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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균 “스타트업, 사업놀음이 아닌 본질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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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7일, 서울 역삼동 D캠프는 후끈 달아올랐다.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창업보육기관)인 프라이머의 대표이자 『권도균의 스타트업 경영 수업』 저자인 권도균의 강연이 펼쳐진 덕분이었다.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시작했거나 하고자 하는 사람, 스타트업 지원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 등이 권도균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저자는 이날 무엇보다 ‘특정한 고객의 특정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스타트업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강조했다.

 

 

스타트업, 문제는 경영

 

권도균은 에릭 리스의『린 스타트업』을 꺼내면서 스타트업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어떤 제품을 만들지 알아내기 위한 도구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창업의 성공은 영웅적인 결단이나 창의적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루한 프로세스를 따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스타트업 경영은 대기업 경영과는 다르다는 것. 『권도균의 스타트업 경영 수업』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린스타트업을 소개하기 위해 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창업은 좋은 머리나 재능을 타고나거나 운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업은 사람과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정해진 틀을 벗어나고자 시도하고 이뤄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기회이다.”(23쪽)

 

스타트업은 특정한 고객의 특정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하는데 초점을 둬야 한다. 권도균은 이에 확실한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는 회사생활을 하라고 권했다. 직장은 확실한 창업 사관학교이며, 스타트업에게는 아이템이 무엇보다 먼저여야 한다는 것. 그는 미국의 대표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인 와이 콤비네이터의 샘 올트먼의 말을 인용했다.

 

 “아이디어가 먼저 오고 스타트업은 그 뒤이어야 합니다. 꼭 탐구하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다음에 스타트업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대박인 아이디어가 있다고? 그건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권도균은 단정했다. 그가 말하는 아이디어는 특정한 고객의 특정한 문제점과 연결된 것이어야 한다. 그저 생각만으로 한껏 부풀려진 장밋빛 제품 아이디어는 그저 관념 속에만 머물 뿐이다.

 

“고객이 누구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고객이 아닌 것은 말해줄 수 있다. 가령 2030 미혼/기혼 여성, 중국인의 1%, 스마트폰 사용자 10%, 전자상거래 시장 등 상상 속, 관념 속의 그룹은 고객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특정한 고객의 특정한 문제점과 연결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면 살아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고객으로 삼아야 한다.”

 

그는 이어 고객이 누구인지 묻기보다 ‘우리의 고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품을 만든다고 고객이 뚝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고객은 이미 다른 곳에서 욕망을 채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하는 창업자들은 ‘우리의 고객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하지 말고 ‘우리의 고객은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자사 제품이 제공하는 가치와 유사한 것을 제공하는 제품은 이미 많다. 춘향이 이 도령을 기다리듯이, 잠재 고객은 자사 제품의 등장을 정절을 지키며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그들은 필요와 욕구를 어디에선가 해소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서 그 욕망을 해소하는지 알아야 한다.”(102쪽)

 

사업은 쉽다. 권도균은 이렇게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거기에 배를 띄우면 된다고 묘사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특정한 고객의 특정한 문제점이다. 물 흐름은 고객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사이의 이동인데, 고객의 가치는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 흥미와 재미
- 있으면 좋은 것
- 없으면 안 되는 것
- 고통스러운 것

 

“많은 스타트업이 재미있으면 고객이 재미있으면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재미의 주기가 매우 짧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계속 흥미와 재미를 만들어야 한다. 흥미와 재미를 주된 가치로 삼는 산업군이 연예산업과 영화산업이다. 애매한 건 ‘있으면 좋은 것’이다. 이걸는 스타트업을 하는 것은 약하다. 없으면 안 되는 것, 고객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스타트업이 비즈니스모델이 없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전했다. 
1. 포괄적 시장과 트렌드를 이야기한다.
2. 언저리에 집중한다.
3. 문제에 대한 지적을 해결책으로 혼동한다.
4. 빤한 첨단기술을 앞세운다.
5. ‘영원한 인류의 문제’들과 씨름한다.(가난, 사랑과 미움, 공동체 회복, 게으름 등)
6. ‘천상의 제품, 천상의 말’을 한다. : 쉽고 편하며 모든 기능이 다 되면서 싸다, 개인의 취향과 바람을 알아서 맞춰준다, 재미있으면서도 공부가 잘 되는, etc

 

“특정한 고객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업의 본질이라고 반복해서 얘기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컴퓨터와 네트워크로 플랫폼을 만들면 사람들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거나 기계적 알고리즘으로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맞추고 서비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플랫폼이라는 개념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특정한 고객은 현실 감각이다.”

 

그는 플랫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거나 없애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많은 스타트업이 플랫폼을 성공이라는 단어와 동일어로 쓰나, 실은 앞뒤가 바뀌었다. 모든 제품, 모든 서비스는 성공하면 저절로 플랫폼이 된다는 것. 페이스북, 구글이 그랬으며 하드웨어 제품도 성공하면 플랫폼이 된다. 그는 플랫폼을 ‘숲’에 비유하며 이를 만드는 첫 과정은 삽을 들고 땅을 파서 첫 나무를 심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 나무에 물과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떨어져 나무가 자라고 숲이 되는 것.

 

그는 스타트업이 플랫폼이라는 용어를 쓰면 플랫폼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치의 창출은 컴퓨터나 플랫폼이 아닌 사람(창업자)이 하는 것임을 명심하는 동시에 사람의 행동의 이유와 불평을 벌레 잡듯이 하나둘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때 빠지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다. 좋은 글이란 쉽고 짧고 간단하고 재미있는 글이다. 멋 내려고 묘한 형용사를 찾아 넣지 마라. 사업을 발표할 때도 형용사를 제거해라. 형용사는 사업가들에게 언어의 마약이다. 사업계획서는 형용사로 묘사하지 말고 무엇을 할 것인지 동사로 말해야 한다. 가령, ‘가치 있는’이라는 형용사를 보자. 어떤 사람에게는 가격이 싼 게 가치가 있을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가격이 비싸도 기능이 많고 고급스러운 것이 가치 있을 수 있다. 가격을 싸게 만들 것인지, 비싸도 고급스럽게 만들 것인지는 그 가치가 다르다. 효과적인, 창의적인 등의 단어도 마찬가지다.”

 

권도균은 마지막으로 “사업놀음과 사업은 다르다”며 사업 준비 과정을 사업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언급했다. 준비는 준비일 뿐이며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 준비 활동은 필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에 집착하면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 본질을 잘하기 위해 도입한 수단이 일차적 목표가 되고 본질이 이차적 목표가 되는 순간 배는 산으로 올라간다. 즉 기술 지상주의, 홍보 지상주의 등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가 만났던 어떤 창업가들은 사업에 집중하라 조언했지만 사업을 위한 주변 활동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 고객을 만나기보다 홍보에 더 집중하는 것, 이런 것이 그가 말하는 사업놀음이다.

 

그는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의 사례를 꺼냈다. 많은 이들이 베조스에게 ‘10년 후 어떻게 바뀔 것 같냐’고 묻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베조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무도 ‘10년 후에는 바뀌지 않을 게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안 하더군요. 제 생각엔 이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사업 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이죠.”
 
“최근 성공적인 스타트업이 나오고 있다. 사업을 할 때 본질에 집중한다는 말이, 첫째는 원래 하려던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본질은 고객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사업놀음에 빠지지 않는다면 가능하다. 요즘 스타트업의 성공 요인은 기술, 모바일, 창의성, 펀딩, 도전, 열정이 아니다. 고객 만족을 돌려주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다. 사업은 고객 만족에서 성공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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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스타트업의 사업계획서를 볼 때 가장 핵심적으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사업계획서 내에 ‘특정한 문제점을 가진 특정한 고객이 존재하는가’ 있는지를 본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가능한지도 살핀다. 그리고 창업자의 백그라운드를 관심 있게 본다. 그것을 보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만한 경력이나 경험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중소기업 지원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부채 없이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이상적인데, 기업이 성장하면서 부채를 지게 되는 것도 불가피한 것 같다. 방법이 있을까?

 

회사가 성장하는 단계마다 다른데, 부채를 지면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부채를 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본다. 비즈니스모델이 명확하지 않은 서칭 단계의 스타트업은 빨리 사업을 접고 직원들은 다른 회사에 취직할 것을 권하고 싶다. 돈이 떨어졌는데도 서칭 작업을 계속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고 빚을 내서 도박하는 것과 같다. 초기 스타트업 단계에서는 부채에 대해 그런 관점을 가져야겠다. 그러나 만약 매출이 조금씩 돌고 있으며 용역 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데, 계약이 끝나면 검수를 받고 잔금을 받기로 돼 있다면 다르다.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급여는 줘야하지 않나. 일정 기간 뒤 돈이 들어오기로 돼 있는데 지금 돈이 없으면 ‘캐시플로우 미스매치’가 생긴다. 돈은 들어오기로 돼 있는데 현재 돈이 없을 때는 빚도 괜찮다고 본다. 부채를 져서라도 지금 중단하기에는 아깝고 더 하고 싶을 때는 빚을 내라고 한다. 물론 임계치를 정해야겠지. 빚의 임계치를 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스타트업 초기 조직을 어떻게 하면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정말 잘 맞지 않는 사람끼리는 같이 하지 마라. 스타트업은 빨라야 하고 일사불란하며 일관돼야 한다. 잘 맞지 않는 사람과 하느니 나 홀로 창업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 에어비앤비는 첫 직원을 뽑는데 6개월이 걸렸다. 첫 번째 직원이 조직 문화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뽑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한다. 문화와 철학이 일치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 정도 사람을 뽑기 전에는 공동 창업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팀이 꾸려졌다면, 결혼 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웃음). 첫째는 서로 많이 양보해야 한다. 둘째 그럼에도 의사결정은 명확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이율배반적이나 의사결정을 할 때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좋다. 회사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은 하지 마라. 고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도록 해야 하지,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은 좋지 않다.

 

프라이머는 성공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가지고 있나?

 

성공이라는 단어는 회사가 크거나 돈을 많이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것을 성공이라고 정의한다. 펀딩 한 번도 받지 않고 가치를 만드는 곳이 있다.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작더라도 지속가능한 것을 성공이라고 본다. 프라이머는 그런 곳에 투자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우리 돈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렇다. 다른 벤처캐피탈은 다르다. 대개의 벤처캐피탈은 리턴이 큰 회사, 이른바 ‘유니콘’을 찾는다. 하나를 대박치면 다른 곳들에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해도 괜찮다. 벤처캐피탈은 도박성 투자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창업가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스타트업이 큰 금액의 투자를 받았다는 뉴스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것에 대해 철학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과 비교하면 사업이 도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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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균의 스타트업 경영 수업 권도균 저 | 로고폴리스
책은 실패하지 않는 창업으로 가는 법, 성과를 만드는 법, 스타트업의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법, 차별화된 스타트업 마케팅 전략뿐만 아니라 협력자(직원)을 구하는 법,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 생존이 최우선 과제인 스타트업 위기관리 등을 소개한다. 끝으로 저자는 사장의 윤리는 회사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사업의 본질에 다가설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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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흐르는 여름밤, 안주철 김중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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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와 예스24가 매달 두 명의 시인과 함께 하는 ‘詩詩한 시인들의 詩詩한 이야기’ 행사, 8월의 詩詩한 시인은 김중일 시인과 안주철 시인이었다. 8월 12일 이리카페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송종원 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송종원 평론가는 등장과 함께 곧바로 안주철 시인의 시 「밤이 떨어질 때」를 낭독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물큰한 노을이
마지막 남은 하늘 한겹을 넘는
밤이 떨어질 때
새 날아간 거친 하늘 위로
늦가을 꽃이 피고
열매 맺을 시간이
다음 생일 때
밤이 떨어질 때
(『다음 생에 할 일들』수록 「밤이 떨어질 때」 일부)

 

낭독을 마친 송종원 평론가는 “시는 특별한 말을 건네는 것 같지 않은데 듣고 있으면 왠지 위로를 받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있다”고 감상을 전했다. “시는 설명을 넘어서는 어떤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신비한 느낌”이라고 덧붙이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어 자리한 김중일 시인과 안주철 시인은 더운 날씨에 찾아온 독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먼저 전했고, 송종원 평론가는 이들에게 행사 장소로 오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평범한 순간을 느끼는 시인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안주철 시인이 먼저 “이곳에 처음 와봤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어둠’이었습니다. ‘밝다’라는 말과 ‘어둠’이란 말이 어울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밝은 어둠 같은 것을 느꼈어요.”라고 대답했다. 김중일 시인은 “퇴근하고 급히 오느라 ‘늦을 수도 있겠다’, ‘덥다’, ‘행사에 온다고 새 운동화를 신었는데 다소 촌스러운 게 아닌가’(웃음) 하는 소소한 생각들을 했습니다.”라고 말해 분위기를 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시집에 대한 詩詩한 이야기들


등단 10년 만에 첫 시집을 낸 안주철 시인에게 시집을 내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물었다. 10년이란 시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을 법했다. 이에 시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마음만은 신인의 느낌이 듭니다. 첫 시집은 첫 시집일 뿐이기 때문에요. 다만 거울 앞에 서서 보면 흰 머리카락도 많고, 수염도 하얘서 좀 멋쩍습니다. 시집이 늦게 나오긴 했지만 시 외에도 시원(始原)을 갈고 닦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뒤늦게 나온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첫 느낌을 마지막까지 사수할 수 있는가, 이것이 시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김중일 시인은 이번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이 세 번째 시집이다. 어느 덧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감상은 어떤 것일까? 세상에 내놓은 시집이 쌓여갈 때마다 드는 느낌은 좀 다를 것 같았다.

 

“세 권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어색하고요. 세 번째 시집은 제가 서두르려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저는 항상 모든 게 단순한데요. 서두른 이유는 30대가 가기 전에 한 권 더 내고 싶다(웃음)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욕심으로 두 번째 시집을 낸 후 3년 동안 쓴 시들을 거의 빼지 않고 다 실은 것 같아요. 첫 번째 시집을 지금 펼쳐보면 그 시집이 담고 있는 감성 같은 것들이 제 20대 초반, 중반의 감성, 지금은 많이 잊고 있는 감성이 담겨 있어서 좋고요. 두 번째 시집은 30대 중반까지 지냈던 또 다른 제 자아가 담겨 있어서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보는 듯해요. 세 번째 시집도 몇 년 후에는 그런 느낌을 제게 선사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시집의 제목과 표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주철 시인의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표지는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이다. 인사를 전하면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전할 때 사용한 단어 ‘밝은 어둠’이라는 말이 그대로 어울리는 표지였다. 시인은 이런 시집의 겉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시집 제목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그걸 전체 타이틀로 넣은 이유는 제 시 대부분이 조금 비극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이것들을 역설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제목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얼마나 역할을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먼저 제목에 대해 이야기를 전했다. 한편 표지에 대해서는 “처음 골랐던 디자인은 이게 아니었고요(웃음). 만일 처음 골랐던 이미지를 표지로 삼았다면 세간의 많은 비웃음을 샀을 것 같습니다. 멋지게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미지는 사막인데요. 사막을 보며 처음엔 예쁘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제목과 붙여 놓으니 느낌이 달랐어요. 사막이라는 공간에 해가 기울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죠. 사막에서 그늘과 햇빛이라는 것은 사실 크게 다른 공간이 아니거든요. 시집 제목과 이미지가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김중일 시인의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의 제목에 관해서 시인은 제목이 결정되기까지의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솔직하게 전해주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제목은 ‘불면이라는 농담’이었어요. 여러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포기하게 됐고요. 그래서 ‘내가 살다갈 사람’이라고 지으려고 했죠. ‘시인의 말’을 상당히 미리 써놨거든요. 거기 이 말이 나옵니다. ‘살다갈’ 사람이라고 하니까 출판사에서 ‘살아갈’ 사람이라고 하자고 했어요. 거의 차이가 없다고요. 저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죠.(웃음) ‘살다갈’은 살다가 죽음 쪽으로 넘어간다는 뜻인데, ‘살아갈’은 너무 미래에만 국한된 느낌이라서 작지만 큰 차이가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 결국 제가 졌습니다.”표지에 대해서는 운이 좋게 적절한 사진이 결정되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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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 담긴 시인들의 시 세계


김중일 시인의 시에는 뜨거운 연애의 감정이 군데군데 있다. 송종원 평론가는 “개인적 판단에 국내 연애시들이 사랑을 다룰 때조차 사랑을 깨달음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쉬움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김중일 시인의 연애시는 망가져가는 사랑의 모습이 있어서 좋았다.”고 평했다.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1부를 구성한 연애시들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1부의 시만 따로 떼어 말씀드리는 것은 다소 한계가 있는데요. 1부의 주제는 사랑, 상실이라는 주제로 볼 수 있고요. 연시(戀詩)의 형태긴 하지만 개인 연애사를 다룬 시는 아닙니다. 고백하자면 두 편 정도는 있습니다.(웃음) 대부분의 시는 그렇지 않고요. 3부까지 감정이 이어져요. 타자와의 교류, 만남, 이별, 여러 가지 감정들이 1부라면, 그 다음 단계로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고, 모든 세상의 가족들이 모이면 공동체라는 거대한 사회가 형성되는데요. 그렇게 1부, 2부, 3부 순으로 외연이 확장되는 식입니다. 제 비밀을 가감 없이 털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혹시 실망을 드렸다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웃음)”


안주철 시인의 시를 읽으면 분위기가 무척 삭막하게 느껴진다. 읽으면서 우울한 감정에 전염되고 힘들기도 하다. 송종원 평론가는 시인에게 이런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시인의 삶, 시인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제 시에 다분히 삭막하고, 적막한 기운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이런 분위기나 배경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트라우마와 관련 있었던 것 같아요. 열여덟 살까지 살았던 작은 마을은 대부분 양계장을 하며 생업을 이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장애인이 많았고요. 저희 부모님도 장애를 가지고 계시고요. 어렸기 때문에 살던 당시에는 그곳이 제게는 가장 완벽한 세계였지만 스무 살이 넘고, 다른 세계를 접하면서 그동안 살았던 이곳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그곳이 꼭 불행했다, 가난했다는 단어로 뭉뚱그려 말하고 싶진 않은데요. 사람은 다 자신만의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조건이 저의 문학, 시를 써나가는 방향에서 기반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제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요. 정체성의 문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극적인 세계를 드러내서 그걸 인정하는 작업을 통해 제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발전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어 시인의 육성으로 시를 들었다. 먼저 안주철 시인이 「살아남은 사람」을 낭독했다.

 

마을에 마지막 남은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나는 풀들이 야금야금 씹어 삼킨 마당 구석에서
석유를 듬뿍 먹인 쥐 꼬리에 불을 붙였다.
저편에 돼지껍데기를 물고 가는 개떼가 보였다.
나는 사내의 살점을 한점 한점
이 세상에서 받아보지 못한 공손한 손끝으로 뜯어내며
소문보다 빠르게 사라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생에 할 일들』수록 「살아남은 사람」 일부)

 

김중일 시인은 안주철 시인의 낭독을 들은 후 “개인적으로 「봄밤입니다」 같은 시들을 굉장히 감격적으로 읽었습니다. 안주철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상에 밀착되어 있으면서 언어가 투명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소소한 일상, 가족사 등을 다룬 시를 보면 다소간 과한 물기 같은 것들을 머금은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안주철 시인의 시는 그런 부분에 대한 균형이 시종일관 유지가 되다보니 여운이 멀리까지 오래가지 않나 생각합니다.”라며 감상을 전했다.


안주철 시인은 낭독한 자신의 시 「살아남은 사람」에 대해 “이 시의 화자는 어찌 보면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화자입니다. 그만큼 엉뚱한 세계를 말함으로써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실험하고 싶었고요. 저의 역사를 직접 드러내게 되면 견디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연출해서 시로 갇히게 했습니다. 청년이 되어 마을을 떠날 때의 느낌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일어난 일들을 바로 수락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시와 비슷한 시로 「혀로 지은 집」이 있는데요. 거기서도 화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의 혀를 잘라서 집을 만드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것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념적으로 들릴 수 있는 시를 물질화하거나 이미지로 변형하는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라며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중일 시인은 뒤이어 「평생」을 낭독했다.

 

해변에 떨어진 초록 샌들을 주워와 네게 주었다. 너는 내가 건넨 호박을 잘게 잘라 넣고 찌개를 끓였다. 곧 식탁 위에는 검은 물웅덩이 하나가 올라왔다. 웅덩이로 떨어진 빗방울들이 치어떼처럼 들끓었다. 나는 소매로 깨끗하게 웅덩이를 훔쳐 네게 주었다. 너는 내가 훔쳐다 준 챙이 큰 모자를 늘 쓰고 다녔다. 나는 너의 뺨에 자꾸 달라붙으려는 나비를 쫓았다. 안돼요 안돼. 너는 나비를 잡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너의 귀에 달려 있던 귀한 귀걸이었다.
(『내가 살아갈 사람』수록 「평생」 일부)

 

안주철 시인이 김중일 시인의 낭독을 듣고 “김중일 시인의 시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행과 연이 갈라져야 할 것 같은데 고집이 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의 텍스트 안에 많은 이미지들이 들어있지만 한꺼번에 읽지 말고 나눠서 읽으라는 전언으로 들리는데요. 그만큼 김중일 시인의 시에는 한편 한편에 수많은 이미지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걸 한 번에 읽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고요. 슬쩍 읽고 떠오를 때마다 그 시를 찾아 읽어야 하는 시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더 집중해서 읽을 때 완성도가 서서히 떠오르는 시편들이라 생각합니다.”라고 의견을 전했다.


김중일 시인은 자신의 시가 읽기 어렵다는 여러 의견에 대해“그래도 세 번째 시집에서는 좀 투명하게 쓰려고 노력을 했는데 여전히 그렇게 느껴지나 봅니다. 일단 시 한편의 양이 좀 깁니다. 이미지가 촘촘하다 보니 그 속으로 진입하는 데 낯설기도 하고 그래서 쉽지 않을 수 있는데요.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있어요. 타인을 처음 만나 목소리를 들으면 익숙하지 않지만 계속 들으면 기억 속에 가장 오래 남는 게 목소리라고 합니다. 비슷하게 제가 쓰는 시는 제 목소리기도 하기 때문에 염치없지만 그 목소리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몇 차례 읽으시면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며 여러 번 읽어주기를 당부했다.

 

송종원 평론가는 “너무 좋았다. 두 분을 데리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싶을 정도다.(웃음) 두 분의 색깔이 다르지만 다른 색의 말들이 시심을 건드려주는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삶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것도 아니지만 삶의 여유로움 같은 것도 느끼게 해줘서 참 좋았다.”고 말하며 이날 행사에서 받은 강한 느낌을 공유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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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저 | 창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농담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세상”을 향해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로 얼룩진 모순투성이의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는 치열한 의식이 담긴 시편들이 공감을 자아내는 한편, “잊지 말 것은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마음속으로 먼저 간 사람들이 빌려갈 수 있는 유일한 책”을 “나를 먼저 살다 간 사람”과 “내가 살아 갈 사람”에게 전하겠다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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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저 | 창비
시인은 등단 당시 “미래의 작품에 기대가 컸다”는 믿음에 부응하듯, 활력이 넘치는 언어와 감각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진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치며 오랜 시간의 깊이와 무게가 가슴에 선뜻 와닿는 묵직한 시편들을 선보인다. 일상의 사물에서 감정의 깊이를 짚어내는 비상한 시선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황폐한 삶의 풍경 속에서 “‘운명’과 ‘운명을 바라보는 눈’이 시의 자기장 안에서 깊게 빛”나는 시편들이 “읽는 이의 눈에 머물지 않고 가슴에 낮게 스며들”(장석남, 추천사)며 뭉클한 감동과 공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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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재 감독, 누구에게나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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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죽음을 통해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목숨>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호스피스 병동의 1년을 기록하며 여든 분 정도의 임종을 지켜본 이창재 감독은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에서 화면에 담기지 않았던 순간들을 들려준다. <목숨>이 그러했던 것처럼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에서도 그는 죽음의 언어로 삶의 의미를 전했다.

 

지난 19일 오후,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이루어진 독자들과 이창재 감독의 만남은 특별했다.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에 담긴 메시지는 <목숨>을 타고 전해졌고,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극장 안에는 눈물과 슬픔을 삼키는 소리들이 가득 찼다. 나와 당신과 우리 가족의 모습일지 모르는 평범한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죽음을 그리고 있었다.

 

화면 속의 그녀처럼, 이제 고생은 모두 끝났고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죽음은 불쑥 모습을 드러낼까. 살아있는 것이 더없는 고통으로 느껴질 때 ‘이제 그만 내 숨을 거두어 가 달라고’ 그녀처럼 신 앞에 간청하게 될까. 18년을 함께한 아내를 두고 떠나야 하는 그와 같이,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게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가 그러했듯, 삶의 끝자락을 움켜쥐려 안간힘을 쓸 수도 있을 터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는 동안 <목숨>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를 생의 저편으로 인도했던 한 사람, 이창재 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는 정목 스님이었다. 추천사를 통해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은 “죽음을 봄으로써 삶을 사랑하게 하는 귀하고 값진 책”이라고 이야기했던 정목 스님은, 이 날 독자들을 대신해 이창재 감독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정목 스님 :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의 제목에는 어떤 의미를 담아놓으셨나요?


이창재 감독 :삶을 잘 살기 위해서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인 죽음을 한 번 직시해 보자는 의미도 있고요. 제가 호스피스에서 봤던 많은 분들이 마지막에서야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워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삶의 마지막 단계에 왔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 부분들을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면, 훨씬 더 가치를 지향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보다 앞서 이곳을 떠나신 분들의 바람들 혹은 그 분들이 마지막 순간에 원했던 무언가를 정리해 보자는 생각도 했고요. 그 분들이 우리한테 남겨주시는 이야기는 ‘우리처럼 마지막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봐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정목 스님 : <목숨>을 찍기 전에는 선방에서 공부하시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을 담아서 <길 위에서>를 만드셨잖아요. 이전에는 신과 인간의 사이를 이어주는 무당의 삶을 <사이에서>에 담으셨고요. 대중적이지 않은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선택하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이창재 감독 : 마치 저세상은 밤과 같고 현세는 낮과 같이 느껴지곤 하는데요. 그런 온실 같은 우주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연극하는 무대와 같은 이곳의 빛이 거두어지면 실제 본질을 볼 수 있는데, 그게 저의 관심사였던 거죠. <목숨>을 만들면서 ‘누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러 오겠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과연 마지막이 정말 마지막인지’ 묻고 싶기도 했거든요. ‘누구나 예외 없이 마지막을 맞이하는데 그렇다면 삶을 사는 이유는 뭘까’ ‘마지막의 뒤에는 어떤 피안이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해야 중심을 가지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때그때의 파도를 따라서 흔들리면서 살지 않을까요.


정목 스님 : 불가에서는 삶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해골을 앞에 놓고 무덤 위에서 관찰 수행을 하기도 하죠. 그건 삶이라는 게 허망하고 아무 볼일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우리가 행복하다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헛것이라는 이야기죠. 지금 만져지고 보여지는 것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지만,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나 위태롭잖아요. 확정되어지지 않은 것을 붙들고 진실인 걸로 알면서 한 생애를 살다 보니까,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는 거예요. 진실을 보지 못하니까 삶이 왜곡되고, 관계가 잘못되고, 삶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 바깥의 다른 세상을 추구하게 되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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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정목 스님 : <목숨>을 촬영하는 동안 여든 분 정도의 임종을 지켜보셨는데요.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해요.


