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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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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은 현실을 바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여러 분들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현실도 바뀌어나갑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서 현실을 바꾸려고 하는 자들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철학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바꾸는 것이 자신을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철학의 힘』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김형철 저자가 남긴 말이다. 종종 우리는 철학이 현실과 동떨어져있다고 규정한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철학이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저자가 말하였듯이, 철학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시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꿈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결국 철학은 지표다.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는 것이다. 『철학의 힘』을 통해서, 그리고 강연회를 통해서 저자가 들려준 내용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줄 만한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김형철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는『철학의 힘』에 다음과 같은 부제를 달아 놓았다. ‘만족 없는 삶에 던지는 21가지 질문’. 그는 ‘삶은 왜 불공평한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가’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일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와 같은 굵직한 질문들은 던진다. 그리고 정의, 탐욕, 자유, 용서, 진실, 죽음 등 작지만 중요한 삶의 요소들을 두루 살핀다. 그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과연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숱한 말들에 흔들리며 불안했던 이유는 ‘나만의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철학의 힘』이 그러했듯 저자는 강연회를 통해서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의 해답’을 들려주었다. 선택의 문제, 쓸모에 대한 고민, 후회에 대한 두려움 등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명쾌하게 정의한 저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렇게 해야 될지 저렇게 해야 될지 헷갈릴 때는 자신에게 손해가 큰 쪽을 선택하십시오. 세상 살아가면서 조금도 손해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좋은 뜻에는 흔쾌히 동참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는 ‘눈앞의 이익을 독식하고 싶을 때면 독 안에 든 쥐가 될 것을 염려하라’고 말했다. 독 안에 가득 담긴 쌀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뛰어들면, 결국 홀로 갇히게 된다는 사실을 경고한 것이다. 선택의 문제에서 늘 욕심을 경계하라는 가르침 뒤로 이어진 것은 ‘답을 구하는 지혜’에 대한 이야기였다.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단 한 사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합니다. 답을 원한다면 질문을 던지십시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르면서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아는 척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출발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늘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보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정의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고 난 후에는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라고. 이어 그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매일 아침 ‘오늘 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목표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늘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은 숫자로 나타낼 수 없다


『철학의 힘』에서 저자는 장자의 ‘무용지용’ 우화를 들려주었다. 훌륭한 목재가 될 수 있는 나무, 맛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 향기로운 꽃을 맺는 나무 사이에서 결국 살아남은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였다. 단단하지도 않고 탐스러운 꽃과 열매를 주지도 않았지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는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에 대해 말했다.

 

“장자가 ‘무용지용’ 우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는, 쓸모는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쓸모 있음과 없음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용처를 아는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것이고, 용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단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장자가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인 ‘사마귀 우화’에 기대어, 앞이 아닌 뒤를 살필 줄 아는 현명함에 대해 깨우쳐 주기도 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사마귀 뒤에는 참새가, 참새 뒤에는 사냥꾼이, 사냥꾼 뒤에는 과수원 주인이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귀는 매미를 잡아먹느라 참새가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뒤를 돌아볼 줄 압니다. 모두가 ‘무엇이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까’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현명한 사람은 ‘어디에서부터 우리에게 해가 닥칠까, 무엇이 우리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줄까’를 생각합니다.”

 

때때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지혜이지만, 이미 지나쳐 온 시간에 매여 있는 것은 어리석다. 저자 역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과거로 되돌아가서 새 출발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단언했다.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으십시오. 간혹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밖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으라는 이야기는 자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바꾸길 원한다면, 사회를 바꾸길 원한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장 쉬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바뀌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바뀌는 것 외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원인 역시 다른 사람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바뀔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만 바뀌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날의 강연에서 저자는 리더에게 필요한 또 한 가지의 자질에 대해 전했다. 바로 ‘자기희생’이었다.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사람만이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리더가 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하다면 어떤 부하가 따르겠나’라고 반문하며 ‘자기희생이 전제되지 않은 리더십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의견을 피력했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철학적 성찰의 끝에는 언제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써 김형철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가치’에 대해 물어보곤 합니다. 대부분 대답은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절대자, 가족, 사랑입니다. 이 중에 어느 것 하나 수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모두 수치화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살아가면서 수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 즉 돈이나 권력 같은 것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김형철 저자가 『철학의 힘』을 통해 전하는 이야기는 거대한 담론도, 어려운 이론도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질문들에서 시작해 일상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지혜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그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삶에 숙제처럼 남겨지는 질문들에 해답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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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힘김형철 저 | 위즈덤하우스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인가’. 정답은 없지만 피할 수 없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철학적, 인문학적 시각에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도와주는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연세대학교 철학과 김형철 교수의 《철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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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의 세 남자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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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PD 셋이 방송이 아니라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시끌벅적 거친 말과 유쾌한 폭소가 오간다. 마치 탁구 경기를 하는 듯 주고받는 말들이 빠르고 재치 있다.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의 이야기다. 이들의 팟캐스트 이름은 <씨네타운 나인틴>. 팟캐스트 좀 듣는다는 사람들은 이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약 2년 전부터는 SBS FM에 <씨네타운 S>라는 이름으로 정규편성 되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방송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 넋을 놓고 그저 남자 셋이 모여 정신없이 떠는 수다에 끌려가게 된다. 낄낄거리고, 맞장구를 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이렇게 많은 팬들이 열광하고(저자들도 알만큼 자주 보는 팬들이 있다!), 책을 내고, 여기저기서 관심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남자 셋은 흡사 친구들끼리 술자리에 모여 떠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저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베테랑 라디오 PD의 내공이 묻어난다. 지식도 풍부하다. 그야말로 ‘듣는 맛’이 있다.


이들 셋이 자신을 키운 책들, 그 책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책 『빨간 책』을 출간했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부터 『체 게바라 평전』, 『코스모스』, 『허삼관 매혈기』와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까지 폭 넓은 이들의 독서편력이 엿보인다. 더불어 이 목록을 따라 한 사람의 일기를 들춰보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돌아보니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 중에서 권장도서는 한 권도 없었다. 모두 어느 지점에서 지나치게 튀어나온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모범생 친구보다는 삐딱한 친구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처럼. 이제 소개할 몇 권의 책들이 바로 그 삐딱한 녀석들이다. (5~6쪽)

 

지난 5월 14일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 세 사람이 모여 자신을 키운 책, 그들의 팟캐스트, 현재의 관심사와 사소한 고민들까지 넘나드는 유쾌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시종일관 시끄럽고, 유쾌한 자리였다. ‘빨간’ 책을 쓴 사람들답게 말도 거침없었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내던진 욕설을 담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이들의 한바탕 수다를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가 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책을 다 읽은 열일곱 살 소년은 한참 동안 전율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어떤 철학책을 읽었을 때보다 더 강렬한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일종의 축복이었다. 모두가 염원하는 영생의 삶을 이룬 휘스카보다 내가 더 행복하다는 깨달음!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오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아마 엄마나 선생님에게 들었으면 달팽이관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진부한 교훈이 뼛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176쪽)

 

먼저 이날 북토크가 진행된 합정 빨간책방에 특별히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등장했다. 그는 마침 이 책이 다양한 책들을 다루고 있어서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책을 보고 제일 놀란 건 이 세 분이 지식이었구나, 이 분들이 책을 읽으시는구나 하는 거였어요(웃음). 세 분의 개성을 비교해가면서 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라고 감상을 전했다.
 
