만큼 긴장을 강요당하는 한국 학생들이 일본보다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 학생들은 군대 때문에 학업을 중지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한다. 서울대를 나와도 직장을 찾기 힘든 현실은 도쿄대 학생으로선 상상도 못한다. 재벌이 장악한 한국 경제구조는 일본의 재벌 집적도나 독점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기엔 한국 학생들이 훨씬 밝다. 민족성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작년 한국에선 3만 6천명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지면 자동적으로 바깥 세계에 대해서도 시선이 가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에도, 정치에도,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무감동하고 무관심한 상태가 퍼져 나갑니다. 즉 실업과 고용 문제는 단순히 경제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p.166)




기존의 행복방정식을 폐기하라

강 교수가 보기에 한국은 과거 통일을 하고 민주화를 이뤄내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으로 믿은 시기가 있었다. 물론 그것이 지금 전혀 맞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의 한국은 직장을 제대로 구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문제를 둘러싸고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 상태에 있다. 왜 일하고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다.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는 시기에는 왜 살고, 일을 하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행복방정식이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심각하게 하지 않아도 남 흉내만 내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보장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대였다. 나도 재일동포로서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 유명대를 나와 대학 교수가 되고, 재일동포로서 도쿄대 정식 교수가 된 것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잃었다. 그것은 저에게 가장 큰 보물이었던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왜 살아가는가?’였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왜 세계에는 행복한 자가 있고 불행한 자가 있는가? 인생에 의미는 있는가? 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들의 물음에는, 이 세계를 찢을 만큼의 절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p.6)

현재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혜택 받지 못한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패전 이후 비정규직 고용화가 진행되고 있고 일본 젊은이들도 장래에 대해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없는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이런 질문을 한다. 왜 하필이면 이 시대에 태어났는가? 왜 나는 이리 혜택을 받지 못하는가? 왜 나는 혜택 받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좀 더 다른 인생을 걸아갈 수 없었을까? 강 교수의 진단은 계속 된다.

“거기에는 굉장히 불우한 의식이 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것들을 지렛대 삼아 자신에 대해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일본 젊은이들에게 반향을 일으킨 『미래는 홈리스, 희망은 전쟁』이라는 글이 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대학도 졸업 못하고 취직도 못해서 휴대전화로 지령을 받아 일 하고 수천엔 정도의 돈을 받아서 노숙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유형의 젊은이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것은 20~3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일본에서 최근 클로즈업된 기사 중의 하나가 ‘맥도날드 난민’에 대한 것이었다. 맥도날드 난민은 맥도날드에 가서 100엔 커피를 시켜서 새벽 2시 문 닫을 때까지 있다가 다시 헌책방에 가서 문 닫는 5시까지 있다가 공원에 가서 그날 일자리를 찾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NHK에서 만든 <워킹푸어>라는 4부작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도 이었다. 주인공은 30세 정도의, 어릴 때 양친이 이혼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했다가 병에 걸려서 홈리스로 살게 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편의점에서 버린 잡지를 수거해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물었단다. 당신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답을 않았다. 질문이 바뀌었다. 당신에게 희망이 있‘었’습니까? 그는 답했다.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그딴 거 어딘가로 사라졌다. 방송은 그 주인공을 계속 쫓았다. 그는 1년 후, 시청에서 하는 도로공사 일을 하게 됐다. 1개월간 일을 하고 10년 만에 목욕탕에 갔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지금 어떻게 생각하나. 희망이 있나?

말없이 있던 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말을 이었다. “나는 1년 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로공사 일을 하는 현장에서 어느 할머니가 수고한다는 말을 내게 하더라. 15년 동안 누구로부터도 수고하네, 고생 하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도로에 널린 자갈 취급을 받았었는데, 할머니의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났다.”수고한다는 말 한마디가 이룬 기적이었다.

“일본에도 한국과 다른 의미의 빈곤자가 존재한다. 이 같은 워킹푸어, 새로운 빈곤이 한국과 일본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특히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다 보니 지금 50~60대는 은퇴해도 연금을 받지만, 젊은이들은 20~30년 뒤 연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여기 계신 분 중에 10년 후 한국이 나아질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있겠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지만, 거슬러 올라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정규직을 강요당하고 정규직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일정 수준의 교육과 수입을 가진 부모, 일정 평수 이상의 주거를 가진 부모 밑에서 혜택을 받지 않으면 부모와 같은 생활을 재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사람의 수만큼 행복을 느끼는 방식이 있어도 좋은데, 그것이 없어져 버렸다는 데 요즘 세상의 불행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행이 있는데, 그것은 행복의 ‘합격 기준’이 사실 굉장히 높다는 것입니다.” (p.24)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다. 강 교수가 보기에 좋은 교육을 받고 돈을 쓰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방정식이 이젠 붕괴돼 가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집 팔고 소 팔아서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면 입신출세한다는 방정식, 통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행복방정식’에 대한 착각으로 그런 과거의 행동과 생활을 답습하는 게 문제다. 강 교수는 최근 중국을 다룬 NHK 다큐멘터리 <양극화하는 중국>에 대해 언급했다.

이 프로그램에 의하면, 중국 내 경제격차는 한국과 일본을 능가한다. 중노동에 시달리고 경제적 격차에서 오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과거 마오저뚱(모택동)을 그리워하는 풍토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 젊은이들에겐 지금 정의도 없고 인간관계는 붕괴됐으며 공산당은 도둑놈이라서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 인구의 0.007%가 중국의 부 60%를 차지하는 현실. 문제는 그런 불평등이나 격차가 금방 시정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한중일 체제도 다르고 역사적 배경도 다르지만, 3국 젊은이들의 공통점은 그런 걸 시정할 수 있는 정치에 관심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도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고 기존의 행복방정식을 따라 영어를 하고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젊은이들에게 사회를 변혁시키고 유토피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돈키호테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신경 쓸 거면 그 시간에 토익 점수를 올리는데 신경 쓰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런 꿈같은 이야기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늘고 있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관심 끄는 것은, 오로지 ‘시장(마켓)’이다.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시장가치를 가지지 못하면 가치 없는 인간으로 인식되는 지금의 세상이다. 더 큰 문제는 무디스 등의 신용평가회사가 국가등급을 정하는 것처럼 개개인에게도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등급이 인간 주위를 맴돈다. 좋은 생각과 양심적인 행동도 시장에서 가치를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의 등급은 최하위로 평가된다. 대학에서도 교양이나 휴먼 사이언스는 관심 밖이다. 학교는 이미 직장인양성소로 전락했다. 사는 의미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쓸데없고, 시장에 통용되는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지식만 쫓는 사람들이 점점 늘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20년 동안 한국이나 일본 대학은 크게 변했다. 종교학이나 철학, 역사 등 실학이 아닌 학문은 무시당하고 있다. 철학이 전공이라고 했을 때, 밥 벌어먹고 사느냐는 질문을 가장 먼저 받을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고 있다. 최근 서울대나 도쿄대 총장 등의 경력을 보면 공대 출신이 많다. 공학적 지식은 해답이 존재한다고 전제를 하고 문제를 푼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의 폭발이 있었는데,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식의 착각을 하며 돌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예지로 자연을 모두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도를 넘어선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3ㆍ11’ 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p.153)




질문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라!

가장 큰 쓰나미가 온 지역도 제방이 16미터를 넘었다. 높이 뿐 아니라 최신 기술로 세운 제방이었다. 후쿠시마 원자력도 최신의 원자력 공학지식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비참한 결과만 남았다.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일에 왜 일어났는지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강상중 교수,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절감했다. 삶에는 대답이 없는 물음이 있을 수 있고,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닌 해답 없는 질문이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해답 없는 물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고,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우리는 젖어왔다. 그런데 왜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리먼 브라더스 쇼크는 왜 일어났고 유럽발 금융위기는 왜 일어났는지 물어봤을 때,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대답은 내놓지 못할 것이다. 숱한 경제학자와 이코노미스트들 누구도 리먼 쇼크를 예측 못했다. 자연재해와 사람이 만든 여러 일들은 질적으로 다르나 그런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설마’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고민하는 힘』부터 여러 글을 써왔는데, 이 시대 안에서 해답 없는 물음에 대해 중요성을 알고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 내 의도다. 옛날에 그런 것은 종교가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신앙을 제대로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강 교수는 ‘3ㆍ11’ 대지진이 발생하고 2주일 뒤 현장을 찾아갔었다. 모든 것이 죽음의 세계였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왜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가 생각했다. 과거라면 신앙, 종교가 답을 해주었겠지만, 지금, 해답은 없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해답이 없다고 그 질문이나 물음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how to’에서 탈피해서 해답 없는 물음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린다. 그러면 인간이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절망에 빠질까? 힘을 얻게 될까? 그 안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힘이야말로 살아가는 힘이다. 2년여 전, 2만 명의 사람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는데, 지금,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 당시 일본 사회의 가장 중요한 단어가 ‘연대’였다. 그런 생명줄을 이어가는 분위기가 지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무런 수단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를 변혁할 힘을 가지자는 뜻에서 『고민하는 힘』을 썼다. 하지만 고민하는 힘 자체가 일본에 정착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치적으로 봐도 과거로 돌아가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은 물론 옆 사람이 변화하고 지금과는 다른, 기존의 행복방정식과는 다른 것을 찾아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들을 써왔다.”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낙관적 인생론이나 행복론을 체로 쳐서 비관론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 비참한 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p.195)

강 교수는 거듭 강조한다. 기존의 행복방정식을 바꿔야 한다! 물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도 당장은 그럴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그것을 낳기 위한 고통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10년 후 한국사회를 상상해보자고 말한다. 만약 10년 후 지금보다 더 격차가 벌어진다면 그 사회는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2기 취임사를 언급한다. 오바마는 미국은 일부 행복한 사람을 위한 사회가 아닌 소수자, 약자, 빈곤자, 실업자, 혜택 받지 못한 자를 돌볼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개인적으로 오바마라는 사람을 낙관하지 않지만, 불행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국가의 위대함이라고 말한 것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오바마가 백악관에 처음 들어가 부시와 악수하고, 부시가 손을 씻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미국은 많은 병을 안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와 같은 리더를 뽑았다는 것에 기대를 약간 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정치계가 하는 일이라곤 생활보호대상자의 부정수급을 적발하고 지급 보장액을 낮추면서 빈곤자를 힘들게 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중요한 것은 해답 없는 물음에 끊임없이 응시하면서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과 손을 잡고 고민하는 것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병 때문에 일할 수 없는 사람이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타자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직업만이 인간의 존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 안에서 일을 함으로써 뭔가 생산물을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것만이 인간이 가진 인격의 모든 원천은 아닙니다. 직업 이외의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자신답게 살 수 있습니다.” (p.180)

강상중 교수를 통해 다시 나의, 우리의 태도를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리고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지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살아야 하는 이유와 태도가 연결돼 있음을 새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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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강상중 저 | 사계절
한국사회가 삶을 보존하기에 부적합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개인들은 불안과 좌절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불안과 좌절의 시대에 다시금 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강상중은 일찍이 근대적 삶의 의미를 궁구한 일본의 국민작가 소세키와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 심리학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 윌리엄 제임스 등의 치열한 고민과 통찰을 들려주고, 근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조건에 처한 개인들의 불안한 삶을 응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 암을 이겨낸 사람들의 특징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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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삶,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의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들만큼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목격하는 이도 드물다.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의 저자 윤영호 박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병원과 국립 암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죽음의 문턱 앞에 선 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 그들의 곁을 지키며 죽음의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왔다. 말기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문제, 그로 인한 고통이 윤영호 박사에게는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스물 네 살의 젊은 나이로 위암 판정을 받은 누이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윤영호 박사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후 시작한 봉사활동은 그를 호스피스ㆍ완화의료 전문가의 길로 이끌었다.

국립암센터 설립 초기에는 ‘삶의 질 향상 연구과’를 만들었고, 한국호스피스ㆍ완화의료학회의 설립위원으로 활동했다. 호스피스 제도화를 위해 연구하고 정책 기획에 이바지해 온 길이었다. 결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문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윤영호 박사의 치열한 고민은 그가 만나는 환자들의 삶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맞닿아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삶,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기를, 그 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그는 오늘도 바라고 있다. 지난 2011년 EBS 프로그램 <명의>의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 편에 출연하고 최근 동명의 책을 출간한 것도, 모두 그와 같은 바람에서 결정한 일이었다.




죽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북 콘서트를 통해 독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윤영호 박사는 새로운 시각으로 죽음을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말기 환자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의미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나의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이 다를 수 있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입니다.”

윤영호 박사는 빅터 프랭클의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의 내용 중 “우리가 세상을 더 이상 변화시킬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조정받게 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가 죽음의 문제와 부딪힐 수밖에 없다면 스스로의 생각을 바꿀 필요성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두려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두려움을 떨치기란 쉽지 않다. 두려운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것과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우리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다. 그 존재를 부정하거나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애쓰는 것이다. 죽음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잊기로 한 것이다. 죽는다는 이야기를 꺼내길 기피하는 사회적 문화만 보더라도, 이러한 우리의 선택은 분명해 보인다.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는 애벌레들이 만든 탑이 나옵니다. 그 탑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 끝에는 무엇이 있나요? 결국 떨어져 죽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계속 올라갑니다. 우리는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딘지도 모른 채 계속 가다가 결국 죽는 존재가 우리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죽음이 축제가 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죽음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그러려면 죽음의 존재를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비록 우주가 그를 삼켜버린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고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과 이 우주가 힘에 있어서 자기를 능가함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러한 사실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엄성은 사고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늘 사색하기에 힘쓰라. 그곳에 도덕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팡세』중)
파스칼의 말을 통해 윤영호 박사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힘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윤영호 박사는 죽음이 곧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사과가 썩어야만 그 안의 씨앗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톨스토이의 말처럼(『인생이란 무엇인가』중),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탑을 오르던 애벌레가 자신이 누에가 되어 스스로 죽어야 나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듯이, 인간 역시도 거대한 운명공동체 안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 안의 백혈구와 적혈구도 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변형된 다른 존재로 몸 안에 존재합니다. 물론 몸 밖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사라져버린 것은 아닙니다. 지구 안에, 우주 안에 존재합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습을 구성하는 세포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졌던 생각도 주변에서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끝인가, 아니면 다른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백혈구와 적혈구의 삶과 죽음이 인간의 생명 안에 존속되어 있음을 이성과 감성으로 이해하듯이, 저는 인간의 삶과 죽음 역시 이 우주 안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삶의 운명이 끝나지 않고 존재하며 또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때, 역설적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윤영호 박사는 떠나간 이의 삶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속에 남아 계속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떠난 이의 삶뿐만 아니라 남겨진 이의 삶의 가치를 높인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를 두고 윤영호 박사는 ‘죽음이 축제가 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모든 죽음이 그러한 순간이 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환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나눔의 문화’

강연이 끝난 후, 동아일보에 ‘웰다잉(well-dying)’을 주제로 칼럼을 연재중인 최철주 기자와 윤영호 박사의 대담이 이어졌다.

최철주 : 지금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대로 죽음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기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느냐,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됐을 때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되는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아무르>나 <엔딩노트>와 같이 죽음을 다루는 영화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도 많이 출간되고 있고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윤영호 : 자신의 삶과 존재,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삶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올곧게 되어 있지 못하면 살아온 시간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위대한 존재라도 스스로의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삶을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존경 받는 많은 분들이 자신이 어떻게 삶을 살아왔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은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문화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최철주 : 지금까지 윤영호 박사는 호스피스와 완화의료에 관한 논문을 25편 이상 발표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많은 논문을 발표한 의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려는 의사들은 윤영호 박사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토록 많은 논문을 쓰게 됐는지 묻고 싶습니다.