이창재 감독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한테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호스피스에 오신 분들 중에 20대 청년도 있었고 여든에 가까운 어르신도 계셨는데요. 다들 이야기하는 게, 죽음이 갑작스럽다는 거예요. 모두에게 죽음은 갑작스럽게 오더라고요. 그러니까 현재 시간의 밀도를 훨씬 더 높여야 될 것 같아요.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가족들이 새롭게 탄생하기도 하는데요. 죽음을 수용하신 분들조차 자신 옆에 가족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무너져요. 죽음이라는 건 개인의 문제인데 이별이란 건 관계의 문제잖아요. 만약 우리가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거라면, 지금 훨씬 더 사랑해야 될 것 같아요.

 

정목 스님 :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안에서 “우리는 살아온 대로 죽어간다. 기적 같은 마무리는 머릿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자기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어간다”고 이야기하셨어요.


이창재 감독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임종과 실제 겪으실 임종은 다르리라고 봐요. 내가 호스피스에서 본 임종도 달랐거든요. 단 한 분도 유언을 하신 적이 없었어요. 임종 직전이 되면 순환기 쪽에 마비가 오면서 머리에 충분한 산소 공급이 안 되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현재 우리가 묶여있는 여러 욕망들과 인연의 타래들을 풀지 못하면, 마지막까지 풀지 못한 문제로 남는 거죠. 기적처럼 갑자기 선해지거나 지혜로워지거나 사랑을 베풀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내려놓고, 손을 잡고, 사랑 고백을 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목 스님 : 책에서도 말씀하셨지만, 미국이나 유럽에는 호스피스 병동이 많은 데 비해서 우리나라는 숫자도 적고 사람들의 인식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직접 임종을 목격하신 입장에서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이창재 감독 :모든 사람이 호스피스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깨어있는 채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진통제나 수면제에 취해있는 채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가치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살아있는 동안에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야 보낼 수 있고 떠날 수 있어요. 정목 스님께서도 책에서 “내일은 준비할 수 없지만 내세는 준비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내세를 준비한다는 건 마음가짐일 거예요. 흐트러진 마음으로 갑작스러운 충격처럼 마지막을 맞을 수도 있지만, 하루하루 완결된 마음을 가진다면 내세가 조금 더 멋지게 준비된다고 생각해요. 훨씬 덜 후회스럽기도 할 거고요.

 

이창재 감독은 정목 스님과의 대담을 마치며 ‘육신이라는 차를 운전 중인 영혼이라는 운전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다 계기판에 연로게이지 경고가 뜨거나 고장신호가 점멸하기 시작하면 속도를 줄여 천천히 갓길에 정차를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러지 않고 액셀을 더 밟는다면 차는 물론 운전자도 위험해지는 건 당연합니다. 한데 우리는 시속 100km로 액셀을 밟다가 마치 급정지하듯 죽음을 맞이합니다. 만약 차가 육체고 운전자가 영혼이나 마음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차도 운전자도 동승자도 다 함께 위험해지는 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때가 되면 액셀에서 밟을 떼듯 삶의 속도도 줄이며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중에서)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에 실린 글 속에서 정목 스님은 이야기했다. “언제든지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자 가장 큰 공부입니다” 죽음에서 배우는 삶의 목적과 방향, 그것이야말로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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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이창재 저 | 수오서재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말기 암환자의 말처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이야기. 통증 조절과 죽음의 단계, 호스피스 정보에서부터 이별을 준비하는 자세,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낌없이 내어준 이들이 전하는 삶의 비밀, 전 세계에서 항암제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이자 호스피스 이용률 최하위에 달하는 우리나라 실태 분석에 이르기까지. 삶의 질과 삶의 의미를 사색하게 만드는 기적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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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치로 “지금을 즐기는 것이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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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줄에 접어든 어느 날 심근경색이 찾아왔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수술을 통해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삶은 이전과 달라졌다. 심근경색은 그의 삶에 큰 사건이 됐다. 그리고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건이 또 다시 그를 흔들었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닥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연관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생로병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재배치됐다. 아들러 심리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질병, 노화, 죽음, 생에 대한 글을 써내려갔다.

 

“죽을지도 모르는 큰 병을 앓은 개인적 경험 그리고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사회적 경험이 내 사고방식(생사관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21쪽)

 

그렇게 탄생한 책이 『늙어갈 용기』. 기시미 이치로가 아픔ㆍ늙음ㆍ죽음ㆍ잘삶에 대한 알프레드 아들러의 사상을 자신의 삶과 죽음 속에서 녹여낸 교양심리서다. 저자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다룬다.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를 것이지만 그전까지 잘 살아야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 타자, 아픔, 늙음,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저자는 죽음으로 자신을 완성할 것을 권한다. 

 

그런 기시미 이치로가 한국을 찾았다. 지난 8월 22일, 서울 숭실대에서 『늙어갈 용기』출간 기념으로 특별 강연을 열었다. 『미움 받을 용기』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강연장을 찾았다. 마침 남한과 북한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할 때여서 일본에서 올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고 용기를 내서 왔다는 농담(?)까지 섞으며 독자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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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날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기시미 이치로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주변의 누군가가 죽었을 때 우리가 비통해하면서 슬퍼하기만 한다면 죽은 사람이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기뻐할까?

 

“주변의 누군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힘들겠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남겨진 사람은 앞을 향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내보겠다. 오늘 누군가를 만나서 춤을 췄다고 해보자. 그때 그 춤은 어떤 목적을 향해 추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고 춤을 추는 사람은 어떤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용기가 필요한 것인데 만약 너무 일찍 죽는 사람, 특히 젊어서 죽는 것은 정말 안 된 것이지만 그 사람이 열심히 살았다면 그것은 그렇게 슬픈 것은 아니다.”

 

기시미는 아들러가 제자에게 말한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이솝우화에 나온 이야기라고 했으나 기시미가 찾아봤더니 이솝우화에 나오진 않은 이야기. 두 개구리가 다리에서 함께 놀고 있다가 한 개구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남은 개구리는 비관주의자였다면 떨어진 나머지 개구리에 대해 포기를 하나 그렇지 않고 남은 개구리가 낙관주의자라면 떨어진 개구리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는 것. 그래서 낙관주의자 개구리는 뭔가 움직이면서 떨어진 개구리가 다시 올라올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기시미는 나치에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하고 학대받았던 유대인들의 경우도 빗댔다. 이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이 낙관주의라고 생각했다.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도 그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도 있었다. 반면 끝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정신이상을 보이거나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만약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게임에 지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다시 도전하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병, 죽음 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 것들에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용기를 갖고 늙음이나 병, 죽음에 직면한다면 인생은 달라지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이다. 내가 무엇인가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라. 어떤 행위로서가 아닌 존재만으로도 세상에 공헌할 수 있음을 명심해 달라.”

 

기시미는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면 내 자신이 달라지면 된다고 강조했다.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을 권했다. 아침에 일어나 역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도 좋다고 했다. 이런 인사를 건네는 것도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것.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인사라고 한다면 그렇게 인사를 건넸을 때 다른 사람들도 높은 비율이 답을 해준다는 것. 그렇게 됐을 때 인사를 건넨 사람은 다시 다른 어떤 일을 도모하면서 세상에 공헌을 할 수 있게 된다.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자기를 갱신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건 컴퓨터 시스템을 바꾸는 것과 같다. 타자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컴퓨터의 하드는 달라지지 않지만 소프트웨어는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작은 계기로 지금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 오늘, 타자에 대한 시선을 바꿔 타자와 세상을 다르게 생각하고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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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전라북도에서 올라왔다. 『늙어갈 용기』에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 ‘누구’보다 ‘무엇’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공감을 하면서도 의문이 든다. 좀 더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아들러 심리학은 대화할 때 기본적으로 말과 그 말을 하는 사람은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3쪽)

 

직장을 놓고 말하자면, 상사가 불합리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로 부하 직원을 혼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누가 혼냈다는 것보다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 맞지 않는다면 상사에게 반박하고 저항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부하가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다면 부하에게도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불합리한 것을 받아들인다. 책임을 상사에게 전가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 상사가 불합리한 것으로 화를 낸다면 그 내용에 대해 지적하고 반발해야 한다.

 

상사가 불합리한 이유로 화를 내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이라는 틀 안에서 자기가 우수하지 않다는 생각에 화를 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말하자면 정도가 아닌 주변적인 것에서 그러는 것인데, 부하를 혼냄으로써 우월감 등을 느끼는 거지. 만약 부하가 용감하게 대들었다면 싸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부하가 진다면 상사는 우월감을 가질 것이다. 그런 상사는 일적인 면에서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그런 무능한 상사와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상사가 어떤 상사인지가 중요하기보다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불합리한 것으로 혼을 낸다면 또 시작이구나, 또 떠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라. 정말 훌륭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은 그 대단함을 대놓고 노출하지 않는다. 무능한 상사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삶을 불필요하게 소모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는 사람과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말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화에서는 어디까지나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 하며, 그것만이 디아렉티케(대화법, 철학적 문답법)의 정신이다.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누가” 이야기하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굳이 구별해야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런 점에 입각해서 “누구”와 “무엇”의 중점을 “누구”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건 “누구”를 중시함으로써 생기는 폐해나 문제점이 크기 때문이다.“(72쪽)

 

두 아이 엄마인데,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를 내기도 한다. 화를 내면 아이에게 사과하지만 내 자신에게 실망을 한다. 책에서 알고 있으면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알고 있는 게 아닌 걸까? 진짜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는 것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혼낸다는 게 유효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아이는 바로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칠 것이다. 혼내서 금방 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그게 반복이 된다면 잠시는 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 지속적으로 유효하지는 않다. 혼내는 것이 유효한 방법이 아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혼내는 것이 아닌 유효한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아이의 행동을 개선시키려면 혼내는 것보다 언어로 부탁하는 것이 낫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의문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주지 않겠니? 그렇게 부탁을 받았을 때 아이가 아니야, 혹은 싫다고 할 수도 있음도 명심해라. 다음으로는 가정문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무엇을 해준다면 기쁠 거야. 명령이 아닌 부탁이다. 그때 아이가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면 아이가 들어줄 확률이 높아진다.

 

아이가 장난감, 과자 등을 사달라며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쓴다든지 할 때가 있다.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심하게 울기도 한다. 아이가 감정적으로 되는 것은 부모가 감정적이 돼서 아이를 혼내는 것과 같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좋다. 나는 유치원 때 그렇게 떼를 썼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울지 않아도 좋으니 말로 내게 부탁을 해주겠니? 그랬더니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하더라. 저 과자를 제게 사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은데요. 부모는 아이가 요구하는 내용보다는 방법이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불완전하더라도 말로 부탁하는 것을 시험해보면 좋겠다. 아이가 바로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부모도 혼내거나 화내는 횟수도 줄고 아이도 변화할 수 있다.

 

“자식을 야단치는 부모는 누구라도 언제든 자식을 학대할 수 있다. 야단치는 것의 폐해는 사회 문제와도 연결된다. 야단맞는 게 무서워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아이는 커서 사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실패나 부정을 은닉한다.(중략)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말로 부탁하면 된다. 만일 아이가 자신의 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걸 모른다면 굳이 야단을 치지 않고 그냥 말로 설명하면 된다. 대화할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83~84쪽)

 

회사를 다니다가 정년퇴직한 상태에 대해 묻고 싶다. 회사생활을 할 때를 작은 공동체라고 묘사하고 정년퇴직 후에는 좀 더 큰 공동체, 나라나 국가 등에 헌신하면서 늙어감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책에서 말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고 못한 것에 대해 피드백이 오는데, 더 큰 공동체에 대해 공헌을 해도 잘했는지 못했는지 피드백을 받을 순 없는 것 같다. 그럴 경우, 주관적인 오해나 독선에 빠질 수도 있다고 본다. 더 큰 공동체에 대해 공헌했을 때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회사에서는 피드백이 바로 온다. 그것은 하나의 인정욕구다. 인류, 국가 등의 공동체에 대해 공헌을 하면 바로 확인할 순 없겠으나 회사를 다닐 때와 같은 인정욕구는 생기지 않는다. 가정과 같은 아주 작은 사회에서도 자신이 한 것에 대해 평가를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가족이 식사를 한 뒤, 대부분 주부가 설거지를 한다. 그때 가족의 다른 구성원은 TV를 보거나 자신의 일을 한다. 설거지를 하는 주부는 나 혼자 설거지를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반면 설거지를 하는 것도 가족을 위한 하나의 공헌이고, 그 공헌하는 자신은 가족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대인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왜 다른 가족이 하지 않지, 라고 생각해보라. 가족에게 공헌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가족이 설거지를 하는 주부에게 고맙다고 말해준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겠지. 공헌도는 자기만족도가 중요한데 타인에 의한 인정이나 평가에 의존한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한 남자가 자기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라며 이런 결심을 했다. 아침마다 집 앞을 지나가는 차를 향해 인사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흔들어주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나중에는 기분이 좋아졌다고 하더라. 심지어 출근길을 바꾼 사람도 생겼다. 이 남자의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큰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 기사를 본 한 정신과 의사가 이를 책에 실었고, 그 책을 내가 읽고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한 작은 행동이 지금 여러분에게 전달된 셈이다. 한 사람의 힘은 의외로 크다. 자기의 능력이나 힘이 어디까지 전달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사람이 고맙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이 세계 어딘가에 전달될 수 있는 힘은 있다고 생각한다.

 

대인 관계에서 인정받으려는 용기를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한국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라고 주변에서는 차, 결혼 등 미래에 대한 기준을 주입한다. 나는 내 페이스를 지키고 싶으나 주변에서 나를 패배자 취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스트레스를 주는 사회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해야만 하는,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것. 그 중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사는 게 가장 낫겠지. 사람은 해야만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물론 인간에게 적정한 스트레스는 필요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의 차이가 스트레스의 크기가 될 수도 있겠다. 이 크기를 스스로 극복하는 건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 와중에 하고 싶은 목표가 정말 정당하고 좋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차, 결혼, 집, 재산 등이 정말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검증하고 물어야 한다. 자신이 병에 걸렸을 때도 그런 것들이 가치가 있을까. 몸을 가눌 수 없게 됐을 때 하고 싶은 것이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혹시 모든 것을 잃는 경험을 하면 정말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본 아이들도 게임기를 무척 갖고 싶어 하는데 왜 갖고 싶은지 물으면 다 갖고 있으니까, 라고 대답한다. 그런 말을 하는 아이에겐 게임기를 사서 주면 안 된다. 한국 젊은이들도 게임기를 갖고 싶은 아이들과 같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고 하고 있어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계속 고민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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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갈 용기기시미 이치로 저/노만수 역 | 에쎄 | 원제 : よく生きるということ
이 책은 아픔, 늙음, 죽음, 잘삶에 대한 알프레드 아들러의 사상을 기시미 이치로라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과 죽음 속에서 녹여낸 교양심리학의 결정판이다. 동시에 니체, 도스토옙스키, 에리히 프롬, 비트겐슈타인, 시몬 베유, 서머싯 몸, 마르틴 부버, 슈바이처, 칼 힐티, 스티븐 호킹, 수전 손택, 무라카미 하루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숱한 명사의 ‘오싹하도록 덧없고 눈물겹도록 살가운’ 생로병사 잠언들을 인용하며 육체의 애틋함과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지혜의 파피루스를 펼쳐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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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트라우마 알고 힐링 받는다고 인생 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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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이정현)은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저렇게 살아야 싶나, 싶을 정도로 열심이고 성실하다. 밤낮도 없고, 오로지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악착같이 산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사는 사람이 잘 살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게 살아도 나와 내 가족의 작은 행복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어렵다. 글러먹은 세상이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법이 없으니까.

 

수남은 가장 보통의 우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안달복달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산다. 그런데도 늘 불안에 시달린다. 제대로 하는 것일까. 이게 최선이고 정상일까. 내가 못나서 그런 것 아닐까. 도리도리, 아니라며 우리는 정상 범주에서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하지현 교수(정신과 전문의). 그는 ‘그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평범한 불행이다. 당신은 정상이다’라고 건네준다. 그리고 ‘생활 기스 상담소’를 열어서 비정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많은 정상인들을 만나 시시비비를 가려줬다.

 

그는 가장 무서운 말이 “최선을 다했는가?”라고 했다. 일상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이 말. 그는 이 말이 진짜 잔인하다고 했다. 우리는 평범에 대한 강박이 있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예능이나 개그 프로에서나 가능한 이 말을 우리는 다큐처럼 듣고 산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수남의 사례에서도 본다. 그것은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착취의 굴레다.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살다가 이쯤하면 되겠지 싶을 때마다 평균치는 점점 더 올라간다. 발걸음을 다시 빨라져야 하고, 지친 나는 사회 구조를 탓하기보다 내가 부족한 탓이라며 다시 나를 다그친다. 혹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며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기 일쑤다.

 

하 교수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심야치유식당’ 시리즈인 『심야치유식당』『사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다』를 내고 이어서 정상의 범주에 있음에도 비정상일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활 기스 상담소>를 열고 한 달에 한 번 이들의 속내를 듣고 진단하는 강연을 열었다. 그리고 이를 묶어 『그렇다면 정상입니다』를 냈다. 지난 8월 25일, 서울 논현동에서 “이런 일로 병원에서 만나지 말자”는 타이틀을 걸고 『그렇다면 정상입니다』출간 기념 특별판 ‘생활 기스 상담소’를 열었다.

 

 

당신은 충분히 정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정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정상임에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데도 평균치가 너무 높아진 탓에 만족이 안 되고 결국 ‘나는 모자라고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정상성이란 무엇일까. 그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것이다. 손가락이 10개 다 있으면 정상이고 하나라도 없으면 비정상이다. 암세포가 있는 건 없어야 할 것이 있으니 비정상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해서 슬프고 괴로워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비정상이라는 것. 염치, 죄의식, 미안함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둘째 커다란 대접 안에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의 아이큐가 90이라고 우는 부모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큐 90은 평범하고 70~130은 정상이다. 머리가 너무 좋은 영재가 이상한 것이다. 몸무게와 키도 마찬가지. 따라서 마음의 심리적인 곡선 분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내가 생각한 것이 옳다고 여기면 반대쪽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둘 다 정상이다. 내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정규분포곡선에선 정상인데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다름에 대한 판단의 문제가 이슈인 셈.

 

“어떤 사람은 나는 양말, 속옷 같은 걸 매일매일 빨아서 정리를 해야지, 그게 어디 쌓여 있는 게 너무 싫어. 있을 수 있어요. 이쪽에서는 다른 쪽을 이해하기 어렵겠죠. 하지만 둘 다 정상 범위 안에 있는 거예요.”(10쪽)

 

셋째는 삶의 궤적에서 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살면서 학교, 취직, 결혼, 육아 등 대략 몇 살 때는 뭔가 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궤적이 있다. 궤적을 따라가지 않으면 모자란 사람이거나 찜찜한 느낌이 든다. 인생의 큰 흐름도 있지만 대인관계, 일상에서도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이 궤적을 딱딱 맞추는 게 사실은 힘든 일이다. 하 교수는 아울러 SNS가 대인관계 등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페북 등을 보면 타인에겐 만날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으며 그런 부분이 내가 하는 행위를 자꾸 평가하게 하면서 못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

 

넷째는 내가 가진 상황과 상황적 요구 사이에 일치하지 않을 때 일시적 비정상성을 느낄 때가 있다. 매우 우연히 일어난 일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 자신이 못난 사람이라고 해서 들어보면 그동안 일을 잘하던 사람이었고 힘들겠다 싶은 일이 한 번 벌어졌을 뿐인데 그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 교수는 완벽에 대한 추구와 염원이 있어서 잠시 길을 벗어나면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이런 네 가지 관점에서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바라보면 시야가 훨씬 넓어진다. 정상성과 비정성상을 가르는 것은 낮과 밤의 경계를 가리는 것만큼 모호하다.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상성의 범위가 좁아지고 나에게 너무 엄격해질 수 있다. 확률 통계적으로 보면 벗어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런 부분 때문에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게 만든다. 사람마다 그릇 크기가 정해져 있다. 우리 대부분은 머그잔이고, 소수가 냉면 사발이다. 그런 소수는 존경하면 된다. 나도 그렇게 돼야지, 생각하지 마라. 정우성이 입는 옷을 입는다고 정우성이 될 순 없다. 그건 정우성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부러워할 순 있지만 억지로 정우성이 되려 해선 안 된다. 지금의 그릇, 컵에 물이 넘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 내 인생의 그림, 몸 등의 영역에서 대부분은 들어온 만큼 빼내면서 잘 살고 있다.”

 

하 교수는 컵에 물이 넘쳐 올라오는 사인을 잘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사인은 짜증. 화가 나기 전의 짜증은 저강도의 분노다. 가만있으면 짜증나지 않는다. 남이 건드리면 과잉 반응하는 것이 짜증이다. 이때가 컵이 넘치기 직전이다. 뭔가 조금만 얹으면 넘치는 아슬아슬한 순간인데, 그럴 때 누군가 나를 건드려주기 바라기도 한다. 화를 내고 폭발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는 그런 것이 조금은 있다.

 

다만 문제는 소심한 사람들. 짜증을 내고 나서 후회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런 짜증은 지극히 정상이다. 하 교수는 이럴 때 병원을 간다거나 만성두통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짜증이 난다는 것은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컵에 용량이 찼으니 멈추라는 신호라는 것.

 

각자에겐 이럴 때 응급약이 있다. 짜증이 나면 잠을 잔다든지, 운동을 하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있다. 그런 것을 하면 된다. 짜증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건 결국 어떤 강박 때문이다. 완벽하게 주어진 것을 다 잘하고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 결국 컵에 물이 넘치도록 짜증이 흘러넘치면서 사고를 친다. 그렇다고 사고 친다고 미쳤거나 비정상이냐. 아니다! 심리책을 읽으면 결론이라는 것이 뻔하다. 엄마아빠가 나를 잘못 키웠구나, 프로이트가 맞네, 인생이 이렇게 꼬인 이유는 트라우마에 있어, 그래서 힐링이 필요해!

 

하 교수는 이런 것도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모든 것을 심리의 문제로 돌리기 때문이다. 잠깐은 모든 것이 명료하게 보이나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부모만 원망하고 지나온 과거가 나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정신분석이 필요한 사람은 있으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내리지 말라고 권했다. 진짜 정신분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털어냈는데도 나아지거나 감당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나에 대해 성찰하고 이해한다고 생각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고 타이밍을 놓치거나 다른 사람을 들이받거나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꺼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고 그래도 된다. 내가 지내온 모든 것을 알아야 인생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알아서 뭐하려고. 몰라도 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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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시시콜콜 참견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엄마 때문에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는 엄마, 나는 나. 엄마는 상수다. 엄마는 안 변한다. 엄마는 참견하는 게 직업인 사람이다(웃음). 나도 바뀌기 힘든데, 남을 어떻게 바꾸나. 특히 육십이 넘은 사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마는 원래 그러려니 해라. 엄마 잔소리를 들어주는 게 효도다. 애인은 변수다. 마음에 안 들면 버리면 된다. 부모는 내가 안고 가야할 핸디캡이다. 상수로 두고 살 뿐이다. 상수와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참견하는 엄마를 어찌할 순 없다. 가끔 참견을 들어주고 알았다고 하는 게 효도다. 이럴 날도 몇 년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사람들과 갈등을 견딜 수가 없다. 친목도모는 괜찮지만 같이 일할 때 갈등은 견디기 어렵다.

 

요즘 갈등 회피형 인간이 많다. 타고난 것이다. 갈등에 낯선 것이다. 그런데 묵히다 똥 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그때 작은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연습하면 좋겠다. 평소에 싫어, 안 돼 라는 말을 연습해야 한다. 타이밍도 연습해야 한다.

 

두 달 사귄 남자와 헤어졌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정상인가?

 

두 달 동안 사이가 어땠는지 궁금하고, 사귄 것은 처음인지,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궁금한데, 일단 눈물이 나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본다. 미련은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끈이 있는 것이다. 화로 인한 눈물인지, 후회의 눈물인지 감별이 필요하다. 전자는 내 선택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왜 저런 새끼를 만났을까. 내 감식안이 화가 나는 것일 수 있다. 후회의 눈물은 다르다.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거지. 헤어지고 전화가 올지 알았는데 전화가 오지 않는다든지. 그것을 구별해보면 좋을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헤어짐은 연애 능력치가 올라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는 책보다 직접 해보는 사람에게 박수를 친다. 연애 책을 보기보다 직접 만나서 연애하고 진도도 나간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다. 또 글을 쓰면 자기 생각이 정리가 된다. 글쓰기는 중국 요리하는 것과 같다. 중국 요리도 재료는 꽤 많이 쓰이고 요리를 위해 갈고 닦아야 하나 요리는 후딱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재료를 많이 쌓아놓고 쓰는 것은 후딱 써야 한다.

 

무슨 낙으로 살아야하는 건지 궁금하다. 그냥 사는 게 맞나?

 

사는 건 원래 재미없다. 지루한 일상이 있는 게 정상이다. 매일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 막장드라마다(웃음). 내 인생이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얼마나 끔찍하겠나. 열 번 중 아홉 번이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는 농사짓듯이 산다. 내 상담 환자들도 처음에 오면 (내게) 할 말이 참 많은데, 6개월쯤 지나서 할 얘기가 없다고 할 때가 있다. 이때 나는 박수를 친다. 정말 잘 됐다고. 앞선 상담 때와 비교했을 때 할 말이 없어진 거지. 그 전엔 매일 칼을 맞았다면 이젠 그게 없는 거지. 내게 얘기할 거리가 없는 것은 되게 좋아진 것이다.

 

“매일의 일상은요, 사실은요, 재미없어요. 지루해요. 그리고 뻔해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그게 보통의 삶인 것 같아요.”(15쪽)

 

때로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 때문에 괴롭다.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자존감을 높여달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답한다. 자존감을 높이는 약은 없다! 그런 약이 있다면 나도 먹고 싶다(웃음). 일반적으로 약간은 ‘자뻑’이 정상이다. 운전자의 85~90%가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사는 게 나쁜 게 아니다. 이런 게 누가 날 뭐라고 해도 나를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작게 느껴진다는 건 뭔가 안 풀릴 때다. 그런 날이 있다. 이런 때는 약간의 허세가 필요하다. 또 작게 느껴진다지만 실제로 작아지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소중히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으레 평소에 잘하고 있다. 내가 가진 자산이 많은데, 그게 잘 안 보일 뿐이다. 대부분 내게 없는 것만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후배정도일 텐데 독특하고 재미난 실용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다. 프로이트가 원인 위주라면 아들러는 목적 위주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의 인생에 개입하려고 하지 말고 타인과의 관계를 너무 의식하지 말라고 말한다. 누가 너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미워하는 사람이 많이 생긴다. 불가피하다. 그런데 우리는 미움 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불가능하다. 미움 좀 받아도 된다. 괜찮다.

 

한두 가지 강박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했는데...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강박이 있다. 그건 안전해지기 위해서다. 강박증상이 생긴다는 것은 딴 데 걱정거리가 있어서다. 그걸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다른 곳에 강박을 둔다. 약간 강박을 가진 사람은 실제로 내가 직면해야 할 걱정거리가 있는데 그걸 무서워하거나 두려워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딴 걸 하면서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착하고 순리대로 사는 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뒤로 가는 기분도 들고 패배자가 된 기분도 든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잠깐 멈추면 된다. 역류하라고 말하진 않겠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는 것이다. 부서지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이것도 잘하는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버텨내는 것만으로 잘해나가는 것이다. 억지로 바로 잡으려는 것보다 버티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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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상입니다하지현 저 | 푸른숲
하지현 교수는 ‘생활기스’라는 개념을 삶에 대입해 ‘마음의 생활기스’에 시달리며 자신을 비정상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시시비비를 가려주기로 하고, 지난해 가을 벙커1에 〈생활기스 상담소〉를 열었다. “이런 일로 더 이상 병원에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내가 혹시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싶어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고민을 안고 몰려들었다. 하지현 교수는 한 달간 그들의 속내를 듣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네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진단을 내리고, 처방했다. 신간 《그렇다면 정상입니다》는 바로 그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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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훈현 “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스승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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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을 여는 대국, 그 대국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세계 바둑의 변방이었던 한국이 세계 바둑의 중심, 최정상에 서게 된 잉창치배 결승 대국 말이다. 주인공은 한국의 조훈현과 중국의 녜웨이핑이었다. 중국 최고의 인물이었던 녜웨이핑을 꺾은 조훈현은 귀국해 꽃다발을 목에 걸고 카퍼레이드를 하고, 은관문화훈장까지 받았다. 세계 최다승(1935승), 세계 최다 우승(160회)이라는 기록은 더욱 범상치 않다. 그 조훈현이 독자 앞에 섰다.