이승훈 PD가 이재익 PD에게 먼저 물었다. 가장 말하고 싶은 에피소드는 무엇이었을까? 이재익 PD는 망설임 없이 친구 어머니와 있었던 에피소드(‘금서의 추억 하나’)를 꼽았다.

 

테니스코치 살인사건 이후 나는 <황홀한 사춘기>를 당시 우리 반 부반장 이용* 군에게 넘겼다. (중략) 며칠 뒤 용*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낙담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대사를 꺼냈다.


“재익아, 정말 미안한데. 우리 엄마가 너 좀 보재.”


오, 신이시여! 이놈이 나에게서 넘겨받은 <황홀한 사춘기>(를 포함한 몇 권의 야설)를 엄마한테 들킨 것이었다. (71쪽)

 

이재익 PD는 이어 김훈종 PD의 에피소드 중 인상적이었던 내용에 대한 감상도 함께 말했다.


“어렸을 때 램덩크』를 다 가지고 있는 여자가 이상형이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그런 여자와 결혼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무슨 문장을 붙였느냐하면 ‘이제 여러분의 선택은 두 가지다. 토하거나, 욕하거나’(웃음) 그 문장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그렇다면 김훈종 PD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무엇일까?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말했잖아요. ‘어떤 책을 사서 제목과 목차만 읽으면 그 책의 반을 읽은 것’이라고요. 이 『빨간 책』 같은 경우에는 목차만 읽으시면 다 읽으신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목차에 있는 책들을 먼저 읽으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김훈종 PD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라고 자신을 설명하면서 “이재익 PD와 비교하면, 제가 1년에 읽는 책이 이재익 PD가 한 계절에 쓰는 책보다 적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직장인인 터라 책을 쓰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는 것 역시 익숙치 않아 힘들었다고도 전했다.

 

“제 것 빼고는 다 좋은 것 같습니다.(웃음)”라고 말하는 이승훈 PD에 대해 이재익 PD는 ‘어떤 게임이든 상식의 힘은 크다’(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의 에피소드를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꼽았다. 내가 잘 아는 것에 투자하라는 조언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을 통해 피터 린치는 상식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중략)알 수 없는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회사의 주식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아는 회사,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을 파는 회사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자신이 많이 먹고, 쓰고, 입는 물건을 파는 회사,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는 회사의 주식을 놔두고 왜 굳이 자신이 잘 모르는 회사를 연구해서 투자하려고 하는가? (218~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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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를 키운 ‘빨간 책’들


이재익 PD는 20여 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펴낸 소설가이자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 전방위 작가다. 그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나의 경전’이라고 고백하고, 갓 등단해서 만난 젊은 시인과의 술자리를 추억하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를 이야기하고, 나이트클럽 룸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읽던 호기 넘치던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한다.


『삼국지』를 사랑해서 중문과에 입학했지만, 중국어를 잘하기는커녕 중국에 발도 못 붙여본 사짜 중국 전문가’라는 수식의 김훈종 PD. 그는 배낭여행에 관심 없던 청년의 피를 확 돌게 만들었던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과 ‘썸’타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앞둔 열다섯 소년이 발견한 『사랑의 단상』에 관한 난해한 기억을 읊는다.

 

흥미롭게도 이승훈 PD는 ‘들어가는 말’을 통해 시공사(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 씨가 대표이사로 있다)에서 책을 내는 것이 꺼려졌다고 적었다. 그는 강풀의『26』을 제일 처음 소개하는 작품으로 하면 책을 내겠다고 했고, 협의를 거쳐 『빨간 책』에서 가장 처음 소개하는 책으로 최규석의 『100도씨』를 선택했다.

 

잘못은 저지르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후에 그 잘못을 어떻게 사죄하고 벌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해를 위해 내 나름대로 아주 작은 돌이라도 놓아보고자 이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시공사에서 낸 책에서, 뒤에 내가 이어서 소개할 ‘이 책’을 다룸으로써 그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단죄를 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아픈 80년대를 치유하는 데 깃털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한한 기쁨이 될 것이다. (11쪽)

 

책은 1부 ‘언제쯤 어른이 될까’, 2부 ‘그렇게 우리는 자란다’, 3부 ‘소년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로 구성되어 한 사람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 그 이후의 의식의 흐름이 엿보이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재익 PD는 “저는 초, 중학교 때 보던 책을 많이 실었고, 김훈종 PD는 중, 고등학교, 이승훈 PD는 비교적 고등학교, 대학교 이후에 보던 책을 실었습니다.”라고 설명하며 많은 분들이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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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 이재익,김훈종,이승훈 공저 | 시공사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고로 어린 시절 어른들이 추천하는 책이란 무난한 책 일색이었다. 균형 잡힌 가치관을 담고,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책들. 이른바 권장도서. 내가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권장도서는 따분하기 짝이 없다. 당연하지, 모범생 친구가 따분한 것과 같은 이치다. 돌아보니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 중에서 권장도서는 한 권도 없었다. 모범생 친구보다는 삐딱한 친구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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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제 책이 화장실에 꽂혀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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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끝이 아닌 끝을 보러 떠나는 것


밴드 ‘그네와 꽃’의 보컬 그네가 석 달 간의 인도 여행기를 책으로 펴냈다. 무대 위에서 듣던 그녀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서 읽는 경험이 생소하면서도 반갑다. 이야기는 단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짙은 여운을 남기는 한 마디가 책장을 넘기던 손을 붙든다. 섣부른 짐작도 해 본다. 인도 역시 그녀가 거닐었던 수많은 길들 중 하나일 거라고. 그 길 위에서 그녀는 무엇과 마주쳤을까. 강한 호기심이 손길을 잡아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까닭에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에는 저자가 걸어왔던 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사랑과 상처가 뒤섞인 기억들은 먼 곳까지 따라와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지난날의 인도가 그러했듯 이제는 모두 흘러가버린 순간들일 뿐이다. 그녀는 다시 돌아왔고 어김없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23일, 대학로의 ‘벙커 1’에서 독자들이 만난 그녀가 그러했듯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진한 눈 화장, 곁을 지키고 선 밴드 ‘그네와 꽃’의 멤버들까지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이전의 그녀와는 다른 느낌이다.