윤영호 : 그동안 가정 방문과 외래 진료를 통해서 말기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반복되는 문제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이런 현상이 계속 반복되는가, 왜 똑같은 문제들을 환자들이 겪게 되는가’ 고민하게 되었고 그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기 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이고, 정책이 잘못되어있기 때문에 정책을 바꾸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책을 바꾸는 것은 정치인이나 시민단체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의사로서 연구를 통해서 근거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게 된 것 같습니다.

최철주 : 윤영호 박사는 진료 현장에서 환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환자들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격려해 주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점이 윤영호 박사와 다른 의사들의 차이라는 것을 우리는 피부로 느낍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같은 삶을 살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윤영호 : 제가 호스피스 전문의가 되려고 했을 때 내과나 정신과를 선택해야 하지 않느냐는 조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학과를 선택했던 이유는 휴머니즘과 가족 중심, 그리고 포괄적이면서도 다양한 문제들을 연속적으로 돌본다는 철학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립 암센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경제적인 손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공기관에서는 자유롭고 활동적으로 일을 하는 데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옮겼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습니다.

최철주 :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안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윤영호 박사가 진찰하고 돌보는 말기 환자들 중에는 질병이나 다른 이유들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보여주고 격려해 주어야 할까요.

윤영호 : 저와 만나는 환자들은 대부분 좋지 않은 상황에 옵니다. 적극적인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악화되어서 더 이상 항암치료가 효과 없을 때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의사가 나를 포기했구나, 라는 생각으로 절망에 빠진 분들도 계십니다. ‘최선을 다해서 치료했는데 나는 왜 상태가 나빠졌느냐’고 하는 환자 분들에게 저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치료받고 잘 해 오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실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와 같이 치료를 잘 해 나가면 생각보다 더 오래 사실 수도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환자분들이 더 건강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립니다. 혹시 모르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들로 하여금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얘기를 나누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나라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얘기하기 보다는 밖에서 따로 만나서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꺼내시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최철주 : 암 치료를 끝내고 5년이 지난 사람을 ‘암 생존자’라고 합니다. 그들이 암 투병중인 환자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암 생존자들은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심리가 굉장히 강합니다. 암 생존자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영호 : 저도 2003년부터 암 생존자 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암을 이겨낸 분들이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긍정적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국립 암센터에서 근무할 때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암을 이겨낸 사람들의 습관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암을 이겨낸 사람들이 치료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코칭 해 주는 ‘리더십과 코칭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2년 째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봉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10개 병원에서만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그 분들이 조금 더 봉사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암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책의 인세는 모두 환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암 생존자 분들이 말기 환자, 호스피스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서도 활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눔의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윤영호 박사는 스스로를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삶을 이야기하는 의사다. 살아가는 순간들을 위해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죽음에 다다르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길 끝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축제가 되는 순간, 다른 이의 죽음을 완성으로 바라보는 순간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다.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는 그 수많은 해답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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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윤영호 저 | 컬처그라퍼
저자 윤영호 박사의 누나는 어렸을 때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는 누나의 죽음을 계기로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이 책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살아온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록이며 동시에 죽음에 대한 사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이 완성된다고 말하며, 죽음이라는 인간적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인지, 이 책이 그 답을 찾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결혼 생각 없는 36세 여성의 고민에 김미경 강사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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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의 주주는 100% 내가 되어야 한다

Q. 대학에서 뮤지컬을 전공하고 있는 24세 여학생입니다. 뮤지컬을 참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만큼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부모님도 힘들어하는 제 모습을 보시곤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세요.

A. 대학은 약간의 재능만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몇 안 되죠. 음대 나왔다고 모두가 음악가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회사에 국문과 나온 친구가 있어요. 아이디어 몇 개만 던져줘도 완벽하게 글을 쓰는 친구예요. 물론 그 친구가 처음부터 글을 잘 썼던 건 아니에요. 대학 졸업 후 잡지사 기자로 일하면서 편집장에게 엄청나게 머리를 맞아 가며 5년을 배웠어요. 이후 작은 신문사에서 5년을 또 굴렀죠. 그리고 이제야 ‘글’이라는 걸 써요. 그 친구도 10년 동안 ‘나는 왜 이렇게 글을 못 쓰지’, ‘나는 왜 이리 능력이 없지’, ‘나는 바보인가’와 같은 수많은 고민을 했대요. 뮤지컬도 마찬가지에요. 뮤지컬을 전공하고 있다고 해서 어떻게 뮤지컬을 완벽하게 잘 해내겠어요? 그건 섣부른 판단이죠. 10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보세요.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좋아하는 일 말고 잘하는 일을 해요. 어떻게 10년도 노력하지 않고 포기를 해요. 심지어 이제 24세인데. 프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10년의 무명 시간 동안 내 꿈의 주주는 100% 내가 되어야 해요. 부모가 자녀의 꿈에 개입하는 것은 ‘투자자’이기 때문이에요. 투자자의 등살(?)에서 10년 동안 꿋꿋이 꿈을 지켜나가려면 경제적인 독립은 필수예요. 부모님의 돈이 아닌 스스로 꿈을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생각해 보세요.

Q. 검도 지도사 일을 하며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27세 드림인턴입니다. 제 꿈은 두 가지에요. 첫째는 검도 도장을 열어 사업적으로 성공하는 것과 한국어 교사가 되는 거죠. 하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이 들 때가 많아요.

A. 검도 지도사와 한국어 교사의 공통점이라면 사람에게 무언가 가르친다는 점일 거예요. 만일 삶의 방향성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 출구는 검도 지도사여도 되고 한국어 선생님이어도 되요. 직업은 출구일 뿐이거든요. 나는 평생 ‘선생’으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을 평생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죽는 것이 내 꿈의 방향성이에요. 강사라는 직업은 방향성의 출구일 뿐이죠. 나는 강사를 하고 있지만, 연극배우나 작가를 했어도 돼요. 꿈의 방향이 정해졌다면 직업은 자본주의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걸로 선택하면 되니까. 만일, 선생으로 살고 싶은데 글은 못 써서 책이 잘 안 팔린다? 그럼 말로 먹고 살아야죠. 그런 판단을 잘해야 해요. 고민을 들어보니 아마 친구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을 잘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럼 그 꿈의 출구가 꼭 검도 지도사여야 할까요? 27세에 꿈을 바꾸는 건 늦은 게 아니에요. 전 29세에 강사라는 꿈을 가졌고, 서른이 훨씬 넘어서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친구는 꿈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정하고, 그 방향에 맞는 직업적 출구를 잘 찾는 것이 필요해요. 직업적 비전과 자본적 비전을 동시에 고민하면서 친구가 가장 효과적으로, 오래할 수 있는 출구(직업)를 찾아보세요.

“꿈은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경제적 책임까지 함께 요구한다. 꿈을 만든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정신적인 독립을 선언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독립은 경제적인 독립 위에서만 가능하다. 나이가 서른다섯이라도 부모에게 용돈을 받으면 다섯 살짜리 아이와 다름없다. 100%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비로소 어른으로 인정받는다. 우리가 자기 인생의 대주주가 되는 시기는 대부분 스무 살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드림인턴들은 서서히 경제적인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 돈 버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196p)




#2. 남의 눈 의식 말고 나답게 돈 벌자

Q. 부모님의 반대와 주변의 걱정을 무릅쓰고 창업의 칼을 뽑은 27세 드림인턴입니다. 1차적인 제 목표는 3년 뒤인 서른 살에 큰돈을 버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목표일까요?

A. 저는 많은 부자를 만나 돈 버는 노하우에 대해 인터뷰했어요. 답은 화가 날 정도로 심플하더군요. 축약하면 3가지예요. 첫째,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둘째, 하루빨리 성공해야겠다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셋째, 돈을 좇은 게 아니라 꿈을 좇았다. 친구가 창업을 한 건 나름의 목표와 꿈이 있어서일 거예요. 그런데 돈을 버는 게 목적이 되면 돈 되는 일은 다 하게 돼요. 그럼 처음 창업했을 때 가졌던 꿈이나 목표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훗날 진짜 돈을 벌 시점에는 돈이 나에게 오지 않아요. 그러니 돈다움을 추구하지 말고 나다움을 추구하세요. 지금은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버리세요. 대신 ‘30대에는 내 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겠다’는 목표로 꿈을 수정하세요. 그러면 돈은 몇 년 뒤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예요.

Q. 작년에 색조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한 36세 드림워커입니다.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걸까요?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부담을 줘서 고민이네요.

A.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 건 아직 커리어가 완벽하게 포장되지 않아서예요. 커리어가 완성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회사의 대표로 보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보거든요. 하지만 커리어가 완벽해지면 여성에 관한 질문을 감히 못 해요. 그리고 결혼을 안 하기로 했다면 그 결심대로 살아가세요. 남들 눈을 의식해서 꼭 결혼할 필요는 없어요. 결혼은 하고 싶을 때 하세요. 몇 마디 덧붙이자면, 특히 여성은 꿈이 확실해진 후에 결혼을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남자의 꿈대로 살게 되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 꿈을 책임져주거나 대신 이뤄주지 않아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창의적이고 위대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리고 꿈을 찾고 이루세요.

Q. 입사한 지 한 달 된 28세 신입사원입니다. 자기계발을 하고 싶은데 퇴근 시간이 늦어서 고민입니다. 친구 만나기, 영어 학원 다니기 등 소소한 약속들도 잡기 어렵다 보니 회사가 마치 족쇄처럼 느껴지네요.

A. 많은 사람이 직장과 꿈을 분리해요. 직장은 돈을 버는 곳일 뿐 자기계발은 퇴근 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죠. 직장과 꿈을 분리하면 꿈을 결코 이룰 수 없어요. 직장이 일터가 아닌 ‘꿈터’여야 하는 이유죠. 모 그룹의 계열사를 5개나 운영하는 한 사장님은 자신이 사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입사 초기 5년에 있다고 말해요. 신입사원일 때는 뭐든지 다 가르쳐줘요. 기획서 쓰는 방법에서부터 회식 때 상사들이 앉는 자리, 심지어 몇 시에 퇴근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죠. 그 사장님은 동기들이 기획서 1장 쓸 때 선배들에게 더 많이 배우려고 3장씩 썼대요. 그렇게 5년 차가 됐을 때 ‘저 녀석은 회사에서 키울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그렇게 사장이 됐다는 거예요. 그러니 입사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라면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라는 걸 알고 열심히 회사에서 배워야 해요. 입사 초기 5년은 다신 오지 않아요. 지금은 퇴근 시간이 늦다고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퇴근 시간을 더 늦추고 선배들에게 일을 배울 때예요. 그렇게 5년을 배우고 10년을 배우면 어느새 달라진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 밖에서 배우지 말고 회사에서 배우세요. 회사가 곧 학교예요.

“회사라는 일터는 생각보다 훌륭한 학교다. 꿈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인프라가 다 갖춰져 있다. 내 책상과 컴퓨터, 전화도 주고, 내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일도 주고, 인맥도 만들어준다. 게다가 월급까지 준다. 이 모든 것 없이 처음부터 혼자서 하려면 얼마나 힘들었겠나. (중략) 일터는 꿈터다. 드림인턴이라면 어떤 직장에서든 꿈의 요소를 발견해, 배우고 익히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장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꿈같은 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209~211p)




#3. 꿈을 이룬 엄마를 둔 자녀는 남다르다

Q. 출산 전에는 교회 전도사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를 낳고 쉬고 있죠. 자기계발을 하고 싶은데, 쉽게 나태해지는 것 같아요. 육아만 하다 보니 우울해지기도 하고요.

A. EBS <60분 부모>를 진행하는 최윤영 아나운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최 아나운서도 아이를 낳고 집에서 육아를 하다 보니 우울했대요. 엄마니까 아이가 무척 예쁘고 사랑스러워야 하는데 그렇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던 거죠. 전적으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니까 나쁜 엄마가 된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대요. 그런 시간을 겪은 후 최 아나운서가 깨달은 건 자신이 얼마나 일을 원하는 지였다고 해요. 얼마 전에 최 아나운서를 만났는데 일과 육아를 함께하니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인대요. 나도 아이 낳고 육아를 했을 때 우울했어요. 아마 모든 엄마가 다 그럴 거예요. 아이가 행복하려면 엄마가 행복해야 해요. 엄마가 행복하려면 ‘나답게’ 살아야 하고요. 평생 아이와 함께해야 하는데 나다움을 버리고 살면 우울해지기밖에 더하겠어요? 지금부터라도 나다움이 뭔지 고민하고 꿈꿀 수 있는 거리를 찾으세요.

Q.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저는 저희 아이들이 저보다 훨씬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니 이루고 싶은 꿈이 있지만 그건 뒷전으로 미루고 자녀교육에만 매진하게 됩니다. 원장님은 어떻게 육아를 하며 꿈을 이루셨는지 궁금합니다.

A. 한 여자가 있어요. 굉장히 좋은 대학을 나와 열심히 커리어를 쌓았죠. 그러다 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어요. 엄마가 된 여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만 매진해요. 딸은 바이올린을 무척 잘했어요. 엄마의 훌륭한 내조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공했어요. 그런 딸이 결혼을 해 아이 엄마가 됐어요. 이 딸이 아이를 기르겠다고 모든 커리어를 접고 육아에만 매진해요. 이 악순환을 어떻게 하죠? 일과 육아 둘 다 하면 안 되나요? 엄마가 24시간 자녀 옆에 붙어 있다고 아이가 성공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엄마가 전업주부인 애들은 다 서울대 가고 성공했겠네요? 저는 오늘 아침 6시쯤 집을 나왔어요. 이 강의가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11시쯤 되겠죠. 그럼 열 살인 막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30분 남짓이에요. 저는 그 시간을 믿어주고 칭찬해주는데 다 써요. 제가 우리 집 아이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믿는다”예요. 왜 그 말을 자주 하는지 아세요? 믿지 않으면 못 나가거든요. “엄마는 너를 믿는다”는 말은 “엄마 나간다”라는 말과 같아요. 또 아이들은 엄마가 믿는 대로 되요. 저는 저에게서 나오는 일하는 엄마로서의 지속적이고 강한 에너지가 아이들을 크게 만들 거라고 믿어요.

“아이가 꿈을 갖도록 돕는 것과 내 꿈을 키우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힘들더라도 끝까지 병행해야 하는 책임이다. 이것은 주부로 사느냐 직장에 다니느냐는 이분법적인 선택도 아니다. 꿈의 터전이 직장이건, 집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의 일상과 태도가 꿈을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주부를 선택했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말고, 나만의 꿈을 만들어 키워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 나와 아이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2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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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드림 온 Dream on김미경 저 | 쌤앤파커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꿈을 말하고 꿈 언저리에서 얼쩡거리는 대한민국. 20대 때는 꿈이 없는 게 당연하고, 30대가 되어야 비로소 꿈 앞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과연 꿈이란 무엇일까? 한때 자기계발서의 달콤한 구호에 속아 꿈에 설렜던 적도 있으나, 이제 단물 빠진 껌처럼 씁쓸해진 꿈,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tvN ‘스타특강쇼’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대한민국 국민강사, 김미경 원장의 새 책 『김미경의 드림 온』이 그 모든 궁금증과 불안을 해소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꿈꾸는 CEO, 그가 가구회사를 성공시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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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회사가 희망이다.” 미국 마서즈 비니어드 섬의 작은 건축회사 사우스마운틴을 다룬 『가슴 뛰는 회사』는 그렇게 말한다.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 작은 회사’ 사우스마운틴은 그렇게 작은 회사로 30년 이상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성공적’이라 함은 성장과 이윤(극대화)에 방점을 둔 수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회사란 무릇 ‘돈을 벌고 바쁘게 일하며 거래를 하고 서비스를 주고받는 곳, 그리고 결국은 빠져나오는 곳’이다.