지난 8월 13일 정동의 한 카페는 조훈현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바둑 팬들과 독자들로 가득 찼다. 한미화 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조훈현은 털털하고 호쾌하게 자신의 삶과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최초 세계 바둑 대회 잉창치배 우승


가장 먼저 독자와 만나는 이 자리에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왔다며 상기된 마음을 감추지 않은 조훈현은 책 『고수의 생각법』의 가장 첫 장면을 장식하고 있는 1989년 잉창치배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최초로 열린 세계 바둑 대회 잉창치배의 첫 회를 우승한 조훈현에게도, 한국 바둑에도 이 의미는 남달랐다. 2승 2패, 마지막 대국에서 불리한 상황을 뛰어넘어 마침내 승리한 장면에 대해 물었다. 조훈현 국수의 바둑 인생에 이 대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바둑은 머리싸움이죠. 중국, 일본 사이에 한국은 주목받지 못하는 변방의 작은 나라였어요. 잉창치배는 국제 대회지만 지명된 선수만 나가는 식이었고요. 주로 일본 선수와 중국 선수로만 이루어졌고 한국 선수로 제가 지명되었죠. 한국 선수가 한 명이 뭐냐고 했더니 조치훈도 한국 선수가 아니냐고 해요. 거의 일본에서 지낸 선수지만 국적은 한국이니까 그렇게 한 거예요. 준결승에서 임해봉(린하이펑) 구단과 제가 만나게 됐고, 저쪽에서는 섭위평(녜웨이핑) 구단과 후지사와가 만났어요. 제가 운 좋게 이겨 올라가서 섭위평 구단과 만났죠. 결국 어쩌다가 운 좋게 이겼는데요. 그 친구가 어느 정도 인기냐면 그 나라에서 금메달리스트, 영화배우, 가수 모두 합쳐서 톱이었어요. 바둑계의 1인자, 음악계의 1인자가 아니라 전 분야의 톱.”

 

그런 거목 앞에서 한국의 청년 기사 조훈현은 놀라운 집중으로 대국을 진행한다. 2대2. 결국 조훈현이 마지막 대국을 승리로 장식한다. 그 자신뿐 아니라 전 세계가 놀란 순간이었다.

 

조바심도 초조함도, 심지어 이기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사라졌다. 바둑과 나, 단 둘만 남았다. 그 절대적인 고요의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바로 여기구나! (중략) 145번째 수를 힘차게 놓자 녜웨이핑이 고개를 떨구며 돌을 던졌다.
“이겼다!”(21쪽)

 

어떻게 그런 수를 두었느냐는 질문이 많았다. 조훈현은 웃으며 말한다.

 

“행운이 따랐어요. 꼭 저렇게 바둑을 두고 싶어서 둔 게 아니니까요. 이 바둑은 바둑계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저 바둑 한 판으로 해서 한국 바둑이 세계 1등이 된 것이 처음이었고. 한 판이 아니라 바둑 역사의 한 페이지죠.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기억이 나지만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생각을 해요. 미생에도 나오고 한국 바둑의 유명한 일화로도 나오는 이유겠죠.”

 

다름 아닌 잉창치배 결승 대국을 책의 첫 장면으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였다. 그 외에 이 장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는지 물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했던 건 아니지만요. 한국 바둑을 세계에 알려야 하고 한 번쯤은 우승을 해줘야 한다는 부담이 상당히 많았어요. 이기고 방에 들어와서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고 생각했어요. 이기는 순간에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홀가분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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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의 바둑 인생


그가 처음 바둑을 시작한 것은 4살 때였다.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원으로 간 것이 5살. 첫 돌을 놓던 순간을 기억할까?

 

“기억은 안 나고, 아버님에게 들은 얘기예요. 4살 때 할아버지가 바둑 두는 걸 곁에서 본 모양이에요.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바둑의 개념을 알고 있는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백돌 하나를 두고 이걸 잡아보라고 했더니 잡았대요. 그래서 바둑을 가르쳐주셨어요. 어린 아이가 바둑을 둔다니 얼마나 귀여워요. 바둑 두는 어르신들이 다 한 번 씩 둬보자고 한 거예요. 어려서 집중력이 떨어져서 자리에 앉아있질 못하니까 용돈, 사탕으로 꼬드겨서 바둑을 더 두게 하기도 하고요. 결국 서울까지 와서 바둑을 배우게 됐어요. 9살에 입단을 해서 10살 때 유학을 가게 됩니다.”

 

놀라운 바둑 실력으로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어린 조훈현은 10살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당시 바둑은 일본에서 꽃을 피운 때였다. 그 중에서도 조훈현은 세고에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유명하다. 알려진 대로 세고에 겐사쿠(1889∼1972)는 단 세 명의 제자만 두었다.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1907∼1994), 중국의 우칭위안(1914~2014), 한국의 조훈현이다. 조훈현을 내제자로 들였을 때 그의 나이는 일흔넷(1963년)이었다. 파격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문하생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이를 둘러싼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원래 기타니 선생님은 웬만한 학생들을 다 받아주세요. 한국에서 간다면 말 안 해도 거의 그쪽으로 갔어요. 근데 저를 데려가신 분이 저울질을 한 거예요. 일본 바둑계에서는 세고에 선생님이 더 위였어요. 그때 세고에 선생님 연세가 74세 정도 됐었죠. 그런 분에게 한국에서 온 어린 아이를 제자 시켜달라고 하니 말이 안 되는 거였어요. 먼 곳에서 왔으니 바둑 한 판 두자고 선생님이 제안하셔서 석 점을 놓고 둔 거예요. 근데 운 좋게 제가 이겼어요. 선생님이 두 점을 놓고 다시 바둑을 두자고 하셨어요. 얘기했죠? 운이 좋다고요.(웃음) 또 이겼어요. 그 자리에서 입문하라고 허락하셨어요.”

 

그러나 세고에 선생님은 바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바둑을 배우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낯선 타지에 온 어린 조훈현에게 세고에 선생님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 사람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태도, 세고에 선생님은 그의 삶을 통해 제자를 가르쳤다.

 

“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거였어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성, 인품,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에서야 조금 깨닫죠.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에요. 사람이 되라는 말은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당시 세고에 문하에는 천재 우칭위안(오청원)이 있었다. 중국 출신의 기사 우칭위안이 세고에 선생 문하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청원 구단은)바둑계의 베토벤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천재인데다가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세고에 선생님이 오청원 선생에게 몸 상하니까 좀 쉬라고 야구장에 보냈어요. 그런데 야구도 안 보고 하늘만 쳐다보더래요. 머리로 바둑 공부를 한 거죠. 그분이 15살에 일본에 오신 건데요. 당시 세고에 선생님이 오청원을 제자로 데려와야 했던 거예요.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15~20명 되는 가족이 모두 같이 와야 해요. 당시 상황이 그랬어요.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어요? 이때 선생님이 지인에게 후원을 부탁한 거예요. 지인이 이런 말을 해요. 네 말대로라면 중국 사람이 일본에 와서 바둑을 휩쓸 텐데 어떻게 키우느냐, 말이 안 된다고요. 선생님 말씀이 사람과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셨던 거예요.”

 

세고에 선생님은 나를 9년 동안 데리고 살면서 정말로 당신의 모든 걸 나에게 주셨다. 바둑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 바둑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그 정신세계까지 다 주셨다. 그것은 앞에 앉혀놓고 일일이 가르치고 주입시키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저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생활하면서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조금씩 스며들게 하신 것이다.


무슨 정신세계를 배웠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로 잴 수도 없고,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60~61쪽)

 

조훈현은 세고에 문하에서 9년을 수련한다. 이후 조훈현은 병역 문제로 1972년 3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세고에는 조훈현이 한국으로 귀국한 지 네 달 뒤인 7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두 통의 유서를 남겼고, 한 통은 가족에게 “노구로 더 이상 신세 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자 한다”는 내용을, 또 한 통은 친구, 후배들에게 “조훈현을 꼭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는 부탁을 담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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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왕


한국으로 돌아온 조훈현은 한국의 바둑 풍경이 낯설었다. 일본은 철저히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바둑 문화였던 반면, 한국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3살 꼬마였는데도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조 선생,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라고 했어요. 그 분들도 모두 대단한 분들이었는데 말이죠. 한국에 오니까 딱 어깨를 두드리면서 ‘어이, 조 군 한 수 하세’하는 거죠.(웃음) 완전 다르잖아요. 또 한국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되는 곳이었어요. 안 하면 1등을 못하니까 1등을 하려면 나도 그래야 했죠. 근데 배운 게 있으니까 그건 못하고요. 완전히 별 세계에 온 거죠. 거기에서 오는 혼란이 많았어요.”

 

좌절감이 심했던 조훈현은 그렇게 방황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용돈을 타려 하자 어머니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이웃에서 돈을 빌리셨다. 그때부터 정신을 차린다.

 

“프로 기사가 돈을 버는 방법은 이기는 수밖에 없거든요. 프로라는 게 그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열심히 바둑을 두게 되고요. 한 판 두 판 이기며 돈도 생기게 되죠. 그렇게 이기면서 타이틀을 따게 되니까 주위에 팬들도 많아지고, 기왕이면 휩쓸어라 하는 말도 듣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전관왕이 되었죠.”

 

전관왕 타이틀을 거머쥔 후 그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내제자를 받아들인다. 바로 이창호다. 스승과 기풍이 너무나도 달랐던 이창호는 성실함과 과묵함으로 바둑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왜 같이 살고, 같이 생활해야 하느냐면 선생님의 행동, 말을 보고, 느끼고,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저도 세고에 선생님께 배운 것처럼 창호에게 바둑 공부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창호는 8, 9살 때 저녁 먹고 나면 그 나이에 12시까지 바둑 공부를 했어요. 우리집을 나갈 때까지 그렇게 공부했어요. 다들 창호를 천재라고 하지만 천재는 아니었어요.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죠. 한 번은 복기를 하는데요. 얘가 후퇴를 하더라고요. 이럴 때는 치고 나가야 하는데 말이에요. 기세라고 하잖아요. 왜 이렇게 안 뒀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말씀처럼 하면 열 번 두었을 때 한 번 쯤은 역전패를 당한다는 거예요. 싸움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자기가 좀 물러서면 백전백승 한다는 거예요. 안 진다는 계산이 되어 있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저보다 낫더라고요. 그렇잖아요. 9승 1패보다는 10승 무패가 옳은 거죠.”

 

조훈현은 이후 이창호에게 하나씩 타이틀을 잃는다. 그리고 또 8년 만에 타이틀을 되찾아온다. 한미화 평론가는 “정상에 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절정에서 내려왔을 때 그것으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조훈현 국수님은 늦은 나이에 다시 한 번 정상에 오릅니다. 이것은 처음 정상에 오른 것보다 더 대단한 게 아닌가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픈 데를 찌르시네요.(웃음) 진검승부를 한 적은 극히 드물어요. 제자와 스승이 싸우는 경우도 그렇죠. 거의 전례가 없던 경우였는데요. 저는 너무 일찍 제자를 받아들였고, 창호는 너무 일찍 커버린 거예요. 그래서 정상을 놓고 싸우게 된 거죠. 초장엔 이겼지만 갈수록 제가 모든 게 부족해서 지게 됐어요. 타이틀도 제자에게 다 뺐기고요. 그나마 제자에게 뺏겨서 덜 마음이 상했죠. 그 후 산에도 다니고 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가진 게 있다고 떨어지기 싫어 발버둥치는 게 잘못이지 밑바닥에서는 올라가는 길 밖에 더 있겠느냐, 생각하게 됐어요. 이제 한 번이라도 이기면 그걸로 만족이고, 그러다가 또 두 번 되고, 또 이길 수도 있는 거니까요. 마음이 편해지니까 바둑이 점점 편해졌어요. 그게 좋은 쪽으로 작용을 해서 다시 싸움이 됐던 것 같아요.”

 

흔히 바둑을 인생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바둑의 최정상에서 삶을 산 고수, 조훈현에게서 인생을 배울 수도 있으리라. ‘자기만의 바둑’을 ‘생각의 위대한 힘’으로 해나가자는 조훈현의 말을 오래 곱씹어볼 일이다.

 

생각을 바꾸는 건 그저 마음만 고쳐먹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심지어 결과까지 달라진다. 개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생각인 것이다.


비록 바둑판에서 얻은 깨달음이지만 나는 어느 인생이나 근본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 같은 바둑판 위를 한 발 한 발 걷고 있다. 생각의 위대한 힘으로 최선을 다해 자기만의 바둑을 두자. 자신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자. 신중하게 포석(布石)하고 거침없이 공격하되 치열하게 방어하자.(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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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조훈현 저 | 인플루엔셜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는 바둑의 고수이자 승부의 고수로 오랜 시간 살아온 조훈현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직접 복기’하는 첫 에세이로, 그가 깨달은 ‘생각의 힘’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인생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조언을 건네는 책이다. 조훈현은 말한다. “세상엔 풀지 못할 문제란 없다.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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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 “카뮈 씨, 부조리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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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를 이해하는 키워드, 태양과 피에누아르


알베르 카뮈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를 단번에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뮈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이 품고 있는 부조리는 무엇인지,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카뮈 씨, 부조리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지나치게 근본적인 듯 보였다. 그래서 늘 입속에서만 맴돌았고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소설가 함정임의 응답을 듣기 전까지는.

 

지난 27일 저녁, 예스24와 민음사가 함께 마련한 ‘세계문학 고전학교’에 초대된 함정임 작가는 독자들을 대신해 카뮈에게 물었다. “카뮈 씨, 부조리란 무엇인가요?” 동시에 그녀는 침묵에 사로잡힌 카뮈 대신 이야기를 이어갔다. 소설을 짓고 연구하고 소개하면서 자신이 발견하게 된 ‘카뮈식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연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카뮈의 소설과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를 소개했다. 태양, 피에누아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 스승이자 문우였던 장 그르니에, 이 모두가 카뮈와 그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 조각들이다.

 

“카뮈는 ‘피에누아르’였어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이주한 프랑스인과 그 2세들을 ‘피에누아르’라고 하는데요. 카뮈의 아버지가 알제리로 이주해 온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인이었어요.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뮈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강렬한 태양과 빛깔과 향에 둘러싸여 있었죠. 그러니까 태양을 숭배하는 헬레니즘의 혼이 의식을 초월해서 생리적인 감각으로 자리 잡았던 거예요. 그런 감각과 지력이 문장과 사유로 이어졌고요.”

 

알제리라는 변방의 공간은 카뮈에게서 ‘정오의 사상’을 낳았고, 피에누아르라는 경계인의 신분은 그에게 끊임없이 ‘명백한 태도’를 요구했다.

 

“카뮈의 정체성은 쉽게 설명될 수 없었죠. 프랑스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그를 키운 8할은 지중해의 바람과 태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알제리에서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는 문제로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어요. 시대의 분위기는 지식인인 작가의 책무는 사회 참여라고 보고 있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카뮈는 회색분자라는 강렬한 비판을 받게 됐죠.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나도 정의의 편이지만 정의와 내 어머니를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머니를 선택하겠다’고 말한 배경이기도 해요. 하지만 결국 카뮈는 수상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어요.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끊임없이 확실한 태도를 요구받았거든요. 루르마랭으로 떠난 것도 그래서예요. 가시방석 같은 파리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끌어안았던 고향과 가장 유사한 곳에서 집필을 하고 싶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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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사람』은 부조리 철학의 핵심


“카뮈에게 있어 부조리는 철학적인 개념”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리고 실존주의와 사르트르를 빼놓고는 카뮈와 부조리, 반항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사르트르와 카뮈, 두 사람의 실존주의는 어떻게 달랐을까. 작가는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에다가 지성계의 중심에 있던 부르주아 출신의 사르트르와는 근본은 달랐으나 『이방인』한 편으로 문학적으로 어깨를 겨누는 문우가 되었고, 실존주의와 다른 노선의 ‘부조리와 반항’을 독자적으로 표방하며 사상적인 라이벌이 되었다”

 

“부조리나 반항은 실존주의 사조의 한 항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실존주의로부터 반항과 부조리를 이야기하게 되죠. 카뮈는 항상 사르트르와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데요. 사르트르가 『이방인』을 두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비판하면서 끊임없이 논쟁을 했어요. 그때 사르트르는 <현대>라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잡지의 주필이었거든요. 카뮈의 부조리가 반항을 이야기한다면 사르트르의 실존은 혁명과 같이 이야기 되어야 해요. 자신이 가진 것을 타자와 세상에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 반항이라면, 혁명에는 분명한 이념과 신념이 있어요. 그 틀을 가지고 궁극적으로는 전복을 꾀하죠. 그래서 반항과 혁명은 그 출발과 과정에서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함정임 작가는 『시지프 신화』부터 『반항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카뮈 안에서 부조리가 싹트고 깨어난 과정을 추적해갔다.

 

『시지프 신화』는 카뮈의 부조리 철학의 출발점이에요. ‘부조리란 무엇인가’라는 의식이 생기는 과정을 쓴 작품이거든요. 이후 10년 동안 『이방인』과 희곡 『오해』『칼리굴라』그리고 『페스트』를 거치면서 『반항하는 사람』이 탄생했어요. 『페스트』는 전쟁의 경험을 내면화해서 발표한 작품인데요. 『이방인』을 통해서 세계와 인간의 유대, 개인적인 죽음의 세계를 다루었다면 『페스트』는 집단적인 죽음, 공포라는 한계 상황을 인간애로써 돌파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 안에 들끓는 다양한 군상들의 욕망을 다루고 있고요. 『반항하는 사람』은 부조리 철학의 핵심이에요. 『반항하는 사람』에 이르러서 부조리의 인식이 더 적극적으로, 각성의 하나인 반항으로 나타난 거죠.”

 

카뮈의 대표작인 『이방인』에서 발견되는 부조리는, 내 삶에서조차 나 아닌 다른 이들이 중심부를 차지한다는 현실에 있다.

 

『이방인』에서 말하는 부조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삶에서 나는 빠져있다는 거예요. 나는 구경꾼이 되어있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말하는 거죠. 나의 탄생이나 죽음과는 관계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고, 내 삶의 재판에서조차 나는 빠져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하고, 문득 내가 낯선 공간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고, 그런 모든 것들이 부조리예요. 부조리 문학에서는 이것들이 중첩되어서 불시에 나타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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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가 ‘증오의 함성’을 기다린 이유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부조리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그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이성이나 논리와는 한 발짝 비켜 서있다. 소설사에서 이토록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출현한 예는 없었다. 그러나 함정임 작가는 뫼르소에 버금가는 또 다른 주인공으로 태양을 꼽았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들 주인공뿐만 아니라 ‘무드(mood, 情調)’라고 강조했다.

 

『이방인』같은 작품에서는 특히 무드(mood, 情調)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카뮈의 부조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태양과 지중해와 ‘피에누아르’를 이야기한 것도 그런 이유고요. 작가가 세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시선과 태도에 따라서 작품 전체를 감싸는 무드가 달라지거든요. 말할 수 없이 처참하고 부조리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릴 수도 있고, 중성적인 태도를 가지고 보여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작품의 무드를 감지하는 것이 곧 작가와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드 속에서 인물의 인생이 시작하고 끝맺는 거고요. 작가가 하나의 세상을 창조했다가 마무리하는 거죠. 특히 『이방인』은 부조리라는 카뮈의 사상 체계, 자연에서 얻은 감각적인 문장, 어머니로부터 가지고 온 침묵의 언어가 원천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또한 『이방인』속의 반항은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뫼르소는 종종 ‘이런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에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함정임 작가는 “이런 문투도 작가가 기본적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실존주의에서는 선택, 책임,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죠. 그런데 카뮈의 작품에서는, 실존주의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인 것 같다’는 표현들이 등장해요.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사르트르가 철학을 전파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 것과는 다른 점이죠.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반복적으로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이것이 정말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이기도 해요. 사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잖아요. 카뮈는 이런 현실을 문학이라는 거울로 비춰줌으로써 충격을 안겨준 거예요.”

 

『이방인』의 결말은 언제나 물음표로 남는다. 뫼르소는 왜, 자신이 죽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증오를 쏟아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김화영 역, 민음사)

 

함정임 작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해석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말은 정답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카뮈와 『이방인』과 뫼르소와 부조리와 반항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어준다는 사실이다.

 

“결말에 이르러서 뫼르소라는 부조리의 희생물, 부조리의 전형은 세계와 자신이 닮아있다는 걸 깨닫잖아요. 그것이 오히려 전체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탄생이라고 해석하고 있어요. 뫼르소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몰려온 군중들도 미래의 사형수들이라고 볼 수 있죠. 점점 죽음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으니까요. 카뮈의 처음과 끝은 표리-안과 겉, 이면에 있어요. 뫼르소 역시 자신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 모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과 같은 사형수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형제애를 느낀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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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알베르 카뮈 저/김화영 역 | 민음사 | 원제 : L'Etranger
낯선 인물과 독창적인 형식으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 '이방인'처럼 나타난 소설. 젊은 무명 작가였던 알베르 카뮈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마주하는 실존의 체험을 강렬하게 그린다. 카뮈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기존의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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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철학가 이주향, 당신의 짐은 누구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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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는 시간』을 읽는 동안 철학은 소리 없이 스며든다. 철학자 이주향이 읽어주는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 한 장의 그림, 한 곡의 음악에는 무수히 많은 삶과 사람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도덕경』 『레미제라블』부터 영화 <설국열차><위대한 개츠비>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조용필의 「바운스」까지, 저자의 손끝이 가리키는 작품들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익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여백과 침묵 속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들을,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무심코 지나쳤던 목소리들을, 철학자 특유의 감각으로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철학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를 만나는 시간』의 책장을 덮을 때쯤, 희미하던 그 실체는 점차 또렷해진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을 느끼고 고민하며 살아가는지,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건과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 그 안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선택하는 것들은 얼마나 다양한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용어들에 기대지 않고도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 두었던 작품들을 펼쳐 보일 뿐이다. 자신을 매료시킨 어떤 것의 의미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나와 당신과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철학자 이주향은 ‘낙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 것이 아닌 짐을 지고서 힘겹게 걸음을 떼는 낙타. 그 눈빛을 떠올리는 것은 거울을 마주보는 것과 같다. 익숙한 피로감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안에서는 서투르기만 했던 사랑의 흔적을 찾게 된다. “위험하지 않은 모험이 없듯 어리석은 줄 모르는 사랑은 없습니다”라는 저자의 한 마디는 잊었던 사랑의 기억을 되살린다. 늘 관계 속에서 앓는 우리를 위한 조언도 빼놓을 수 없다. “만날수록 얽히기만 할 때는 ‘대범’을 가장하고 만나는 것보다는 그릇이 작음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게 좋습니다”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뜨끔하다. 엉킨 실타래를 풀고야 말겠다고, 마치 수학문제를 풀 듯 답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도 당신도 지쳐버린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렇듯 『나를 만나는 시간』은 명쾌한 해석으로 갈증을 해소시켜 주기도 하고,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져 깊은 사유에 빠져들게도 한다. 그 순간들을 거치며 우리는 비로소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저자가 포착해낸 오늘의 현실을 응시하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알게 모르게 지쳐있었던 나를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저자의 통찰에 가슴이 시원해지는 이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 질문과 갈등을 쌓아둔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각종 의료장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몸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는 것처럼, 마음과 감정 역시 관찰하지 않으면 그 상태를 알 수 없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자신 이외의 존재와 바깥세상을 향해있던 시선을 거두어들여 나의 안을 비추는 일이 필요하다. 『나를 만나는 시간』은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길어 올린 ‘철학의 지혜’를 들려줌으로써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한’ 시간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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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고 가는 짐은 누구의 것인가요?


“동서양의 고전들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고 생각해요. 『소학』만 보더라도 옛 사람들이 사람과 생명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잖아요. 한 예로, 유모는 아이가 처음 만나는 스승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온화하고 말이 적은 여인을 선호했고요. 그런 배려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겠죠.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자신감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여주느냐가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에요. 우리는 늘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한 태도를 가지려면 모범이 되어줄 존재가 필요하거든요. 책이 그 역할을 해줄 수도 있어요. 깊이 읽을 수 있는 책은 나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와 같잖아요.”

 

『나를 만나는 시간』에서 철학자 이주향은 예리한 시선으로 현실의 겉꺼풀을 벗겨냈다. 그러자 차갑고 불편한 세계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통쾌함과 서글픔이 뒤섞인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도태와 낙오라는 단어가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가능한 멀리 달아나려는 것처럼, 떠밀리듯 살아가는 나와 당신을 확인하는 일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토록 아픈 상황을 이해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몸속 시계가 작동하기 전에 알람에 맞춰 일어나, 깨지 않은 잠을 커피로 깨우고, 지옥철에 몸을 싣고 일터로 나가는 인생을 그래도 축복받은 인생으로 여기는 사회” 속에 우리는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남의 평가만 내면화하는 하인으로, 하녀로, 낙타로만 살게 되는” 줄도 모르고 “바쁘다는 것이 능력의 척도인 줄” 믿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낭만도 반납하고 정의도 외면하고 오로지 취업을 향해 질주했건만 취업을 하지 못하는 청춘들”과 “취업은 됐어도 비정규직의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하듯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 근사해 보이는 일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처럼 언제 낙오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외줄 타는 심정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필요를 ‘얼마만큼 성과를 낼 수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는 세상이죠. 그런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생 아닌가요?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면, 지금의 사회는 봉건 사회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봉건 사회에서는 주인을 잘 만나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심리적인 부담 없이 살아갈 수 있었잖아요. 하지만 현대 사회는 먹고 사는 문제도 보장해주지 않죠. 그러면서 계약을 빌미로 사람을 쥐어짜요. 1년마다 혹은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나를 만나는 시간’은 엄두도 낼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에요. 현대인들은 자신을 하인 취급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끝까지 하인 대우밖에 받지 못해요. 우리에게는 사람답게 경영하려는 노력, 그리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나를 만나는 시간』에서 저자가 들려준 ‘낙타의 삶’이 떠올랐다. 미생들에게 허락된 삶은 낙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낙타는 열심히 짐을 지고 가는데, 그 짐은 주인의 것이지요. 오로지 주인의 짐을 지고 주인이 정한 길을 가는 낙타의 시간, 누구나 그 시기를 거치며 사회적 존재가 됩니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잡고 성과를 내는 일로 떳떳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공동체의 일원으로만 살다 보면 남의 평가만 내면화하는 하인으로, 하녀로, 낙타로만 살게 되는 겁니다. (『나를 만나는 시간』 92~93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이야기죠. 니체는 자기 짐이 아닌 것을 성실하게 지고 가는 낙타 같은 인간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다가 ‘나를 만나는 시간’이 찾아오면 사자로 변한다고 했죠. 사자 같은 사람은 나의 삶을 사는 사람이에요. 내가 아닌 것의 삶을 살지 않고, 그런 삶을 강요하는 것에 대항해서 싸우죠. 엄청난 저항의 에너지를 가진 존재이지만, 그 삶은 굉장히 긴장되어 있기도 해요. 중요한 건 사자가 어린아이로 변하는 과정이에요. 니체는 어린아이가 최초의 긍정이라고 했는데, 운명을 긍정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슬플 땐 슬픔과 놀고 기쁠 땐 기쁨과 노는 거죠. 희노애락애오욕이 없는 게 아니에요. 희노애락애오욕에 빠지지 않고 파도타기 하듯이 타고 넘는 거죠. 그게 긍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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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하세요


책 속에서 저자는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죄라고. 나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것은 죄라고. 죽비처럼 내리꽂히는 그 말들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마음을 살피는 일이 선택의 영역 밖에 있는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의무였고, 그렇게 하지 못한 우리는 모두 유죄였다. 자신을 상대로 지은 죄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알아야 했다.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나를 관찰하는 일의 시작은 내 몸을 관찰하는 거예요. 몸의 변화를 지켜보면 감정이 어떻게 일어나고 가라앉는지 보여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이야기들이 추상적으로 들리죠. 굉장히 구체적인 이야기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이든 신체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신체 어느 한 곳에 의식을 두면 보이는 흐름들이 있어요. 만약 명치끝이 막혀있는 게 보인다면 ‘내가 인생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것들을 명치에 차곡차곡 쌓아뒀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한두 달이 지나면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막혀있던 것들이 풀어지는 걸 느끼게 될 거고요. 그렇게 몸의 변화를 관찰하다보면 한결 차분해져요.”