 

“인도에 다녀오고 나서 인상이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주위 분들이 ‘굉장히 편안해졌고 밝아졌다’고 하시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예전의 저는 잘 웃지도 않고 어설픈 고집을 부리기도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실수들도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고요. 그래서 인도에서 돌아온 후에 ‘이 마음으로만 살면 더 이상 힘겨운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힘든 일들이 또 찾아오기는 했지만요(웃음).”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의 출간 기념 콘서트에는 밴드 ‘그네와 꽃’과 탁재형 PD가 함께했다.『탁PD의 여행수다』를 출간하기도 한 그는 동명의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저자의 인도 여행기를 소개한 바 있다. 탁재형 PD는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에서 그네 씨가 쓴 노랫말에서 느껴지는 압축된 감성과 여행자로서의 자유분방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탁재형 :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라는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그네 :‘길’이 가지는 의미는 저마다 다를 것 같아요. 저에게 이 책의 제목이 가지는 의미는 ‘끝을 느낄 것 같은 느낌인데 끝이 없다’는 거예요. 언젠가 끝을 보러 또 한 번 가겠죠? 끝이 아닌 끝을 보러 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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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값진 선물


아직까지 작가라는 호칭이 너무 부끄럽다는 그녀는 “가감 없이, 솔직하게” 썼을 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탁재형 : 책을 쓰면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네 : 책을 쓰고 나니까 발가벗겨진 느낌이더라고요. 어렸을 적 이야기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솔직하게 썼거든요. 어쩌면 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깨는 게 굉장히 어려웠을 지도 모르겠어요. 책을 쓰면서 많이 사랑했지만 지금은 헤어진 사람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순간들도 있었고요. 그런 과정들이 당시에는 힘들었는데, 지나고 나니까 또 한 꺼풀 벗겨낸 느낌이더라고요.

 

탁재형 : ‘그네와 꽃’의 새 앨범도 발매됐잖아요.


그네 :지난 4월에 『엘리펀트 러브』를 발표했어요. 이번 앨범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위로’가 될 것 같아요. 저희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신 분들이 계셨는데, 이번에도 또 다른 위로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다가오는 6월 13일에 있을 단독 공연을 준비 중인 그녀는 이 날도 노래로써 진한 위로를 전했다. 그녀와 함께 무대에 오른 ‘그네와 꽃’의 멤버들은 새 앨범의 타이틀곡인 「그댈 놓아요」를 비롯해 「바라본다」 「제주 그곳」 「엘리펀트 러브」 등의 신곡을 공개했다.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코르도바」 「달콤한 꿈」 「봉구」 「가지말아요」 「헤이보이즈」 와 같은 곡들로 관객들과 하나 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저는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가 화장실에 놓여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을 오늘 다 읽어야지’라고 생각하시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시면 될 것 같거든요. 책 속에는 로맨스도 있고,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고, 여행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많아요. 여행에 대한 정보보다는 ‘사람’과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에서 그녀는 고백했다.“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이 주는 시선”에 두려워했던 순간들도 있었음을. 그러나 인도를 여행하며“낯설기만 했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온기를 느꼈”고 자신을 짓누르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바라보는 시간도 가졌다.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한결 가벼워진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떠나 본 사람만이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값진 선물을 받은 것”이라고.

 

물론 여전히 나는 때때로 아파하고 지쳐 숨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으로부터도 도망가지 않는다.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 힘이 좀 빠지다가도 좋은 사람들의 응원에 다시 눈에 힘을 준다. 그리곤 가슴속 꽃이 시들어 갈 때쯤 또 길을 나선다. 인도를 갈 때와는 다르게 떠나는 나는 씩씩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중략) 길은 끝도 답도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걸어갈 것이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한다. 두 손 모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에필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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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아그네 저 | 이담북스(이담Books)
노래하는 여자 그네, 태연한 척 했지만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이 주는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인도로 향했다. 저자가 여행을 마치고 가져 온 것은 오랜 시간 저자를 짓누르고 있던 상처를 만나 한결 가벼워진 자신의 모습과 낯선 사람들을 만나 담아온 마음의 온기였다.

 

[추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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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저기, 내 개념 좀 찾아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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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이라는 말을 전방위적으로 퍼뜨린 책이 있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저자이자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2004년 민주당의 대선 패배를 분석하면서 미국 진보세력의 새로운 혁신을 강조하면서 프레임이라는 틀을 내놨다. 미국의 진보 세력이 패배한 이유를 프레임으로 설명했고 이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국 민주당은 2008년과 201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프레임론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없지만. 책이 나온 지 10년이 흘렀고 저자는 개정판을 내놨다. 한국에서도 최근 개정판이 번역?출간됐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쟁점의 프레임을 어떻게 짜는지에 대한 논의를 전국의 어느 언론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쟁점에 대한 논의에서 ‘프레임’이라는 말을 듣고 기초적으로나마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 작은 책 한 권이 거둔 성과치고는 꽤 크다.”(6~7쪽)

 

최근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프레임 가운데 가장 무섭거나 두려운 프레임이 있다면?

 

우석훈 : 지난 2006년 박세일 교수가 선진화에 관한 책(『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을 낸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우리가 산업화 단계, 민주화 단계를 거쳐 선진화 단계에 와 있다며 선진국가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그 이후, 야당은 대부분 선거에서 다 졌다. 야당 정치인들은 ‘민주화’라는 말을 쓰고 싶어 한다. 그런데 ‘민주’라고 말하는 순간, 낡은 것처럼 취급받는다. 지금은 선진화와 그 다음 단계를 얘기해야 하는데 20년 전 이야기를 한다고 여긴다. 새정치연합에 그런 이야기를 전해줬다. 말은 맞는데 민주화라고 말하면 가슴이 뛴다고 말하더라. 박세일 교수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선진화, 경제 발전이라는 프레임 하나가 (새누리당과 그 전신이) 모든 선거에서 이기는 요인 중 하나라고 본다.

 

김민전 :선진국들이 이뤄온 과업이나 역사발전 단계를 보면 근대 국가를 형성한 뒤 산업화와 민주화가 온 다음은 복지국가였다. 그러나 우리는 복지국가를 향한 경로를 걷지 않았다. 복지국가를 선진화로 대체했다. 그 순간, 복지 논쟁은 낡은 것이 됐다. 프레임이 정말 무섭다. 안보 프레임도 마찬가지인데, 진보는 안보에 약하다는 말이 있다. 진짜 안보에 진보가 약했는지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 정말 보수가 유능한지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데도 진보는 안보에 무능하고 보수는 안보에 유능하다는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상돈 :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개념이 본토에서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고 했지만 독일은 그런 것이 없었다. ‘프레임’이라는 단어도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야권이 선거에서 계속 패배하니까 범여권이 프레임에 스스로 갇힌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전략적 실수나 과오에 대한 반성보다 남의 탓으로 돌리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보수적인 집단은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최면을 걸만큼 그렇게 정교한 집단이 아니다. 시계바늘을 돌려보면 2002년 대선 결과는 대이변이었다. 이때 기본적으로 보수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비도덕적이고 나쁜 사람으로 된 것은 진보가 짜놓은 프레임이었다는 각성이 나왔다. 2002년 대선 결과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반성과 각성이 나오면서 반격을 해야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이 책은 2004년 미국 대선 결과를 놓고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반성과도 관계가 있다. 당시 미국 민주당은 자기의 실패를 성찰하기보다 면피를 하려는 측면이 있었는데, 지금 한국의 야권도 면피성 프레임을 깨지 않으면 선거에서 이기기 힘들다.