그러나 사우스마운틴이라는 작은 회사는 다르다. 무한 성장과 이윤에 목매단 지금-여기의 대부분 회사, 즉 치사하게 밥줄 갖고 장난치는 밥통정국의 무법자들과는 ‘다른’ 회사다. 작은 회사라서 어쩌면 가능한 이것은 사우스마운틴을 회사인 동시에 공동체로 만든다. 회사를 유지하고 구성원들과 나누는데 절절한 이윤인지, 모두에게 충분한 급여인지, 일의 중요성에 걸맞게 시간이 주어지고 있는지,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규제와 고민거리가 지나치지 않는지 등에 관심을 둔다. 더 나아가, 직원들의 마음이 기쁜지, 생계는 잘 유지되는지, 고객과 거래처의 기대가 맞춰지고 있는지, 환경에 대한 고려는 잘 이뤄지는지, 건강하고 공정하게 일이 진행되는지, 자신의 일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 등이 이윤보다 더 중요하다. 또한 그것들을 살펴야 회사가 지속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경쟁보다 협동이 유효하다고 믿고, 직원들이 함께 회사를 만들어간다는 느낌 속에서,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회사의 핵심가치로 존중하며 일하고, 직장에서의 일이 내 삶과 하나로 연결되는, 작은 회사.

사우스마운틴이 사유하고 실천한 작은 회사의 미덕과 희망은 한국에서도 가능한 것일까. 지난 1월 29일에 열린 ‘내 작은 회사 시작하기: 스몰 비즈니스 브랜딩’을 들으면서 사우스마운틴에서 파생한 작은 회사를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스몰 비즈니스 아이덴티티 전략

서지현 프라이머스파트너스 이사에 의하면, 경기불황과 장기 침체에 빠져있는 지금 세계 경제의 대안은 대기업 위주가 아닌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벤터 등 다양한 경제 인프라가 풍부한 경제구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인기업’에 대한 이야기로 잇는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 2008년 발간한 보고서 <일자리창출의 틈새시장 ‘1인기업’>을 언급한다.

이 보고서는 “세계는 지금 ‘1인 기업 시대’”라면서 미국은 76%, 한국은 39.1%(일본은 31.5%)에 달하는 1인 기업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 1인 기업의 산업별 분포도를 보면, 서비스업이 절대적으로 많아 94%에 달했으며 서비스업에서도 전통서비스가 90.1%로 지식서비스 9.9%보다 월등히 많았다. 서 이사가 주목한 것은 미국과 유럽 등지에는 의료, 금융 등 고부가가치산업에 1인 기업이 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막상 1인 기업, 시작하려니 걱정부터 앞선다. 인지도와 신뢰를 구축하기에는 인력도 부족하고 마케팅 자원도 부족하다. 경쟁력 있는 브랜드 구축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 서 이사의 조언이 따른다.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자신의 강점과 핵심역량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내가 대표이자 회사 그 자체니까. 그리고 강점과 핵심역량을 브랜딩에 담아내야 한다.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 스타의 도시락 ‘도시락 아트 수지킴’

도시락을 철저히 수작업으로 진행해 패키지부터 내용물까지 예술작품처럼 제조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도시락’이라는 콘셉트로 유명세를 탔다. 전업주부가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발상을 넘어 그가 잘하는 요리와 특별하게 잘 꾸미는 장점을 살려 사업화한 경우다. 스타를 통한 입소문 마케팅 전략과 블로그를 통한 개인 브랜딩을 병행했다.

* 기네스에 오른 여성헬스클럽 ‘커브스’

젊은 나이의 어머니가 비만으로 생을 마감한 것에 충격 받은 창업자 게리해이븐은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이 여성전용 헬스클럽을 창업했다. 부대시설을 줄이고 오직 여성을 위한 사적 공간으로서 편안한 공간에서 여성들의 육체와 정신에 도움을 주는 공간으로 꾸몄다. 철학을 갖고 공간을 만들다보니 스토리가 됐고, 여성들이 공감을 했고, 소수다보니 저절로 커뮤니티가 이뤄졌다. 다이어트 성공기 등을 공유하면서 입소문 마케팅도 이뤄졌다.

* 살림을 넘어 사업으로 ‘한경희 생활과학’

교육부 사무관으로 안정적 직장을 다니다가 자신만의 꿈을 위해 특허를 낸 제품을 통해 창업을 한 경우다. 홈쇼핑 등의 성공스토리를 토대로 자신의 이름을 딴 HAAN생활과학으로 창업했다. 주부 창업자로서 무엇보다 주부들의 라이프스타일과 니즈를 잘 알고, 그에 맞는 제품개발을 진행했다. 시장에 없으면 내가 직접 만든다는 생각으로 도전하는 정신이 돋보였다.

* 1만 명의 추종자 프로그래머를 보유한 ‘모질라 파이어폭스’

모질라 재단에서 만든 웹브라우저로 웹 표준을 상대적으로 잘 지키며, 강력함과 편리함을 겸비하고 있어서 IE(인터넷 익스플로러) 독점 시절의 정체된 인터넷 세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애플도 처음에는 스몰 비즈니스였다. 브랜드 가치가 핵심역량과 철학을 심플하게 전달해주는 것인데, 지금 소비자가 기대했던 애플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서 이사는 브랜딩 전략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전략1. 핵심역량을 브랜딩화 하라! ‘장점 부각하기’

“스몰 비즈니스는 단점이 너무 많다. 그런데 몇 개는 잘 하는 것이 있다. 장점을 부각해야 한다. 도시락 아트 수지킴은 디자인, 커브스는 공감, 한경희생활과학은 열정,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소통, 애플은 혁신이었다. 핵심역량 및 주요 콘텐츠를 브랜드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략2. 기능적 가치에 정서적 가치를 더 하라! ‘매력 발산하기’

“기능도 가치가 있고, 정서적 가치가 더해져야 한다. 결국 매력 발산이다. 꼬셔야 한다. 자신만의 가치를 세상과 연결하는 과정이 브랜딩이다.”

-자신만의 철학과 비전을 타인에게 전파해야 한다.(커브스)
-자신의 강점을 확장시켜라 (수지킴 도시락아트)
-디자인과 접목하라 (애플, 수지킴)
-자신의 노하우를 사업과 연결시켜라 (한경희 생활과학)
-끊임없이 소통하라 (모질라)

서 이사는 작은 회사의 경우, 전문회사에 의뢰해서 CI나 브랜딩을 제작하기에 여의치 않으므로 직접 해 볼 것을 권한다. 우선, 가치를 정교화 할 필요가 있다. 이름(존재의 이유, 차별화), 이미지(시각적 주목, 관심 증대, 매력 어필), 스토리(나만의 이야기, 감성적 어필, 구전 강화), 경험(서비스 체험, 감성 교류, 공감대 형성) 등에서 그것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브랜드컨설팅회사 싱크토피아 대표 패트릭 한론은 ‘탄탄한 브랜드 구축을 위한 7가지’로 ▲이야기 ▲신념 ▲남다른 모양 ▲신성한 제품 이름 ▲반복적 홍보 및 고객관리 ▲탁월한 경영자 ▲신뢰가 약한 고객에 대한 서비스 등을 꼽았다.

“스몰비즈니스는 우리 회사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이야기에 가장 주목한다. 스몰에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이야기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니까. 처음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있다. 작은 회사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듯, 인간미를 주면서 할 수 있잖나. 거대한 조직에서 스토리를 얘기하면 뻥친다는 얘기도 듣지만, 작은 회사의 이야기는 살아 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걸 알리는 것이 스몰 비즈니스에서는 주목할 만한 브랜딩 요소다.”

서 이사는 스몰 비즈니스의 브랜드 구축에 필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리 회사만의 아이덴티티 찾기
-우리 회사만의 스토리 만들어가기
-소비자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브랜드 네임과 디자인 만들기
-우리 회사에 맞는 마케팅, 홍보 전략 세우기
-뚝심 있게 브랜디 아이덴티티 지켜가기

또 스몰 비즈니스의 브랜드 기준도 제시했다.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잘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카테고리, 제품, 및 서비스 특성에 적합해야 한다.
-타깃의 취향 및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경쟁 브랜드와 차별화 되어야 한다.
-브랜드 네임은 어려지 않아야 한다.
-상표등록은 반드시 한다.




소심한 남자, 작은 회사를 차리다

가구회사 바이헤이데이와 브랜드 비즈니스회사 스투디오헤이데이를 운영하는 노동균 대표가 브랜드 전략보다 더욱 생생한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눴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성적. 소극적.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어리바리. 그래서 그는 통상 우리가 리더나 대표가 가져야 할 미덕으로 여기는 카리스마로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 대외활동을 좋아하는 활동성, 학창시절 회장 한번쯤 해봤던 경험 등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창업할 때 주변에서 만류를 많이 했다. 혹시 창업을 하거나 브랜드를 만들 때 본인의 능력에 의구심이 들거나 주변에서 말리면 날 보고 용기를 가져라(웃음). 통상적인 대표나 리더의 이미지와는 반대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것일까. 확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다양한 개성이 있다. 단점도 있지만 좋은 성향도 있고. 내가 내린 결론은, 대표는 자신의 성향을 효과적으로 발휘해 개인의 성향에 맞게 조직을 잘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회사나 브랜드를 이끌 수 있다”

수줍은 노 대표가 이끌고 있는 작은 회사는 2개다. 스투디오헤이데이는 브랜드 전략디자인 컨설팅 그룹으로 애플리케이션, 모바일 디바이스의 디스플레이 화면 디자인 등의 일을 한다. 바이헤이데이는 친환경 디자인 가구브랜드로 미니멀하고 깔끔한 가구를 제작ㆍ판매하는 회사다. 그는 2007년, 학교를 다니면서 스투디오헤이데이라는 웹디자인 회사를 처음 만들었다.

“학교 다니면서 프리랜서였는데, 4학년 때 창업했다. 당시 답답했던 게 디자인 에이전시에선 편집디자인이나 웹사이트디자인 등 매체를 구분해서 전문가라고 어필하더라. 왜 다른 강점을 이야기하지 않는지 답답했다. 매체를 떠나, ‘무엇을 디자인하는가’보다 ‘어떻게 디자인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디자인하는가에 접근하고 브랜드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스투디오헤이데이는 달랐다. 다른 회사는 경쟁PT에서 폰트, 컬러, 레이아웃 등의 독특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브랜드에 맞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조형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노 대표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했다. 브랜드와 회사가 원하는 미션, 커뮤니케이션 목표를 얼마나 임팩트 있고, 가슴 깊숙이 전달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들이 원하는 미션을 고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브랜드 전략을 제안했다. 즉, 스투디오헤이데이는 브랜드 전략에 맞게 디자인을 하는 에이전시라고 접근했다.

“우리가 실제로 제작하는 것은 웹사이트였으나 브랜드 전략 에이전시라고 이야기했다. 경쟁PT에 많이 나갔는데, 컬러나 게시판, 버튼 등을 넣어서 제출하는 다른 회사의 것과 달리 시안을 만들지 않은 대신 미션을 이런 아이디어로 고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겠다는 논리만 전달했다. 그게 차별점이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맞는 회사와 이야기하면 되니까. 좋게 바라본 사람은 PT자리에서 바로 결정도 하더라.”

재미가 붙었다. 여러모로 이점도 많았다. PT 준비시간도 줄고, 클라이언트도 대형화되면서 대기업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브랜드 전략을 짜고 디자인하고 성과가 좋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고민한 전략과 디자인, 결과물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큰 기업의 고위급 임원에 맞춰 아웃풋이 달라졌다. 과연 이대로 좋은가, 고민이 됐다.


바이헤이데이, 오리지널리티를 만든 작은 회사

“작은 회사지만 협업을 통해 우리의 역량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역량이 결과물로 전달되지 않으니,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는지 고민했다. 그래서 낸 결론이 남의 일만 하지 말고 우리 역량으로만 채워진 브랜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관심을 가진 게 세 가지였는데, 패션, 가구, 카페, 모두를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에디션(패션 신진디자이너 온라인 멀티숍), 바이헤이데이(온라인 디자인가구 브랜드), 레이지마마스파이(프랑스 가정식 수제파이)였다. 노 대표, 다 잘될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바이헤이데이만 남았다. 셋 중 가장 마음이 덜 간 것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바이헤이데이는 3종류 10개, 살 테면 사라고 올려놓은 경우였다.

“레이지마마스파이는 친구와 함께했는데, 1억 원이 넘게 들어갔다. 에디션과 함께 투자를 많이 한 것에 비해 사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브랜드 전략 디자인 면에선 세 개 다 원하는 타깃에게 원하는 미션을 전달했다고 본다. 에디션은 패션업계에서 좋아했다. 레이지는 파이가 잘 팔렸다(웃음). 그러나 브랜드 비즈니스로서는 바이헤이데이만 순항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노 대표가 내린 결론은 오리지널리티와 절실함이었다.

“에디션은 내가 좋아하는 옷을 사면서 패션에 대한 갈증이 해소됐고, 카페는 해보니 내 카페여야만 만족이 되는 건 아니더라. 챙길 것도 많고, 되게 귀찮았다(웃음). 가구는 참 좋아하는데 무척 하고 싶은데, 간접체험도 할 수 없고 전시만 보는 정도였다. 대학 때 미술 전공수업은 거의 다 들었는데, 목조과만 타과생이 못 듣게 하더라. 다칠까봐. 그때도 애증이 타올랐다. 그런 절실함이 있다 보니 가장 작게 시작했지만 애정을 많이 쏟게 됐다. 패션은 섭외가 잘 안 됐다. 내가 가기 싫어서 아랫사람을 시키기도 했고. 가구는 달랐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다. 작은 문제만 생겨도 잠을 못 잤다.”

그는 오리지널리티를 최우선으로 두고, 다음으로 오리지널리티를 이용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정립ㆍ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경우, 자신의 성향을 적극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결합시켰다. 자신의 성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소심해서 작은 것에 민감하다. 지저분하고 장식적인 것을 싫어한다. 그때 장식적인 우리나라 가구들이 싫었고, 이런 성향을 가구에 반영했다.

“당시엔 장식 없는 스타일은 바이헤이데이가 유일했다. 병적으로 섬세한 성격이 디테일에 반영됐다. 처음에 친환경은 관심 없었다. 그런데 가구와 그래픽 디자인을 함께 하다보니 밤을 많이 샜고, 몸이 망가졌다. 그때부터 한의학을 공부했는데, ‘오염된 집’이라는 게 뇌리를 쳤다. 문명병은 오염된 공간 때문에 생긴다고 한의학은 정의한다. 처음엔 소비자들이 우리 가구디자인을 보고 눈이 행복했으면 했다. 그런데 피부는 병들어 있을 수 있었던 거지. 사람과 맞닿는 오브제를 어떻게 본드를 많이 쓸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했다. 친환경이 뭔지, MDF가 왜 안 좋은지 몰랐는데, 공부를 했다. 친환경이 그렇게 몸속에 들어와 오리지널리티가 됐고, 친환경 디자인 가구브랜드 바이헤이데이라고 접근하고 있다. 3월에 라디오 광고도 할 계획이다.”

그는 오리지널리티와 절실함을 척추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그 두 개를 정립한 뒤 제공하고자 하는 서비스나 제품에 반영할 수 있다면, 좋은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한다.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고 본인에게 떳떳한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 것.’ 마케팅, 유통, 홍보, 고객관리 등도 그가 보기엔 척추 같은 중심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오리지널리티가 깃들어 있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하자. 부수적으로 마음에 새기고 있는 태도 같은 건데,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속에 화가 있다(禍兮福之所依, 福兮禍之所伏). 노자의『도덕경』에 나온다. 나는 20대가 굉장히 암울했다. IMF 때문에 학자금 대출로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병행했고, 밥 사먹을 돈이 없었던 적도 있다. 아스팔트 갯지렁이 같은 인생이라고 친구가 그러더라(웃음). 아름다운 20대를 바랐는데 현실이 안 받쳐줘서 짜증이 굉장히 많이 났다. 그러다 27살에 창업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시절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싶다. 회사가 잘 돼도 항상 불안하다. 그래야 하고. 헤이데이가 존속할 수 있는 50%는 이런 태도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는 자신의 성향을 이렇게 승화시키고 있다.