 

무심코 짓는 표정, 습관적인 손짓까지도 의식적으로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이야기다. 손쉬운 방법임에 틀림없지만 그만큼 어색한 일이기도 하다.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몸과 마음을 내버려둔 채 지켜보지 않았던 시간들이 피부로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필 시간이 없다고 이야기하죠. 일을 위해서는 24시간을 쓰면서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 하루에 30분도 할애하기 힘들잖아요. 자식을 위해 살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는 엄마들과 똑같은 거예요. 자식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내 일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자식이든 일이든 자신이 애착하고 있는 대상에 빠져있는 거예요. 나를 볼 줄 알아야 내가 애착하고 있는 것이 보이고 내가 미워하고 있는 것이 보여요. 애착과 증오는 삶을 만드는 축이에요. 자신이 무엇에 애착과 증오를 느끼는지 아는 것과 모른 채 끌려가는 것은 굉장히 달라요.”

 

『나를 만나는 시간』속에서 저자는 묻고 있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어 그녀는 담담하게 고백했다. “나는 혼자만의 공간으로, 나만의 동굴로, 침묵으로 도망갑니다” 언뜻 문제를 회피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자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내가 나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 대범한 척 나서기보다는 작은 그릇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편이 낫다고 조언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인생의 매듭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맺히고 풀리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내 손을 떠나는 일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어떤 일을 손에서 떠나보내고 나면 어느 순간 해결이 되기도 하고요.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아요. 끝까지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면 애착을 보이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느 순간 다시 챙겨져 있다는 걸 아니까요.”

 

『나를 만나는 시간』이 선사하는 변화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의 마음을 돌보는 일은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일까지 가능하게 한다. 그녀가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에게서 발견한 베풂이 지금 우리에게 낯선 이유는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다른 이를 향해 마음을 열 수 없는 것 아닐까.

 

“어렸을 때부터 미리엘 신부를 굉장히 좋아했는데요. 요즘에는 그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자기 인생을 믿고 수행이 된 사람들이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이야기한, 사자를 거쳐 간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죠. 그들은 네 것과 내 것을 나누지 않아요. 그리고 변화시킬 의지를 갖지 않고서도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켜요. 만약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을 변화시킬 의지가 있었다면, 장발장은 절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미리엘의 삶은 개방적인 거죠. 마음을 열어놓고 사는 사람이잖아요.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서 함께 식사를 하는 하룻밤이 굉장히 소중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거고요. 저 역시 미리엘 신부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거든요. 저에게 오는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을 믿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자신을 믿는 것이다. 사랑하는 일 역시 다르지 않다. 종종 사랑한다는 말은 내 안으로 찾아들지 못하고 밖으로만 맴돈다. 가족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사랑을 전하면서도, 정작 나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한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마도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부족함 투성이로 규정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불신이 나를 믿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들고, 진짜 내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을 회피하도록 만든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를 만나는 시간』이 전하는 진실을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당신은 46억 년의 세월이 기다려온, 태양의 피워낸 꽃이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라고”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자기 안으로 거둬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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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는 시간이주향 저 | 사우
철학자 이주향이 안내하는 철학은 어렵고 복잡하지 않다. 그는 난해한 철학을 영화, 만화, 문학, 고전 등과 접목시켜 쉽게 설명하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아 성찰과 삶의 태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문학작품과 고전, 음악, 미술, 영화 등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다양한 소재를 갖다 쓴다. 《도덕경》, 《서경》, 《소학》 등 동양 고전부터 《파이돈》,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등 서양 고전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철학을 풀어내지만 편안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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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림이 전하는 내 인생 착해지는 7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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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일, 서울 합정동 빨간책방에서는 ‘송정림 작가와 함께하는 힐링 토크’가 펼쳐졌다. 『착해져라, 내 마음』 출간기념으로 열린 이 행사는 시인 유희경의 사회로 송 작가가 ‘내 인생 착해지는 7계명(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주제로 독자들과 만났다. 송 작가는 이 자리에서 착한 마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다. 

 

“책 제목 ‘착해져라 내 마음’은 내가 하루에 한 번씩 거는 주문이다. 착하다는 게 요즘 잘못 쓰이고 있다. 바보 같다는 뜻이나 손해 본다는 뜻으로 쓰인다. 착하다는 건 순수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상태이고 행복해진다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는 아이스크림 하나만 줘도 행복해하잖나. 지금은 어떤 것을 해도 감사하기보다는 불만부터 쌓인다. 그래서 제목은 매일 나를 돌아보면서 아이처럼 순수해지자는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에세이 한 편씩 꼭 쓴다. 에세이를 쓰려면 나를 돌아봐야 글이 나온다. 착해지기 위해서다. 하루만큼 독해진 마음을 하루만큼 순하게 만들고자 에세이를 쓴다.”

 

“‘착하다’가 ‘바보 같다’는 뜻으로 쓰이는 시대. “왜 착해져야 하지?”라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순수하면 아주 작은 것도 크게 느낍니다. 순수하면 삶 앞에서 용감해집니다. 감동하고 감사하니 행복해집니다. 용기가 있으니 고난도 맥을 못 춥니다. 그러니 마음이 착해진다는 것은 인생이 순탄해진다는 뜻입니다. 내 앞에 놓였던 울퉁불퉁 자갈길이 잘 뻗은 고속도로가 됩니다.”(5쪽)

 

송 작가는 이어 자신이 생각하는 ‘내 인생 착해지는 7계명’을 건넸다. 어떤 거창한 의미보다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 정도로 알아달라고 덧붙였다.

 

1.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라.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다. 행복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행복 체감도가 굉장히 낮았다. 유치원부터 나이 많은 사람까지 취재했다. 우선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불행하다고 답했다. 유치원 때부터 서울대에 가라고 엄마가 말한다고 하더라. 리포터가 서울대에 가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들 역시 불행하다고 하고 법관과 의사를 만났더니 역시 불행하다고 답했다. 경쟁에 치여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물으니 무척 행복하다는 답이 나와서 리포터가 그 아저씨를 따라갔다. 십여 평 남짓한 연립주택에 들어갔다. 아저씨는 리포터에게 놀라지 말라며 아내가 굉장히 미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간의 기준으로 예쁘지 않았다. 그런데 무척 행복하게 웃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감사하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저씨 직업은 환경미화원이었는데, 아내가 늘 따라간다고 했다. 아저씨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를 기다려주는 가족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며 매일 인생 찬가 시를 쓴다고 말했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모든 상황이 착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도 길이 있는데 그것은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다. 내가 불만이 있으면 잘 나가지 못한다. 무슨 일을 하던 감사한다면 하루하루 축복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2. 첫 경험을 시도하라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감탄사를 잃고 설레질 않더라. 죽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해지려면 설레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애하는 기분이 되자. 호기심, 관심을 갖자. 나 혼자 미술관에 가 본 적도, 새벽시장에 가 본 적도 없고, 고아원에도 안 가보고, 안 해 본 것이 너무 많더라. 처음 경험하는 것을 찾아서 하다 보니 거울에 비친 내 눈에 별빛이 생겼다. 눈에 별을 담으려면 설레야 한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 오랜만에 하는 것도 해봐야 한다. 가령 우체국에 가서 엽서나 편지도 써보고 그러면 정말 기분이 좋다. 그러면 인생의 행복이 조금씩 확장된다. 지금까지 쓰여 진 인생은 바꿀 수 없지만 앞으로는 새로 써나갈 수 있다. 내가 못해본 일, 첫 경험을 시도해보면 좋겠다.”

 

3. 웃어라

 

“인도에는 ‘웃자 클럽’이 있다고 하더라. 매달 모여서 한 사람이 소리 내서 웃으면 나머지 사람들도 웃기 시작하는데, 결국에는 모인 사람들 모두 배를 잡고 웃는다고 한다. 웃으면서 감사하는 사람을 곁에 두면 내 운도 풀린다는 말이 있다. 그건 맞는 말 같다.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

 

4. 쓸데없는 자만심을 버려라

 

“내 자신에게 매일 주입시키는 말이다. 자존심과 자만심, 비굴함과 자존심의 경계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과거 책 한 권을 내고 싶어서 애걸복걸하던 첫 마음을 떠올리거나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도 처음 만날 때 어땠는지 생각해본다. 착하다는 건 다른 사람 마음을 편하고 웃게 만드는 노력이다. 쓸 데 없는 자만심을 버리는 것이 착해지는 비결이다.”

 

5.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어라!

 

“착해지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다쳤던 적이 있다. 그날따라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갔던 날이었는데, 차가 와서 날 받아서 다쳤다. 병원에 갔더니 인대가 파열되고 한 3년가량 고생했다. 목발을 짚고 다니다가 나았는데, 어느 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목발을 짚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몇 년 전 내 모습이 오버랩 됐다. 목발 짚은 사람의 뒷사람이 걸음을 천천히 걷고, 많은 사람들이 목발 짚은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오는데 감동이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구나. 이 세상에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든든해지고 타인에게 좀 더 친절해진다.”

 

6. 지금 말하고, 지금 행하라

 

“그저께 슬픈 일을 겪었다. 좋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을 떠날 때가 있다.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는 후회도 밀려왔다. 사랑하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고백은 지금 해야 한다. 내일은 없다. 지금 현재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어제는 지나버린 것이고 지금 현재 말하고 행해야 한다.”

 

7. 감동하라

 

“소머리국밥집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우리 친구들이 보기엔 인생이 안 풀렸는데, 우리에게 항상 고맙다고 얘기를 한다.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며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행복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마음에는 우체국이 있다. 우체국에서 어떤 우편물을 접수하고 있는지 우리는 느껴야 한다. 인문학의 목적 중 하나는 감동이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감탄사를 터뜨리는 습관을 가지면 내 인생이 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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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착한 사람 코스프레’가 아닌 진짜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착해진다는 것이 가면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착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착한 마음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순한 마음이다. 영어로는 굿(good)이고 나이스(nice)다. 착한 척, 착한 사람 코스프레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도 내 자신에게 착한 척이라도 계속 해야 한다. 완벽하게 착한 사람은 없으므로 착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착한 가격, 이런 말도 있는데 착하다는 건 다른 사람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태 같다. 착해지는 게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악을 떨어도 착한 사람은 착하다. 착하다는 건 가격표를 매길 수가 없다.

 

착하게 살고 싶은데, 거절하지 못하고 힘들게 사는 내 모습이 힘들다. 어떻게 하면 당당하게 거절 할 수 있을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는 어떻게 가져야 할까? 순수한 의도로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 순 없을까?

 

나도 거절을 잘 못한다. 그건 착하다기보다 마음이 약한 것이겠지. 그래도 진심은 통한다. 좋은 마음은 좋게 받아들인다. 안 좋은 마음이 오면 안 좋게 받아들인다. 불의에 항거하는 것도 착한 것이다. 시간이 없거나 다른 상황 때문에 남의 부탁을 못 들어주면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거절에 상처가 없을 순 없다. 그런데 거절하지 못해서 큰 상처가 나느니보다 지금 거절을 해서 작은 상처로 끝나는 것이 낫다. 착하게 도와주면 이를 이용해먹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일은 잃어도 좋은 사람은 잃지 말자는 철칙이 있다. 좋은 사람은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 내가 착하게 했는데 타인이 악하게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착한 사람에겐 다 복을 빌어주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라 표현을 잘못하겠다.

 

가장 고마운 사람인데도 곁에 있고 편하다는 이유로 막 대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기차 안에서 누나가 동생에게 야단을 쳤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 사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수용소로 간 뒤 누나는 살았지만 동생은 죽었다. 나중에 이 여자에게 새로운 인생관이 생겼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마지막 말이라고 생각하자. 아내에게 하는 말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노력해야지. 오늘 하루, 하루살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좀 더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칭찬으로 날 조정하려는 사람이 싫다. 그러다보니 진심어린 칭찬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다. 칭찬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싶다.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에게 나쁘다. 나에게 나쁜 것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칭찬하는 사람도 노력해서 칭찬하는 것일 거다. 우리나라 사람은 칭찬에 인색한 경향이 있는데, 칭찬을 받으면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받으면 좋을 것 같다. 진심이 1%라고 해도 그걸 받아들이면 자신에게도 좋을 테니까. 

 

친구의 성공과 기쁨에 대해 축하하는 것이 고통을 위로해주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더라. 어떻게 하면 축하를 잘해줄 수 있을까?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얘기가 있지만 살아보니 주변 사람이 잘 되면 내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더라.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밝은 빛이 내게 온다. 그 사람이 잘 되는 건 내가 잘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좋으면 나도 좋다, 이런 마음을 살다보면 알게 된다.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복을 빌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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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져라, 내 마음송정림 저 | 예담
그러나 한 발짝만 떨어져 생각해보자. 과연 그런 생각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 오히려 다시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독해지기 위해 지쳐가는 내 심신은 정작 어디에서 위로받아야 할까? 더 잘살기 위해,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오히려 선한 생각, 착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건넨 착한 말이 선한 생각이 내게로 돌아와 지금-여기를, 오늘 하루를 환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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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을 하면서 바뀌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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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간 1년 9개월(636일), 여행지 52개국 252개 도시(아시아 9개국 46개 도시, 아프리카 12개국 68개 도시, 유럽 13개국 42개 도시, 중동/북아프리카 5개국 35개 도시, 라틴아메리카 10개국 52개 도시, 북아메리카 3개국 9개 도시), 여행 경비 9200만원.

 

“우리가 하고 싶은 거잖아.” 이 한마디에 시작했던 세계여행이었다. 결혼 9개월의 맞벌이 신혼부부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삶에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여행을 참 좋아하는 두 사람,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다. 기록주의자 오빛나와 흥정주의자 배용연 두 사람의 삶과 가치관 등은 여행을 통해 바뀌었다. 사무실 책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책도 펴냈다. 『잠시 멈춤, 세계여행』. 지난 8월 28일, 오빛나는 서울 논현동에서 그들의 여행을 독자들과 함께 나눴다.

 

“때로는 우리가 하고 싶고,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 수치화된 그 무엇보다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세계여행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이익과 손해를 나눠보고 있었다. 나의 오랜 꿈마저도 끝내야 하는 업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서글펐다. 그래, 가자. 남편, 우리 세계여행 가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진짜’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21쪽)

 

그렇게 떠났던 세계여행.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할 여행 경비가 있다. 오빛나는 어느 대륙, 어느 지역인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다. 그의 여행 경험에 의하면, 1일 생활비(2인 기준)를 보면 아시아 국가는 대체로 물가가 저렴했다. 부탄과 몰디브가 다소 높긴 하지만 아시아를 여행할 때는 이른바 ‘질러도’ 좋다는 것. 반면 아프리카는 의외였다. 많은 이들이 여행 경비가 비싸지 않은 나라라고 여기나 여행자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 우선 교통비가 많이 들었다. 여행자용 버스나 렌트카,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비쌌다. 국립공원 투어비도 마찬가지였다. 물가는 저렴했지만 다른 것들이 여행자에겐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프리카와 반대라면 유럽이었다. 여행 경비가 비싼 대륙이라고 대부분 생각하나 모든 유럽이 그렇진 않다는 것. 동유럽은 특히 물가가 쌌다. 어떤 방식으로 여행하는가에 따라 예산이 달라지는 것이 유럽 여행의 특징이다. 중남미는 중미와 남미가 달랐는데 대체로 중미가 남미보다 저렴했다.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은 이동거리가 길어서 싸지 않았다. 무섭게 빠져나가는 교통비는 조심, 아울러 지갑을 공격하는 여행지가 있었다. 좋으면서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오빛나의 조언. 남미에서는 페루, 볼리비아가 저렴했다.

 

 

가장 좋았던 여행지

 

그들은 52개국 252개 도시를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묻는다. 각각의 장단이 있는데, 오빛나는 특이한 나라 중심으로 좋았던 곳을 꼽았다. 우선 아시아에서는 부탄. 인도, 중국, 티벳, 네팔 사이에 있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로 알려져 부탄이 그들에겐 인상 깊었다. 부탄은 국가 차원에서 자유여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부탄 정부가 인정한 현지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여행만 가능하기에 비쌌다. 호텔, 전용가이드, 전용드라이버, 식사 등이 포함된 패키지 비용이 하루 200~250달러였는데, 만족도는 높았다. 평화롭고 친절하며, 손꼽히도록 아름다운 하늘을 가진 나라이자, 부모를 모시고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부탄은 세계여행의 첫 번째 여행지였다. 그는 마지막이었다면 가지 않았을 거라며 돈 아껴서 다른 곳에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몰디브는 충동적으로 갔다. 1박에 60달러짜리 호텔에 숙박했는데 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선 비쌌지만 리조트임을 감안하면 비싸지 않다는 것. 몰디브에 가기 전, 럭셔리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아시아를 돌아보고 아프리카를 갔다. 준비도 여행도 힘들었다. 정보가 너무 없어서 초반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대중교통이 있어도 이용이 쉽지 않았다. 탄자니아와 케냐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캠핑카 여행을 했다. 캠핑카라고 대단한 건 아니고 봉고차를 개조한 정도로 잠 잘 수 있는 캠핑카다. 차를 빌렸더니 자유로워졌다. 아프리카의 도로 사정도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대신 도로에 차가 없다. 그래서 졸린다(웃음). 아프리카만 여행하는 트레킹 투어가 있는데, 그걸 하려고 했는데 나이 제한이 있었다. 27살까지. 그래서 껴주지 않더라. 아프리카 여행은 국립공원을 가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이동하는 것부터 밥 먹는 것, 장소도 우리가 모두 결정하면서 여행을 했다.”

 

유럽을 여행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조건이 있다. 솅겐협정. 유럽 국가들 간 국경 이동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협정으로 2015년 현재 유럽 26개국에서 적용되고 있다. 협정에 소속된 국가에 입국한 날부터 180일 안에 최장 90일간 무비자 여행이 가능하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3개월을 살았다. 여행한지 1년쯤 되는 시기, 감흥이 줄고 힘이 들어서 스페인에서 집을 얻고 문화도 익히고자 그렇게 지냈다.

 

“여행을 오래하면 심신이 지치고 목적의식이 사라지는데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스페인이 그랬고, 좋았다. 중남미도 낯선 지역이라고 여기나 무척 좋다. 아즈텍, 마야 유적지 등이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 모여 있는데 이런 곳만 묶어도 3개월을 돌아다닐 수 있다. 요즘 중남미를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도 많은데 인상적인 곳이 무척 많다.”

 

오빛나는 브라질 북부를 추천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다.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등 브라질 남부와 달리 여행자가 많지 않고 무척 예뻐서 좋다는 것. 하얀 모래사막에 빗물이 모여서 만들어진 호수가 있고 호수에 사는 물고기 이야기도 꺼냈다. 우기가 끝나면 물이 마르는데, 물고기는 알을 모래에 낳고, 부화할 즈음에는 비가 와서 물고기가 된다는 것.

 

“우리는 여행을 깨알 같이 메모했다. 일기를 썼는데, 매일 쓴 것은 아니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버스, 기차 안 등에서 썼다. 남편은 중간에 일기를 포기하고 사진을 찍었다. 손때 묻은 일기장이 총 12권이었다. 사진은 총 175,789장(하루 평균 276장)을 찍었다. 우리가 가장 열심히 기록한 것은 가계부였다. 매일매일 기록했다.”

 

세계여행이 매순간 낭만적이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용과 시간의 한계 등으로 힘들었다. 짐을 짊어지고 매일 걸어 다녔고 잘 수 있는 곳에선 머리를 대고 잤다. 힘든 순간도 많았다. 여행이 깊어질수록 개인의 한계가 드러나는 한편 지저분한 곳에도 누웠고, 씻지 않고도 견디는 등 한계도 커졌다. 부부끼리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다니는 건 어떨까.

 

“부부가 여행한다고 하면 대부분 로맨틱하겠다, 좋겠다, 멋지다, 말하는데 매일 붙어 있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싸우진 않았다. 여행하면서 금슬이 좋아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동네에서 기댈 곳은 서로밖에 없으니까(웃음). 삐친 적은 있지만 서로에게 솔직한 시간이었다. 기본적으로 대화가 많아지니까 상대에 대한 예측도 가능해지더라. 힘들고 서운한 순간도 있었지만 서로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니까 뒤로 갈수록 여행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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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이 바꾼 것들

 

세계여행의 마지막은 브라질로 계획하고 있었다. 브라질월드컵을 보고 귀국하고자 했으나 돈이 모자라서 돌아왔다. 1년 9개월. 외적으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둘 모두 피부가 까매졌다. 남편은 15kg이 빠졌고, 아내는 기미와 주근깨의 압박이 커졌다. 이렇게 바뀐 외양보다 더 크고 많이 바뀐 것은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필요 없는 것을 가지려고 아웅다웅하지 말고 가볍게 살자는 식으로 바뀌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생각보다 변한 것도 없더라. 우리가 생각하기엔 긴 시간이었는데 갔다 오니 찰나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귀국하니 천국에 온 것 같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한국 여행을 다녔는데 역시 좋았다. 외국에서 여행하다 만난 친구가 한국에 와서 함께 여행했다.”

 

한국에 돌아와 꿈같은 두 달을 보냈다. 돈이 떨어져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원룸으로 이사를 하고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이 기간에 새로운 생각과 고민을 했다. 구직활동을 하는 와중에 몇몇 제안들이 있었다.

 

“제안 중에는 절로 ‘오~’하는 소리가 나오는 회사도 있었다. 돈을 많이 주고 복지도 좋은 회사도 있었지만, 이전과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 일이 정말 재미있을까를 고민했다. 건방지게 이런 오퍼를 거절할 수가 있느냐는 말도 들었다. 여행을 가기 전 이직을 할 때와는 다른 기준이 생겼다. 돈 많이 벌고 화려한 명함을 갖는 것보다 우리가 재밌는 일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그리고 지인을 통해 남편에게 네덜란드에 위치한 회사로 들어오라는 제안이 왔다. 외국을 여행하는 것이 아닌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두렵기도 했지만 2주 정도 고민 끝에 일단 3개월만 해보자며 짐을 쌌다. 다시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3개월은 넘겨 1년을 바라보고 있다. 새로운 집이 생겼고, 자전거도 4대나 생겼다. 무엇보다 이 기간, 책이 나왔다. 1년 9개월의 세계여행, 그렇게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변화가 일어났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는 이쯤이면 됐지, 라고 만족하고 있다. 세계여행을 처음 떠나면서는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지 불안이 컸지만 결국 여기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에 있던 나는 여행을 하고 나서 달라져서 그 자리에 다시 갈 수 없다(웃음). 지금 생활에 굉장히 만족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 많은 돈과 시간을 써서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이제는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치관, 꿈이 더 확실해졌다.”

 

 

Q&A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저자가 생각하는 여행의 정의에 듣고 싶고, 여건이 안 돼서 여행을 못가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게 여행은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어느 회사원, 어느 학교의 학생 등 우리는 일상에선 색칠을 하고 있는데, 여행을 하면 그런 색칠한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쁜 옷도 필요 없다. 그렇게 껍질을 벗다보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그래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었지, 하면서. 여행하면서 이런 순간, 이런 생각을 하는 나와 만났다. 

 

우리의 여행 경비는 전세금 1억5천만원이었다. 둘이 함께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이었다. 그 돈을 결혼할 때 집에다 몰빵했다(웃음). 예단도 하지 않았다. 대출도 없었다. 그 전세금을 빼서 여행을 했다. 우리가 여행을 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남들이 하는 것을 다 하면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차도 사고 명품 가방을 메면서 여행까지 하려면, 우리 형편에서는 힘들다. 다른 걸 포기해서라도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어떨까, 그렇게 의기투합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를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다. 여행가기 위해 직장 그만두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두 달을 여행 간다면 어디가 좋을까.

 

직장을 그만둬야할지 물어보는 사람도 많더라. 나중에 직장 그만둔 것을 후회할 것 같으면 그만두지 마라. 이 직장이 인생 최고의 직장이라 생각한다면 계속 다녀야지(웃음). 그건 내가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정말 뭐가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다. 두 달을 여행 간다면 인도를 추천하고 싶다. 인도를 ‘인크레더블 인도’라고 표현하는데 그게 정확한 것 같다. 인도는 참 매력적인 나라다. 동네마다 색깔이 무척 달라서 갈 때마다 새롭다. 우리는 내년에 또 인도에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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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멈춤, 세계여행오빛나 저/배용연 사진 | 중앙m&b
멀쩡한 대기업에 다니던 5, 7년 차 직장인 두 남녀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9개월이 되던 어느 날 밤, 그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계획했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이 아니면 못갈 것 같아서!” 『잠시멈춤, 세계여행』은 아시아에서 남미까지 636일 간 52개국을 여행한 한 신혼부부의 여행기를 담은 책이다. 여행은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돌아온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발적 백수 부부에서 야무진 여행자 부부로 진화한 용감한 그들의 스펙터클한 세계여행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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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음악평론가 정만섭이 추천하는 ‘클래식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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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구하기 힘들다면 리이슈 음반에 주목하세요


클릭 몇 번 만으로 손쉽게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시대에도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LP 마니아다. 그들에게 음악은 흘러가 버리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약동하는 생명력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는 무엇이다. 앰프와 스피커의 최상의 조합을 찾아내려 애쓰고 오래 전 발매된 음반을 찾아 중고 LP 가게를 찾아가는 것도, 사그라지지 않는 호흡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손끝에서 음악은 다시 꿈틀댄다. 시간의 더께 속에서 한층 더 깊어진 울림을 선사한다.

 

지난 28일 저녁, 예스24와 예술의 전당은 LP 마니아들을 위한 시간을 마련했다. 작가와의 만남 ‘책 읽는 풍경’의 일환으로, 음악평론가 정만섭과 함께하는 ‘클래식 LP 감상회’를 준비한 것이다. KBS 1FM에서 <명연주 명음반>의 진행자로도 활약하고 있는 정만섭 평론가는 “무언가를 사랑하면 혼자 간직하고 싶으면서도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LP를 사랑할 수 있기를, 그들과 더 많은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클래식 LP 감상회’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LP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즐기지 못하시는 분도 많은 것 같아요. 턴테이블을 장만해서 음악을 듣는다는 자체가 어렵게 생각되는 건데요. 사실은 무척 간단해요. 턴테이블과 앰프, 포노 이퀄라이저, 그리고 스피커만 있으면 즐기실 수 있습니다. 그 외의 것들은 마니아들이 잔재미를 느끼는 부분들이지, 실제로 어려운 건 없습니다.”

 

이 날 감상회에서 정만섭 평론가는 독일의 리이슈 LP 레이블인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의 타이틀을 소개했다. 음질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혹은 음반 자체를 구하기 어려워서 아쉬워했던 LP 마니아들에게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준 것이다.