 

책에는 조지 부시가 감세가 아닌 ‘세금 구제’라고 말하면서 프레임을 장악한 사례가 나온다. 한국에서도 종부세를 놓고 ‘세금 폭탄’이라는 단어가 떠돌았는데.

 

이상돈 : 나는 노무현 정권이 정권을 재창출 의지가 있었는지가 의심스럽다. 세금을 올린 정권이 정권을 재창출한 적이 없다. 세금 문제는 그만큼 민감하다. 세금 폭탄론에 대해서도 그 당시 조중동과 경제신문이 줄기차게 써대니까 효과를 본 것이다. 세금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인데도 세금으로 사회정책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다.

 

김민전 : 정치적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타이밍 등을 고려했어야 했다. 2007년 이명박 정권 이후 ‘유체이탈’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현실과 주장하는 바가 달라서 그런 말을 쓰는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하면서 ‘녹색성장’이라고 일컬었는데, 정확한 명칭은 ‘회색 토목 사업’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잡는 것이 비일비재하자 대통령이 하는 말에 유체이탈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석훈 :프레임이 일국 차원에서도 움직이지만 예기치 않게 튀기도 한다. 나는 종부세를 찬성했었다. 차등을 줘도 모든 부동산에게 종부세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미친놈 취급을 당했다. 정권을 잃었다는 트라우마 때문인지 문재인 대표는 종부세 이야기를 절대 못하게 하더라. 부동산에 대한 세제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지는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쪽은 프레임, 다른 한쪽은 트라우마처럼 돼서 지금 한국에서는 세금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렵게 됐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프레임이 엄격한 아버지 모델과 자상한 부모 모델로 수렴된다고 말한다. 엄격한 아버지는 남성의 지배를 전제로 하나 자상한 부모는 양성이 고르거나 한부모라도 부모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세계관으로 나눠볼 수 있을까?

 

우석훈 : 되게 어렵다. 나는 한국의 ‘보수’를 잘 모르겠다. 진보나 좌파도 상대적으로 규정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본 프랑스나 스위스 보수는 책을 무척 많이 본 덕분인지 논리가 탄탄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책 자체를 잘 안 보기도 하지만 보수는 책을 아예 안 보더라(웃음). 최근 ‘반지하법’을 연구하고 있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을 위한 정책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 그 사람들은 대개 정치적으로는 박근혜를 지지한다. 서양 기준의 진보와 보수가 우리나라에선 맞지 않는다. 특정 집단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도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고맙다고 하면서도 표는 다른 정당(후보)을 찍는다.

 

김민전 : 가난해도 경제적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것만은 아니다. 레이코프의 고민이나 우석훈 박사의 고민은 맞닿는 데가 있다. 우리나라는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진 않는다. 이것을 합리적 투표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지적도 나오는데, 우리는 레이코프 모델에 따라 분류하긴 힘들 것 같다. 한국의 보수가 자유를 신중하게 존중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이념적 역정을 보면 노무현 정권에서는 내가 진보가 아님을 발견하고 이명박 정권에서는 내가 보수가 아님을 발견했다(웃음). 2012년에는 보수와 진보 모두 비율이 늘어나지 않은데 반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엄한 아버지 모델이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지만 우리의 보수는 자유주의자라기보다 국가주의자가 아닌가 싶다. 한국의 진보는 자상한 부모 모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진보라고 하는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해나 공감 보다 투쟁 이미지가 강하다. 여전히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다른 나라의 진보?보수 개념과는 다르다. 여성들이 진보보다 보수에 대한 지지가 많은 것도 아이러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순 없지만 최근 『잔혹동시집』이 화제가 됐었는데 학원가라는 말은 엄마가 하고 아빠는 방임을 한다. 남녀 차이도 서구와는 다른 것 같다.

 

이상돈 :이승만, 박정희는 미국적 관념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볼 수가 없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였으며 박정희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 적도 없으니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고 민족중흥을 꿈꾼 국가주의자에 가까웠다. 진보는 권위주의적 정부에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긴 것이다. 보수는 노무현 정권 때는 폄하 당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의 야권을 지배하는 프레임은 ‘노무현 프레임’이라고 본다.

 

셋 모두 레이코프의 모델이 한국을 설명하는데 어렵다는 일관된 말씀을 하고 있다. 미국에선 이 책이 나온 뒤 민주당은 2008년 대선은 물론 2012년에도 이겼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야권이 분열되고 내부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에서 왜 진보는 10여 년 동안 선거마다 지는 걸까.

 

김민전 : 우선 환경의 변화를 들고 싶다. 인구 구조의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금 20~40대 유권자가 37%로 2002년과 비교하면 10%가량 줄었다. 50대 이상은 더 많아졌다. 지금 여야가 선 포지션이 그대로 간다면 야권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을 지도 모른다. 2002년 2030이 진보에 대해 보인 지지와 지금의 2030의 지지 강도는 훨씬 약화됐다. 보수 지지 기반은 늘어나고 충성도도 유지되나 진보 지형은 숫자도 줄어들고 충성도도 약해지고 있다. 둘째 환경이 불리해도 새로운 균열 구도를 만든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균열 구도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균열 구도를 자신들을 다수로 만든다면 상황이 바뀌겠으나 야권이 그 정도 역량을 갖고 있을지 의문이다. 레이코프는 미국 보수는 다양한 보수들이 모여 있는 것이 강점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진보가 다양한 세력이 모여 공존할 수 있도록 하려면 공천권을 민주화하는 방법밖에 없다. 야권에서 혁신론이라면서 물갈이론을 말하는데 이것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진부한 프레임이다. 과감하게 ‘오픈 프라이머리’ 등의 방식으로 유권자에게 권한을 넘겨서 물갈이나 물대기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돈 :선거에서는 후보 역량 등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영남 인구가 많고 연령대에서도 새누리당에 유리한 구조다. 문제는 젊은 층을 투표장에 유인하지 못한다. 1970년대를 떠올리면 40대 기수가 나오면서 돌풍을 일으켰듯이 세대교체 같은 바람이 야권 개편을 통해 있지 않으면 투표율도 저조하고 집권당도 30%정도밖에 지지를 획득할 수밖에 없다.