내성적이기에 깊이 고민하고
소극적이기에 한 번 더 참을 수 있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지만 일대일로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혼자 있기 좋아해서 혼자라도 끝까지 남아 업무를 마무리하고
어리바리한 모습 보일까 한 번 더 생각한 후 행동하고


“단점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 각자가 가진 성향을 반영해서 브랜드와 회사를 꾸려나가면 자신만의 좋은 회사, 자신만의 좋은 브랜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노 대표가 요즘 가장 꽂힌 일은 축구다. 3부 리그인 챌린저스리그(옛 K3리그)의 선수로서 2014 브라질월드컵 국가대표의 꿈을 갖고 있다. 축구를 배우고 빠져 지내면서 욕심이 생긴다는 그의 수줍은 진심이 그의 오리지널리티를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그는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디자인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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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회사 시작하기
정은영 저 | 디자인하우스
클라이언트 비즈니스를 전문으로 하는 에이전시 형태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소규모 기획사, 소규모 출판사, 갤러리, 디자인과 예술 제품 브랜드 개발 등의 분야에서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과 이미 창업 전선에 뛰어든 초년병들을 위해 집필된 책이다. 크리에이터들뿐 아니라 독특한 아이디어, 차별화된 콘텐츠로 스몰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창업의 전 과정을 업계 고수들의 노하우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영화 베를린의 하정우, 현실에서는 난민 - 욤비 토나 『내 이름은 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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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의 「하정우」, 현실이라면 난민 신청했을 터

 

2월 1일 금요일,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홀에서 욤비 토나 씨와 박진숙 씨가 독자와 만났다. 욤비 토나 씨와 박진숙 씨는 최근에  『내 이름은 욤비』라는 책을 함께 썼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욤비 씨의 인생을 담았다.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욤비 씨의 이야기를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박진숙 씨가 한국어로 옮겼다. 박진숙 씨는 이주여성의 자립을 추구하는 NGO 단체 에코팜므를 이끌고 있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하정우와 한석규, 전지현 등이 출연한 영화 「베를린」이 화제다. 영화에서 하정우는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다, 모국에 배신당하며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에게 쫓긴다. 세세한 면에서는 다르겠지만, 욤비 토나 씨의 인생은 「베를린」에서의 하정우와 비슷하다. 콩고 공화국 출신인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이라 할 수 있는 콩고비밀정보국(ANR) 요원으로 일한다.

 

콩고 공화국은 한국과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식민지 시기를 거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립했다. 기쁨도 잠시, 주변국과 분쟁에 휘말린다. 아프리카 국가 중 많은 나라가 독립한 뒤 내전을 겪었다.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어진 국경선 탓도 있다. 르완다 내전도 그중 하나다. 수적으로는 소수이나 지배층인 투치족과 다수이나 피지배계층인 후투족 사이에 벌어진 르완다 내전은 주변국에도 영향을 끼친다.

 

르완다 내전에서 많은 난민이 발생하며, 이중 일부가 콩고 공화국으로 이동한다. 후투족 출신의 구 르완다 정부군은 콩고 공화국 내 반군과 합세하여 콩고 공화국 내전에 개입했다. 콩고 공화국은 모부뚜 대통령의 오랜 독재를 막 끝낸 뒤였다. 자신이 집권하게 도와준 대가로 리스 까빌라 대통령은 르완다 출신 인사를 대거 요직에 앉혔다. 이런 와중에 리스 까발라 대통령은 임기 중 살해되고, 콩고 공화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혼돈으로 빠져든다.

 

요원으로 활동하던 욤비 씨는 이런 시기에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겉으로 정부를 반대하는 반군이 실제로는 정부와 모종의 협상을 벌였고, 이는 콩고 공화국의 앞으로 존망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집권 정당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내용이었다. 사실대로 상부에 보고한다면 위험에 처하리라 예상했지만, 그는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한다. 이 사건으로 욤비 씨는 체포되지만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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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난민 처우에 관해서는 후진국

 

중국을 거쳐 그가 도착한 곳은 한국. 콩고 공화국의 감시로부터 멀어지기는 했지만 한국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민 처우에 관해서는 후진국인 이곳에서 난민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다.

 

1992년 '난민협약'을 비준한 이래, 한국 정부에서 난민 신청자 수 대비 난민 인정비율은 10%도 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난민을 바라보는 인식도 문제다. 한국에서 난민은 빈곤, 기아 등의 단어와 연결된다. 즉, 난민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인식. 실제로 난민이 되는 경우는 훨씬 복잡하다. 정치나 종교적인 문제로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욤비 씨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날 강연회의 플래카드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난민은 불쌍한 사람도,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닙니다. 난민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난민을 인정받기까지 걸린 세월은 무려 6년.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난민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몰래 일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처지. 월급을 못 받을 때도 있었고, 손찌검을 당할 때도 있었다. 차라리 난민 인정을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는 캐나다와 같은 곳으로 갈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욤비 씨는 버텼다. 자기가 무너지면 다른 사람이 한국에서 난민 인정받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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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이 자립하도록 도와달라

 

독자와 만난 자리에서 욤비 씨는 책에 적힌 내용을 영어로 이야기했고 박진숙 씨가 한국어로 통역했다. 강연회에서 박진숙 씨는 그가 운이 좋았던 사례였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수차례 하기도 했고, 결국 난민으로 인정받은 덕택이다. 욤비 씨도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나처럼 운 좋은 난민이 다시없기를 바란다. 나처럼 운이 좋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이 한국 사회가 바뀌길 바라기 때문이다. 후원금 몇 푼 주는 것보다 난민 스스로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회가 더 건강하고 유연한 사회라고 믿는다. 그리고 난민 역시 그런 사회에서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늘 내 경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난민들이 스스로를 돕도록 도와주세요!” - 307쪽

 

실제로 이날 행사에서도 그는 독자에게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당부했다. 물질적인 원조도 좋지만, 자립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더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국은 난민이 발생하던 곳에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곳으로 변했다. 한국전쟁 때, 난민이 많이 생겼다. 지금은 많은 곳에서 난민으로 대접받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대지진 이후, 다른 나라로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이른바 환경 난민이다. 이렇듯 난민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국제 사회가 난민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할 때, 지구 공동체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한국사회도 이제는 난민을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볼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할 때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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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박진숙 공저 | 이후
‘난민’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렇다. 구호물품을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앙상하게 뼈마디만 남은 아이와 그 아이를 안고 눈물 흘리는 어머니, 얼기설기 만들어진 텐트 아래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젊은이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이미지에 갇혀 우리는 우리 곁에 살아가는 난민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무관심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야 하는 한국의 난민, 이 책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군은 왜 친일파를 껴안았을까? - 한홍구 한국현대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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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멘붕까진 안 갔다. 왜냐면 질 거라는 생각을 더 했다. 물론 선거당일 투표율이 높아서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 질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4.11 총선 이후 반전의 계기를 못 찾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총선 때 지는 걸 뒤집을 수 있는 뭔가를 꺼내야하는데, 대선까지 그것을 못했다. 많은 분들이 대선 후 자신의 가치관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심한 충격을 느꼈던 것 같다.”




식민통치의 아픈 기억

한 교수, 역사의 기억을 꺼낸다. 대한민국 史. “역사에서 보면 우리의 힘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해방, 미군점령, 전쟁, 이승만 군사독재, 4.19 이후 1년쯤 좋은 세상을 기대했지만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97년 말 국가 부도가 났다. 그제서야 정권이 바뀌었다. 국가부도 안 났으면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의 탄생을 기적이라고 해야 한다. 다른 요인들도 돕지 않았으면 정권교체가 안 됐다. 이인제가 500만 표를 갖고 가면서 민주정권의 수립의 1등 공신이 됐다. (웃음) 거기에 DJP연합도 있었다. 김대중을 대통령 병 환자라고 비판했다. JP와 붙었다고. 나도 비판했다. 그런데 이게 없었어도 정권은 바뀌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김현철 게이트도 있었다. 이런 모든 요인에도 김대중은 겨우 37만 표 차이로 이겼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왜 민주세력은 이다지도 힘이 약한 것인가? 한 교수, 한국전쟁 때 모두 죽었다고 설명한다. 전멸. 일본의 식민지 지배도 독하게 겪었다. 이웃나라에 식민지 지배당한 국가는 한국과 아일랜드 밖에 없단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면서, 그 넓은 인도 땅에 영국인 2천명이 주둔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한국 땅에 60만, 많을 때는 100만이 주둔했을 정도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우리나라를 강하게 압박한 것이다. 더불어 일본은 강력한 동화정책을 폈다.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등이었다.

“일본인은 성(姓)이 없었다. ‘다나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친척이 아니다. ‘집이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나카였다. 집이 우물 주위에 있으면 ‘이노우에’였다. 일본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성을 만들었다. 우리는 어땠나. 내 말이 거짓이면 성을 간다. 이런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성이 중요했다. 조선이 일본에게 식민지 당할 만한 나라가 아닌데, 운 없게 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역량이 안 됐는데, 운 좋게 조선을 집어삼켰다. 그러니 일본은 폭압적이었다. 그것을 해방이후 그대로 우리가 물려받아 지금까지 왔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는 물론, 궁성요배라고 천황에 대한 절을 강요당했다. 세상이 바뀌어 해방이 됐지만, 비슷한 것이 이어졌다.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강요했다. 중요한 것은 반성이 없었다. 신사참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반성했다는 얘기, 한 교수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편에선 의병이 싸웠다. 한 교수, 묻는다. 의병이 싸움을 잘했을까? 일본군을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싸웠을까? 그는 답한다. 이긴다는 망상(!)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질 것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런데 싸웠다! 그들, 처절하게 죽었다. 교수형 당하고 총살당하고.

“나라가 망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거룩하게, 또 하나는 드럽게. 우리가 망할 때 고종이 책임졌나? 고종 개인에겐 가혹한 얘기겠지만, 고종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거나 목을 매서 죽었다면 어쨌을까. 1945년 해방됐을 때, 대한제국을 다시 세우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입헌군주제 하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나라가 드럽게 망해서! 대궐에서 망한 것도 아니고, 통감부 사무실도 아니요, 통관관저의 침실의 부속응접실에서 도장을 찍었다. 회사가 합병하듯, 물건 팔듯이, 그렇게 드럽게 망했다.”

한 교수, 백범일지를 보니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슬펐다고 말을 이었다. 나라를 망하게 한 도장을 챙겨온 이가 있었다. 조선이 망한 테이블에 이완용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말하자면, 울트라 친일파. 그러나 역사책은 이것을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치욕의 장면이자 역사라도 제대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 역사책의 임무임에도, 역사는 그를 다른 일로 기억한다.

“친일파 문제를 다루다보면 뉴라이트와 시비가 붙는다. 뉴라이트는 우릴 ‘패륜아’라고 부른다. 뉴라이트는 그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다. ‘신문화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고. 그들은 아버지가 많아서 좋겠다(웃음)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람들이 아버지를 복원시킨다. 우리 사회는 친일파를 친일파라 부르지 못한다. 다카키 마사오를 다카키 마사오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정희가 불렀다. 정희가 정희 딸을 구박했다. 그리 부르다가 독한 년이라고 불렸지. 아무도 안 부르고 이정희 혼자 그렇게 부른 게 죄지. 박근혜 검증, 그런 게 있었나? 2007년, 이명박과 경선할 때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언론도 안 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자료에 나온 것만 봐도 수두룩하게 많았는데, 아무도 안 했다.”

다시 조선이 망할 때로 돌아간다. 한 교수, 이완용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흉악한 놈이 아니었단다. 학식과 인품이 출중했으며, 온화ㆍ겸손하고 세상 이치에 밝은 명필이었다. 좋은 세상이었다면 보통교육을 도입시킨 학부대신으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이완용은 세상의 추이를 따라갔다. 어차피 망한 나라, 연착륙 시키면서 자신도 이익을 보자고 한 것이다. 한 교수, 묻는다. 우리는 이완용‘만’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 또 한명의 친일파를 언급한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 종이와 인주, 도장을 들고 간 이, 이인직이었다. 신소설의 아버지. 『혈의 누』. 우리말로 ‘피눈물’ 혹은 ‘혈루’하면 될 것을, ‘혈의 누’라고 굳이 쓴 신소설. 이인직,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이는 얼마나 될까.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그것을 제대로 말해줬던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죄!

일제의 잔재를 청산 못해 군사독재가 왔다. 긴가민가 싶겠지만, 한 교수의 설명이 잇는다. 한국 역사에서 중요하고 꼭 알아야 할 것으로 이것을 든다.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 이어진단다. 즉, 친일파와 군사독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그놈이 그놈이라고 덧붙인다. 한 교수, 해방 직후의 독립 사진을 외치고 있는 한 사진을 보여준다.

“머리가 짧지? 서대문형무소 독립투사들이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다. 한참 들여다보면, 사진사가 늦게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사가 제 시간에 갔으면 정말 생생한 사진이 나왔을 텐데, 늦게 와서 사람들을 다시 잡아 연출해서 찍었을 것이다. 그러니 포토라인이 형성됐던 거지. 연출된 사진이라도 무척 좋다. 1945년 8월 15일이니까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헌데, 이 사진을 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사진 속 인물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한 교수에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투사의 이름을 모른다니. 이름이 더러 있어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이 땅의 해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로부터 7~8년 후 남한에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이 땅의 해방이었다.

해방 직후 가장 가슴 아픈 것.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무산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반민특위였다. 그러나 나라를 팔아먹고서도 반성문을 쓴 친일파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회개한 사람도 없었다. 한 교수가 알기로는 참회록, 반성문, 회개 거의 없었다. 일본의 압제 하에 있다가 36년 만에 해방이 됐다. 그 징한 일본 밑에서 주구노릇을 한 사람들, 어떻게 처리해야 옳았을까.

“역사에서 보면 더한 멘붕이 많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아니고 친일파에게 역으로 청산을 당했다. 진짜 멘붕이지. 친일청산 옳은 일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시민들은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못했을 거다. 친일파는 어땠을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 상황을 돌파했다. 물론 분단이라는 상황 덕을 봤다. 2차 대전 뒤 150여 개의 독립국이 생겼다. 그 새나라의 핵심권력을 누가 장악했겠나.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는데, 딱 두 나라에서 제국주의에 빌붙었던 놈들이 핵심권력을 잡았다. 대한민국과 남베트남. 남베트남은 그나마 없어졌다. 한국만 유일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됐는데, 식민국에 빌붙은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면, 정의, 상식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일들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사람들, 해방 직후 처음엔 도망갔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돌아와 마구 짓기 시작했다. 되레 승진을 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미군의 소행이었다. 일본의 떡고물을 주워 먹던 놈들을 미군이 아예 떡판 채 맡긴 것이다. 힘 센 놈들에게 붙어먹던 놈들이 다루기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일파 입장에선 말이 안 되게 고마운 것이었다. 미군이 친일파를 껴안은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멘붕이었다. 그것이 또한 대한민국의 해방이었다.

“친일파에 대한 가장 좋은 청산은 봐주는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그들이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봐주는 것, 필요하다. 왜? 친일파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하면 저들을 반성하게 만들까 궁리했어야 했다. 그런데 절대 봐줄 수 없는 놈들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고문하고 탄압한 자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런 놈들이 정권을 잡았다. 친일파들이 해방 조국에 대해 한 짓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했다.”