 

“흔히 초반이 더 좋다고 해서 비싼 값을 주고 구하기도 하는데요. 초반이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 많이 마모되어서 깨끗한 상태의 앨범을 구하기 어렵잖아요. 그렇다면 리마스터링 되어서 발매된 LP를 듣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스피커스 코너’ 같은 회사들의 LP를 이용하는 거죠. 물론 세운상가나 용산에 가서 중고 LP를 고르는 재미도 있지만, 어느 정도 공력이 있어야 그 안에서 진주를 뽑아낼 수 있잖아요.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가 힘들고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깨끗한 음질의 새 LP를 통해서 음악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피커스 코너’에서는 과거의 명연들만 추려서 LP로 발매했기 때문에 어떤 앨범을 고르더라도 실패하는 법이 없다는 장점도 있어요.”

 

‘클래식 LP 감상회’의 첫 번째 앨범은 루지에로 리치(Ruggiero Ricci)의 바이올린 소품집이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이 앨범에는 ‘비제: 카르멘 환타지’ ‘사라사테: 지고이네르바이젠’ ‘생상스: 하바네즈’가 수록되어 있다. 정만섭 평론가에 따르면 이 음반은 “LP의 아날로그 시스템을 점검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앨범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의미 있는 앨범이다.

 

이어서 그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가 연주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선택했다.

 

“리히터의의 앨범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이 앨범을 선택하겠어요. 일반 오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영화 테이프에 녹음을 한 것이거든요. 냉전의 장벽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리히터가 서방 세계에서 연주하면서 녹음한 앨범 가운데에서 각별히 뛰어나다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썼고 음질이 오디오 파일에 가까운 음반이에요. 프로듀서는 연주자의 연주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많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거든요. 이 음반은 상당히 묵직하게 녹음을 했어요. 리히터의 특성을 많이 살렸고 저음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정만섭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클래식 LP’


세 번째 감상 앨범이었던 ‘그리그 : 페르귄트 모음곡 (Grieg: Peer Gynt)’에서 지휘를 맡은 에이빈 피엘스타트(Oivin, Fjeldstad)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그와 같은 북유럽의 작곡가들에게는 스페셜리스트로 여겨졌던 지휘자다. 정만섭 평론가는 이 음반에서 ‘산속 마왕의 전당에 (In der Halle des Bergknigs)’ ‘솔베이그의 노래(Solveigs Lied)’를 소개했다. 그리고 “클라리넷 협주곡을 스테레오로 녹음한 음반 가운데 단연 최고”라는 찬사를 보내며 페터 마크(Peter Maag)가 지휘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을 함께 감상했다.

 

“드보르작(Dvorak)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는 정말 빼놓으면 섭섭할 음반이죠. 아마 ‘스피커스 코너’에서 나온 음반 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을 거예요. 이전에 발매된 음반들은 너무 많이 들으셔서 음질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럴 때 새로 나온 LP의 깨끗한 음질로 들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음반에는 교향곡 5번으로 적혀있는데, 슈베르트 교향곡도 8번과 9번을 바꿔서 써놓기도 하거든요. 출판 날짜와 작곡 날짜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8번 교향곡이 미완성이지만 이전에는 9번 교향곡이 미완성이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이 음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스트반 케르테스(Istvan Kertesz)가 지휘를 맡은 이 앨범은 음질도 좋고 연주도 좋고, 설명이 따로 필요 없죠.”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중 4악장을 감상한 후, 턴테이블 위에는 브람스(Brahms)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베를리오즈(Berlioz)의 환상 교향곡 음반이 차례로 놓여졌다.

 

“베를리오즈는 약학을 전공했어요. 당연히 약물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죠. 당시에는 아편을 약으로도 많이 사용했는데요. 실연을 당한 베를리오즈가 아편을 먹고 죽으려 했는데 치사량에 미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비몽사몽 상태에 빠졌는데 그 때 쓴 곡이 환상 교향곡이에요. 첫 번째 악장에서 꿈의 전경을, 두 번째 악장에서 연인이 춤추는 무도회의 전경을 그리죠. 세 번째 악장에서는 들판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여주고, 네 번째 악장 ‘단두대로의 행진’은 애인을 살해한 후 단두대로 끌려가는 장면이고요. 4악장과 함께 제일 드라마틱한 부분은 역시 5악장 ‘마녀들의 밤의 향연과 꿈’이죠.”


‘클래식 감상회’를 마무리하며 정만섭 평론가는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의 교향곡 5번과 바흐(Bach)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2번 샤콘느를 선물처럼 남겼다. 특히 므라빈스키(Jewgenij Mrawinskij)가 지휘하고 ‘스피커스 코너’에서 발매한 LP를 두고 그는 “상징적인 음반”이라 단언했다.

 

“냉전 시대에는 군사적 경쟁만큼이나 문화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대결이 치열했는데요. 므라빈스키는 서방 세계에 가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지휘함으로써 철의 장막 안에 있었던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거예요. 저는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같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직접 연주를 감상했었는데요. 그 날은 공연 끝나고 충격을 받아서 바로 집에 갔을 정도예요(웃음). 이 음반은 므라빈스키가 서방 세계에 갔을 때의 역사적인 기록이에요. 이후에는 므라빈스키가 서방 세계의 메이저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한 오케스트라를 40년 동안 독재 지배를 했는데,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죠. 그 결과 일사분란하게 포효하는 듯한 연주가 탄생했고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은 4번 5번 6번이 다 좋지만 5번 교향곡의 전주가 제일 좋아요. 특히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5번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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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뒤흔든 소금, 모피, 보석,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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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들여다보면 누구나 한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그간 발간된 세계사 책 목록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날씨가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기술의 발달이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치명적인 몇몇 인물들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만히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모습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상품의 역사를 통해 인류의 삶을 해석한 책『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 이야기』역시 그래서 흥미롭다. 저자 홍익희는 소금과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 등 다섯 가지로 세계사를 읽어냈다. 문명의 기반이 되는 도시의 발달이 소금을 통한 교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척박한 땅 시베리아를 개척한 것이 모피를 얻기 위한 강한 경제적 동인에 인한 것이었다는 사실 등 인류를 좌지우지했던 매력적인 다섯 가지가 세계사에 어떻게 기능했는지 살핀다.


지난 7월 16일 동교동에서 진행된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홍익희 저자는 가장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난과 생존


“사람들이 살기 편한 곳은 온대나 아열대 지역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문명은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온대 지역에서 모두 발현했어요.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굶어죽거나, 대비하지 않으면 얼어 죽는 기후죠. 즉 문명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곳에서 발현했습니다.”

 

토인비는 문명은 도전과 응전 속에서 발전했다고 말했다. 위기나 도전이 발전을 가져왔다는 지적이었다. 저자 홍익희는 이를 감람나무(올리브 나무)를 들어 설명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감람나무입니다. 사막성 기후에서 사는 감람나무는 살기 위해 뿌리 내리는 데만 15년 이상을 쏟습니다. 최초의 열매를 맺는 건 거의 20년이 다 될 때입니다. 바로 그 최초의 열매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름이 나오죠. 그 첫 열매에서 나온 기름을 ‘엑스트라 버진 오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왕의 머리에 바르는 데 사용했어요.”

 

고난을 극복한 생명이 강하게 진화한다. 소금 역시 고난과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인류 문명사의 가장 중요한 상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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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시작에 크게 기여한 ‘소금’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을 보자.

 

수메르문명이 발생할 수 있던 것은 야생 밀과 소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이후 메소포타미아 강 하류에 수메르문명이 꽃피면서 기원전 5300년경부터 에리두를 필두로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택, 성벽, 지구라트 등 도시 건축과 설형문자가 탄생했다.(13쪽)

 

“도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교역이 발전했다는 의미입니다. 농업, 어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서로 교환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예요. 고대는 생각처럼 그런 원시시대가 아닙니다.”

 

소금은 교역과 시장 발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금 생산지에서 멀어질수록 소금 가격은 엄청나게 상승했다. 때문에 소금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왔고, 도시는 번성했다. 소금을 사간 상인들은 소금 생산지에서 먼 곳으로 가 소금을 되팔았고 큰돈을 벌었다. 인류 최초의 도시 예리코(Jericho,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도시)가 사해 옆에 형성된 도시라는 점을 떠올리면 된다.

 

성경에서는 이 도시를 ‘종려나무의 도시’라 부른다. 지금도 예리코 오아시스 근처에는 종려나무가 많다. 일면 대추야자나무로 불리는 종려나무는 광야에 사는 사람들의 귀중한 식량이었다. (21~22쪽)

 

페니키아인들 역시 소금을 다른 민족에 비싸게 되팔면서 소금을 이들 무역의 근원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소금을 사기 위해 페니키아로 모였고, 페니키아인들은 소금을 주석과 교환하면서 유럽의 청동기 문화를 이끌게 된다. 청동기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다름 아닌 소금이었다는 사실이다.


페니키아와 자주색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페니키아’는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이란 뜻이에요. 당시 자주색 옷은 수십만 마리의 뿔고둥의 내장을 모아서 짜야 나오는 소량의 염료들로 만든 것이에요. 고대부터 가장 비싼 색의 옷이 자주색 옷이었습니다. 아무나 못 입어요. 왕족이나 추기경만 입을 수 있죠. 그래서 자주색 자체를 추기경이 색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소금은 희귀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천혜의 염전을 보유한 우리에게 소금은 다양한 식문화를 발전시킨 강력한 동력이었다. 저자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나라에 천일염이 많이 나기 때문에 흔하게 생각하지만요. 소금은 쉽게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현대에도 바다에서 만드는 천일염은 전체 소비량의 몇 퍼센트 되지 않아요. 대부분은 땅 속에서 파낸 암염을 사용해요. 우리나라 서해안만큼 드넓은 갯벌을 갖고 있는 곳이 다섯 군데 정도 되는데요. 그 중에 서해 갯벌이 가장 좋은 갯벌입니다.”

 

소금은 유럽 문명에 뿌리 깊은 영향을 주었다.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sal’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 초기에는 소금이 화폐의 역할을 했다. 관리나 군인에게 주는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다. 이를 ‘살라리움(salarium)’이라 했다. (중략)봉급을 뜻하는 샐러리, 봉급생활자를 일컫는 샐러리맨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참고로 ‘soldier(병사)’, ‘salad(샐러드)’ 등도 모두 라틴어 ‘sal(소금)’에 어원을 두고 있다. 채소를 소금에 절인다는 뜻에서 샐러드는 ‘salada(소금에 절인)’에서 나왔다. 심지어 사랑에 빠진 사람을 ‘salax’라 불렀다. 채소를 소금에 절인 것처럼 사랑에 취해 흐물흐물해졌기 때문이다.(29쪽)

 

 

세상을 움직인 ‘모피’


인간이 처음 만난 옷감은 동물의 털가죽이었다. 동물의 모피는 사냥의 기념품이자 최초의 의복이었다. (중략)모피가 신성하고 귀한 소재였던 만큼 그 값어치도 만만치 않았다. 인구가 늘어나고 공급이 제한되면서 모피는 대표적인 사치품이 되었다.(103쪽)

 

시베리아. 그 추운 땅에 섣불리 들어가려고 한 사람은 없었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뒤늦게 시베리아가 개척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모피’였다.

 

“당시 모피가 대유행을 합니다. 시베리아에 들어가서 담비를 잡으면 큰돈을 벌었어요. 모피 상인이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속도가 군대가 진격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어요. 순식간에 시베리아를 상인들이 다 개척을 합니다. 경제적인 동력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에요.”

 

미국의 서부 대륙 개척, 알래스카 개척 모두 모피로 인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한반도 인근에서는 모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시아에서 모피 동물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어디일까요? 백두산입니다. 백두산 일대에는 호랑이나 표범 등 많은 동물이 있었어요. 그 모피를 사기 위해 많은 장사꾼들이 고조선이나 발해, 고구려를 찾았을 겁니다. 고대 역사학자가 중앙아시아에서 모피를 찾아 발해까지 찾아온 길을 발견했어요. 그만큼 모피가 우리 역사에도 큰 역할을 했을 텐데 남아 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요. 그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1625년 서인도회사는 아메리카 대륙의 섬 맨해튼에 가죽거래교역소를 세운다. 모피를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그 섬에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과의 싸움도 치열했다. 책에는 ‘월가(Wall Street)’라는 이름의 탄생 배경에 관한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교회나 도로의 건설이 진행되면서 인디언의 습격을 막기 위해 통나무 벽을 쌓았다. 1653년에는 맨해튼 남단에 영국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무목책(Wall)도 세웠다. 그 뒤 나무목책이 세워진 거리와 인접한 거리를 ‘월가(Wall Street)’라 불렀다.(118쪽)

 

인간들의 모피 사냥으로 바다표범, 해달을 시작으로 현재는 밍크, 여우, 너구리 등이 치명적인 죽음을 당하고 있다. 바다표범의 경우 수세기 동안 사냥을 당한 결과 숫자가 80%나 줄어든 20세기 초부터 비로소 산업의 쇠퇴가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금만큼이나 무서운 경제적 동인으로 모피가 세계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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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과 자본주의


보석 산업이 확대된 데에는 유대인들의 영향이 컸다. 무엇보다 보석 산업은 유통의 폐쇄성이 특징이다. 그야말로 독과점 체제인 것인데, 이 체제를 유지해야 수급 조절이 자유롭고 보석의 고가정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유 시장에 맡기면 어떻게 될까요? 다이아몬드는 하루아침에 돌값이 되겠죠. 그런데 이러한 보석 시장에 중국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서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세계 2위의 다이아몬드 소비시장이며, ‘타오 바오(Tao bao)’ 등 중국의 인터넷 쇼핑몰들은 적지 않은 다이아몬드 거래가 일어나고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인터넷 쇼핑몰의 향후 발전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보았다.


한편 보석의 역사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론의 단초가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영국의 존 홉슨(John Atkinson Hobson)은 1899년 보어전쟁 취재를 위해 남아공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유대인들의 탐욕에 의해 자신의 조국, 영국이 제국주의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 후 그는 『제국주의론』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긴다.

 

“결국 이 『제국주의론』이라는 책이 레닌(Vladimir Il'ich Lenin)에게 연결이 되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낳았고, 후에 홉슨이 얘기한 ‘과소소비설’은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유효수요이론의 원형이 됩니다. 공산주의의 핵심이론과 자본주의 이론이 보석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보고 쓴 홉슨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커피의 역사


“모카커피 아시죠? 무엇을 모카커피라고 할까요? 과거 아라비아 반도에 사는 유대인들이 커피를 독점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 있습니다. 우선 절대 생두 상태로는 다른 곳에서 키우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에요. 또 수출하는 항구를 한 군데로 묶어버렸어요. 그 항구 이름이 모카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모카 항구에서 온 커피를 다 모카라고 불렀어요.”

 

1616년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몰래 들어가 커피 원두와 묘목을 밀반출해낸다. 네덜란드에 그렇게 밀반출한 커피 묘목을 재배하다 해충 피해를 입고 재배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다시 재배지를 인도네시아로 옮긴다. 그곳에 바로 ‘자바’지역이다.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커피를 전파한다. 가이아나, 수리남, 카리브 해 등에 커피를 옮겨 심어 재배에 성공하게 된다. 이 중 수리남에서 자라던 커피는 이후 브라질로 들어가는데, 책에는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로맨틱한 사연이 있다.

 

프랑스령 가이아나의 총독 부인이 화려한 꽃다발 속에 커피 묘목을 숨겨 잘생긴 스페인 연대장에게 선물함으로써 그 묘목은 콜롬비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브라질로 퍼져 나갔다.(274쪽)

 

역사를 쫓다 보면 사건이 되는 중요한 물건들이 아주 많다. 저자는 활, 마차, 펌프, 도자기, 화약, 종이, 설탕부터 비교적 근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전구, 기차, 자동차, 전화기 등이 얼마나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 아주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그 거대한 흐름 안에 우리 민족의 위치를 꼼꼼하게 살피며 좀 더 다양하고 적극적인 연구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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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 이야기홍익희 저 | 행성B잎새
기존 출간도서들과 달리, 이 책에서는 서술 대상이 되는 상품들을 우리만의 시각으로 파악해 좀 더 독자들이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야기들이 많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지금까지 유용하게 쓰이는 상품들의 역사는 단지 책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박제된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보완해 미래의 새로운 상품 교역의 활로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진행형’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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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천효정 “아이에게 독서를 억지로 시키는 건 지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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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5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천효정 작가와의 만남’이 열렸다. 천 작가는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삼백이의 칠일장』으로 제14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을 수상했고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 『도깨비 느티 서울 입성기』『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 『아기 너구리 키우는 법』『첫사랑 쟁탈기』등의 책을 펴냈다. 이날 초등학교 1~4학년 학생들과 부모 등이 함께 모여 천효정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 대부분 천 작가의 책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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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_ http://ch.yes24.com/Article/View/25731

 

 

아이의 독서 지도는 이렇게

 

천 작가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쓰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교사로 일한 것은 9년이 됐는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이었다. 천 작가도 그전에는 독자였고 독자로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 있으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생겼다. 자신이 잘 쓸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아이들을 잘 관찰해봤다. 학교에 있다는 것이 좋은 장점이 된 셈이었다.


 
“아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살펴봤다. 많은 아이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더라. 그래서 아이들이 읽는 무서운 이야기를 읽어봤다. 문방구에서 파는 500~600원짜리였다.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잔인하고 야했다.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겠더라. 읽을 게 없으니 이런 걸 읽고 있구나 싶어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썼다. 『도깨비 느티 서울 입성기』가 첫 책이다. 어떤 아이는 읽다가 울었다고 하더라(웃음). 즐겁게 썼고,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줬다.”

 

교사와 작가는 통하는 면이 많았다. 그는 글감을 아이들에게서 계속 찾았다. 아이들을 관찰해야 하는데, 그냥 관찰이 아닌 깊은 관찰이 필요했다. 그는 아이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깊이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쓸 시간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교사와 작가 2개를 함께 하다 보니 외려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전했다. 

 

관찰하다보니 아이가 주변에 비해 늦는 것 아니냐고 안달하는 부모가 있다. 천 작가도 실제로 자신의 아이의 말이 늦어져서 걱정을 많이 했다. 두 돌이 지나도 말을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주변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둥 가만있지 않았다.

 

“요즘 엄마들은 주변에서 가만두질 않아서 너무 힘들다. 모든 게 때가 있는 것 같다.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변에 여섯 살짜리 아이가 말을 잘 못해서 주변에서 난리였다. 더구나 아이의 엄마가 필리핀에서 온 분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태평한 거라. 1년이 지나고 아이는 2개 국어에 능통해졌다. 말하는 게 다소 늦었을 뿐이다. 기다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천 작가는 독서 지도에 대한 학부모들의 문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독서 지도에 대한 상담을 하면서 많은 학부모가 만화만 읽는다는 고민을 토로한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학습만화’라는 타이틀을 단 책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는 아이가 만화를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말했다.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

 

“만화를 보다가 줄글로 옮기는 아이들도 많다. 강요할 일도 아니다. 우리 집에도 만화가 많은데 나는 많은 영감을 만화에서 받는다. 아이에게 만화가 아닌 직접 책을 고르게 하면 그림이 많은 만화 비슷한 책을 고르는데, 그게 시작이다. 생애주기 독서 그래프를 보면 초등학생들이 많이 읽고 중고생 때 급격하게 떨어지다가 어른이 되면 바닥을 친다. 어렸을 때 너무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면 질리거나 정이 떨어질 수도 있다. 독서는 평생을 해야 할 일이다. 조금씩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도와줘야 한다. 독서를 억지로 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Q&A

 

미리 인터넷을 통해 받은 질문과 현장 질문 등에 대해 천효정 작가가 답을 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아기 너구리(『아기 너구리 키우는 법』)는 어떻게 사람이 되었나?

 

너구리 시리즈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중에 썼다. 너구리는 원래부터 사람이 될 씨앗을 갖고 있었다. 의도하고 썼던 부분인데, 아기너구리가 너구리 분유가 아닌 사람 분유를 먹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게 복선이라고 생각하고 썼다. 아기너구리는 원래부터 사람이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나?

 

나는 시골 깡촌에서 자랐다. 언니, 남동생 모두 심심하게 자랐다. 그런데 이들 중에 유독 나만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집에 어린이 책이 많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읽던 한자가 섞인 책도 읽었다. 초등학교 도서관은 너무 작아서 책이 많지 않았는데 도서관에 있는 책도 다 읽었다. 특히 반공책의 열렬한 팬이었다(웃음). 그렇게 책을 많이 보면서 자랐다. 작가의 꿈이 생긴 것은 얼마 안 됐다. 평생 독자로 살 수 있었고,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읽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이 나오니 쓰는 즐거움이 그에 못지않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나를 위해서 쓴다.

 

중학교 동생이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매일 3시간씩 쓰고 있다. 어떤 조언을 해주면 좋을까?

 

중학생 동생이 매일 3시간씩 쓰고 있다면 나중에 좋은 작가가 될 것이다. 나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열심히 쓰다 보니 이렇게 작가가 됐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습작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던 사람 중에 지금 작가가 된 사람은 나밖에 없다.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열심히 쓰고 있다면 다른 조언은 필요하지 않다. 자기만의 글쓰기를 하면 된다.

 

아이가 책을 속독으로 읽는다. 그래도 괜찮을까?

 

나도 속독으로 한다. 덕분에 어릴 때 초등학교 도서관의 책을 다 읽은 거 아니겠나. 물론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아이는 정독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속독을 한다. 정독을 하든지 속독을 하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독서에서 가장 좋은 것은 즐거움이다. 즐겁게 읽고 있다면 괜찮다. 대개 속독을 해도 어떤 책에 대해선 정독하기도 한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역사책에 관심이 많다.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선 창작 동화 같은 것을 읽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창의성에 대해서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창의적인 사람의 표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를 말하는데, 그 사람이 초등학교 때부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아니다. 창의적인 아이로 키운답시고 대한민국 교육이 미쳐 돌아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지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을 쓰려고 걱정하지 말고 내 식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기초적으로 해야 할 것을 해야만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게 좋은지, 여러 책을 한 번씩 읽는 게 좋을까?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럴 만한 책이라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책을 계속 읽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재밌어서 책을 여러 번 읽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아이의 성향이고 좋고 나쁘다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사람이 통찰이나 지혜를 얻는다고 하는데, 나는 주로 자기 계발서를 읽는다. 인문, 역사, 철학 등의 책을 읽는 게 더 좋을까?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중에는 자기계발서를 쓰레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문, 역사, 철학 등의 책을 읽으면서 남는 구절이나 문장이 있을 수 있다. 자기계발서도 그런 게 있다. 그렇게 한 문장이라도 남을 수 있는 책이 좋다고 본다. 『배려』라는 책을 보면서 ‘배려를 할 때는 작은 배려를 해라’는 문장이 내게 남았는데, 그 덕을 많이 봤다. 좋은 철학서를 읽었을 때도 한 문장이 남지만 자기계발서도 그럴 수 있다. 자기계발서가 안 맞는 사람도 있고 철학이나 인문 책도 마찬가지다. 자기에게 맞는 책을 읽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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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쟁탈기천효정 글/한승임 그림 | 문학동네
『첫사랑 쟁탈기』는 제14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과 비룡소의 스토리킹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대형 작가의 탄생을 예고했던 천효정의 신작입니다. 어린이문학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등장한 작가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며 다양하게 진화하는 작품 세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되는『첫사랑 쟁탈기』는 단숨에 읽히는 유려한 문장과 빠르게 전진하는 서사, 사랑스럽고 입체적인 인물 설계와 가볍지 않은 메시지까지 천효정의 장기가 빠짐없이 발휘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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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허먼 멜빌, 박상륭, 하일지 『내가 사랑한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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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나라의헌책방이라는 이름은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그곳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그곳 주인장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다.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주인장이자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의 저자 윤성근,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서가다. 애서가기도 한 그의 책 읽는 방식은 아주 다양해서, 그저 이야기를 따라 읽어 내려가는 방식뿐만 아니라 문장을 곱씹고, 원문을 찾아보고, 이야기와 관련 있는 다른 책들, 이를 테면 철학이나 역사책들을 함께 읽는다. 자연스럽게 책이 책을 불러오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읽을 책들이 너무 많다.


지난 8월 27일, 이상한나라의헌책방에 독자들이 모였다.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더없이 아늑한 공간이었다. 이야기는 짧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독자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먼저 헌책방 주인장이자 저자 윤성근이 시간 내 찾아와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며 말문을 열었다. 

 

“이곳을 카페라고 알고 계신데, 카페는 아니고요. 헌책을 사고파는 헌책방입니다.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곳이죠. 경우에 따라서는 정가보다 비싼 책도 있긴 하지만요. 여기서 책을 많이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도 많이 쓰게 되고, 책도 많이 읽게 돼요. 지금까지 책도 여러 권 냈는데 이런 책은 꼭 한 번 내보고 싶었어요.”

 

 

음악적인 문장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다양한 문학 작품들의 첫 문장과 그에서 비롯되는 작품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오스카 와일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란츠 카프카, 허먼 멜빌, 장 폴 사르트르부터 이상과 박상륭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독서편력이 엿보이는 다양한 목록들이 눈에 띈다.


왜 첫 문장인가. 저자는 알파벳 문화권이 문장을 다루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서 시작했다.

 

“첫 문장이라고 하는 것은 외국 문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거든요. 알파벳 문화권에서는 시를 쓸 때도 문장의 리듬, 운율을 굉장히 따졌어요. 학교에서 배우잖아요. 각운, 미운, 이런 것을 그 문화권에서는 굉장히 맞춰서 썼습니다. 시뿐 아니라 소설에서도 그런 것을 많이 맞춰서 쓰려고 했어요.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사실 본래의 맛이 잘 안 나죠. 이 책, 특히 롤리타의 첫 문장은 원문을 표시했어요. 한글로 읽어도 아주 괜찮은 첫 문장이지만 이 맛은 정말 원어로 읽었을 때 알게 돼요. ‘T’로 미운을 맞춰서 문장을 쓰거든요. 그 단어들로 써내는 게 굉장히 특이하고 시적으로 읽혀요.”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이렇게 이어지는 첫 문장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소설의 첫 시작보다 아름답고 달콤하다. 험버트는 롤리타의 이름을 발음한다. 그래, ‘발음’한다. 롤리타의 외모나 나이, 성격,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이름을, 혀끝에 감각을 집중하고 그 이름을 부른다.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을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중략)“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우리말로 옮긴 것을 읽었을 때는 알 수 없지만 원문엔 시처럼 운율이 있다.(147~148쪽)

 

또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첫 문장을 쓴 국내 작가로 박상륭을 꼽았다.

 

“우리말의 운율, 문단의 구조들을 굉장히 음악적으로 표현을 해서 그 안에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분들의 작품을 읽으면 내용을 떠나 그런 아름다움을 감상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줄거리와 사건 중심의 책읽기가 조금 지루해졌다면 저자가 제안하는 책읽기를 시도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 하나를 곱씹어보는 것, 사투리를 잘 다룬 작품을 읽어보는 방법 등이 가능할 것이다. 

 

“책은 이제 더 이상 재미로 읽는 매체는 아니에요. 처음에는 재미로 접근하지만 어느 정도 읽으면 재미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외의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해요. 그중에 문장에서의 운율을 느끼는 방법이 있겠죠.”

 

때문에 저자는 어떤 작품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그 작품의 원서를 찾아보기를 권했다. 전체를 원문으로 읽는 것이 무리라면 반드시 전체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문장의 원문을 찾아 읽어보는 것은 풍성한 독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실제 저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카프카의 『변신』의 독일어 원작 읽기를 시도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작품에 한결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었다.

 

“원문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그 작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는 힘들어요. 전체가 힘들다면 정말 좋아하는 문장, 그것도 아니면 제목만이라도 원제목을 찾으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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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Werwandlung, 변신? 변태!