 

우석훈 :야권이 계속 선거에 졌는데, 8년을 굶어서 이젠 지는 것이 익숙하다(웃음).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서민’이라는 용어를 계속 쓸지 말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스스로 서민이라고 말하는데 당당하다. 그런데 정치인이 서민의 정치를 하겠다며 유권자에게 서민이라고 일컬으면 화가 난다는 거다. 서민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면 듣는 서민은 기분이 확 나빠지면서 명품 정당을 찍겠다는 생각을 한단다. 그래서 서민이라는 개념을 포기하자고 건의했더니 DJ를 모신 오래된 분들이 DJ노선을 폐기하자는 말이냐며 화를 내더라. 나는 프레임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서민이라는 말을 쓰면 쓸수록 진다. 익숙한 민주화 담론, 서민 담론이 아닌 젊은 사람 감성에 맞는 것을 쓰지 않으면 또 질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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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최근 세월호 1주기 집회를 폭력집회로 볼 것이냐, 추모집회로 볼 것이냐를 놓고 프레임 이론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폭력성을 부각시킨 일부 방송의 보도가 유가족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본질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전후맥락을 제거한 채 유가족이나 관련 단체를 폭력과 결부시켜 보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김민전 : 동의한다. 세월호 사태도 그렇고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대응을 않고 갈등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지금 정부가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지 분노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유가족을 비판할 때 정치화되었다는 틀로 비판을 많이 하는데 처음부터 이들이 정치화되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권이나 청와대에서 말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만들었다. 재보선이 없었다면 인양 얘기도 안 나왔겠지. 특히 내가 분노하는 것은 상설특검법은 유체이탈적인 법이다. 상설특검법을 만들어놓고 법을 지켜야한다며 협상을 10개월 이상 끌었고 시행령을 갖고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것이 음모론을 키우는 것 같다. 정부가 제대로만 한다면 음모론이 넘쳐나겠는가.

 

이상돈 : 방송 환경이 야권에 불리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 지지도는 왜 40%를 유지하느냐. 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이명박처럼 크게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어서 그런 지지율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편하고 부족한 언론 환경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프레임이라고 말하면 유권자가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 느낌이다. 그동안의 선거결과를 놓고 봤을 때 유권자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결과인지, 프레임에 속은 결과인지 의견을 듣고 싶다.

 

우석훈 : 프레임에 속아서 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선거에는 분위기도 있고 공약 등 여러 기제들이 있다. 필요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줘야지 상대방의 잘못을 붙잡고 늘어진다고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프레임은 참고할 수 있으나 선거 결과를 설명하는 요인으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반성을 잘 하고 분석해야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데 왜 졌는지 분석하는 것을 해석 투쟁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해석이다. 프레임도 참고해야겠지만 만능이나 분석의 틀로 가져가는 건 미신 같은 것을 믿는 것이다. 

 

김민전 : 만능은 아니지만 나는 프레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명박이 내건 ‘국민성공시대’도 상당히 먹혔고 박근혜의 ‘준비된 대통령’도 먹혔다. 프레임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유권자 입장에서는 선거용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혜안을 가지면 좋겠다.

 

이상돈 : 사실 2012년 총선에서는 야당이 제1당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봤으나 그렇지 못했다. 자신들만으로 두 번의 선거를 이길 수 있다는 자만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야권도 안주하기보다 틀을 깨야 한다. 남 탓을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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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조지 레이코프 저/유나영 역/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세계적인 석학 조지 레이코프가 언어학을 현실 정치에 적용한 베스트셀러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10주년 전면개정판. 이 책은 “왜 평범한 시민들이 자기 이익에 반하는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라는 진보의 해묵은 의문에 답하며, 여의도 정치권과 언론, 지식인 사이에서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추천 기사]

- 제주를 낭만적으로 돌아다니고 싶다면
- <씨네타운 나인틴>의 세 남자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
- 김이나 “직업 작사가는 현실에 있어야 한다”
- 강상중 교수가 말하는 ‘모라토리엄’
-제 책이 화장실에 꽂혀 있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한양도성을 걸으며 도시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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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의해 살해된 도시”(프랑스 사진작가 얀 베르트랑)라던 서울은 더디지만 ‘걷는 도시’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보행친화도시 서울’을 선언한 서울시 정책과 함께 걷기 열풍이 불면서 서울에서 걷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서울이 파리처럼 걸을 수 있는 환경이 좋은 도시는 아니다. 특히 장애인에게는 보행이 너무 열악한 도시가 서울이다. 서울은 좀 더 걷도록 만들어야 한다. 자동차에게 내줬던 우선권을 사람과 생명이 돌려받아야 한다. 걷기를 통해 이어져야 하고, 만나야 한다. 그럼으로써 서울은 좀 더 도시다운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다. 생기를 찾게 될 것이다.

 

“걷는 사람에게 절망은 없다. 그가 정말 걷는 사람이라면”이라던 프랑스 시인 자크 레다의 말은 도시 산책자에게 힘을 준다. 이 말을 곱씹으며 한양도성을 걸었다. 지난 5월 31일이었다. 『권기봉의 도시산책』출간기념 ‘권기봉 작가와 함께하는 도시 산책’은 한양도성을 누비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한양도성은 요즘 떠오르는 산책길 중의 하나다. 앞선 명칭은 ‘서울 성곽’으로 2011년 7월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한양도성은 왕이 통치하는 도시 한양의 상징물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직전부터 대대적으로 파괴됐다가 최근 활발하게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한때 눈길도 두지 않았던 한양도성길이 새로운 도보여행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총길이가 18.6킬로미터나 되어 규모 면에서 여느 올레길이나 둘레길에 뒤지지 않는데, 특히 전체 구간 가운데 12킬로미터 정도는 성벽과 나란히 걸을 수 있어 역사와 자연을 함께 만끽하기에 제격이다.”(183쪽)

 

스무 명 가량의 독자들이 4호선 한성대입구역 부근에서 저자와 만났다. 가장 먼저 바라본 곳은 혜화문. 사소문에 속하는 혜화문은 원래 있던 위치에서 벗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도로 확장과 함께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게 됐던 것. 저자는 성에 대한 이야기도 풀었다.

 

“성은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높은 곳이 유리해서 능선을 따라 짓는다. 높은 곳을 못 찾으면 다른 방어 장치를 찾는다. 대부분 도시는 높은 곳에 지어졌다. ‘아크로폴리스’의 어원을 따지면 ‘아크로스’와 ‘폴리스’의 합성어인데, 아크로스는 높다,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이다. 즉 높은 곳에 만들어진 도시다.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전후 많이 철거됐다. 교통 등을 이유로도 그랬고 성돌을 갖다 쓰면서 사라진 것도 많다.” 