이들, 반민특위를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잡아넣었다.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백범을 암살했다. 이 세 가지 사건, 한 교수에 의하면 하나의 것이다. 친일파들의 쿠데타. 대한민국을 접수했다. 이승만과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남은 제국주의 협력 세력, 손을 잡았다. 멘붕은 계속 된다.




7년 주기설, 다시 일어나는 법

한 교수, 1991년 분신정국의 기억을 꺼낸다. 학생운동 진영이 마지막으로 군사정권과 붙었던 시절. 국제적으로 동서냉정 무너진 시기. 이틀에 한 명꼴로 분신이 일어났다. 끔찍했다. 정권도 위태했다. 유서조작사건이 일어났다. (당국이 범인으로 몰았던 강기훈은 현재 간암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운동권과 군사정권의 팽팽했던 대결, 정원식 총리가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쓴 사진 한 장으로 분신정국은 끝이 났다.

“광주항쟁이 비록 졌지만, 긴 호흡에선 승리했다고 하는 지점이 있다. 헌데 91년 투쟁은 너무 아프다. 회고도 안 한다. 사진 한 장에 훅 가버렸다. 우리 역사를 보자. 피카소 작품 중에 <한국에서의 학살>이 있다. 평화박물관에 정말 걸고 싶은데, 철갑옷을 입은 군인이 벌거벗은 여인을 학살하는 그림이다. 이렇듯 다 죽고, 우리 같은 쭉정이만 남았다. 거기서 우리는 시작했다. 그런데, 4.19, 전쟁 끝나고 만 7년이 안 됐을 때 일어났다.”

한 교수가 서른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의 한 50대 남성이 노동자들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한 교수에게 4.19를 아느냐고 물으면서, 4.19의 힘으로 그것을 돌린다고 했다. 그는 미국 중부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가난이 싫어 입대했고, 훈련을 받고 배치 받은 곳이 영등포였다. 그가 본 당시의 영등포는 폭탄을 갓 맞은 것과 같은 곳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온지 6개월이 안 돼서 어린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세상이 바뀌었다. 이게 과연 무슨 힘인가 생각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 노동운동을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고, 그 약발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한 교수에게 말했다고 한다.

“왜 중고생이 들고 일어났을까? 어른들이 다 죽었으니까. 사람, 회복이 참 빠르다. 7년 주기설을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길어야 10년. 박정희가 4.19를 짓밟은 것이 5.16이다. 71년, 온갖 파동이 일어나고 데모가 나니 견딜 수 없어서 박정희가 유신을 선언했다. 그렇게 찍어 눌렀는데, 7년이 지나고 부마항쟁이 터지고 암살당했다. 그걸 다시 찍어 누른 게 80년 광주다. 만 7년 만에 6월 항쟁이 일어났다. 해방정국 때 돌파 구호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는데, 그 말뜻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이 87년이었다. 그러다 다시 뚫린 것이 3당 합당이었다. 합당하면서 민자당이 100년 간다고 했다. 그러다 97년 선거에서 마침내 정권을 교체했다. 우리에겐 그런 힘이 있다. 너무 실망할 것 없다.”

한 교수는 진짜 보수주의자가 사라진 한국의 현실에 대해 한탄했다. 사법살인이라는 인혁당 사건 등을 거치며 그리 됐다는 것. 기실 한국은 보수 전통이 강한 나라였다. 장준하도 진짜 보수였다. 그러나 그 제사는 보수가 지내지 않고 이른바 진보세력이 지낸다.

“장준하는 사상으로 말하면 극우파다. 첫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이 장준하의 대장이었다. 장준하가 원래 백범 비서였는데, 이범석이 데려왔다. 장준하가 백범과 왜 갈라섰느냐면, 공산주의와 협상한다며 이범석에게 갔다. 그런데, 이범석도 공산주의자와 타협하고 얘기를 듣는 거다. 장준하는 극우 중의 극우다. 성골 극우다. (웃음) 그런데 재야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얻고 재야 진영의 구심점이 된다. 돌아가신 게 너무 슬프다. 마지막 광복군이 다카키 마사오에게 토벌 당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했고,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정경모 선생은 미군 통일장교였다. 김수영도 반공포로 출신으로 인민군에 잠시 가담했지만, 자유주의자다. 이렇게 재야 진보진영의 큰 어른들, 해방 직후 기준으로 보면 울트라 우익이다. 이 분들이 진짜 보수다. 우파는 매판이자, 앞잡이지.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구도가 이상해졌다.”

모완용, 모택동 아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모완용은 한국전 때 죽었는데, 북한에 아직 묘가 있다. 중국 최고권력자가 아들 묘지를 왜 북에 뒀을까. 염치 때문이었다. 자신이 내린 명령 때문에 중국 젊은이들 수십만이 죽어 북한에 묻혔는데 내 아들만 어떻게 중국으로 데리고 오냐. 모택동은 그랬다. 이 땅의 권력자들, 비교된다. 대통령은 다리를 끊고 도망을 갔고, 돌아와서는 피난 못 간 사람들을 빨갱이 혹은 부역자 취급했다. 공직자 임명을 놓고, 늘 빠지지 않는 것. 아들의 병역문제다. 한 교수, 이념의 문제 아닌 ‘싸가지’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4,19, 학생들이 나왔는데, 마산에서 첫 발포가 있었다. 반민특위에 붙잡혔던 놈이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김주열을 쏴 죽였다. 일본 군국주의가 어떻게 군사독재와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성공한 혁명과 실패한 혁명은 1미터 차이다. 민중이 탱크 위에 올라가느냐, 탱크에 깔리느냐.”

1979년 YH사건이 있었다. 박정희가 이 사건 80일 후에 죽는다. 엄정한 시국이었는데, 여공들의 데모로 유신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경찰의 진압 과정, 6년 차 19세 여공이 죽었다. 학생들이 함께 들고 일어섰다. 노학연대. 그러나 90년대, 대학생들만 민주화됐다. 한 교수는 그것이 망하는 징조였다고 진단한다.

“그 어려운 지경, 학생운동도 헌신적이었다. 미국으로 치면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대 학생들이 어떻게 노동자가 될까, 세미나를 하는 거지. 이렇게 부마항쟁이 터졌다. 부산은 5년 동안 데모가 없었는데, 데모가 터졌다. 그리고 박정희가 총에 맞았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쐈다. 수천 명 젊은이의 피 대신, 박정희를 쐈지만, 유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유혈사태는 몇 달 뒤 광주에서 일어났다. 당시 광주는 대동천국을 만들었다. 일주일 이상 시민들이 점령했는데, 칼빈총 수천 자루가 풀렸는데, 금은방, 은행 단 한 곳도 털리지 않았다. 도청소재지 점령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게 점령했지만, 다른 도시에서도 일어나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5월 26일, 계엄군 쳐들어온다는데 도청 앞 광장에 3만 명이 모였다. 하나, 뿔뿔이 흩어졌다. 말릴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 ‘걍’ 남았다.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넘겨줄 수 없는 사람들만. 승패완 상관없었다. 한 교수, 그게 역사라고 말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 이요원이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이유다.

“광주의 새벽, 반만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었을 것이다. 도청에 300명 정도 남았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30명 안팎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깨지고 딱 7년 후, 백만 인파가 거리로 나왔다. 그때 (정권이) 바뀌었어야 했는데, 양김이 갈라지면서 실패했다. 87년 체제가 지금 생명력을 다했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실패했다. 허나, 미국도 민주주의 250년을 한 뒤에야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냈다. 노무현은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인터넷 은어)’에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의 인터넷 은어)’다. (웃음) 우리가 많은 것을 이뤘지만, 이루지 못한 것도 많다. 우리는 다 졌다. 총선에서도 이긴 게 딱 3번이다. 지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게 쉽지 않다. 제대로 준비해야 이길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민주화 진영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찍어줬다. 그런데 찍어줬더니 별 볼일 없잖나. 그래서 더 이상 부담 갖지 않는다. 민주화 가치를 더 이상 옹호하지도 않는다. 지는 게 당연하다.”




지금 이 순간 역사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한 교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87년 6월 항쟁. 이때 민주화되면서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4년을 싸워 월급이 3~4배 올랐다. 노동시간도 단축됐다.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동시에 왔다. 노동자들에게 여가가 생기고, 분배가 이뤄져서 소비를 하고, 선순환이 이뤄졌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민주투사들은 자신들만 민주화됐다. 비정규직이 나타났고, 손배가압류를 이념적으로 풀어내는 작업도 못했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한진중공업의 투쟁, 1991년 박창수 열사를 시작으로 김주익 열사, 김진숙 위원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간이 지났다.” 감성이 따뜻한 사람인데, 그렇게 소릴 했다. 김주익이 투쟁의 수단이었나? 아니다. 견딜 수 없어서 그랬다. 자신도 결국 그랬지 않나. 그런데 대통령할 때 그런 모진 소릴 했다. 나중에 김진숙 영상을 보고 놀랐다. 노무현이 김주익 변호사였다. 그렇게 하나였는데, 갈라졌다. 87년엔 실패했지만, 97년에는 정권 교체했다. 그런데 그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운동, 시민운동이 갈라졌다. 이 갈라진 틈을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정권이 들어설 수 없다. 박근혜, 5년 후 끝나지만, 간단하게 보지 마라. 중임제 얘기할 테고, 자신이 지명하고 중임하면 이명박까지 합쳐 18년이 되는 거다.”

한 교수, 문제는 이른바 민주화세력의 ‘자살골’이라고 말한다. 집권 기간 중 대중에게 다시 찍어줘야 할 이유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 엄중한 상황에서 특히 비정규직노동자, 청년노동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인지 준비하지 못했다. 그 부분을 어떻게 극복할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메시지를 던진다.

“세상에 거저 주어진 것은 없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 몇 십 년 전 누군가의 피와 땀이 섞인 것이다. 바통을 제대로 넘겨줘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노후와 미래, 현실이 달려있다. 부동산이 문제화 된 것은 50년 안짝이다. 사교육은 불과 30년이며, 비정규직은 25년이 안 된 문제다. 한 세대의 문제를 알고, 우리의 현실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 투표도 중요하지만, 투표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역사공부만 할 게 아니고 주인이 돼야 한다. 여러분이 쓰는 역사,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돼서 마지막 페이지를 써야 한다. 이 상황이 고착화되면 광주는 개죽음이 된다. 유신 잔당과 싸운 건데, 지금 유신의 잔재가 대통령이 됐다. 독립투사들도 그렇고, 광주에서 계엄군이 언제 올지 몰라도 자신의 투쟁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30년 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겠나.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시작했다. 게임 끝의 휘슬은 민중이 부는 거다. 우리의 룰은 진 팀이 이길 때까지다. (웃음) 피곤할 수밖에 없지만, 느긋하게 결국은 우리가 이긴다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 역사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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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세트
한홍구 저 | 한겨레출판
소설보다 재미있고 영화보다 짜릿한 역사이야기 대한민국사 세트. 한국 사회의 현실을 치우침 없는 역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홍구 교수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요한 문제들을 재치 있는 입담으로 들려준다.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역사교양서의 베스트셀러로 그동안 출간된 4권의 책을 세트로 구성하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제주도에서 홀로 귀양살이를 하는 김정희의 심정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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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와 서양화, 어떤 차이가 있나

손영옥 저자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부터 묻는다. 동양화와 서양화 사이,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저자가 꼽는 가장 큰 차이는 동양화에는 글이 있다는 것. 즉,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 그리고 동양화의 이런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

-재료 : 종이 비단, 묵, 붓-용묵(用墨)
-전시방식 : 두루마리(軸), 족자(圈), 첩(冊)-장황
-공간구성 : 여백
-제발 인장

저자는 두루마리의 예부터 든다. 황공망 <부춘산거도>다.

“<부춘산거도>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다. 중국의 10대 회화 중 하나로 유명 소장가들이 보유했던 그림인데, 길이만 6미터(33 x 636.9cm)가 넘는다. 명나라 말 우홍위의 손에 들어가는데, 이 그림을 무척 사랑했다. 죽을 때 함께 태워달라고 유언을 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우홍위 조카가 훌륭한 그림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불이 붙자마자 껐다. 그래서 약간 불탄 흔적이 있고, 국공내전이 일어나고 장개석이 이 그림을 소장했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중국의 유명 회화를 대거 가져갔다. 대만 박물관이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수화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는다. <몽유도원도>는 19명의 선비가 글을 썼고, 길이만 2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기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어 족자의 예로, 북송의 화가 범관이 그린 <계산행려도>를, 첩의 예로는 김홍도의 풍속화 화첩을 보여준다. 동양화의 중요한 특징인 ‘여백’에 대한 것도 빠지지 않는다. 중국 그림에도 처음부터 여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나라 때 그림을 ‘청록산수’라고 말하는데, 당시에는 화면 가득 그림을 채워 넣었다. 여백은 송나라 이후부터 강조되기 시작한다. 배경에 공백을 뒀고, 칠하지 않은 채 여백을 남겨둔 것.

“글과 그림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고 했다. 붓, 먹, 종이, 비단을 쓰고, 동일한 도구를 사용하는 쌍둥이 형제 같다. 사실 상형문자 자체가 그림이다. 동양화는 문학성을 강조한다. 당나라 왕유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속에 그림이 있다.” 동양화는 기교나 사물의 묘사 자체보다 그림의 정취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동양화를 감상하기 위해선 ‘제발(題跋)’, 즉 여백의 글귀도 함께 이해해야 했다. 여기서 ‘제’는 제사 화복의 앞쪽에 쓰는 글이며 ‘발’은 화폭의 뒤에 쓰는 글을 뜻한다. 제발의 내용은 화가에 따라, 제발을 쓰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詩를 쓰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나 그림을 그릴 때의 기분 등을 썼다. 제발을 쓰는 주체도 화가뿐 아니라 감상자나 소장자도 가능했다. 서양화와의 차이는 여기서도 난다. 서양화는 화가가 모든 것을 다루는데, 동양화에선 감상하는 사람도 글을 쓰는 경우가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런 제발을 쓰는 전통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저자에 의하면 원나라 이후다. 북송시기만 해도 사인과 날짜는 눈에 보일 듯 말 듯 썼다. 그러다 남송시기에 여백이 등장하면서 제발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문인화태동과 관련, 여백의 미도 강조됐다.

“북송시절 범관의 <계산행려도>를 보면 화폭 전체가 꽉 차 있어서 글을 쓸 수가 없다. 원나라로 오면서 여백이 본격 등장하는데, 원나라 말의 오진이 그린 <동정어은도>를 보면 시가 여백에 쓰여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과 글, 화가의 고충

그렇다면, 화가는 그림만 잘 그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을 것 같다. 글에 대한 부담은 없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화가의 삼중고에 대해 말한다.

“전통 화가는 힘들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지어야 했으며, 글씨도 잘 써야 했다. 그래서 이런 말도 나왔다. “치졸한 글씨를 보이기보다 차라리 공백으로 남기는 게 낫다.” 이런 부담이 있었다. 서예 글씨체에 대해서 중국에는 이런 비유를 들기도 했다. 드리워진 이슬, 바람에 날리는 명주실, 하늘을 치는 번개, 풀숲으로 사라지는 놀란 뱀. 글씨를 이렇게 비유한 것을 보면 글씨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저자는 조선의 추사 김정희가 아꼈던 제자이자 중인 조희룡의 <묵란>을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조선 초중기,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오롯이 양반의 문화였으나 후기로 가면서 중인들도 양반을 따라 한다. 중인들도 그림을 그렸고, 조희룡은 그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광을 받은 중인이었다. <묵란>에는 난을 그린 뒤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리 집에는 난초가 잡초처럼 흔하다. 미친 듯 함부로 그려낸 것이 네 벽을 가득 채웠다.
우습게도 어린 손자가 겨울 말을 배울 나이에 벌서 붓을 거꾸로 잡고 봄바람을 그리려 한다.
텅 비어 광활한 세계, 맑은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 경지를 늙은 눈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내 못할 게 무엇인가.