『변신』은 독일어로 ‘Die Werwandlung(Verwandlung은 ‘변신’이라는 뜻이지만 동사로는 ‘변태’의 의미도 포함한다)’이다. 이걸 우리말로 옮길 때 ‘변신’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 단어가 ‘변신變身’보다는 ‘변태變態’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30~31쪽)

 

“카프카의 『변신』을 찾아보세요. 원제목은 ‘변태’라는 의미도 포함된 단어인데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변신’이 아니라 ‘변태’를 한 것이라고 인식했다면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상황이 또 다르게 느껴져요. 변신이 어떤 사물로 바뀐 것이라면 변태는 이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카프카 역시 책 표지에 벌레 그림을 넣지 말라는 당부를 했었어요. 책을 읽을 때 내용이나 줄거리, 이런 것만 읽는 게 아니라 이런 조그만 디테일에 관심을 갖고 읽어보면 다른 재미가 있어요.”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작품들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다른 요소들에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허먼 멜빌의 『모비딕』첫 문장으로 넘어갔다.

 

“천 페이지 가량 되는 엄청 긴 책인데 첫 문장은 무척 짧아요. ‘Call me Ishmael.’ 세 단어예요. 그런데 그 첫 문장이 최근 <아메리칸 북 리뷰>에서 1위를 했어요. 미국 문학 작품 중 최고의 첫 문장으로 꼽힌 거죠. 이 문장을 보면 바로 거기서부터 궁금증이 유발돼요. 왜 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을까, 이것이 첫 번째 의문이고요. 두 번째 의문점은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왜 Ishmael일까, 세 번째는 본명은 무엇일까 하는 거죠. 『모비딕』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본명이 나오는데 혼자만 가명이거든요. 이 모든 것이 다음 이어지는 천 페이지에서 모두 해소가 되고 그게 굉장히 커다란 주제를 갖고 있는 거예요.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달라는 단순한 첫 문장이『모비딕』이라는 거대한 대서사시 같은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굉장히 뛰어난 첫 문장으로 보는 거죠.”

 

책 읽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다. 저자는 직접 경험한 황당한 일화로 이를 설명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가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와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 책이 소설이라는 걸 안 노인은 버럭 화를 내며 “젊은 사람이 소설이나 읽느냐!”고 했다. 그러니 공부하는 학생들은 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 속에서 얻어내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다는 당부로 말을 마쳤다.

 

 

Q&A


국내 작품은 두 가지를 다뤘다. 그 밖에 다른 작품을 넣지 않은 이유가 있나?


원하는 모든 작품을 넣을 수는 없었어요. 절충하는 과정에서 넣고 뺀 작품들이 있었던 거죠. 쓰려고 했다 못 넣은 작품 중에 하일지의 『새』가 있었는데요. 하일지 작가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예요.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작품의 첫 문장이 “언제부터인지 새 한 마리가 A의 주위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A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입니다. 굉장히 많은 궁금증을 가질 수 있는 문장이죠. 새가 왜 쫓아다닐까, 왜 A일까, ‘언제부터’가 언제부터일까, 이런 것들이 다 궁금하죠.(웃음) 저는 이런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첫 문장이 좋아요. 이렇게 해놓고 뒤를 어떻게 감당할까 싶을 정도의 첫 문장이 좋아요.

 

책을 많이 읽을 텐데, 첫 문장을 읽고 마음에 안 들어서 안 읽는 책도 있나?


대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먼저 읽는데요. 첫 문장이 안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면 안 읽는 경우도 있어요. 싫어하는 스타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너무 평범하거나, 사람 이름이 첫 문장에 나오거나, 사람 이름 중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평범한 이름이면 흥미가 안 가요. ‘김일순 씨는 오늘 약국에 가려던 참이었다’라든지 하는 식인데요. 뒷 문장이 궁금해지지 않아요.(웃음)

 

소설을 주로 읽나?


소설을 주로 읽지만 읽다보면 필연적으로 역사서와 철학서도 읽어야 해요. 그런 책들을 곁들여 많이 읽습니다. 그 세 가지, 문사철이 맞물려서 가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지치지도 않고, 덜 지루해요. 소설만 읽으면 어느 순간 지루하거든요. 저는 동시에 여러 권을 읽는 편인데요. 좋은 점은 흐름이 끊기질 않아요. 한 권 끝내고 다음 권 시작하면 다음 책을 고르다가 1~2주가 훅 가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흐름이 끊기면 다시 독서하기가 쉽지 않아요. 동시에 여러 권을 읽는 저만의 방법이 있는데요. A4 종이를 두 번 접으면 단행본에 끼울 수 있는 크기가 돼요. 백지에 중요한 내용들을 써 둬요. 그걸 책갈피처럼 끼워 두는 거죠.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책으로 돌아오면 그 내용을 보고 다시 떠올릴 수 있어요. 또 어느 정도 연결돼 있는 책들을 읽어야 해요. 예를 들어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읽어요.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프랑스 혁명 시대니까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를 함께 읽죠.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같은 철학책이라든지 말이죠. 그렇게 읽으면 더 재미있어요. 셋 중 어느 한 권이 끝났다면 다른 걸 시작하는 거죠. 소설이 끝났다면 『레미제라블』을 넣어보는 거예요. 같은 프랑스 혁명 때 소설이지만 다르니까요.

 

소설 읽기가 시간 낭비라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한데요. 태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소설을 시간의 문제로 보지 않고 공간의 문제로 인식하거든요. 시간으로 인식한다면 시간 낭비일 수도 있는 건데 저는 공간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공간이란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건 아니고요. 내 마음 속에 있는 공간, 마음의 공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그런 것이에요. 그 소설에 얼마나 시간을 써야 하느냐, 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책에 내가 얼마나 마음을 할애할 수 있느냐, 그런 개념으로 보고 있어요. 바쁘신 분들은 시간의 개념으로 볼 수밖에 없겠지만요.(웃음) 

 

최근에 읽은 책은 뭔가?


정말 따라하고 싶은 문장을 쓰는 작가가 있다면 장석주 시인의 산문 문장이에요. 굉장히 감칠맛 나고 좋아요. 최근에 읽은 책이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라는 책인데요. 무척 감명 깊게 읽었어요. 재미도 재미거니와 문장을 읽는 맛이 있어요. 소리 내어 읽어보면 더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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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첫 문장윤성근 저 | MY
누구보다도 ‘첫 시작’에 집착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자들에게 자신이 쓴 이야기를 읽게 만들고 싶은 소설가들이다. 소설가는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첫 문장을 쓰기 위해 펜을 집었다 놓았다를 수십 번 반복한다. 미닫이문처럼 독자의 마음을 스르르 열릴 수 있게 하기도 하고 또 단번에 시선을 확 사로잡는 폭발력을 갖기도 하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고심한다. 그런가 하면 첫 문장 한 줄이 소설 전체의 내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첫 문장 증후근’인 저자는 작품의 문장 사이마다 심어둔 소설가의 의도를 찾기 위해 퍼즐을 맞추듯 원문도 찾아보고, 소설가의 인생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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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 “시인의 집을 향한 여행, 결국 나를 찾아 떠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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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자 작가인 정여울의 사회로 낭독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시인의 집』은 평생 독일문학을 연구해온 저자 전영애가 그 동안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 떠났던 날들을 기록한 책이다. 정여울은 먼저 전영애 교수에게 이번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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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기까지

 

정여울: 이 책이 나오는데 거의 10년 정도 걸렸다고 들었어요.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전영애:쓰기 시작한 건 10년이 넘었지만, 오래 썼다기보다 제 망설임이 커서 늦게 나오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문단에서 활동도 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로 책이 상품이 된 시대에 적응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그게 아마 가장 큰 원인일 거예요. 제가 올해에는 학문적인 글이나 시 모두 독일어로만 썼어요. 아무래도 한글로 쓰는 경우는 문단이나 출판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염려가 되었고, 독일어로는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동안 독일어로만 글을 쓰다가, 이제 다시 제 언어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이번 책은 그런 결과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여울: 그런 과정을 들으니까 독자로서 책에 대해 더 애정이 생기는 것 같은데요. 이번 책을 읽으면서 시인이나 작가의 집을 찾아가는 여행에는 쉬운 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대부분 후미진 곳이거나 교통이 불편하니까요. 많은 작가들은 살면서 여행도 많이 하고, 태어난 곳과 죽은 곳이 다른 경우가 많잖아요. 이렇게 작가를 찾아가는 여행은 쉽지만은 않지만 갔다 오면 굉장히 많은 것들을 얻고 돌아오는 것 같아요.

 

전영애:저는 지금 말씀하신 어려운 길과는 전혀 다른 어려움이 있었어요. 찾아가는 길이 어려워서 신체적으로 고생을 한 건 없지만, 제가 들고 갔던 질문의 무게가 커서 스스로 답을 내려야만 하는 부담이 컸어요.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이틀이 된 날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하루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으로 유럽을 왔다 갔다 할 만큼 절박했으니까요. 시를 찾아갔던 것이지만 동시에 저를 찾아간 길이기도 했습니다.

 

정여울: 선생님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계셔서 시인으로서의 삶은 조명이 덜 된 것 같아요. 학자로서의 길과 시인으로서의 길을 동시에 걸으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전영애: 간단히 말씀 드리면, 저는 공부할 때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독학에 가깝게 공부했기 때문에 제가 언젠가 대학에서 가르치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제 삶이 많이 황량했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나 못 배웠기 때문에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도둑질하듯이 공부했어요. 상황이 안 따라줬기 때문에 제가 줄일 수 있는 건 저의 안락함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공부도 해야 했고, 학생들도 너무 귀한 보석 같았고, 그래서 제 글을 들고 왔다 갔다 할 틈도 염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썼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지탱이 된 것 같습니다.

 

정여울: 저도 평소 글이 없다면 과연 나라는 사람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주변 사람들이 왜 이렇게 계속 글을 쓰면서 여행을 다니냐고 묻는데 글을 쓰지 않으면 여행을 하는 이유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뜨겁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여행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언어의 힘, 그리고 시의 힘

 

평소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에 부담을 느꼈다고 전한 전 교수는, 글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감사해하는 사람이었다.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이어서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속 프롤로그 부분을 낭독했다. 그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 에스토니아 문인의 집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까지 함께 그곳에 방문한 것만 같은 기분에 젖어 들게 했다.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은 마담 몽튀페가 불쑥 “나의 탈린!”이라고 말한다. 내가 얼른 대꾸한다. “저의 탈린이기도 한데요.” 이런 말들이 저절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공항에 마중을 나와주고 한나절 시내 구경을 시켜준 플롬 교수 덕분이다. (중략) 다른 거리 쪽으로 난 문을 나서며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바로 나의 ‘부동산’이 있는 거리가 아닌가! 내가 하룻밤을 묵은 집은 바로 ‘에스토니아 문인의 집’이었던 것이다. 놀라서 다시 뛰어들어간 나는 사무원에게 얀 크로스의 책을 사들고 온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얀 크로스도 이 집에 살고 있는데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시인의 집』 23~24쪽)

 

이날 낭독회에서 전영애 교수는 한국어 낭독과 함께 유창한 독일어로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흔히 강하고 딱딱하게 느껴졌던 독일어가 전 교수의 입을 통해 나오니 너무나도 부드럽게 들렸다. 정여울은 “언어의 힘이 이런 것 같아요. 그 언어를 몰라도 울림이 좋다는 것은 느낄 수 있잖아요. 텍스트를 둘러싼 수많은 맥락, 사연들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수많은 표정, 몸짓, 목소리를 다 실어 나르는 것 같아요.”라며 낭독 후 소감을 밝혔다. 평소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언어를 알면 세계가 하나 열린다고 이야기한다는 전 교수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일화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번은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이탈리아 청중 앞에서 독일문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버거워서 강연이 끝나고 굉장히 지친 상태로 강가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 자꾸 말을 거는 거예요. 저는 너무 피곤하고 귀찮은데 자꾸만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이탈리아어를 잘 못하는 저도 다 알아 들을 정도였어요. 하늘은 푸르고 이 세상은 빛나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런 내용의 이야기였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제가 조금 싫은 내색을 하니까 이 할아버지가 떠나면서 저에게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고 다시 왼손으로 악수하고 이런 식으로 여섯 번이나 악수를 하더라고요. 강변이 굉장히 길었는데, 그분이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말만 알아듣고 뜻은 하나도 못 알아 들었더군요. 생각을 해보니까 그 할아버지는 강가에 기운 없이 앉아있는 내가 투신을 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거였는데, 제가 그 뜻을 못 알아들었던 것이죠.”

 

저자와 사회자의 낭독이 있었던 1부가 끝나고 2부에서는 독자들의 낭독 시간이 이어졌다. 낭독을 맡은 사람들은 각자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골라 조금은 떨리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갔다. 정여울은 낭독회를 마무리하면서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인의 모국어, 시인이 처한 상황, 시인을 둘러싼 모든 것을 같이 걱정하고 공감하는 일인 것 같아요. 시인들의 삶,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아름답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만 해도 알게 된 시가 열 편이 넘을 텐데 집에 돌아가서 소중한 사람에게 낭독해주신다면 많은 밤들이 따뜻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오늘과 잘 어울리는 시를 한 편 읽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라이너 쿤체 「한잔 재스민차에의 초대」, 『시인의 집』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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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전영애 저 | 문학동네
삶은 어쩌면 평생에 걸쳐 안주할 단 하나의 집을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힘겨운 대낮의 일상을 마치고 어둑해지는 길들을 지나서, 마침내 돌아가 곤한 몸을 누일 장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고 부른다. 집이 없는 자에게는 휴식이 없다. 주변을 온통 경계하느라 잠조차 편하게 잘 수가 없다.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라 할지라도, 그날 밤의 거처를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곳. 든든한 식사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곳. 그리고 마침내 구원받을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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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애란과 함께한 ‘2015 예스24 문학캠프 양평’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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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예스24가 주최하는 문학캠프가 올해는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 양평에서 열렸다. 이번 문학캠프에는 ‘한국소설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1위로 뽑힌 김애란 작가와 더불어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작가들 김성중, 손보미, 정용준 작가가 자리했다. 특히 김애란 작가는 지난 8월 4일부터 24일까지 예스24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소설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를 실시해, 전체 투표자 27,047명 중 7,820표(8.5%)를 얻으며 1위로 뽑혀 화제가 된 바 있다. 설문에 응모한 독자 가운데 약 100여명이 선정되어 문학캠프에 참여했다.

 

첫날 먼저 도착한 곳은 황순원소나기마을이었다. 올해는 황순원 탄생 100주기로 황순원소나기마을을 방문한 것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 이후 자리를 옮겨 독자들은 김성중, 손보미, 정용준 작가와 함께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소설이란 무엇인지,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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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이야기자체에 관심이 많았어”


세 작가는 독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전한 후, 제일 먼저 ‘왜 소설을 쓰게 되었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성중 작가는 “첫 소설은 소설쓰기의 말문을 틔워준 소설”이라고 설명하며 “그 소설을 씀으로써 소설을 쓸 줄 알게 되었”다고 먼저 말했다. 동경에 그치지 않고 ‘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을 때 소설을 쓰게 됐다는 것이었다.


“소재, 주제가 아니라 그 작가만의 발성, 리듬 같은 것이 생겨날 때 소설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습작품이 더 많더라도 첫 소설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쓰다 만 부러뜨린 글들이 많이 있었고, 마침표를 찍은 첫 소설이 등단작이었기 때문에 그 소설이 특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떤 시기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손보미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소설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도 세계 미스터리, 귀신 이야기책처럼 이야기 자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는 만화책을 엄청 많이 읽었어요. 그때 어렴풋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때도 소설가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아니었어요. 후에 작가가 된 후 친구가 ‘나는 네가 작가가 될 줄 알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도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걸 좋아했대요.” 

 

정용준 작가에게는 소설쓰기 이전에 독서가 있었다. 텍스트가 귀한 군대 안에서 독서는 자기 시간이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때 만난 한국 문학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전까지는 악인, 선인이 분리되고, 끝이 확실한, 해석이 쉬운 이야기들이었는데요. 군대에서 읽은 ‘이상문학상 수상작’ 같은 것들은 다 기분이 이상한 채로 끝나는 것이었죠.(웃음) 인물과 상황이 계속 생각났어요. 독서를 하면서 어느 순간 소설이란 형식이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학교에 소설 수업이 있어서 그때 처음 글 쓰는 사람을 만나게 됐죠. 소설가 이승우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렇게 멋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웃음)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과 이십 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정용준, 내 소설은 “먹기 싫은 음식”


그렇다면 이 ‘젊은’ 작가들이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은 무엇일까?


먼저 손보미 작가는 소설가 이인성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인성 선생님이 제게 ‘너는 너무 많이 쓴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단순히 작품 수를 말씀하신 것 같진 않아요. 저는 늘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하고 꽉 찬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야기 구조도 빽빽한 편이고, 단편에 비해 등장인물도 많은 편이고, 겹쳐서 일어나는 사건도 많은데요. 음식으로 치면 되게 단 음식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장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담백한 어떤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책을 덮고 나면 인간이란, 삶이란 이런 건가보다 라는 것을 아주 천천히 느끼게 하는 그런 작품이요. 길게 보면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많이 생각해요.”

 

김성중 작가 역시 손보미 작가의 답변에 이어 음식 비유로 답했다.


『보물섬』, 『지킬박사와 하이드』같은 작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제 문학적 영웅들은 모두 재미있는 소설들이었어요. 좋아하는,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의 첫 번째 모델은 모험소설이에요. 많은 인물이 나와서 함께 이런 저런 사건을 통과해나가는 『돈키호테』같은 소설이요. 그동안은 제가 뭘 잘 쓰는지 모르고, 간 맞출 줄 모르고 그냥 이런 식자재를 갖고 써보자는 생각으로 쓴 것 같아요. 써보니 이런 건 못하는구나, 하는 걸 알아갔던 것 같고요. 좋은 책은 하나의 인생을 잠깐 살아본 듯한 느낌을 주잖아요. 그런 모험이 가득한 서사를 한 번 써보고 싶어요. 물론 간 맞추기는 평생 할 거고요. 여러 식자재를 다 사용해보고 싶어요.”

 

정용준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먹기 싫은 음식”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고 전했다.


“독서를 통해 얻은 유산이 소설 쓰기에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읽으면서 배웠던 것들은 사건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기사, 에세이 등으로 인간을 다룰 수 있지만 소설만큼 그 인간을 다룰 수 있는 장르가 있나 생각이 들어요. 제 소설에서는 항상 그 인물의 실존, 그 인물이 갖고 있는 실재를 좀 다루려고 애를 썼어요. 제가 비관적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한 인물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면 다 슬프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이런 걸 쓰고 싶지 않지만 이것만 쓰고 재미있는 걸 써보자고 하면서 계속 글들이 유예됐던 것 같아요. 단편의 경우는 그렇고, 장편은 다릅니다. 장편에서는 다른 세계를 그리고 싶어요.”

 

문학의 역할, 소설 쓰는 방식 등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눈 후 독자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드물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니만큼 세 젊은 작가들이 좋아하는, 추천하고 싶은 책을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논픽션을 좋아한다는 손보미 작가는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를 꼽았다. 20대 중반 처음 읽은 그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해 『화성의 인류학자』, 『깨어남』등을 소개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들이라 곁에 두고 계속 읽는다고 설명했다. 김성중 작가는 추천해서 실패한 적 없던 소설로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소설 역사상 가장 멋있는 남자 주인공으로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을, 인생에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소설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꼽았다. 정용준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으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을,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한 책으로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과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소개했다.

 

젊은 작가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독자들은 조를 나누어 김애란 퀴즈대회를 즐겼다. 1등 조에는 김애란 작가 도서 네 권과 세계지도를, 2등 조에는 김성중, 손보미, 정용준 도서 세 권과 소설학교 책 노트를, 3등 조에는 영화예매권 2매가 경품으로 주어졌다. 독자들은 김애란 작가 애독자임을 증명하듯 작가와 작품에 관한 난이도 높은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며 실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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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의 미래, 김애란을 만나다


드디어, 김애란 작가와 만나는 시간. 독자들은 큰 환호와 박수로 작가를 맞이했다. 김애란 작가와의 이야기에는 송종원 평론가가 진행을 맡아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애란 작가는“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하고요. 요 며칠 하늘이 좋아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하늘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냈어요. ‘한국소설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1위했다는 소식에 기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했는데요. 새 책을 들고 만났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 여러분을 만나니까 빨리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약 1시간 50분 간 진행된 행사를 통해 김애란 작가의 깊은 속내와 문학에 대한 생각, 작품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김애란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작가를 문학적 방향으로 이끈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대학교 3학년 때 대산대학문학상이 처음 생겼어요. 과실에서 밤을 새워 쓴 원고를 들고 광화문까지 직접 가서 접수를 했던 기억이 나요. 접수를 하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밀려와서 함께 간 후배와 햄버거를 먹었던 기억도 나고요. 이상한 간절함과 서러움, 자기 연민이 밀려들면서 햄버거를 넘기는데 왜 그렇게 목이 메었는지요. 사심 없이 냈다가 꼭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었어요. 등단 소식이 특별했던 건 단순히 좋은 소식이어서가 아니라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과 훨씬 나쁜 소식 뒤에 온 좋은 소식이어서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문학적 간절함이 생기게 되었나?


목표를 항상 작게 잡았어요. 작가가 되겠다, 이전에 청탁을 한 번 받으면 다음 목표는 또 청탁이 있었으면 좋겠다였고요. 책을 내면 한 쇄가 다 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목표를 잡았는데요. 그게 운 좋게 이어졌어요. 그때도 직업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한예종이 배출한 스타가 장동건과 김애란이다.(웃음) 한예종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었나?


부모님은 제가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어요. 시골 분들이라 교사라 하면 껌벅 죽으셔서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하시면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무릎 꿇고 전화 받으시는 분들이신데요. 이런 학교가 있다는 건 고3 때 우연히 알게 됐어요. 당연히 반대하실 거라 생각해서 물어도 안 보고 몰래 원서를 냈어요. 합격하고 시골 삼거리에 플래카드가 붙었어요. 그때까지 말씀을 안 드렸었는데 그걸 보고 학교로 찾아오셨어요.

 

소설 속에 가족 얘기가 많이 등장한다. 각각 작품의 가족들이 일관성 있는 모습도 있는데 실제 가족 모습과 닮았나?


네. 특히 『침이 고인다』『달려라 아비』에 비슷하게 들어갔고요. 어머니는 20년 넘게 손칼국수집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발사를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세요. 「칼자국」의 배경도 실제로 있던 가게고요.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미녀와 입 맞춘 후 왕자로 변하지만 저희 엄마는 숫기 없고 수줍은 아가씨였다가 아버지와 입 맞춘 뒤에 슈퍼우먼으로 바뀌셔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부모님도 작가의 작품을 읽나?


네. 제게 글 안 썼으면 사람 구실 못했을 거라고 농담도 하세요.(웃음) 대학 때 이렇다 할 자격증도 없이 집에서 책 보고, 글 쓰고 하니까 어머니가 ‘너만 보면 답답하다’하셨다가 데뷔하고 상금을 드렸더니 ‘앞으로 글만 써라’하셨어요. 특히 어머니는 당신이 등장하는 장면 좋아하시고요. 「칼자국」에서 엄마가 죽는 장면 보고 오열하셨다고 말씀하세요. 그렇지만 연예인도 죽는 연기하면 재수 좋다더라, 하면서 쓰라고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 작품이 신문에도 나고 하니까 동네에 자랑하고 싶으신데 신문 카피들이 ‘명랑한 어머니와 무능한 아버지’하는 식이어서요. 소설일 뿐이라고 변명을 했더니 괜찮다고, 자기 이야기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먹으라고 하셨어요.

 

쌍둥이 언니에게도 소설을 보여주나?


제가 원고 보여주는 사람이 같이 사는 사람과 제 쌍둥이 언니인데요. 데뷔할 때부터 많이 보여준 것 같아요. 언니는 국문과를 나와 잘 봐주기도 하고, 자기가 고급독자라고 생색내면서 봐줘요. 바닷가가 배경이라면 제가 ‘나물 무치는 손이 야무졌다’라는 표현을 썼더니 여기는 바다니까 ‘미역 무치는 손’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도 해주고요.

 

창작하는 과정에서 정해진 글쓰기 규칙이 있나?


예전에는 낚시를 하거나 그물을 던지는 기분으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이제는 농사를 짓는 기분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네 권 쯤 내다보니 실감하고 있어요. 일단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을 활자 보는 일로 하자고 해서 신문이나 책을 보며 시작하려고 하고요. 스크랩도 폴더별로 해두고, 작은 메모들도 예전보다는 부지런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글을 쓸 때 바로 스위치가 켜지는 스타일인가? 진입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글에 집중하기 힘들어서 눈에 띄는 집안일부터 하는 편이에요. 빨래가 있으면 그것부터 개고요. 컴퓨터 부팅하듯이 몸이나 머리를 부팅하기 위해 독서기록장을 써요. 좋아하는 문장들을 타이핑하면서 몸을 풀듯이 쓰기도 하고요. 전날 써놓은 원고를 앞부분부터 다시 타이핑하거나 그런 식으로 해요. 저도 바로 들어가지는 못해요. 

 

한국 문단이 위기다, 소설이 끝났다는 말들을 한다. 문학이나 소설의 종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나?


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보다 문학적 환경이 달라진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아요. 선두에 서서 주도하거나 변화시켰던 소설의 자리는 약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고요. 그것이 만일 정치적, 경제적 환경이 바뀌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바뀐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은?’이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여전히 그 안에서 분투하고, 이야기의 지위를 갖지 못한 혹은 가져야 하는 삶은 여전히 진행되는 것 같은데 자리가 약해졌다고 해서 무의미해지거나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분투를 하나?


쾌락을 위해 쓰기도 하고요. 저 자신의 생활을 위해 쓸 때도 있고요.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이 쓴 기사를 봤는데요. 고통에 찬 사람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낸다는 표현을 한 부분이 인상 깊어 메모를 해놨어요. 이것이 어떤 대단한 대안이나 선명한 구원이 될 수는 없어도 눈 감고 시치미도 떼보고 능청도 떨면서 문장으로 꾸리려고 했어요. 소리조차 안 나는 힘든 상황들을 계속 겪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때때로 그 소리를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 말에 기대 건너는 시간들이 있을 것 같고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이것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나 전부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는 유의미한 이유 중 하나예요. 

 

작가 생활 13년, 슬럼프 온 적이 있는가? 어떻게 벗어났나?


가장 나중에 나온 책 『비행운』이란 단편집 안에 「하루의 축」이라는 단편이 있는데, 그걸 쓸 때 쯤 위기가 왔던 것 같아요. 제 얘기를 쓸 때는 활달하게 농담을 할 수 있었고, 자기검열 같은 것도 덜했어요. 힘들거나 어려워도 ‘어때, 내가 나를 가지고 낄낄대는 건데’하면 됐어요. 내가 궁금해서 썼던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쌓인 뒤에 다른 사람이 궁금해서 쓴 이야기들이 『비행운』에 묶인 건데요. 가끔 멋 부리려고 ‘타인’, ‘이해’라는 말도 했었지만 그게 간단치 않은 말이구나, 생각보다 무척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조심스럽기도 하고 상상해야 할 부분도 훨씬 많아서 그때 그랬어요. 어렸을 때 명랑한 것들은 씩씩하다고 얘기할 수 있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똑같은 전략이어도 조금 순진해보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때 생활도 변하고 해서 어려웠어요. 하지만 모든 노동에 따르는 피로, 분투들이 있으니까요. 크게 엄살 피우지도 말고 지나가길 기다리자고 생각했는데요.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어느 순간에 점프하듯 벗어나는 게 아니라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이 벗어나는 걸 느꼈어요.