 

혜화문을 바라본 뒤 본격적으로 성곽 길로 올라섰다. 성곽에는 복원의 흔적인 아크릴판이 붙어 있었다. 태조 4년 한양도성은 축성되었다. 백악산(북악산)ㆍ낙산(낙타산, 타락산)ㆍ남산(목멱산)ㆍ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됐던 한양도성은 세종, 순종 때 수정(보완)됐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순조 때도 보완공사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복원이 한창 이뤄지고 있는 지금, 성곽 주변의 나무는 없애는 추세다. 성곽에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쳐서인지 성돌의 크기나 색깔, 질은 조금씩 다르다. 시기에 따라 성돌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농한기를 택해 성을 쌓았는데 주로 겨울에 하다 보니 여럿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쌓았던 성이 일부 무너지면 관군들이 보수ㆍ보완에 나섰다.

 

“새 돌의 색깔이 너무 밝아 옛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기계로 다듬은 느낌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지적을 쉽게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옛 모습을 되찾아주려는 노력도 좋지만 빨리 지으려고만 하다 자칫 안 하느니 못한 날림공사가 될까 우려스럽다. 나아가 ‘복원’이라 이름 붙은 일련의 재건축 작업들이 한양도성의 ‘진정성’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본질적인 차원에서 더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185쪽)

 

“한양도성 보존을 위해서는 안쪽 나무들도 베어야 하나 아직 사유지여서 그렇게는 못하고 있다. 성곽을 자세히 보면 나무뿌리 등도 잘라낸 흔적을 볼 수 있다. 횡렬로 된 시멘트 흔적이 있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예전에 성곽길에 가건물이나 상점 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한양도성을 공원화 사업하면서 이들을 철거했다.”

 

성곽 주변을 그렇게 거닐다가 마을이 나왔다. 몇 번 들렀고 아는 사람도 살고 있는 마을이다. 장수마을. 이 마을의 재생사업을 주도했던 마을기업 ‘동네목수’가 떠올랐다. 붙어 있는 북정마을도 발을 디디고 싶었다. 이들은 이른바 ‘성곽마을’로 불리고 있다. 한양도성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바람에 개발이 쉽지 않았고 슬럼화 되기도 했지만 이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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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마을은 재개발을 하려고 했지만 높이 제한 등으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새 건물을 짓기보다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바꾸는 재생 사업을 하고 있다. 난간도 설치하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문화재 정비를 구실로 주민들을 원래 삶의 공간에서 몰아낸 예가 적지 않았다. 이제는 개인의 주거권도 중시하면서 동시에 문화재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또 그 성과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한양도성을 축대 삼은 탓에 알게 모르게 싫은 소리를 들어온 동네가 그 성곽을 매개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을로 재탄생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189쪽)

 

낙산공원에 들어섰다. 이곳은 공원화하기 이전에 ‘시민아파트’가 있던 곳이다. 한국전 이후 인민들이 서울로 대개 왔다. 그러나 살 곳이 없다 보니 산 능선, 중턱 등에 움막이나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군인 출신의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판자촌을 허물고 아파트 건설 사업에 적극 나섰다. 창천동 와우아파트, 회현동 시범아파트 등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면서 김현옥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났고 구청장과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회사 사장까지 책임을 지고 좌천되거나 구속됐다.)

 

“낙산은 공원화 사업을 하면서 시민아파트는 철거됐다. 돈을 아끼며 빨리 짓는다며 부실시공과 비리가 생겼고 결국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시민아파트는 집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으나 아파트 입주자들은 피아노 등을 가진 중산층이었고 이런 수요층 파악도 제대로 못해서 짐이 많아지면서 무너졌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회현동에 지어진 것은 ‘시범아파트’로 이름을 바꿔지었다. 아직 이 아파트는 남아 있는데 몇 년 전 안전등급에서 D등급을 받았음에도 보상금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아서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왕산, 백악산, 남산 등을 바라볼 수 있고 대학로와도 연결된 낙산이다. 왜 이런 산사면에 아파트를 지었을까. 지을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지만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전시행정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시민들이 잘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파란 기와집의 최고권력자 눈에도 잘 띌 수 있는 곳. 시민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낙산을 둘러보고는 흥인지문으로 향하는 길, 창신ㆍ숭인동을 거친다. 이곳은 도시재생 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권기봉은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이었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은 이수광의 생가 ‘비우당(庇雨堂)’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비를 피할 만한 집이면 족하다’는 뜻의 비우당. 검소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집 이름이다. 과거의 선비는 이렇게도 살았건만, 지금 우리는 이런 풍모를 만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을 탓할 순 없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니만큼. 그럼에도 거듭된 총리 낙마와 공직자들의 태도가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종을 그렸다는 동망봉은 지금 아파트촌이 되어 있다. 낙산에서 잠시 빠져 이화마을에도 발을 디뎠다. 성곽마을과 달리 성 안쪽 마을인 이화마을은 관광지로 뜬 탓인지 외지인들의 발걸음이 활발하다. 일본 관광객들이 ‘가와이~(귀엽다, 사랑스럽다)’를 외치며 상품 구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마을 평상에는 마을 구경을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쉬어가고 있었다. 이화동 마을박물관이 눈에 띠었다. 예능 프로그램 <1박2일> 등에 나오면서 ‘이화벽화마을’로도 알려진 마을답게 곳곳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도 볼 수 있다.

 

다시 이어진 골목길 탐방은 창신봉제골목으로 이어졌다. 권기봉은 채석장으로 독자들을 이끌었다. 자연절벽이 아닌 돌을 깎아지른 채석장. 석질이 괜찮았던 까닭에 일제강점기 채석장으로 개발됐다. 이곳에서 잘라낸 돌로 초선총독부,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등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저자는 근처 보문동에도 채석장이 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 당시 채석장에서 일한 분 가운데 지금도 이곳에 살고 있는 분들도 있다. 창신동은 동대문 의류산업의 배후 생산지로 작동하고 있다. 뉴타운 안이 나오기도 했는데 무산되고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도 듣고 재생을 위한 여러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대문 의류산업의 배후기지인 창신동은 문화적?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동네다.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봉제공장도 있고, 백남준과 박수근이 살았던 집도 있다. 백남준은 죽기 전 창신동에 가고 싶어 했다. 지금 이곳에는 러닝투런이라는 사회적기업이 ‘OOO간(공공공간)’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함께 흥미로운 예술작업과 경제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 밖의 여러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 주체들이 슬럼화됐던 창신동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러닝투런은 2013년에 이미 ‘도시의 산책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창신동을 누비는 재미를 느끼게 해줬다.

 

그리고 동대문(흥인지문)으로 향했다. 평지 지역이어서 옹성을 쳐서 둘렀던 동대문은 지금 숭례문처럼 외따로 떨어져 섬처럼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건널목 건너의 동대문성곽공원에 얽힌 이야기도 풀어냈다.