“19세기에는 중인 출신의 ‘시서화 삼절’이 나오기도 했어. 양반들은 교양의 기준으로 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 세 가지가 모두 빼어난 사람을 석 삼(三) 자와 빼어날 절(絶) 자를 써서 삼절(三絶)이라고 불렀거든. 김정희의 제자였던 조희룡은 대표적인 중인 출신 시서화 삼절이야.”(p.227)

김홍도 <포의풍류도>에 대한 언급이 뒤를 잇는다. 이 작품은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그렸는데, 선비처럼 살고 싶은 모습이다. 제발에는 이렇게 써있다.

흙벽에 창을 내고
여생을 벼슬에서 물러나
시나 읊조리며 살리라


“18세기 후반에 절정을 이룬 풍속화는 정조 시절에 조선의 문화가 활짝 꽃피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야. 영조가 죽고 스물다섯 살에 왕이 된 정조는 영조가 오십 년 동안 이룩한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토대로 조선 후기 최고의 문화 황금기를 이룩했어.”(p.209)

김홍도 <마상청앵도>를 보는 순간, 저자는 충격을 받았다. 즉, 고미술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였다. 제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시 짓는 선비가 술상 위에 귤 한 쌍을 올려놓았다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 실버들 물가를 오고 가더니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다가 봄 강에 고운 깁을 짜놓았구나


“<마상청앵도>를 자세히 보면 선비가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다. 버들나무 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새들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을 귤 한 쌍을 올려놓거나 베틀 북을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런 비유, 참 아름답다.”




감상자가 쓴 ‘제발’

저자는 감상자가 쓴 제발(그림 속의 글)의 예를 들었다. 화원화가였던 강희언의 대표작 <인왕산도>는 하늘을 여백으로 두지 않았다. 서양화가 들어온 영향이었다. 빈 여백을 하늘색으로 칠했다. 이 작품에 표암 강세황이 제발을 썼다. 강세황은 문인이면서 화가와 교류를 많이 했던 사람이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발이다.


우리 산천의 실제 모습을 그린 작품은 매번 지도와 비슷해서 너무 무미건조한 점이 걱정이었는데,
이 그림은 이미 충분히 사실적이면서 또한 화가의 법식을 잃지 않았다.


“이 그림은 지도처럼 세밀하게 그렸다. 산천을 그리면서 격을 잃지 않았다고 강세화이 칭찬하는 내용이다.”

허나 제발도 마냥 그림을 살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제발이 그림을 망친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원나라의 조맹부가 그린 <작화추색도>가 있다. <작화추색도>는 조맹부가 귀양을 가서 그를 도와준 친구 주밀을 위해 주씨 집안이 조상대대로 살아온 산동 제남의 교외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작화추색도>는 문인화의 출발로 본다. 조맹부는 문인화의 시조로 볼 수 있는데, 소장가들은 그런 이유로 그의 그림을 갖고 싶어 했다. 이에 건륭황제도 빠지지 않았다. 건륭황제는 <작화추색도>에 소유자이자 감상자로서 제발을 썼다.

“제발을 보면 객이 주인을 내쫓는 격이다. 조맹부가 쓴 제발은 하나인데, 건륭이 4개의 제발을 썼다. 너무 많이 쓰다 보니 그림이 가지는 여백의 맛이 완전히 사라졌다. 건륭은 제발 뿐 아니라 인장도 많이 찍었다. 그림을 버린 대표적인 경우다. 조맹부의 제발만 있으면 여백의 미를 살릴 수 있는 그림이나 소장가들의 지나친 사랑이나 과시욕 때문에 그림을 망쳤다.”

양 두 마리를 그린 조맹부 <이양도>도 마찬가지다. 제발은 많지 않은데, 인장이 엄청나게 찍혀 있다. 건륭이 여기서도 대거 인장을 박은 것이다.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초중기의 소장가는 왕과 왕족, 양반이었다. 그러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돈을 번 중인도 소장가로 나섰는데, 석농 김광국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는 영정조 시절의 어의로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했다. ‘석농김광국화첩’을 보면,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도 있을 정도였는데, 석농은 그림에 대한 예의를 갖춰서 제발이나 인장을 찍었다.

“영조와 정조 시절에 어의를 지냈던 김광국은 재산이 아주 많아서 값비싼 그림을 수집한 것으로 유명했어. 영조와 정조를 거치며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 중인들이 양반의 문화도 누리기 시작한 거야. 그 전에는 값비싼 그림을 구입해 감상하는 건 왕실이나 명문 양반 가문이 아니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스러운 문화였거든.”(p.226~227)

김광국은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하고 있다.


서양화법은 당나라도 송나라도 아닌 그 자체로 별체이다. 작은 화복에 능히 천 리의 경치를 담고
그 새김 기법 또한 신묘하고 정교하여 비교할 게 없다. 한 폭 수장하여 일격을 갖춘다.


석농김광국화첩에는 공재 윤두서의 <석공공석도>도 있는데, 석공의 노동하는 모습을 직접 관찰해서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현대갤러리에서 지금 전시회를 하고 있으며, 역시 이런 평을 쓰고 있다.


이 <석공공석도>는 공재가 그린 것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속화이다.
자못 형사를 얻었으나 관아애제 비한다면 오히려 한 수 아래라 하겠다.


“청나라 문화가 들어오면서 조선의 제발도 바뀐다. 추사 김정희 <부작란도>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김정희는 글씨나 그림, 제발도 파격이다. 동양화는 제발이 오른쪽에서 시작하는데, 김정희의 것은 왼쪽에서 시작한다.”

“한양에서 가장 먼 세상 끝의 섬, 제주도에서 홀로 귀양살이를 해야 하는 김정희의 심정이 어땠을까. 놀랍게도 김정희는 원망과 울분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다만 글씨를 쓰고 또 썼어.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괴이한 멋’이 있다는 추사체는 이처럼 유배 시절의 인내와 끊임없는 연습 끝에 탄생한 것이야. ‘내 칠십 평생 벼루 열 개가 닳아 구멍이 났고 붓 천 자루가 몽당붓이 되었다.’ 김정희가 남겼다는 말이야. 얼마나 많이 벼루에 먹을 갈고, 붓으로 글씨를 썼을지 상상이 되니?”(p.220)


Q&A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미술 공부를 하게 됐는가?

학창시절, 미술동아리를 했었다. 그런데 기자생활 하면서 그림 그리고 싶은 욕구는 안 생기더라. 그러다 직장 생활이 중반쯤 되자, 전문분야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 연수를 가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필요한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김홍도 그림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면서 전통미술을 공부하겠다며 대학원에 들어갔다. 서양화보다는 중국 미술과 한국 미술을 공부했었다.

일반적으로 그림에 대해 제목을 붙일 때 화가가 하는가, 소장자나 다른 후대 사람이 하나?

후대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 소장자가 붙이는 경우도 있고, 현대에 와서 붙이기도 한다. 김홍도의 <송하선인>도 나중에 붙은 경우다. 현대 그림에서 제목이 갖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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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한국사
손영옥 저 | 창비
이 책은 그림 한 폭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 사회문화를 풀어가면서 한국사 전반을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미술 역사서다. 저자는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한국사를 관통하는 16가지 대표 예술품을 설명하면서 작품들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까지 상세히 알려 준다. 역사는 암기 과목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청소년들은 이 책을 통해 역사가 사회와 문화, 사람 등 여러 요소들이 얽히고 설킨 한 편의 이야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술품조차 암기의 대상으로 교육받던 이들에게 미처 알지 못한 그림 보기의 매력을 알려 주어 ‘보는 즐거움’을 일깨워 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발레리나 강수진 “다만 이 자리에서는 은퇴를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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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초침이 다섯 걸음을 내딛는 시간, 5초. 또 하나의 어린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렇게 하루 1만 8천 명의 아이들이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기아대책 본부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국내외의 아이들에게 식량과 사랑을 전하고 있다. ‘꿈을 이루는 사람’ 북 콘서트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되었다.

나눔의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뜨거운 가슴을 가진 많은 이들이 흔쾌히 동행의 뜻을 밝혀왔다. 『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을 출간하고 인세 수익 전액을 빈곤지역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의 설립 기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힌 이지성 작가와 김종원 작가,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통해 꿈과 열정을 이야기한 발레리나 강수진이 참여해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이밖에도 10년 가까이 기아대책 본부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연기자 김혜은, 부활의 ‘사랑할수록’을 부른 가수 김재희, 시각 장애를 딛고 재즈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정명수도 함께했다.




톤도에는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 것

북 콘서트의 사회를 맡은 김혜은의 소개로 가수 김재희의 첫 번째 무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지성 작가와의 인연으로 이번 행사에 대해 알게 된 후 나눔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으로 함께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사랑할수록’ 과 ‘나는 행복한 사람’을 열창한 그의 무대가 끝난 뒤 작가 이지성과 김종원의 강연이 이어졌다. 두 작가는 세계 3대 빈민 도시로 꼽히는 필리핀 톤도를 함께 찾아가 그곳의 아이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희망과 나눔의 꽃을 목격하고 돌아와 『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을 공동 집필했다.

이지성 : 톤도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 필리핀의 일류 대학이나 세계 명문 대학에 장학생으로 다니는 경우도 있어요. 그 아이들이 졸업할 때 국내 대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고는 하죠. 그런데 그것들을 모두 거절하고 다시 톤도로 돌아와요. 여전히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톤도의 아이들을 섬기고 낮은 데 내려가서 꽃으로 피어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고 『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으로 쓰게 된 거죠.

이지성 작가는 톤도에서 배운 교훈을 바탕으로 인문학에 대한 강연을 이어갔다. 그것은 철학이나 미학, 역사와 같은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밑바탕 된 관심, 그것으로부터 피어나는 고민과 실천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이를 두고 ‘일상의 인문학’이라 말했다.

이지성 : 내가 환경미화원이 아니더라도 길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고, 나와 친하지 않은 친구라도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 저는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멋진 인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인문학 책들이 있지만 ‘결국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실천해 나가는 것, 저는 그게 바로 인문학의 목표지점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종원 작가는 『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안에 담긴 톤도의 모습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국내 대기업에서 최연소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억대 연봉을 받았던 그가 돈을 ‘버는 즐거움’이 아닌 가치 있게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다. 몸속에 피가 아닌 돈이 흐르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작가는, 톤도의 아이들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사랑이 흐르는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톤도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가치관 교육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과 톤도 아이들의 가치관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김종원 : 한국의 아이들이 많은 교육을 받고 있지만 정작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왜 배워야 하는지’ 가치관이 서 있지 않다는 거예요. 당연히 ‘내가 그 동안 왜 살았는지’ 알지 못하고 꿈도 없는 거죠. 톤도의 가치관 교육은 이런 거예요. 땅 바닥에 쓰레기와 돈이 떨어져있다면 쓰레기를 먼저 주워요. 지금 우리는 다 돈만 줍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돈 줍느라 너무 힘들어요’하고 힐링이 필요한 거예요. 필리핀 톤도는 다 쓰레기를 줍고 있으니까 바닥에 남은 돈을 함께 나눠 쓰면 돼요. 진정한 경쟁이란 남과 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하는 거잖아요. 톤도의 아이들을 보면서 ‘이 아이들은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꿈’이라는 단어는 ‘직업’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과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닮은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우리의 아이들처럼 톤도의 아이들도 의사가 되기를, 선생님이 되기를, 요리사가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톤도 아이들의 꿈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사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요리사가 되어 ‘톤도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바람까지가 그들의 꿈이다. 물론 한국의 아이들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한 맹세대로 기꺼이 낮은 곳으로 찾아와 베푸는 삶을 사는 이는 많지 않다. 그것이 바로 김종원 작가가 이야기하는 톤도와 우리의 가치관 교육의 차이다.




강수진, 오늘을 살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이지성 작가와 김종원 작가의 강연이 끝난 후 기아대책 본부의 박재범 본부장의 강의가 이어졌다. 그는 기아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직접 만나 촬영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현장의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신발이 없어 맨발로 걸어 다니다 질병에 걸리는 아이들, 모유 수유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되는 아이, 모유 수유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빈 젖을 물리는 에이즈에 감염된 엄마,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가족을 목격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린 아이들,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아이까지... 그들을 모두 안지 못하는 우리 가슴의 미적지근한 온도가 부끄러워지는 시간 속에서 박재범 본부장이 물었다. 과연 꿈이란 누구나 꿀 수 있는 것인가. 꿈조차 꾸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기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며 박재범 본부장은 강의를 마쳤다.

‘꿈을 이루는 사람’ 북 콘서트의 2부는 정정섭 기아대책 본부 회장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함께 나누는 삶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기꺼이 재능을 기부해 준 이들과, 주말 오후에도 불구하고 콘서트장을 찾아와 뜻을 같이해준 많은 시민들에게 전하는 마음이었다. 이어 재즈피아니스트 정명수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시각장애로 인해 꿈꾸는 것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장애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준 그는, 쇼팽의 ‘즉흥환상곡’ 연주와 함께 가수 김범수의 ‘끝 사랑’을 직접 열창하며 다시 한 번 ‘꿈꾸는 이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발레리나 강수진이 무대에 올랐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출간을 맞아 바쁜 일정 속에서 한국을 찾았다. 짧은 체류기간 중에도 ‘꿈을 이루는 사람’ 북 콘서트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온 그녀였다.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무대도 아닌 세계 5대 발레단인 슈투트가르트에서 수석 발레리나로 활동하는 그녀에게 많은 이들은 성공의 비결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피나는 노력,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흘린 땀과 눈물. 하지만 발레리나 강수진에게도 시련과 유혹이 없었을 리 없다.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뛰어넘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우리는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통해 그 비법을 들려준다.

강수진 : 저는 하루 24시간이 언제나 부족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부터 발레 연습을 하는 거죠. 매일 발전하는 저의 모습에 재미를 느꼈어요. 그 시간들이 쌓이다 보니 사랑받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되어 있었어요. 저도 사람이다 보니 지칠 때가 있죠. 연습을 하지 못할 때도 있고 하기 싫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몸이 아프거나 연습을 하기 싫을 때도, 나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단 10분이라도 연습을 했어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에요. 저에게는 ‘오늘 하루를 내가 열심히 살아 나가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 같으면서도 가장 힘들다는 것을, 저도 해봤기 때문에 알아요. 하지만 큰 꿈을 꾸고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 오늘을 살지 않으면 내일이 없어요.

발레리나 강수진은 욕심이 없었다.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욕심도, 오늘 하루 동안 많은 동작을 완성시키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하루에 한 동작씩,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만이 있었을 뿐이다. 토끼처럼 살지 않고 거북이처럼 살아서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매일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그녀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

‘꿈을 이루는 사람’ 북 콘서트의 마지막 순서로 세 작가가 함께 나누는 대담이 시작되었다.

김혜은 : 많은 분들이 현실의 경제적인 이유로 선뜻 나눔에 동참하지 못하고 계세요. 그런데 나눔에는 돈보다 마음이 먼저인 것 같아요.

이지성 : 나누는 일은 결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철로 위에 아이가 떨어져 있고 3분 후에 열차가 들어온다면, 구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나눔도 똑같아요. 아프리카나 톤도에는 선로 위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10억 명 가까이 돼요. 그 아이들 모두를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생애 한 명의 아이를 구하고 갈 수 있다면 참 아름다운 인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눔의 가치는 나누는 사람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받는 누군가에게는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일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김혜은 : 가난을 이유로 발레를 할 수 없는 아이들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 아이들을 위해 강수진 씨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강수진 : 가끔씩 ‘베네피트 갈라’ 공연을 해요. 공연 수익금을 모아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거예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공연을 해서 수익금을 보내주는 일들이 자주 있죠.