 

자신의 얘기를 쓰다 타인의 얘기를 쓰면서 겪은 어려움을 말했다. 최근 작품으로 오면서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줄어든 것 같다. 소설이 어두워진 것 같은데?


첫 책의 유머러스한 부분은 엄마에게 받은 유산 같아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엄마가 농담을 하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안심됐던 기억이 나요. 저도 그 영향으로 썼다가 이게 하나의 틀로 굳어져버리면 씩씩한 나, 쿨한 나처럼 일종의 자기애로 굳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어느 때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인물의 어깨를 툭 쳐주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는 그 슬픔에 조용히 조응해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그때 소설의 소재와 형식에 맞게 쓰다보면 색깔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소설의 시작이 이미지에서 시작되는지, 소재에서 시작하는지, 화자의 어조를 먼저 떠올리는지 궁금하다.


처음 소설을 쓸 때는 단순한 이미지나 단어, 문장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단편이라 더 가능했던 것 같아요. 선배 세대에 비해 이야기 주머니가 많이 비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로 글을 꾸리는 것보다 바라보는 시선이나 표현, 문장으로 다르게 써보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아무 설계도 없이 첫 문장 쓰고, 괜찮다 싶어 두 번째 문장 쓰고, 또 괜찮아서 세 번째 문장 쓰고, 어쩌려고 이래 하는 마음이 들면서 제 불안과 싸워나가며 썼던 작품들이 있고요. 그 후에는 설계도를 준비해서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요즘은 씨앗 저축을 많이 해놨다가 꽤 자세하게 그림을 그려놓고 시작하는 편입니다.

 

작가에게도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을 것 같다.


이럴 때는 가장 최근작이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하는데요(웃음).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라는 소설이 갖고 있는 상쾌함이 좋아요. 제가 갖고 있는 이야기충동이나 이미지들의 씨앗들도 박혀있는 것 같고, 건강한 느낌도 좋아요. 딱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은 그 단편인 것 같아요.

 

김애란 작품에는 도약이 있다고 비평가들이 말한다. 희망의 기미가 조금씩은 들어있다. 소설을 통해 희망을 말하려는 욕망이 있나?


희망이란 말을 잘못 쓰거나 쉽게, 많이 쓰면 희망 가지고 장사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기 쉽다고 생각해요. 더더욱 소설 쓰는 작가들에게는 순진해보이거나 게을러 보일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희망이란 말보다는 인간 내부에 있는 이상한 선(善) 같아요. ‘이상한 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제가 그 선을 당위나 도덕, 목표라고 생각하고 쓰는 말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동시대적인 풍경들을 볼 때 이상할 때가 있어요. 힘 센 누군가가 모든 걸 빼앗아가도 그 사람으로부터 끝끝내 가져가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걸 뉴스를 보고 실감한 적이 있는데요. 그럴 때 희망이란 의당 가야하는 목표거나 당위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간신히, 어렵게 지킨 것이기 때문에 귀한 거예요. 거기까지 가는 동안 생기는 의심, 회의, 실망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의 이름이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 과시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상한 선을 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 단편에도 썼지만 그것을 평생 궁금해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작가의 인물들은 작가와 함께 성장하는 것 같다. 같은 세대의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소박하게 제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에서 출발했던 이유가 크고요. 빤히 보다보면 우리 동선 안에도 우리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어요. 변주의 욕구도 있었어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반복하면 나쁜 쪽으로 얘기하면 답습이거나 반복이거나 한계가 되고, 좋은 쪽으로 얘기하면 그 작가의 색깔이거나 깊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안에서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변주하거나 조금씩 제 시간들을 따라가 보는 뜻에서 썼어요.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무엇인가? 한 번에 한 책만 읽는 스타일인가?


고등학교 때부터 꽤 오랫동안은 한 책만 읽었고요. 좋아하는 부분은 연필로 밑줄 그으며 봤고요. 책이 더러워져야 제 것이 되는 것 같았어요. 최근에는 여러 권을 보게 됐어요. 읽고 싶은 게 점점 많아져서요. 가장 최근에는『보르헤스의 말』이라는 인터뷰집과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라는 소설을 동시에 봤는데요. 흥미로웠던 건 실제로 눈이 먼 보르헤스와 눈 먼 소녀가 나오는 소설을 함께 읽었다는 거예요. 나라와 국적이 다른 창작자가 그 환경 안에서 취했던 전략, 고민 같은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들면서요. 우연인데 그렇게 보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독자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꽤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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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학생과 교사가 함께 행복한 학교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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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학교는 민주주의 빼고는 다 있다. 즉 엘리트주의, 권위주의, 경쟁주의 등 없어야 할 것만 있는 곳이 학교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교와 교육은 변화가 아닌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학교, 협동수업, 토론수업 등이 몸에 베인 학교 등의 초석을 다진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다양한 교육 주체들과 함께 책을 펴냈다.

 

곽 전 교육감이 지난 2014년 4월부터 다양한 게스트들을 초대해 진행했던 팟캐스트 <나비프로젝트 - 훨훨 날아봐>를 묶어서 내놓은 책이 『혁신교육 내비게이터 곽노현입니다』. 이에 지난 9월 16일,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북콘서트를 가졌다. 첫 번째 손님으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함께했다.

  

노현 : 조희연 교육감은 나비프로젝트에 4회 출연해서 최다 출연자였다. 이번에 (법원 판결로) 기사회생했다(웃음). 소감 한 마디 여쭤보고 싶다.

 

조희연 :감사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많은 분들을 긴장시키고 해방감도 드렸는데, 성원해주셔서 고맙다. 이번 2심은 30% 가능성을 보고 출발했었고, 앞으로 대법은 90%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10%의 위험성이 있으니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다. 2기 진보교육감의 과제는 1기 진보교육감 시대에 시작되고 중단된 일들을 다시 세우고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책의 에필로그를 보니 (곽 전 교육감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서울의 교육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 내가 당선된 것은 혁신학교 학부모, 교사의 열정 덕분이었다. 혁신은 과거와 단절하는 혁신이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 혁신이 있는데, 이 두 혁신을 위해 곽노현 전 교육감을 고문으로 모시고 열심히 이뤄가도록 하겠다. 

 

조 교육감이 일정상 먼저 일어났다. 이어 이부영(강명초), 권재원(『학교라는 괴물』저자, <우리교육> 편집위원), 조영선(『학교의 풍경』 저자) 등 세 명의 초대손님이 함께 했다. 

 

혁신이라는 말이 생소한 사람들이 있다. 이부영 교사가 생각하는 혁신학교는 무엇인가?

 

이부영 : 혁신은 다 바꿔보는 것이다. 강명초등학교는 5년차 혁신학교인데, 정말 재밌다. 학교뿐 아니라 사회도 바꾸면 무척 재밌다. 밤새도 힘든 줄 모른다. 지금까지 하던 것에 익숙해서 편하다고 생각하는데, 바꿔봐라. 물론 같이 딸려오는 게 있는데, 힘들다. 혁신하려면 힘들지 않으면 안 된다. 혁신은 반드시 갈등을 동반한다. 그것이 견디기 힘들어서 혁신이 싫다는 분도 있으나 해보면 재밌고 가슴이 뛴다. 요즘 전국에 혁신학교에 대한 ‘간증’을 다니고 있는데, 일단 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있다.

 

혁신학교의 힘은 교사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일반학교 교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책임감이다. 내가 교사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혁신학교 교사를 하면서 진짜 교사가 됐다는 느낌을 가졌다. 혁신학교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혁신학교를 만들 때부터 교사회가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5년 동안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원래 교사는 힘들고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5년째 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도 혁신학교가 많이 생겼는데, 첫째 교사회부터 잘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사회가 살아있는 학교가 진짜 혁신학교이며, 그렇지 않으면 혁신학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혁신학교에 대한 비판 지점도 있을까? 권재원 교사는 민주주의와 시민성, 인성교육 등에 대해 여러 글을 썼는데 인성교육법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나?

 

권재원 :나는 혁신학교를 못해봤다(웃음). 다만 지금 쓰고 있는 혁신이라는 말은 바꾼다고만 하지 ‘어떻게 바꾼다’라는 것이 없다. 바꾸는 게 다 좋을까. 어떻게에 대한 연구와 합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려가 크다. 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원래 인성이다. 모든 교과가 인성교육을 위해 필요한 영역이어서 나눈 것인데, 또 인성교육이라니 옥상옥이다. 옥상옥이 생기면 초등학교가 동네북이다. 그게 우려점이다. 또 하나 인성교육법안을 보면 효, 충 등 구체적 덕목을 정해놓고 그게 인성이니 교육하라고 강요한다. 파시즘적 방식이다. 민주시민성이 빠진 인성은 신민이다. 충, 효, 경을 갖춰도 민주시민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신민이다. 그래서 인성교육법안은 신민교육법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체벌금지법 등이 시행되면서 학교의 풍경은 어떻게 바뀌었나.

 

조영선 :학교에 인권이 가당키나 해, 라는 의문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는데, 많은 혁신학교가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많은 교사가 노력하고 있다. 교사 중에도 인권을 말하는 교사가 많아졌다. 그런 희망을 만들어낸 것이 좋다. 만약 학생들이 되바라지는 경우는 교사가 공격을 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공격을 교사에게 풀거나, 둘 중 하나다. 폭력은 어디서든 표출되기 나름이다. 내가 학생에게서 도전을 받으면 (그 학생이) 어디서 이런 분노를 경험했을지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요즘 민주주의라는 말이 새롭게 들리고 있다. 특히 학교민주주의에서 학교와 민주주의를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학교민주주의란 무엇이며 선행돼야 할 점은 무엇일까?

 

이부영 : 학교는 권위적이다. 교사는 교장이 지시하고 전달하면 따르는 구조이나 그렇게 돼선 안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위아래가 아닌 하나의 역할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교장의 말이라면 앞에선 무조건 따른다. 교장의 권위에 복종하는 교사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권위적이다. 혁신학교 5년 동안 나를 성찰해보고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교사회 덕분이었다. 교사회는 토론하는 과정이다. 오래도록 다양한 의견을 듣는다. 덕분에 교사들의 성장을 많이 봤다. 교사회에서 상대를 배려하면서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교실에서도 그렇게 하더라.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는 가짜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교사가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 때 교실에서도 민주주의가 나타난다. 그게 당장 어려우면 기다려주고, 그것이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교사의 태도가 변하고 남도 인정해주는 것을 느끼고 있다.

 

댄스공연 후 삼각산고등학교 혁신기획부장을 거쳐 최근 퇴직한 김정안 교사, 삼각산고등학교를 1기를 졸업한 오세리 씨가 나왔다. 서울의 혁신학교에는 중고등학교가 11개 있는데, 처음 시작한 세 개의 고등학교 중 하나가 삼각산고등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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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언급했는데 왜 삼각산고등학교가 최고인가? 모둠 수업에 대해서도 얘기해달라.

 

오세리 :학생이 행복한 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가까워서 선택했는데 그 삼각산고에서 보낸 3년은 깜짝 선물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것이 모둠 평가였다. 모둠 수업을 통해 협력하는 것을 배웠다. 2학년 때 친구가 다른 친구 손을 잡고 같이 하자고 했는데, 나도 수업 시간에 누워있는 친구에게 같이 하자고 따라해 봤는데 결과가 훨씬 좋게 나왔다. 밖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거나 교사를 인터뷰하는 등 다양한 좋은 교육을 받았다.

 

삼각산고등학교의 수업방식 중에 일반 학교에 전파할 만한, 전파하고 싶은 게 있다면?

 

김정안 :우리가 한 것은 일반 학교에서 다 했으면 하는 것들이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수업 방법이고, 교사가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교사와 학생이 함께 참여하고 지식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이 스스로 학교의 주체가 되고 공부하는 역량이 자라나는 수업이 모둠 수업이다. 학생이 중심이 되는 수업이고, 이런 것 모두를 권하고 싶다.

 

일반고 살리기의 해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김정안 : 우선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야 한다. 학교가 스스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이다. 학교는 혼자 바꿀 수 없다. 학교 구성원 전체가 함께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집단지성이나 어떻게 중지를 모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교사들이 존중하고 협력하는 문화를 만들고 학생,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학교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구조 개혁 등도 시작해야 한다.

 

곽노현 : 고등학교에서 혁신교육을 시도하려는 생각 자체가 어려웠다. 성공했다고 얘기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데, 삼각산고는 어느 정도의 노력을 경주했을까.

 

김정안 :쉰여덟 살에 혁신학교에 갔다. 진짜 학교에 가고 싶었고, (교사로서) 내 자신이 존중받고 싶었다. 동료 교사, 학생도 존중하고 싶었다. 학교를 바꾸면 세상을 바꾸는 힘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고등학교가 혁신에 성공해야만 초중학교의 혁신이 힘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면서 신이 났다. 교사를 믿어주는 풍토가 만들어졌고 우리가 힘을 합치면 학교를 바꿀 수 있음을 목격했다. 삼각산고 1기 졸업생들이 만든 문집이 <삼용이>인데 ‘삼각산에서 용이 된 아이들’을 뜻한다. 아이들이 그만큼 성장했고 그것을 느꼈다. 혁신학교를 만들어줘서 고마웠고 야근을 밥 먹듯 하지만 교사로서 이렇게 행복한 시절은 없었다.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책임지는 참여민주주의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곽노현 : 삼각산고가 어떻게 용으로 만들어줬나? 협동수업을 1년 반쯤 경험하고 보니, 처진 학생들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고 했다. 어떻게 바뀌었나?

 

오세미 : 대학에 와서 다른 학교 출신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가 삼각산고에 오지 않았다면 가치관이 이상해졌겠구나 생각했다. 삼각산고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지원해주는 교사만 있었는데 성적이 모든 판단 기준이 된 학교에서는 내가 잘못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인격적으로 성장한 부분이 내겐 용이 됐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에서 수업 중에 놀고 자는 친구를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삼각산고에서는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깨달았다. 그런 친구가 나보다 더 똑똑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보고 내가 친구들을 이렇게 봐선 안 되겠구나 느꼈다.

 

곽노현 : 김정안 교사는 혁신학교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어떤가?

 

김정안 : 혁신학교 교사를 경험하고 은퇴한 것이 내겐 엄청난 행운이다. 교육으로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이론이나 희망이 아닌 실제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나는 평교사로 퇴직했는데, 평교사로 느낄 수 있는 자부심이라면 보람된 일을 하고 퇴직하는 것인데, 나는 그렇게 퇴직했다. 모두가 함께 주체가 되는 것이 혁신학교다. 함께 학교를 만들고 바꿔가는 것이 아이들이 미래 사회에 당당하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나비프로젝트의 마지막 초대손님이기도 했던 박재동 화백이 등장했고 노래 한 곡을 불렀다.

 

박재동 :곽노현 전 교육감이 ‘문예체(문화예술체육) 르네상스’라는 말을 썼다. 국영수 암흑기 혹은 압제에서 문예체가 다시 꽃을 피우는 르네상스의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곽 전 교육감을 처음 만났을 때 교육감 선거에 나가게 됐다고 고민을 하는데, 될 것 같았다(웃음). 그래서 6~7시간 별별 이야기를 다했다. 내가 교육감 될 거 아니니까(웃음). 그러다 교육감이 됐는데 혁신학교 운영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전화가 왔다. 그때 내 생각은 하나였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중에 들어보니 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보다 더 나아가 아이를 믿고, 아이가 어른보다 낫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각해봐라. 아이들이 부모에게 내가 돈을 벌 테니 엄마나 아빠가 공부하라고 해봐라. 엄마?아빠 다 도망갈 거다. 아이들도 돈맛을 알아야 인생의 맛을 안다. 아이들에게 꿈나무라고 하지 마라. 그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미루는 것이다. 가수가 꿈이면 지금 가수하면 된다. 학급 가수를 하면서 돈을 받으면서 하면 된다. 선생하고 싶으면 지금 친구들과 학교를 만들어서 후배를 가르치고 돈을 받아라.

 

곽노현 : 지금 경기도에서 꿈의학교프로젝트를 하면서 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박재동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지상파 PD가 있는데 이 PD가 학창시절 수학천재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 대학에 입학했었다. 이 PD가 입학한 과 교수가 되게 유명한 사람인데, 수업 시간에 소설가, 시인, 영화감독, 만화가 등을 불러 이야기를 들려줬다더라. 계속 예술가들이 와서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니 이 수학천재가 왜 딴따라들 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싶어서 어느 날 교수에게 면담 신청을 했다. 면담을 했는데 교수가 말하길 자네는 수학 문제는 잘 풀지 모르지만 수학의 아름다움을 즐길 줄 모르니 수학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이어 교수는 수학자가 궁극적으로 선망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며 수학이 선망하는 경지는 예술의 경지라고 덧붙이면서 예술가에게 힌트를 얻고자 예술가를 불렀다고 말했다. 그래서 문예체가 훌륭한 것이다. 이 교수는 수학을 왜 해야 하는지 말해준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수학을 왜 해야 하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 것 외에. 수학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즐기게 되는 것, 멋지지 않나?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기는 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이다. 김민웅 교수도 말하길, 공부를 왜 하느냐.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대. 돈도 벌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는 것. 우리는 지금 공부하는 목적을 재조정하고 설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강민정 북서울중학교 교사와 이찬승 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이 무대에 올라 곽 전 교육감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찬승 대표는 본격적으로 교육운동에 투신한 지 6~7년 됐는데, 어떤 내용인지 공유해 달라.

 

이찬승 : 책에서 곽 전 교육감이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위한, 공공성에 의한, 공공성의 교육을 강조했다. 나는 글자 하나만 바꿔 공정성을 위한, 공정성에 의한, 공정성의 교육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의 교육 틀에 갇혀 살아가다보면 교육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수 없다.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성적을 기준으로 한다. 그 성적이 능력을 우선적으로 뽑겠다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의 경제력이나 문화자본 등이 포함된 성적으로 뽑겠다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고등학교로 가보자. 상대평가를 하려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공부가 아닌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해서 평가를 내려야 한다. 1등급도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깔아주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나이가 같다고 같은 반에서 똑같은 내용의 공부와 시험을 보게 한다. 사람들 각자가 자신만의 재주가 있는데, 우리 (교육) 체제는 지독하게 불공정하다. 정의롭지 못하다. 나는 대안을 찾기 위해 기업을 팔고 운동을 하고 있다.

 

곽노현 : 이 대표는 기업(능률교육)을 크게 운영하다가 불공정과 부정의, 교육격차 문제를 제기하면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의 아이들이 부모 자본 때문에 뒤처지지 않는 교육구조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천착하고 있다. 또 교사들은 수업 외에 학교에서 무척 바쁜데 학교업무 정상화에 대해 강민적 교사가 한 말씀 해준다면. 

 

강민정 : 조직의 체계는 조직이 가진 목표의 부산물이자 반영물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의 조직 체계는 교육을 하는 체계가 아니다. 그래서 곽 전 교육감 때, ‘교원 업무 정상화’라는 정책이 나왔다. 사실 교사가 수업만 하는 게 아니다. 굉장히 많은 행정업무를 본다. 혁신학교에 대해 교사들이 뭘 바꿀지 고민하면서 많이 나온 사안이 교사가 교육만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학교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방과 후 돌봄교실 등도 그렇다. 울타리 바깥의 마을과 공동 협력 교육을 해보자며 혁신교육지구도 시행하고 있다. 학교 바깥의 사적인 영역에서도 교육이 이뤄지는데 공공성을 지닌 교육이 이뤄지는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차원이다. 아이들 교육을 함께 고민하는 어른들을 조직하고 실천적인 교육을 하는 과정이며 각자 자신의 일을 해온 사람들이 교육을 목표로 서로를 이해하는 민주주의의 훈련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혁신교육지구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이찬승 :내년 총선 등을 앞두고 어떤 교육개혁 담론이 필요한지 생각해봤다. 낡은 것을 없애고 신선한 것, 오늘날 교육문제를 잉태한 원인을 제거하고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담론의 화두가 ‘표준화’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은 표준화된 음식 먹고 싶나?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교육은 표준화가 돼 있다. 물론 과거에는 교육과정과 평가의 표준화가 필요했다. 표준화를 하고 보니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만들어졌다. 성취 기준에 도달했는지 아닌지를 국가가 예산을 갖고 관리할 권리가 있는 거라. 학교를 비교하면서 모든 교육은 시험 중심의 교육으로 갔다. 교사들은 전문성을 개발할 이유가 없었다. 일제고사, 수능 등 모든 것이 표준화돼 있어서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표준화를 완화하거나 아이들의 성장 수준, 흥미, 욕구, 비전, 목표 등에 따라 개별화, 더 나아가 개인화된 커리큘럼을 짜는 것이 공정화 된 교육이자 우리가 꿈꾸는 교육이 되지 않을까. 국가가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기제가 되는 표준화에 대해 생각해보고 완화하고 없애야 한다. 표준화가 장점도 있지만 우리 교육이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탈표준화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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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교육 내비게이터 곽노현입니다곽노현 편저 | 맘에드림
서울시 18대 교육감이자 첫 번째 진보 교육감으로서 혁신 교육을 펼쳤던, 이 책의 저자 곽노현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우리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주요 교육 현안들을 이 책에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2014년 3월부터 1년간 방송된 교육 전문 팟캐스트 ‘나비 프로젝트’ 인터뷰에 출연한 전문가들과 나눈 대화와 그에 대한 저자의 성찰적 후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우리가 ‘지금 알아야 할 최소한의 교육 이야기’를 포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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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맞는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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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좋은 생두를 고르고 갓 볶은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소비하는 것이 좋다. 로스팅을 한 원두는 대체로 보름에서 한 달 반 정도가 지나면 맛이 떨어진다. 따라서 신선한 커피를 즐기려면 그 기간 안에 자신이 소비하는 커피의 양을 알아보고 그만큼만 준비하고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다. 또한 커피 기구들도 청결하게 관리해야 한다. 음식을 먹고 나서 다음 끼니를 위해 우리가 늘 설거지를 하는 것처럼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이용했던 기구들 역시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커피를 음식으로 생각한다면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이들이 지켜야 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관리이다.”(13쪽)

 

커피 로스팅 공장이자 커피 관련 연구개발(R&D)과 기업 컨설팅을 하는 ‘로스팅마스터즈’ 대표이자 『커피 마스터클래스』의 저자 신기욱이 정성스레 커피를 내려준다. 커피향이 가득하다. 좋다. 한 모금씩을 머금자 맛있다는 감탄사도 터져 나온다. 지난 9월 8일이었다. 서울 당인동의 로스팅마스터즈에는 신기욱 대표의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게 된 운 좋은 독자들이 모였다. 『커피 마스터클래스』 개정판 출간기념으로 마련한 커피토크. 신 대표는 커피를 내려주면서 자영업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부터 풀었다.  

 

“자영업 2년 내 생존율이 5% 내외라는 통계가 있는데, 20명 당 1명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서울대 경쟁률이 15대1인데, 15명만 제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잖나. 자영업도 마찬가지다. 자영업은 정말 독하게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커피를 해보자, 플라워를 해보자, 이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하곤 하는데, 어떤 일이든 5년 이하로 일한 사람이 성공하긴 어렵다.”

 

그는 커피도 요식업의 하나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여느 요식업처럼 재료와 요리, 손님 반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재료를 좋은 것을 쓴다고 전제한다면 어떤 요리를 줄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그게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손님) 반응을 보면서 맞출 줄 알아야 한다. 커피도 마찬가지. 커피가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나 이를 감안하면 그렇진 않다.

 

“유기농식당이라고 하면 대개 맛없는 집이라고 찍힌 경우가 있다. 커피든 다른 음식을 제공하든 (손님의) 삶을 책임지는 건 아니다. 위로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손님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커피를 잘 만드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즐겁게 먹도록 만들 것인가를 연구하는데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하다. 그것을 위해 첫째 깨끗하면 된다. 즉 위생이다. 위생을 유지하고 약품을 쓰는 방법이다. 둘째 손님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커피를 맛없게 만드는 방법도 연구한다.”

 

그는 대학교 근처, 큰 잔에 커피를 파는 가게 대부분이 쓰고 맛없게 만드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맛있게 만들면 약 먹은 느낌이 나지 않기 때문이란다. 커피를 마셨을 때 확연하게 쓰고 괴로워야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단다. 그가 대표적으로 꼽은 곳이 노량진. 커피가 부드러우면 장사가 안 된다는 것. 노량진에 위치한 로스팅마스터즈의 거래처가 있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커피를 썼다. 매출이 잘 나오지 않자 거래처에서 커피를 태워 달라고 요구했다. 맛이 없어졌음에도 이 거래처의 매출은 두 달 만에 4배 높아졌다. 맛있고 좋은 커피가 아니었지만 그곳에 맞는 커피였다. 

 

 

커피의 향미는 어떻게 발현되는 것일까

 

신 대표는 이날 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추출했다. 드리퍼만 있다면 집에서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커피 추출방식이다. 일본식 드립과 미국식 드립이 다르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크게 다를 바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식은 물을 많이 붓고, 일본은 물줄기를 조심스럽게 붓는 차이가 있다는 견해에 대해 그는 의미 없다고 전했다. 커피 가루가 나오지 않게 만든 것이 드립 방식이며 다만 손으로 하므로 할 때마다 다른 맛이 난다는 것. 그렇다면 커피의 향미는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로스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녹색이나 갈색의 생두가 로스팅 되면서 캐러멜라이징, 마이아르 반응을 보인다. 캐러멜라이징은 당류, 과당 등이 열을 받아 색깔이 변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의 양은 우리가 느껴질 만큼의 양이 아니다. 마이아르 반응은 비효소적인 갈변이라고 말하는데, 빵 껍질이 구워지는 반응이라고 보면 된다. 당과 아미노산, 유기산, 지방산 등이 결합해서 나타난다. 이는 요리에서도 드러나는데 고기를 구울 때가 대표적이다. 누룽지도 마이아르 반응이 나타난다.”

 

커피에는 이렇듯 캐러멜라이징, 마이아르 반응을 하는 성분이 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꺼내기 위해선 물이 필요하다. 또 커피는 로스팅을 거치면서 카페인 성분이 나온다. 카페인은 어지간한 열에 파괴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로스팅을 강하게 했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나 아주 뜨거운 물에는 카페인 입자가 오징어처럼 비틀어질 수 있다. 이것이 비틀어지면 독특한 향이 생기는데 너무 높은 온도에 추출하면 타이어나 고무 타는 향이 나므로 주의해야 한다. 신 대표는 커피를 추출하기 위한 이상적인 온도는 92도라고 설명했다. 92도를 넘으면 변성이 시작되며, 추출률은 좋지만 커피를 맛있게 만드는 온도는 아니라는 것.

 

“카페인이 든 음료 중에 녹차가 있다. 커피보다 카페인 변성이 적은데, 전기포트의 물을 팔팔 끓자마자 부으면 녹차 맛이 씁쓸하다. 녹차는 84도 이상이면 카페인이 변성된다. 홍차는 98도면 카페인 변성이 일어나는데 높은 온도에서 추출해야 충분히 성분을 끌어낸다. 이것만 알아도 음료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발효된 차는 높은 온도, 발효되지 않은 차는 낮은 온도에 추출하면 좋다.”

 

그렇다면 커피는 어떻게 하면 맛있게 추출할 수 있을까. 커피의 양과 물의 온도도 중요하지만 커피 향미를 조절하는 중요한 요소는 분쇄(굵기)다. 만약 커피콩을 분쇄하지 않고 달인다면 구수한 차가 나온다. 반면 분쇄할 때도 굵기에 따라 향미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래서 추출 방식에 맞는 적절한 굵기가 중요하다. 드립으로 내릴 때는 깨 한 알 정도의 굵기, 커피를 잘 컨트롤 할 수 있다면 깨 반쪽 정도라도 좋겠단다. 