 

“1907~1908년 전차선로를 놓으면서 성벽을 원래보다 3m 넓혔다는 기록이 있고 전차선로를 확장하면서 성벽이 허물어졌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격전지로도 알려져 있다. 최근 지반 침하가 이뤄지면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동대문성곽공원은 이대동대문병원을 철거하고 조성한 것이다. 이에 대해선 약간의 논란이 있다. 이대병원은 건물 역사만 80년 이상으로 구한말 외국인선교사가 지은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데 한양도성 때문에 철거됐다. 지금은 한양도성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흥인지문은 근현대사의 현장이다. 흥인지문 바깥길은 ‘왕산로’라고 부르는데, 왕산은 1900년대 초반 일제에 대항해 의병 궐기를 일으킨 의병장 허위의 호다. 왕산은 의병을 일으켜 사대문 안으로 진군하다가 청량리 바깥에서 일본군에 의해 진압을 당했다. 그 정신을 잇는 의미로 ‘왕산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권기봉의 설명이다.

 

흥인지문을 지나 북적이는 동대문시장을 통과했다. 다리를 지나면서 저자는 ‘오관수문’에 대한 이야기도 풀었다. 한양도성의 다른 구간에는 물길이 지나는 곳이 없다. 유일하게 성곽을 뚫고 물길이 지나는 유일한 곳이었다는 것. 다섯 개의 구멍이 있어서 오관수문이었다. 이 오관수문에는 30명 정도가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요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건축물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도 빠질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왕은 해방 이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꾼 ‘경성운동장’을 만들었다. 운동장을 만들면서 흙을 덮었는데 이때 남산에서 발원된 물이 나오는 이관수문을 덮었다. 이관수문 위로 한양도성을 지나는 길이 있었다. DDP를 만들면서 이런 유적을 발견하고는 지금 이관수문은 보전을 하고 있다.

 

“오세훈 전 시장 때 DDP를 지으면서 땅을 파니 이관수문 등 성곽 유물이 나왔다. DDP를 짓다가 설계 변경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설계 비용에 맞먹는 돈이 들게 된 거지. 사실 DDP는 지을 때 목적 없이 만들어졌다. 지금 전시회나 초대전 등을 통해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서울디자인재단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는데 새 건물의 운명이 시민들의 손에 맡겨진 셈이다. 시민들이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걷다 보면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은 무언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서울은 걷기를 통해 재발견될 수 있다. 계획도시였던 서울은 그동안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과거를 지우는 데만 공을 들였다. 그러다 자동차에 의해 살해도 당했고 걷기에 불편한 도시로 전락했지만 서울은 걷기를 통해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러니 걸어라. 도시를 산책하자. 비록 절망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 절망은 익숙한 것이지만, 걷기는 그 절망에서 다른 가능성을 잉태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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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의 도시산책 권기봉 저 | 알마
서울이라는 도시의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다채로운 모습들을 95꼭지에 담아낸 책. 이 글들을 읽다 보면 서울이 얼마나 깊이 있고 역동적이며 매력적인 도시인지 새삼 깨닫는다. 《권기봉의 도시산책》은 서울이 과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단편적인 정보만 나열하고 있는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임을 새삼 재발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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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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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보통 사람들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해서 ‘괴짜 교수’로 통한다는 이광형 교수. 실제로 강연이 열린 이날에도 그는 양쪽 신발끈의 색을 다르게 매고 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색 신발끈을 매고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똑같이 따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며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주제가 창의력인 만큼 그는 뇌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의 문을 열었다. 인간이 갖는 전체 에너지의 20 퍼센트를 소모한다는 뇌. 우리의 몸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너무나 미약하다.

 

“우리 뇌에는 천 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습니다. 신경세포에서 시냅스가 옆의 뇌세포에 연결돼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데, 이것은 전기 신호와 같습니다. 이 전기 신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시냅스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 속에는 전자회로가 있는데, 납땜하는 것은 이들을 연결해서 기능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뇌세포도 혼자 있으면 작동하지 못하고, 연결되어야 작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결된 것들 중에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있고 자주 사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회로를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전기가 흐르지 않기 때문에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뇌의 회로는 새롭게 암기하면 또 다시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없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규칙적으로 몇 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도 회로가 만들어져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복하면 시냅스의 연결이 강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나

 

많은 사람들은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서 정작 단 1시간이라도 창의력 개발에 투자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광형 교수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 지적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창의력 수업을 따로 시키고 있나요? 그렇게 창의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왜 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는 무언가 모순이 있는 것이죠. 혹시 많은 분들이 창의력은 수업을 통해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들 창의력은 본래 타고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개발시킬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창의력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축구를 잘할 수 있습니까? 달리기, 드리블, 패스, 슈팅 등 몇 가지의 훈련을 열심히 하면 결과적으로 축구를 잘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창의력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면 창의력이 늘까요? 책 읽고, 생각을 많이 하고, 여유를 가지라고 하는 것은 마치 축구를 잘하려면 열심히 공을 차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방법론이 아니죠.”

 

그는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실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을, 그러한 고착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질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은 뇌를 자극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반복하면 뇌에서 신경회로를 형성해 습관화합니다. 저를 포함한 몇몇 교수들이 카이스트에서 새로운 교육방법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왜 교실에서 토론이 안될까 고민했습니다. 생각을 해보니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교수들과 의견을 나누다가 앞으로 교실에서는 진도를 나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수업 진도는 미리 교수가 동영상으로 녹화해서 올리고, 학생들은 그것을 수업 전에 보고, 교실에서는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자고 의견을 냈어요. 저는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수업하고 왔습니다. 질문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은 창의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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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공간, 분야로 떠나는 3차원 여행

 

이어서 이광형 교수는 자신이 창안한 ‘3차원 창의력 개발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인간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연구하다가 이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시간, 공간, 분야’ 이렇게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광형 교수는 말했다. 현재를 살아가기에 급급한 우리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집착이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창의력을 키우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고의 틀을 깨고 5년 후, 10년 후로 시간을 이동하여 상상해본다면 어떨까.