김혜은 : 사람을 사람답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은 무엇일까요?

김종원 : 봉사 같아요. 진정한 봉사는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걸 내려놓는 것이라는 걸, 봉사를 하면서 느꼈어요. 저의 경우에는 돈을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봉사를 하게 되었고, 값진 인생을 살게 되었죠. 또 저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그러면서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강수진 : 사람마다 다르고 분야마다 다른 것 같아요. 저희 같은 경우에는 많은 관객 분들이 오셔서 짧은 공연 시간 동안 바깥세상에서 못 받는 행복을 한 번이라도 느끼고 가세요. 저희는 공연을 통해서 행복을 받고, 관객들은 저희들에게 행복을 받고 가시죠. 행복의 의미를 너무 크게 생각하면 부담돼서 행복해질 수 없는 것 같아요. 너무 크게 바라보고, 크게 목표를 세우고, 큰 도움을 줘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죠. 우리한테는 물이 작은 거지만, 그 물이 없어서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작게 생각하고 적게 줘도 그것이 항상 도움이 돼요. 욕심 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하면 서로 행복을 주고받는 거죠.
이지성 : 이 순간 여기 함께한 모두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하나의 마음으로 모인 거잖아요. 이런 마음들이 더 퍼져나갈 때 멋진 세상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혜은 : 드림 프로젝트를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드림 프로젝트가 무엇인가요?

이지성 : 세계 최빈국 마을에 우물도 파주고,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짓는 프로젝트에요. 현재 4개국에서 진행이 됐고 올해 2개국 정도에 진행이 될 것 같아요. 이지성 드림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의 이름이 학교 벽에 새겨져요.

김혜은 : 저는 기상캐스터를 그만둘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떠나자’고 생각했거든요.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강수진 씨는 어떠신가요.

강수진 :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오늘 최선 다하고, 오늘 공연을 잘 끝내고, 하루를 잘 끝내는 거예요. 언젠가는 당연히 은퇴를 하죠. 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은퇴를 하지 않는다는 게 제가 아는 한계에요. 최고에 있을 때 은퇴하고 싶은 마음은 있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대로 제 몸이 따라주는 한 계속 하고 싶어요. 늘 배운다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면 나이 드는 것이 진짜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 만큼 경험이 쌓이게 되고 노련해지니까요.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살면 후회 없이 나이가 들 수 있어요.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이 드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김혜은 : 요즘 자기계발 관련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지성 : 더 많이 나와야죠. 그런데 조금 안타까운 게 있다면 99%의 자기계발서는 ‘꿈을 이룬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그 이후의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요.
김종원 : 어떤 분야이든지 기본이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낮은 데서 피는 꽃』은 자기계발서를 읽기 전에 봐야 할 기본서인 것 같아요.


자신이 가진 부와 재능을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들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일군 것이 아니라고. ‘꿈을 이루는 사람’ 북 콘서트를 통해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왜 고통의 땅에 태어났는가. 우리는 왜 그곳이 아닌 여기에 있는가.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노력이나 선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누구라도 그곳에 혹은 이곳에 태어날 수 있고, 그들과 우리의 삶이 바뀌었을 수 있다. 그러니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지 그들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그것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쥘 수 없었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나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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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여러 사람을 좋아한다고 죄가 되나요? - 송형석 『까칠하게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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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석 원장은 대중에게 친숙한 몇 안 되는 정신과 전문의 중 한명이다. 『위험한 심리학』『위험한 관계학』두 권의 책이 많은 사랑을 받은 까닭이기도 하지만 <무한도전>의 ‘정신감정 편’에 출연해 쉽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예전 개그맨 정형돈의 캐릭터 ‘갤러리 정’과 흡사한 단발머리 비주얼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시크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그의 스타일의 영향이 컸다. 입심 좋은 개그맨들 사이에서 송형석 원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무심한 듯 척척, 족집게처럼 무한도전 멤버들의 심리상태를 짚어냈다. 그래서인지 『까칠하게 힐링』이라는 새 책의 제목은 그의 이미지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사실 『까칠하게 힐링』은 전혀 까칠하지 않은 책이다. 오히려 과도하게 친절한 이야기에 가깝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려준 적 없었던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이런 정신과 의사는 없었다. 환자나 대중이 아닌 자신에게도 청진기를 대어보고, 그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의사는 그가 처음이다. 또 한 권의 심리학 개론서와 같은 『까칠하게 힐링』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풀어내는 이유는 뭘까.




의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북 콘서트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4인조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송형석 원장이 활동하고 있는, 4명의 의사들로 구성된 밴드 ‘ASIDE’였다. ‘노래하는 의사 송형석’ 이것만으로는 그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만화도 그린다. 2010년부터 지난 2년 동안 순정만화 잡지 <윙크>를 통해 ‘Dr.MAD’라는 제목의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은 음악가로 성공하는 거예요(웃음). 진짜로 제 아이덴티티는 음악가 쪽이 더 커요. 음악을 잘 하고 싶고 그쪽이 훨씬 더 재밌는데, 이상하게 기회가 많이 안 와요. 그래서 음악가로서는 아직도 많이 미진하고요, 만화가는 조금 꿈꾸다 말았던 건데 이번에 책으로 내게 돼서 그 꿈은 끝났죠(웃음). 가끔씩 제가 그린 만화 캐릭터가 제 영혼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까칠하게 힐링』은 사람들의 성격과 대인관계, 정신질환과 같은 주제에 따라 송형석 원장의 설명과 그가 연재했던 ‘Dr.MAD’의 내용을 싣고 있다.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 것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영혼이 반영되었다는 만화를 함께 엮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화가 아니더라도 그는 자신을 내보여 주었을 것이다. ‘정신과의사는 환자의 거울이 되어야 할 뿐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프로이트의 지론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결심을 한 까닭이 궁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실제로 그의 동료는 『까칠하게 힐링』을 읽고 난 후 ‘정신과의사가 자신에 대해서 오픈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라는 감상평을 남겼다고 한다.

“이번 책에서 제 이야기를 조금 드러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들한테 ‘이렇게 해서 치료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하다 보니까 자꾸 오해가 생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가를 알아야 되는데 그런 사전 정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말을 굉장히 편협한 소리로 들을 때도 있고, 가끔은 성경 말씀처럼 너무 존중해서 들으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렇다 보니까 내가 어릴 때 어떤 삶을 살았고,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이야기할 필요도 있다고 느꼈어요. 매일 환자들과 부모와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으면서 제 부모님 얘기를 드러낼 수 없다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그 정도의 이야기는 누구나 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신과의사들이 워낙 그걸 기피하다 보니까, 다른 의사들이 보기에는 제가 유독 튀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죠.”




동시에 여러 사람을 좋아한다고 죄가 되나요?

아마도 여타의 의사들과 송형석 원장의 차이점은 환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자는 치료 대상이고 의사는 그의 거울이라는 일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송형석 원장은 환자가 의사를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치료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의사와 환자가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정신 상태에 대해 진단하는 ‘상호 정신 분석’의 방식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정신과의사만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송형석 원장은 ‘나한테 치료받을 돈이 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여행을 가고, 나한테 치료받으러 올 시간이면 그 시간에 여행을 떠나라’고 쿨하게 말한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쉽게 답을 드리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사람이 뭔가를 다음 수준으로 깊이 있게 가져가려고 하면, 사실 자기 내면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될까요. 여행을 가게 되면 마음속에 고독이 생겨나면서 자기한테 묻는 질문들이 올라오게 돼요. 거기에 대해서 혼잣말하는 것처럼 계속 주고받다 보면 굉장히 진지한 이야기도 스스로에게 하게 되고요. 그게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건 아니지만 한 달 정도 여행을 하고 오면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송형석 작가의 강연이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독자들은 ‘향긋한 북살롱’ 시작에 앞서 준비된 종이에 각자의 질문을 적어, 자신들이 안고 있는 심리적 고민에 대한 솔직한 조언을 구했다.


정신과전문의는 처음 만난 사람의 정신적 문제도 짚어낼 수 있나요?

정신분열증이나 조울증, 인격 장애, 우울증을 심각하게 앓고 계신 분들은 보면 알 수 있어요. 특유의 얼굴 표정들이 있거든요. 굉장히 친숙한 표정인데 상대방 마음을 잘 읽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면,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신 분이 아닐까 생각하죠. 알 수 있는 이유는 포커 칠 때의 상황과 비슷해요. 상대방이 겁을 내면 그게 읽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반응을 하거든요. 그것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다보면 자기 내면을 감추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보이고 싶어 하는지 파악할 수 있어요. 정신과의사들이 환자에게 물어보는 질문지는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왜 똑같은 질문을 하냐하면 사람마다 평균 반응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의사들은 환자가 그 평균 반응에서 벗어나는 부분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거예요. 그렇게 질문하는 시간을 5~10분 정도만 가지면 중요한 포인트들을 잡아낼 수 있죠.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 네 사람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소녀시대를 보면서 한 사람만 좋아하게 되던가요?(웃음) 상대방에게 끌린다는 마음 자체는 사실 사랑의 일부일 뿐이잖아요. 저는 사랑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확 끌린다는 것에 대해서 환상이 별로 없어요. 그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 역동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족들과의 관계가 얽혀서 생기는 갈증이기 때문에,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달려들면 나중에 힘들어지기도 하죠. 사랑에는 상대방에게 끌리는 감정도 있어야겠지만, 자신이 상대방을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하겠다는 의무감과 자기 계획이 없으면 결국 완성이 되지 않아요. 저는 사랑이라는 게 감정의 개념이 아니라 내가 죽을 때까지 이뤄나가야 되는 긴 일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 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건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와 결혼할 수 있다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죠.

어렸을 때부터 남의 손을 만지는 버릇이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끊을 수가 없는데, 어떤 심리상태 때문일까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애정결핍이 있다는 쪽으로 생각해 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죠(웃음). 사실 저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킨십 자체가 너무 없잖아요. 초등학교 1~2학년 이후로는 스킨십을 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사실 이건 굉장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원숭이는 사실 스킨십을 통해서 안정감을 찾는 동물이거든요. 원숭이나 인간이나 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스킨십을 성적인 의미로만 몰아가죠. 저는 그게 불만이에요. 스킨십의 과정과 섹스를 너무 붙여서 생각하잖아요. 사실 많은 부분 프로이트의 영향이기도 하죠. 무의식적 역동이 다 성(性이)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많이 퍼져 있잖아요. 그렇게 스킨십을 금기시하다 보니까 오히려 유일하게 남은 스킨십은 성적인 것 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저는 서양 사람들이 손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문화를 빨리 들여와야 될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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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하게 힐링송형석 저 | 서울문화사
현대인들의 불안심리가 확대되는 만큼 이 문제를 다루는 심리학 관련서들 역시 우후죽순으로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지나치게 딱딱한 심리학 이론에서 접근한 어정쩡한 이론서이거나, 반대로 너무 가볍게 다이제스트한 심리 테스트 수준의 책들이 상당수이다. 이에 방송으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전작으로 심리학서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는 저자의 유쾌한 시선을 바탕으로, 실제 상담사례집을 보는 듯한 생생한 내용과 만화를 접목시킨 방식의 색다른 심리학서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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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스마트폰을 때려 부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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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태어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탄생과 죽음은 한 쌍이다. 그럼에도 둘은 동등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탄생에 대한 찬사와 관심은 넘쳐나도, 죽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되레 나쁘거나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것처럼 취급받는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죽음은 탄생과 동등하게 다뤄져야 한다. 기실 죽음은 머나먼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루하루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며, 내일은 죽음과 하루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관통한다.

하나 지금-여기, 약한 사람들에게만 가혹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는 고약하다. 이 사회가 지닌 악취가 유독 노동자나 약한 사람에게만 침투한다. 이 사회가 연결돼 있지 않고 분리나 배제를 작동의 원리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이 말을 꺼내야할 이유는 분명하다. “오직 연결하라(Only connect)!” 20세기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E.M.포스터의 《하워즈 엔드》에 나온 유명한 경구(警句). 한 회사에 일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 24명이 죽어가도, 이 사회는 무덤덤하다. 아니, 정치적 리더들은 무기력하거나 일부러 눈을 감는다. 죽음에 대해 공론화 하지 않는 무책임이다. ‘시민 보기를 아픈 사람 대하듯이 하라’는 시민여상(視民如傷)이 정치인의 덕목이건만,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


죽음은 어떤 모습, 어떤 경험으로 다가왔는가?

(강신주, 이하 신)죽음은 1, 2, 3인칭이 있다. 나의 죽음이 1인칭이고, 문제는 2인칭이다. 2인칭, 즉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3인칭이다. 2인칭이 죽으면 자살하기도 한다. 이 책은 ‘너’를 다루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 때문에 죽음이 힘들다.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2인칭적 죽음의 강도가 중요하다. 그게 피드백 돼서 내가 죽으면 주변이 힘들 거라는 고통으로 파생된다. 죽음이 힘든 건, 사랑이 지워지는 느낌 때문이다. 옆에 손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자살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죽을 때 우리는 아프다. 사랑하지 않는 대상이 죽을 때 무관심하다. 죽음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영원한 이별의 고통이다. 극단적인 얘기지만 보험에 드는 인간이 나의 죽음을 숙고한다. 문제는 ‘당신’의 죽음이다. 그 사람이 내 손을 놓고 떠나는 사태, 내가 떠날 때 손을 놓을 것인가의 문제, 이것을 더 숙고했다면 이 책은 우릴 더 울릴 것이다. 노숙자는 무관심 속에 버려진 사람이다. 사회가 그런 조건을 만드니까 아프다. 자살은 인간에겐 사회적으로 타살이다. 너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을 죽고 떠나는 나를 숙고했으면 좋겠다.

(윤영호, 이하 영)내 경우, 죽음에 대한 고민은 중학교 때였다. 20대의 누나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나가 떠났다는 사실도 나중에 들었다. 의사생활하면서 지켜본 죽음은 실재의 문제였다. 죽음 이후 유족들이 만나는 상처를 어떻게 풀 것인지, 제도적인 측면에서 국가에서 말기암 환자에게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나름대로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심보선, 이하 보)중요한 건 ‘너’의 죽음이다. 3인칭도 때론 너의 죽음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 것 같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아는 사람의 죽음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거기서 이상한 인칭이 생긴다. 1.5인칭? (웃음) 나는 죽음을 굉장히 자주 생각한다. 망원동에서 태어났는데, 수해를 3번 겪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죽는다. 홍수가 났을 때, 온갖 것이 뒤섞인 물을 잘 모를 것이다. 어릴 때 놀이터가 한강이었다. 그땐 모래사장이거나 잡초들이 우거졌는데, 한강에 시체가 떠내려 오면 거죽으로 덮는다. 나는 시체는 못 보지만 삐져나온 발을 본다. 익사한 시체의 발은 묘하다. 그런 이미지에서 죽음을 많이 접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내 죽음까지 다다랐다. 밤마다 가위눌리고 울면서 깨어나고. 어머니가 한의원에 데리고 갔는데,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했다. 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묻는데, 죽는 게 무서워요, 죽음이란 뭘까요, 이럴 순 없잖나(웃음). 끙끙 앓다가 내가 다니던 기독교계열 중학교에서 예배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구원이라는 게 있구나 싶어서 교회를 나갔다. 교회에 나간 첫날, 예배드리다가 뒤에 앉은 사람에게 뭔가 물었는데, 날 때리더라. 선배에게 반말한다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첫발을 디딘 순간, 폭력사태가 일어난 거지(웃음). 이후 반전이 있다. 얼마 후 그 선배가 한강에서 아이를 구하다가 죽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고민했었다. 부조리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계시처럼. 그때 내게 죽음은 판단중지의 영역이었다. 물론, 내게도 너의 죽음이 많다.