 

“커피의 ‘맛’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자신의 취향이나 개성을 살리기 위한 방법은 꼭 이상적인 기준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커피 맛은 로스팅 정도, 커피 입자의 굵기, 물 온도, 추출 시간 등 여러 가지를 조절함으로써 달라지는 것이다.”(14쪽) 

 

반면 에스프레소용 커피는 설탕입자보다 가늘게 분쇄를 한다. 에스프레소를 뽑기 위해 필요한 압력은 9기압이다. 이는 300kg의 힘이다. 드립커피는 그런 압력이 없다. 따라서 에스프레소만큼 갈아서는 효율(맛)을 낼 수가 없다. 따라서 에스프레소만큼 가늘게 분쇄하지 않고 그보다는 굵게 분쇄한다.

 

“에스프레소는 높은 압력으로 기포조차 밀어낸다. 크레마는 가스가 밀려나오면서 기름과 함께 나오는 것이다. 드립커피보다 에스프레소가 향이 강하고 맛이 쓴 이유가 지용성 성분까지 뽑아내기 때문이다. 삼투압은 물이 이동하는 것이고 확산은 용질이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인데, 에스프레소는 확산이 일어나서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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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붓기가 중요한 이유

 

물을 잘 붓는 것만으로도 커피를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커피를 고르게 적셔주고 커피와 물이 효율적으로 만나야 한다. 만약 드리퍼에 담은 커피의 같은 자리에만 물을 부으면 잘 우려지지 않아서 나무 맛만 날 뿐이다. 즉 팬 놈만 패는 건 좋지 않다는 것. 지그재그건, 별모양을 그리건, 원을 그리건 물과 원두를 잘 섞어주면 좋은 향미를 낼 수 있다. 커피 추출 단계별로 맛을 보면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맛이 나오지 않는다. 좋은 성분은 앞에서 녹아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쓴맛이 더 많이 나온다. 

 

“커피 향미는 추출할 때 앞선 단계에서 좌우된다. 뒤는 잡미, 쓴맛 등을 담당한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려면 확산이 앞에서 강하게 일어나야 한다. 앞을 효율적으로 추출하고 뒤의 것을 줄이면 된다. 물을 때려 부어도 된다. 30초 동안 사전추출하고 확산 준비를 한 뒤 물을 확 부으면 확산과 용해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1분 10초 내에 끝나게 해보자. 물에 닿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나무 맛이 약할 수밖에 없다. 커피는 정성들여 뽑기보다 어떻게 뽑아낼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커피 맛의 형태를 알고 설계해서 어떻게 그 맛을 끄집어낼 것인지가 중요하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물 양만 있으면 반응하는 것이 커피라는 물질이다.”

 

“흔히 물을 부을 때는 커피층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줄기를 조절해서 물을 부어주어야 한다고 한다.(중략) 물을 붓는 것 자체가 커피를 잘 섞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커피를 고르게 섞어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물을 붓든 커피 맛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145쪽)

 

 

머그잔이 탄생한 배경

 

신 대표는 여담으로 커피 잔에 얽힌 이야기도 풀었다. 커피 잔은 지금의 머그잔보다 작았다. 손잡이에 손가락이 들어가는 잔은 없었다. 표준 잔은 120mm로 진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물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큰 잔이 나왔다. 큰 잔에는 손가락이 들어갔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름기가 묻은 장갑으로 잔을 만질 수는 없었다. 장갑을 낀 손이 들어갈 수 있는 손잡이를 가진 잔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에 손가락이 들어가는 잔은 천한 잔이었다. 높은 분들은 손가락을 넣지 않았다. 품위 있는 잔은 손가락을 넣지 않았다. 머그잔 문화는 미군이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나왔다. 과거 우리나라도 원두커피가 먼저 들어왔다. 이상의 제비집도 원두커피를 팔았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인스턴트커피로 대체됐고 인스턴트 문화와 함께 손잡이가 달린 머그잔이 퍼졌다. 고급스러운 유럽의 잔을 갖다놓아도 왜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몰라서 그렇다.”

 

커피에 설탕을 넣으면 촌스럽다거나 세련되지 못하다는 인식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마시는 사람의 취향이다. 예부터 커피에 뭔가를 섞어서 마셨다. 과거 설탕이 귀했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설탕을 넣어서 마시는 것은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설탕을 넣어 커피를 마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신 대표는 단맛과 매운맛의 유행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단맛과 매운맛의 유행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있다. 요즘 여자들의 40% 정도가 맛을 볼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통각인 매운맛에 반응한다. 혀가 아린 맛인데 정상적인 미각으로는 엽기떡볶이나 불닭을 먹을 수 없다. 미각을 상실했다는 의미다. 단맛을 좋아한다는 건 느낄 수 있는 미각이 없어서다. 첫 번째 이유가 호르몬 불균형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 먹는다. 한국은 상시적인 다이어트 시대로 들어섰는데 체질량 지수가 떨어지면서 상시적인 생리 불순에 시달리면서 호르몬이 불균형 상태를 보인다. 지금 음식이나 음료 설계에서 당도를 엄청 올리는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불만이 나온다. 음식을 밖에선 조절할 방법이 없다. 특히 매운맛은 쓰기 때문에 쓴맛을 없애려고 달게 만들 수밖에 없다. 지금은 맛에 대한 개념이 무너져서 외식산업이 어렵다. 음식문화가 퇴행했고, 상시적인 다이어트 상태라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신 대표는 전 세계의 커피 관련 빅4(네슬레, 크래프트, 프록터 앤 갬블(P&G), 사라리)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했다. 네스카페, 폴저스, 유반, 맥스웰하우스, 맥심 등 이들의 브랜드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전 세계 커피공급량의 7~80%를 차지하는 이들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하다. 이들은 식품 관련 초대기업이기도 한데, 자신의 이익과 이윤을 위해서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식품에 대한 오해의 장막 속에서 산다. 생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인지 우리는 유독 식품과 관련한 불안이나 공포증을 조장하는 정보에 약하다.

 

“식품은 위험한 존재다. 되레 식품 첨가물은 안전하다. 안전하지 않으면 바로 쇠고랑을 차기 때문이다. 식품은 그만큼 어렵다. 첨가물 문제로 감옥에 가기 싫긴 때문에 사실 첨가물은 알려진 것만큼 나쁘지 않다. 식품은 그만큼 어렵다. 커피도 거짓말이 잘 통한다. 어쨌든 다시 커피로 돌아와서 커피를 내릴 때 행위에 집착하지 마라. 커피 추출의 메커니즘은 물의 속도, 온도, 굵기 등이 중요하다. 커피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이 더 필요하고 덜 필요한가, 빨리 혹은 천천히, 뜨거워야 하나 차가워야 하나를 명확하게 하면 추출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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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마스터클래스신기욱 저 | 클
커피콩이 원산지에서 재배, 가공되어 로스팅되고 추출되기까지 커피에 대한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 이 책의 가장 큰 특장점은 각 과정을 소개하고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탕이 되는 원리를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다양한 사진과 그래프들은 10여 년에 걸친 저자 신기욱의 치밀한 연구 결과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커피 마스터 클래스]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해주는 안내서가 될 뿐만 아니라, 커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한 차원 더 높은 지식을 원하는 중급자에게도 유용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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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임을 확인하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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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가 돌아왔다.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네 권의 책을 냈던 유홍준이 다시 길을 나섰다. 7권 제주편 이후 3년 만이다. 이번에는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간다. 영월에서 시작해 단양, 제천, 충주, 원주, 여주 등을 거닐었다. 아름다운 산과 강과 호수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기에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임을 뼛속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 유홍준의 길을 지난 9월 15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컨벤션홀에서 독자들과 나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남한강편 출간기념 강연회. ‘오색찬란한 가을에 만나는 남한강의 매력’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선 유홍준 교수는『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쓴 내용을 강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남한강이란 그저 남쪽으로 흘러오는 한강이 아니라 영월부터 남양주 양수리 두물머리까지를 의미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아름다운 가변 풍광과 그 고을의 문화유산에 얽힌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4~5쪽) 

 

“한국에서는 지역 안배가 중요한데 늘 충청도는 빠져 있었다(웃음). 재밌는 것이 서울, 경기도에 대해선 안 썼다는 말은 안 들었지만 충청도를 안 썼다는 중학생의 편지도 받았다. 그렇다고 충청도를 쓸 의사는 없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루게 됐다. 남한강 물줄기는 조선시대에 경부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다. 강원도 있는 분들도 동강은 잘 아는데 서강은 잘 모른다. 동강과 서강이 영월에서 만난 다음 양수리로 오고 북한강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한강이다. 우리가 가진 강에 대한 개념도 한 번만 얘길 들으면 안다. 동강은 대개 잘 알고 있으나 거기부터 내려와서 서울에 입성하기 위해 여주까지 온 것이 이번 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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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은 답사기

 

유 교수는 이번 책은 답사 편의를 위해 주변 이야기를 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첫발을 내디딘 곳이 요선정. 평창강으로 흘러드는 한강의 제2지류인 주천강에 자리 잡고 있다. 요선정은 주천강변의 높이 60미터쯤 되는 절벽에 올라앉아있는데 정자가 생기는 과정이 여러 사연을 갖고 있다. 유 교수는 요선정에서 내려다보는 강의 풍경이 꽤 좋다고 언급했다.

 

“해외에 나가도 우리나라의 강처럼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강은 드물다. 우리는 노년기 지형이라 씻겨나갈 것이 다 씻겨나갔다. 청년기 지형은 늪도 있고 위험하다. 강이 편안하게 흘러가는 강변은 이곳이 아닌가 싶어서 주천강에서 답사기를 시작했다. 중앙고속도로에서 원주IC로 들어가면 영월 가기 전 주천강을 만날 수 있다.”

 

“드라마 「기왕후」와 「무사 백동수」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탐방객의 발길이 잦아졌다는 것인데 그래도 여느 유흥지처럼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것은 아니어서 주천강 무릉리 요선정이라는 이름값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주천강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곳 요선정은 나의 남한강 답사 프롤로그로 삼아 한 점 부족함이 없다.”(37쪽)

 

이어 법흥사로 들어가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갔다. 진입로가 참 아름답고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며 유 교수가 칭찬했다. 해인사는 들어가는 길이, 송강사는 나올 때의 길이 멋있다는 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한 그는 법흥사가 오랜 역사동안 많은 것이 파괴됐지만 소나무 숲길은 여전하다고 덧붙였다.

 

법흥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증효대사비문이다. 유 교수는 비문을 쓴 최언위를 빠뜨릴 수 없다며 그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한 3대 최씨(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중 한 명이다. 나라가 망하면서 최치원은 가야산으로 가서 세상을 등졌고, 최언위는 왕건에게 가 『훈요십조』를 만들었으며, 최승우는 견훤에게 갔다. 기가 막힌 사연도 있었다.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팔공산 전투를 하고 협정을 맺을 당시 두 최씨가 앉아서 사인을 했다.

 

“이런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주고 변혁기에 지식인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 교훈을 준다. 답사기에는 이런 이야길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역사책에선 잡담이 된다. 역사는 유물과 함께 기억을 해야 생생하게 기억되고 오래 간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고 책에 썼는데 말이 참 멋있어서 내가 한 말 같지 않다(웃음). 남한강변 산속의 비석 하나를 가지고도 나말여초의 지식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대개 고승의 비문을 보면 행했던 기적이나 명언 등을 적는데, 징효스님은 달랐다. 징효스님이 젊을 적에 도담선사를 찾아가 배움을 구했다. 이전에는 이름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이전에는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답했다. 스승이 너 같은 놈은 없다며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영월 주천강변에는 물줄기가 한반도 지형을 그리며 돌아가는 물의 흐름이 있다. 유 교수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하나를 꼽았다. 영월군이 서면의 이름을 한반도면으로,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바꾼 것이다. 행정구역 이름을 관광객들을 위해 바꿨다는 것이 너무하다는 것.

 

“영월은 영월 사람들의 땅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토이다. 그것은 애칭 또는 별칭으로 그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관광 홍보 효과는 보았겠지만 국토의 이름을 이렇게 희화화한 바람에 잃어버린 국토의 품위는 어떻게 회복한단 말인가.”(63쪽)

 

유 교수는 김삿갓에 얽힌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김삿갓의 시라고 알려진 것들 중에는 다른 시인과 한시가 섞였다는 견해도 있다는 것. 그런 가운데서도 김삿갓다운 면모가 잘 보이는 시라며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소개했다. 

 

是是非非非是是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꼭 옳은 것은 아니고
是非非是非非是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是非非是是非非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 이것은 그르고 또 그른 것이고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청령포로 넘어갔다. 영월은 조용한 곳인데, 역사상 크게 부각됐던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단종이 유배를 살았다. 청령포 솔밭 속, 열일곱의 단종이 숙부에게 귀양을 가서 두 달을 살았다. 이곳은 2000년 단종문화제 때 복원됐는데, 단종은 이곳에서 두 달을 살다가 홍수가 나는 바람에 영월 읍내에 있다가 처형을 당했다. 영월 관아의 객사인 광풍헌으로 거처를 옮긴 단종은 매죽루라는 누각에서 「자규사」를 읊은 이후 이곳은 자규루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자규사」는 열여덟 살 소년이 쓴 시치고는 너무 애절하다. 이 시를 짓고 얼마 안 돼서 사약을 받고 단종은 죽었다. 자규는 소쩍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두견새, 접동새 등으로 돼 있는데, 생물도감을 보면 소쩍새와 두견새는 다르다. 두견새 소리는 슬프지 않고 낮에 우나 소쩍새는 밤에만 운다고 한다. 소쩍새는 밤새도록 계속 운다. 자규는 그래서 소쩍새를 의미한다. 만해 한용운, 김소월, 이미자 등 낮에 우는 두견새를 말하는데, 시인들이 두 새를 구별 못해서 그리 썼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단종의 무덤은 ‘장릉’에 있지만 왕릉으로 조성돼진 않았다. 장릉은 조선 왕릉 42곳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 100리 바깥에 있다. 이유가 있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 중종 때부터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큰 문제가 됐다. 이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왕가의 권위에 위험이 될 수 있었기에 중종 때는 단종을 어떻게 복위시킬 것인가를 고민했고, 숙종 때는 단종을 노비 신분에서 노산군의 지위로 올렸다. 마침내 장릉을 만들었고, 이는 왕릉이 됐다.

 

단종의 과거사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한 왕은 정조였다. 장판옥이라는 제향 공간을 만들어 단종이 쿠데타로 무너질 때 희생되거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특히 환관이나 노비 이름 등까지 모두 영혼을 달래는 제를 지냈다. 단종애사의 마지막 과거사 정리는 300년이 지난 정조 때에야 이뤄졌다. 유 교수는 정조의 치적 중에 하나로 이것을 꼽았다. 특히 왕족과 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 노비의 이름을 쓴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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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을 찾다

 

영월을 떠나 남한강을 따라 가다보면 충주호를 지난다. 남한강 물줄기의 가장 아름다운 정자 한벽루가 있다. 진주 촉석루,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 등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정자다. 이들은 관에서 지은 정자들로서 현감, 군수가 그 고을의 가장 좋은 곳에 지었다.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자 마을 사람을 모아 이야기하는 곳이었다. 충주호는 청풍호라고도 불리는데, 사연이 있었다.

 

“충주호로 가는 도로 표지판에 청풍호라고 쓰여 있다. 이유가 있다. 충주댐을 짓는다고 단양과 청풍이 수몰됐는데 이름도 충추호가 됐다. 이에 제천시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청풍면이 수몰 당했으니 주민청원 서명을 첨부해 청풍호로 해달라고 연판장을 돌렸다. 그러나 국토부에서 허락하지 않자 제천시는 시에서 만든 안내표지판에 청풍호반이라고 썼다. 그래도 되느냐고 제천시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세상엔 별명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고(웃음). 자기들은 청풍호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이어서 간 곳은 옥순봉. 청풍에서 단양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단양8경이다. 유 교수는 옥순봉의 진면목은 수몰되기 이전의 풍광이라며 단양읍이 수몰되기 전인 1983년에 옥순봉 사진을 찍었던 일화를 건넸다. 수상보트를 빌려 타고 옥순봉 사진을 찍었다. 조선시대 회화사의 현장이기에 그렇게도 집착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1897년 조선을 여행하면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책을 낸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도 옥순봉을 보고 워낙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다는 일화도 덧붙였다.  

 

“단양8경이란 옥순봉구담도담석문사인암상선암중선암하선암 등 8곳을 말한다. 단양8경은 관동8경과 함께 대표적인 8경으로 꼽히고 있지만 그 명칭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141쪽)

 

유 교수는 단원 김홍도의 「옥순봉도」가 김하종의 「옥순봉도」와 비교해 얼마나 명작이고 아름다운지를 설명했다. 사군산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극찬도 따랐다. 비어 있는 마음으로 강변 풍경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는 감상도 함께했다.

 

그리고 채석장을 둘러본 풍경도 언급했다. 성신양회 채석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랜드캐넌을 온 줄 알았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단양팔경보다 더 감동적이라고 했다. 채석장의 넓이는 150만 평(480만 제곱미터), 채석장 깊이는 해수면 기준으로 140~260미터. 함께했던 예술가들도 감동을 표했다. 유 교수가 언급한 다음 답사는 4.19의 시인 신동문이었다.

 

“4ㆍ19혁명 때는 배후세력으로 몰려 서울로 도피해서는 「아! 신화 같이 다비데군들-4ㆍ19의 한낮에」라는 뜨거운 시를 발표했다. 염무웅 선생은 당시를 회상하기를 “1960년대에 신동문은 혜성과도 같이 빛나는 시인”이라고 했다. 4ㆍ19혁명을 계기로 등장하는 참여시의 선구로는 신동엽과 김수영을 꼽고 있지만 신동문이 더 앞섰다.“(196~197쪽)

 

“쿠데타 정권이 들어서고 신동문 시인은 절필을 하고 단양으로 낙향했다. 그는 지식과 글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지식인이었다. 「내 노동으로」라는 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시인의 마지막 시였다. 그는 단양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면서 살았다. 독학으로 침을 배워서 마을 사람들에게 침을 놔줬는데, 효과가 좋았다더라. 돈을 받지 않고 노래를 한 곡해야 침을 놔줬다고 한다. 그래서 단양에서는 그를 ‘신바이쩌’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 교수는 중종 때 퇴계의 제자이자 단양군수를 지낸 황준량의 이야기도 꺼냈다. 감동적이다. 그는 퇴계가 유일하게 추천서를 써준 제자였다. 황준량이 단양군수로 와서 고을의 참상을 살피니 심각했다. 백성들이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산속으로 도망을 가기 일쑤였다. 황준량이 10년간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달라는 내용 등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10년 동안 부역과 세금이 면제됐다. 유 교수는 이런 목민관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이냐며 지자체선거와 총선 때 제대로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월에서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 곳이 영춘이다. 남한강이 길게 쭉 내려가는 영춘가도가 무척 아름답고 온달산성 또한 아름다워서 이를 책 표지로 썼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온달산성에 대해 한 건축가는 전쟁에 대한 기억은 없어지고 우리 선조가 자연을 어떻게 경영하면서 인공과 자연이 조화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의 3대 산성으로 온달산성, 상주의 견훤산성, 보은의 삼년산성을 꼽았다.

 

나머지 길도 이어졌다. 죽령고개 길에 자리한 목이 없는 불상인 장육불상. 통일신라 말기의 명작이나 목이 없다. 제천 시내에서 볼 수 있는 7층 보존석탑 하나로 제천의 역사가 살아난다는 감상도 나눴다. 

 

“제천에서 왕조가 망할 때 마지막 항거가 있었다. 일본군이 제천이 폐허를 만들었다. 제천에는 그런 아픔의 현장이 있다. 박달재를 넘어가면 울고 넘는 박달재의 별의별 버전이 다 있다. 책에 정호승 시인의 「폐사지처럼 산다」를 넣었는데 경기 여주의 고달사 터가 폐사지 맛이 참 좋다. 신륵사의 보제존자 석종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지었는데 보제존자의 고상한 도풍에 대한 감동을 드러낸다.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문화유산의 뜻을 새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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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저 | 창비
신간 ‘남한강편’은 우리 국토의 핏줄이라 할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다. 영월에서 시작해 단양, 제천, 충주, 원주, 여주를 거쳐 한강을 향해 이어지는 유홍준 교수의 이번 답사기는 남한강 유역에 산재한 수려한 경관과 평화로운 강변 마을의 풍경, 각지의 문화유산에 얽힌 풍성한 이야기로 우리를 또다시 감탄하게 한다. 아득한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 가슴 찡한 사람살이의 이야기가 어느 곳보다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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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스토리?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던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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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기업 분석서 ‘바로 취업 시리즈’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은 취업 준비생들을 위한 맞춤형 취업 멘토링 도서이다. 이재호 강사는 이번 시리즈가 어떻게 하면 취업 준비생들이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원하는 기업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소개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 비하면 혜택을 받고 자란 세대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제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뭘까 고민했어요. 저는 원래 투자전문가였어요. 금융을 잘 아는 사람이 투자전문가가 아니라 세상을 잘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투자전문가예요. 그 점을 살려서 비슷한 이야기를 절박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콘텐츠화 할 수 있게 멘토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맞는 경우가 많아서 자신감을 갖고 지금 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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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그는 어마어마한 취업 경쟁 속에서 모두가 유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경쟁을 느낄수록 우리의 본능이 남들과 다르게 가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두가 비슷해진다는 말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다르게 쓰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면 결코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나만의 스토리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 두 문장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Do it right’와 ‘Do the right thing’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먼저 ‘Do it right’은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산업사회에서 인재관이 바로 이거였어요. 산업사회에서는 무조건 열심히 해서 생산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소개서에 주로 높이 나는 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 이런 말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부지런해야 됐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지식정보사회입니다. 산업사회와는 조금 다르죠. ‘Do the right thing’은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을 뽑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에 걸맞는 소양을 갖고 있는지 보겠다는 것이죠.”

 

이제 더 이상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갖고는 통하지 않는 시대다. 이재호 강사는 특별한 것을 쓰라는 게 아니라 비슷한 활동이더라도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포인트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경험, 성장 배경, 지원 동기 등을 전략적으로 잘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어서 창의적인 것은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데에서 생겨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취업 준비생들이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책임지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전부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어떤 방식으로 작성해야 면접관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일까. 면접관의 관점은 얼마나 창의적인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얼마나 흥미로운지에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우선 자기소개서에 성장과정이나 성격의 장단점, 경험을 쓸 때 단순히 그 자체만 적는 것이 아니라 지원한 분야, 회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면접관들에게 흥미를 주는 포인트는 직무, 그리고 기업경영과 연계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수다를 많이 떤다는 것이 성격의 장점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필요할까요? 사람을 많이 만나서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무가 있어요. 그런 분야라면 이 사람이 수다를 떨 수 있는지 본다는 것이죠.”

 

그는 이어서 팔려고(자기소개) 하지 말고, 팔리도록(자기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소개하고자 자기소개서를 쓰면 남들과 유사해지기 때문에 자신을 홍보하는 쪽으로 맥락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기업분석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평범한 경험과 재능이 기업분석을 만나면 비범한 경험과 재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에 유의해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면 지원자의 장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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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드려면

 

조금 더 본격적으로 실제적인 사례와 함께 간단한 실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재호 강사는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우선 첫 번째로, ‘나만의 콘텐츠를 구축해 보자’라는 문장이 화면에 띄워졌다. 그는 한석봉 이야기를 꺼내며 사례를 들었다.

 

“남들과 비슷한 성장과정과 경험을 흥미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한석봉이 자신의 성장과정을 작성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반적으로는 ‘저는 엄한 어머님 밑에서 연습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와 같은 식이겠지만, 여기서 엄한 어머님 대신 교만함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해 볼게요. ‘저는 타고난 재주를 평범하게 하는 지름길은 교만함에 있다는 삶의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첫 문장을 이렇게 들어가보는 겁니다. 유사한 것 같지만 일단 주제부터 다릅니다. 굉장히 고급스러운 전략이죠. 자신이 서예에 능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타고난 재주’라는 말을 통해 이미 검증이 되는 것입니다. 뒤의 말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임팩트를 이미 주었으니까요. 이 사람은 프로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죠.”

 

그는 다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달리기를 자주 시켰다면 이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풀어가는 것이 좋을까요?” 많은 학생들은 체력을 기를 수 있었다거나, 끈기나 목표 설정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는 식의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의 대답은 단어가 다 다를지 몰라도 면접관들이 볼 때는 똑같다고 말했다.

 

“나만의 스토리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던지는 거예요. 달리기를 하다 보니 솔직히 귀찮을 때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요?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하다 보니까 우연히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책상머리에서는 절대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로 아이디어는 언제 떠오릅니까? 보통 걸어 다닐 때, 혹은 땀을 흘릴 때 떠오르죠. 면접관들은 이미 사회인이잖아요. 사회인의 정신세계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을 던져줘야 된다는 것이죠. 내 이야기보다는 사회인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차별화된 콘텐츠가 되는 거예요.”

 

이어서 그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말주변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요?” 말주변이 없는 것은 대표적으로 취업 준비생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일 것이다. 그는 단순히 잘난 점만 이야기해서는 절대로 남들과 차별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부족하고 못난 점을 효과적으로 이야기하면 면접관들의 눈에 띌 수 있다는 것이다.

 

“말주변이 부족한 자신을 어떻게 강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말주변이 부족해서 스피치 학원에 다녔다고 하는 것은 남들과 유사해지는 길이에요. 말주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어요. 한발 짝 물러나서 보라는 거예요. 꼭 말을 잘하는 것만이 장점은 아니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저는 주도적으로 말하는 것은 잘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도 주목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을 잘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적절하게 잘 던지는 사람은 경청도 잘 한다고 생각하겠죠. 말 없이 말하는 방법이야말로 진정 훌륭한 것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남과 차별화된 자신을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기업 분석의 중요성

 

다음으로 이어진 주제는 ‘나만의 기업을 분석해보자’ 였다. 그는 기업 분석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경영학적인 지식보다 스스로 던지는 질문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며, 2012년에 있었던 ‘아모레퍼시픽’ 대표의 신년사를 사례로 들었다. 당시 서경배 대표는 상품?브랜드 혁신, 구매 경험 혁신, 소통 혁신, 신시장 개척, 근무환경 혁신 등의 세부 실행전략을 발표했다. 그는 왜 그 당시 대표가 혁신을 외쳤을까 질문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글링만 해봐도 화장품 산업과 관련된 내용들이 쭉 나옵니다. 그렇게 찾다 보니 아모레퍼시픽이 혁신을 강조한 이유가 감지되었습니다. 2012년 당시 화장품 시장의 지형도는 크게 고가의 기능성 화장품 시장과 중저가 브랜드 시장, 이렇게 두 가지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고가의 기능성 시장에서 정체를 보이고 있었죠. 그런데 당시 중저가 브랜드 시장은 굉장히 급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CEO가 혁신을 외치는 이유에 대해 추측을 해봤어요. 첫 번째로는 지금이라도 중저가 브랜드를 따라 잡을까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따라 하기 보다 원래 잘하고 있는 고가 기능성 분야를 새롭게 혁신하여 시장을 키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후자를 택해서 자기소개서에 활용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겠죠.”

 

그는 기업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네 가지 포인트를 제시했다. 첫째는 산업, 둘째는 시장, 셋째는 고객, 넷째는 기업 문화였다. 이렇게 네 가지 축을 토대로 기업을 분석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기업을 정했다면 우선 그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해당 기업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지원하고자 하는 회사가 있다면 반드시 그 기업이 어떤 것들을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키워드를 끄집어내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말하며 이날 강의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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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콘텐츠로 원하는 회사 바로 간다 이재호 저 | 프리이코노미북스
『나만의 콘텐츠로 원하는 회사 바로 간다』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출신의 취업 멘토 교수가 자기소개서와 직무에세이, 면접 등에서 취준생들이 차별화된 자신만의 콘텐츠로 승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가고자 하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코칭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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