존엄사, 안락사 등 직업적 고뇌도 있을 것 같은데, 존엄사와 완화치료에 대해 말해 달라.

(영)말기암 환자를 많이 만났다. 환자가 그 사실을 모르고 적극적인 치료를 안 해주냐고 하거나 가족들도 최선을 다해달라고 한다. 그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의학적으로 1초라도 연장하는 게 최선인가. 그렇게 되면 연명치료를 하게 된다. 인공호흡을 하고 중환자실에 가는 거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죽는데, 가족에게 한 마디도 못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죽음을 맞닥뜨리는 거지. 미국에선 60~70년대 연명치료가 의미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법제화까지 된 상태다. 우리나라는 효도문화가 있어서 죽음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자신과 가족 모두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의사와 가족이 다 결정하고 환자는 받아들일 뿐이다. 의사결정과정에 배제된다. 연명치료보다 삶을 잘 마무리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호스피스 제도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호스피스에 가면 죽으러 가는 걸로 생각해서 중환자실로 가는 쪽이 많다. 오래전부터 존엄사에 대한 주장을 했지만, 아직 요원한 상태다. 환자를 케어해주는 것이 가족을 위한 복지다. 그런 것을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부탁한다.

(신)영미철학은 이익계산이 상당히 빠르다. 서양의 논리나 추론은 우리 정서엔 안 맞다. 삶의 대부분은 논리로 되지 않는다. 인생의 대부분은 모순 덩어리다. 영미철학은 너무 논리만 중요시해서 하나만 다룬다. 죽음도 논리적으로 접근 안 된다. 이 책의 시작에 카프카의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를 인용했는데, 개소리다. 보험회사만 좋아할 말이다. (웃음) 나의 죽음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옆 사람의 고통과 죽음이 안 들어온다. 너의 죽음을 왜 자꾸 강조하느냐면 거기에 죽음의 온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만 숙고하는 순간, 자기 관념에 빠진다. 잡념을 갖지 말고,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나? 악취를 풍기는 사람도 있다. 죽는다고 모든 게 소중한 것은 아니다. 독재자가 죽으면, 나는 ‘왜 이렇게 늦게 죽었지?’라고 생각한다. 삶이 아름답고 사랑받은 사람의 죽음만이 안타깝다. 꽃 지는 거, 개 죽는 거, 아이 아파하는 거 봐라.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랑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 내가 감당해야 한다. 사랑하면 그래서 서로 경쟁하면서 오래 살려고 한다. 너의 죽음을 숙고하고, 카프카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진 마라. 진짜 소중한 삶을 살았고, 사람을 사랑했고, 사랑받은 사람이 질 때 아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는가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삶을 꽃피워야 예쁘고 안타깝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시간을 놓친다는 것이다. 나 죽는 것만 안타까워하면 안 된다. 모든 죽음을 동등하게 보지 말자. 나의 죽음을 숙고하다보니 에피쿠로스학파에 근접한다. 저자의 테마는 철학적으로 단순하다. 동양에서 두 사람만 이야기하겠다.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야기하겠느냐”고 했고, 장자는 “태어나는 것은 깨어나는 듯 태어나고, 죽을 때는 잠들 듯 죽는다”고 했다. 저자는 이걸 모른다. 나의 죽음을 무서워말고 타인의 죽음을 더 고민하면 좋겠고, 서양철학에서 죽음의 대가는 하이데거다. 죽음에 대해 예리하게 설명한다. 죽음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숙고지점을 볼 수 있다. 서양논의는 그렇게 보충이 된다. 동양은 유학이나 불교, 장자 등을 보면 죽음을 숙고하는 게 많다. 동양에서는 대체로 죽음은 별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최근 몇 해 동안 한국에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단어가 횡행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왜 이토록 쉽게 죽고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보)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자살률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최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24명이 자살 혹은 사망에 이르렀다. 대한문 앞에서 해고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고, 평택의 송전탑에서도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운동권의 투쟁으로 보는 분들도 많은데, 생각해보라. 한 공장의 동료 24명이 죽었다. 해고의 명분이 기업회생을 위한 정리해고였는데, 그것이 회계조작으로 인한 기획파산이었다. 부당한 이유로 3000여 명의 사람들이 해고됐고, 그 결과 24명이 죽었다. 이런 자살률은 유래가 없다. 단순히 해고 문제만은 아니다. 그때 경찰이 77일 동안 농성중인 노동자를 토끼몰이 하듯 진압한 장면을 보면, 몸이 부르르 떨린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압했고, 그게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돼서 자살에 이른 경우도 있다. 지금 노동자들에게 국가, 자본이 유래 없는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윤과 성장의 이름으로. 그 희생의 강요가 부당하고 정의롭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사회적 타살’은 사회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건데, 나는 그 언어는 아닌 것 같다. 너무 멀게 느껴진다. 사회분위기, 막연한 실체가 사람을 자살로 내몰았다고 비판할 때 적절할진 몰라도, 사회가 나와 연결돼 있다는 상상을 하는데 사회적 타살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 더 깊이 들어가면 거기에는 IMF이후 한국사회의 변화, 기업구조의 변화, 가족의 변화, 생활의 변화, 관계의 변화가 있다. 그 변화는 파괴적이다. 사람을 분리시키고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나에게 남은 것이 없다는 고립감이 강화되고 있다. 개인의 마음의 어두운 풍경이다. 헌데 어두운 풍경을 보고 직시해야 한다. 나와 네가 연결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죽음에 골몰하다보니 사회와 삶과 인간관계가 바뀌면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태, 그로 인한 마음의 어두운 풍경이 포착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가 우리와 연결돼 있다는 말씀인데, 죽음은 나쁜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신)조화와 꽃의 비유를 하겠다. 조화는 지지 않는다. 죽음, 나쁘지 않다. 열심히 산 사람에게 죽음은 안심으로 다가온다. 탐욕스럽게,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산 사람만이 죽음을 연장하고 싶어 한다. 가난하고 힘들게, 타인을 위해 살 때만 죽음은 안식이 된다. 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IMF 이후 우리는 탐욕스럽게 길들여져서 자기 보험만 든다. 안식의 의미를 잃었다. 의사는 땡큐지. 검사하고 또 검사하고. 산에 갔다 오면 나는 곯아떨어지는데, 죽음의 느낌이 그랬으면 좋겠다. 삶을 어깨에 무겁게 메고 살다보면 눈 감을 때 편해진다. 주변에서도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한다. 이젠 그만 쉬세요, 이 말을 들어야 한다. 여전히 해답은 삶에 있다. 남루하게 살면 죽음은 무섭게 다가온다. 인간답게 살지 못해 생명연장을 꿈꾸고 탐욕으로 변한다. 벚꽃이 계속 피어 있으면 힘들 거 같지 않나. 떨어질 때 떨어져야지. 삶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나의 죽음에 너무 집중하지 않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건강해야 한다.

(영)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다.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원하지 않아도 떠날 수가 있다. 그게 인간이다. 내가 만약 먼저 떠난다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뭘 해줄까 고민하는 게 인간이다. 며칠 내 떠나게 된다면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 뭘까. 첫째가 가족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다. 그 다음이 경제적 책임감이고, 나 없이도 남은 이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쥐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렇게 보면 실존적인 고민도 있다.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가족, 경제, 사랑하는 사람, 삶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웃을 사랑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보)이 책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면,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비존재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고, 비존재라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비존재는 내가 소유할 수가 없다. 내가 그것을 움켜쥘 수가 없다. 하이데거는 자살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위대한 승리라고 했다. 나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데, 죽음이 나에게 오기 전에 죽음에게 가겠다는 거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장 숭고하게 발현되는 것이 자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다른 철학자는 죽음은 내가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도 늘 누군가를 떠올린다. 자살할 때 유서를 쓰는 것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후배가 유서를 분석한 『자살, 차악의 선택』을 썼는데, 이 책에 쓰인 어떤 노인의 자살을 잊을 수가 없다. 노인은 유서에서 가족이야기를 계속 한다.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을 지금 손자에게 알리지 말고, 기말고사 끝나고 알리라고 한다.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까지 손자의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마음은 뭘까. 이 마음은 죽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관계 속에,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죽음은 슬프지만,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의 동물과 다른 점은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내 죽음뿐 아닌 타인의 죽음,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고, 그런 능력이 유지돼야 한다.

자살은 나쁜 것일까. 우리는 자살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신)사람은 자존감이 붕괴될 때 자살한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 모두 책임이 있다.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사랑하는 게 있고,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안 죽는다. 외로운 사람은 개나 화초, 혹은 수석을 키워도 된다. 사람은 하소연할 곳이 없을 때, 가장 가벼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등에 업고 해운대 백사장을 거니는 무게감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뭐든 상관없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있을까, 그렇게 물으면 죽음에 대한 핵심에 이를 수 있다. 사랑과 관심이야말로 인간을 애드벌룬처럼 뜨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랑은 공중에 뜨지 않을 만큼의 무게감을 준다. 자살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픈 게, 나도 부끄럽다. 댓글이라도 한 마디 달았으면. 같이 사는데, 우리는 무한 책임을 갖는다. 나와 너, 관계의 복원이 필요하다. 자살을 문제 삼을 때는, 이렇게 되물어라.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누가 나를 사랑하는가. 영화를 좋아하면 영화를 봐야 하니까 안 죽는다. 사랑의 밀도에서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찾아야 한다. 자살이라는 단어에 빠지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게 있는가, 충분한 노력을 했는가, 그렇게 되묻고 찾아야 한다.

(영)공리주의 목적,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 못한다.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고 본다. 자살 유혹을 가장 느끼는 때가 암 진단을 받고 일주일이다. 그 기간을 넘기면 충동이 떨어진다.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두려움이 닥치는데,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해결책이 있음을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자살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에게 공감해주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공동체적인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살문제를 함께 풀어가려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보)한국사회의 자살은 많은 경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최선의 선택처럼 말한다. 그럼에도 그 순간,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최종적으로 죽는 게 낫다고 떨어지는 순간에도,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인간이다. 문제는 그런 죽음이 늘어나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감옥이기도 하다. 살고 싶은 마음은 옆에 누가 있으면 절로 나온다. 자살은 도와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이 책에 의하면, 공리주의에 의해 총량을 계산한다. 행복은 쾌락 빼기 고통이라고 한다. 플러스가 나오면 행복이고, 마이너스면 불행이다. 불행의 총량이 한국에서는 명백하게 크다. 불행한 사람이 넘친다. 그러면 행복의 총량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물론 정책 중요하다. 경제적 보상을 해주면 자살률이 낮아질 거라고 오해한다. 감옥에서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음을 알면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관계망의 회복, 공동체의 회복,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지금, 여기저기 농성촌이 많다. 이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경찰의 진압이 아니고, 잊히는 것이다. 혼자 있다는 고립감이 무서운 거다. 그 뒤, 좋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Q&A

선과 악의 경계는 무엇인가?

(신)자본주의에 의해 현재가 희생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피폐화시키고, 순간의 행복을 앗는다. 자본주의는 지금을 희생하자고 말한다. 미래의 행복을 약속한다고.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미래에 행복할 수 없다. 미래에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구조가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구조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선과 악은 없고, 좋음과 나쁨만 있다.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은 목숨 걸고 지키고, 나쁜 것은 버려라. 죽음에서 근본적으로 해방되는 것은 현재의 꽃핌이다.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확장해라. 좋은 선생, 좋은 관계가 아니면 나와라. 선악 관념이 아닌 좋은 관계인지, 나쁜 관계인지 판단을 내려라. 삶을 충만하게 보내는 방법은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다. 선악은 외부에서 붙여진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리스트를 작성해보라. 좋음과 나쁨. 좋음의 관계가 많을수록 좋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 좋은 것은 지혜보다 용기일 수 있다.

용산, 쌍용차, 해답은 돈이 아닌가 싶은데, 심보선의 해답은 무엇인가.

(보)부를 통한 것은 해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닌 관계다. 불행의 총량이 많은 공간에서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을 때, 살 의지를 충분히 발현하고 살아낸다. <쇼생크 탈출>을 보자. 주인공 직업이 은행원인데, 감옥에서 수용소장의 행복을 보장해준다. 회계장부를 조작해서 경제적 소득을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지? 그런데 정작 주인공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동료다. 명장면이 있는데, 감옥에서 <피가로의 결혼>이 흘러나온다. 피해볼 것을 감수하고, 방송실에 들어가 모차르트의 아리아를 감옥 동료들에게 방송한다. 그게 주인공의 행복이었고, 피수감자들의 행복이었다. 지금 우리 삶이 감옥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끔찍한 삶의 환경이다. 행복의 총량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어떻게 행복할 것이냐. 연결돼라. 내가 할 말은 이 말밖이다. 글과 詩를 읽어주고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작은 출발이라고 본다.

사회적 연대에 대한 말씀, 한편으로 공허하다. 사회적 죽음은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대를 만들 수 있을까. 죽음 이후 타자에 의해 추도되고 싶은가?

(신)스마트폰을 때려 부숴야 한다. 세계와 연결돼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둘이서 만나도 둘 모두 스마트폰을 한다. 앞사람과 소통하지 않는다. 반드시 발로 걷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 직접 자기 눈으로 봐야 한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니까. 온 감각이 총동원돼야 한다. 그래야 리얼리티가 생긴다. 매체가 발달할수록 우리는 세계와 단절된다. 직접 가보고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만나야 다음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른 사람이 날 기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한다.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생을 만들지 마라. 잠시 여행지처럼 머물렀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면 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사유를 해야 한다. 나는 글을 쓰다가 죽으면 좋겠다.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들뢰즈의 자살을 이해한다. 그는 아프다가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돼서 투신해서 죽었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영)의학적인 측면과 인문학적인 측면 두 가지다. 세포는 분화돼 커져서 기능을 유지하다가 다시 분화되다가 새로 생긴 세포가 커지면서 자리를 내주면 전 세포는 소멸한다. 그래야 생명이 유지된다. 세포가 죽지 않는 게 암이다. 정상적인 세포의 탄생과 소멸의 과정이 우리 생명을 유지한다. 죽은 세포는 없어진 것일까. 아니다.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나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 나는 내 시체를 내가 공부한 해부실에 기증하기로 했다. 의학지식을 그곳에서 받아 의사가 됐고, 세상을 떠나도 내 삶의 의미를 넘겨주고 싶다. 그렇게 생명은 연속될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보)죽음은 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압도될 것인가. 아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늘 구체적으로 느끼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그것이 詩를 쓰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다. 살 때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내 삶에는 죽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이 있고, 관계가 있다. 詩와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한테만 해당되는 사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무엇을 나눌 것이냐. 먹을거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관계 속에서 나도 바뀌고, 어떤 부분이 죽는다. 타인이 죽을 때, 마음의 세포가 잘려 나간다. 개인의 이야기를 사회로 확장할 수도 있다. 죽음이 늘 이 사회에 있고, 고통이 있다. 그걸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지금은 느끼지 못하는 쪽으로 사회가 작동하고 있다. 나는 웃으면서 죽고 싶다. 그 미소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마지막 표정으로 남겨졌으면 좋겠다. 나중에 죽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웃으며 죽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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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 저/박세연 역 | 엘도라도
이 책은 셸리 케이건 교수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철학 정규강좌 ‘DEATH’를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DEATH’는 하버드대 ‘정의’및 ‘행복’과 함께 ‘아이비리그 3대 명강’으로 불리는 강의이며,17년 연속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로 꼽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던 심리적 믿음과 종교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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