 

“먼저 ‘시간(Time)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컵을 바라보면서 사색해봐도 특별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때 시간 축을 이동시켜서 10년 후, 30년 후에 어떤 컵을 쓸까 상상하면서 현실에서 벗어나보는 것입니다. 20년 전에 우리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녔나요? 아니죠. 그러니까 당연히 20년 후의 미래에도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 않을 거예요. 물론 통신은 할 테지만 다른 형태로 하겠죠. 이처럼 미래를 위해서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상상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 축을 이동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의 대상을 놓고 모양이나 위치, 크기를 달리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다음은 ‘공간(Space)축’입니다. 다시 컵을 예로 들게요. 아까는 시간을 이동했지만, 이제는 공간을 바꿀 거예요. 알래스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어떤 컵을 쓸까 상상해보는 거예요. 식당에 가면 국자가 있잖아요. 그런데 국자로 면 같은 것을 뜨려고 할 때 자꾸 미끄러지니까 톱날을 단 거예요. 이미 국자가 존재하고 있는데 공간적 요소를 살짝 변형해 모양을 바꾼 것이죠. 제 연구실에는 벽에 TV가 거꾸로 달려있어요. 공간적 요소를 바꾸니까 모든 것들이 거꾸로 바뀌고 새로워져요. 뇌 속에서 사물을 거꾸로 인식하는 새로운 회로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창의력은 아예 없는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들을 결합하고 응용하는 과정에서 창의력은 생겨난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 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만든 사람 중 한 명이죠. 이 사람은 위대한 발명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결합했을 뿐입니다. 분야의 융합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었어요. 지금 화면에 보이는 것은 고무줄입니다. 우리는 고무줄을 물건 묶는 데에도 쓰지만 총 쏘는 데에도 쓰죠. 이렇게 용도를 바꾸는 거예요. 분야를 바꿔서 결합해 보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용도가 생기는 거예요. 한번은 제가 등산을 하러 갔는데 비가 왔어요. 그런데 같이 가던 친구가 갑자기 가방에서 샤워캡을 꺼내더니 머리에 쓰더라고요. 용도를 바꾸니까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시간, 공간, 분야의 세 축을 서로 엮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간과 공간적 요소를 결합해, 시간의 축을 옮기면 공간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지 고민해보는 것이다. 이광형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이 평소에 자주 사용한다는 ‘창의력 왼손법칙’을 소개했다. 손 모양은 플레밍의 왼손법칙과 동일하다. 왼손을 들고 엄지, 검지, 중지를 서로 직각이 되도록 편다. 다만 여기서 엄지가 분야축, 검지가 공간축, 중지가 시간축을 의미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이 법칙을 기억하고 평소 일상 생활에서 낯선 문제를 만나면 손가락을 펴고 스스로 질문해보는 것이다. 앞으로 ‘시간, 공간, 분야’ 이 세가지를 의식적으로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머리에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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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머릿속에 창의력을 심어놨지?이광형 저 | 문학동네
인공지능, 바이오정보, 미래 예측에 관심이 많은 저자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3차원 창의력 개발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괴짜 교수를 따라 시간, 공간, 분야의 3차원을 여행하다보면 어느덧 자신의 머릿속에 창의력이 부쩍 자라나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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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장세이 “자신만의 숲을 만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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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나무들도 산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때로 혹은 자주 다른 생명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그래서 주변의 나무를 생명이 없는 사물인 양 대하기도 한다. 잡지기자를 하다가 숲해설가를 거쳐 생태창작작업실 ‘산책아이’를 열고 생태이야기꾼이 된 장세이는 그것이 못내 가슴 아팠나보다. “나무는 생명이다”라고 다시 강조한다. 서울에 사는 나무를 보듬으며 그가 쓴 책 『서울 사는 나무』(장세이 지음/목수책방 펴냄)를 통해서다. 이 책은 서울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다. 서울은 사람만 흔하고 북적이는 곳이 아니다. 장세이는 서울의 흔한 길과 거리, 동네와 마을, 크고 작은 공원 등 서울이라는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들을 통해 서울의 오늘과 사람을 들여다본다.

 

“나무가 인간보다 위대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무너져가는 인간성이 다소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흐릿해지는 끈기에 풀을 보탰다.”(16쪽)  

 

지난 5월 25일, 부처님 오신 날. 나무와 자연이 제공하는 편안함과 깨달음을 얻고픈 독자들이 장세이를 호명해 삼청공원에 모였다. 장세이의 나무 해설을 들으며 삼청공원에 사는 다양한 나무를 만나는 ‘나무 산책’의 시간. 삼청공원의 나무들이 두 팔을 벌려 ‘함께 생명’의 기운을 발산했다.

 

장세이는 책에서 “봄에 숲에 들면 몸서리치게 좋다”고 했다. 무더워지긴 했으나 삼청공원의 봄이 그랬다. 성현(成俔)이 『용재총화』에서 도성 안에 제일 경치 좋은 곳으로 꼽은 바 있는 곳. 공원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로서 도심과 가까운 공원으로서 산책을 즐기기에도 제격인 곳이다. 독자들이 도서관과 카페를 겸한 숲속도서관 앞에서 모였다. 이곳 도서관은 숲에서 자연스레 책을 접하고 누군가 책을 읽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책을 꺼내서 읽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평도 듣고 있는 곳이다. 책의 초판 한정 특별부록인 ‘삼청공원 나무지도’는 그래서 특별한, 세상에서 다시 구하기 힘든 귀한 선물이다. 이 지도는 때죽나무, 참빗살나무, 가죽나무, 벚나무, 귀룽나무,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 등 삼청공원에 생명의 뿌리를 박은 40여종 1000여 그루의 수종과 위치를 담아냈다.

 

숲속도서관에서 말바위를 따라 봄기운을 간직한 숲길을 걷는다. 나무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데 삼청공원에서 빠질 수 없는 나무가 때죽나무다. 땅만 바라보며 죽어 떠날 때만 기다려’ 때죽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닐까 하며, 저자는 자신만의 때죽나무 어원을 상상했다.

 

“때죽나무 꽃은 처음 만난 세상이 두려운지 땅을 향해 열린다. 조심스레 연 마음 도로 닫아버릴까 ‘고개 좀 들어봐’ 말도 못 건넨다. 대신 조용히 몸을 낮춘다.”(157쪽) 

 

연리목(連理木)을 만났다. <연리지>라는 영화도 있었고,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이어진 연리지는 사랑을 상징할 때 흔히 표현하는 말이다. 저자는 ‘연리목’의 조건을 묻는다. 단어는 종종 들어봤지만 그 조건을 아는 사람은 없다. 연리목은 같은 종의 나무여야 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이어져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단다. 엇비슷한 시기에 자라야 한다는 조건도 따른다.

 

“가지가 이어진 것을 연리지, 뿌리가 이어진 것을 연리근이라고 하지요. 연리지는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눈에 띄기도 하지만, 연리근은 땅속의 일이라 쉽게 볼 수 없습니다.(중략) 가지, 뿌리, 줄기 등 두 그루 이상의 나무가 마치 한 그루처럼 이어진 나무를 아울러 연리목이라고 합니다.”(325쪽) 

 

저자가 가리킨 곳의 나무는 그래서 연리목이 되기에는 힘들어보였다. 하나가 현저히 어리기 때문이었다. 엇비슷한 시기에 자라야 한다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 한 나무는 고사할 것 같다는 저자의 말이 따랐다. 가지, 줄기 등이 이어진다고 모두 연리목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연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조건 중에도 타이밍이 있다. 한 사람만 원한다고 연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연인이 되고 연리목도 될 수 있다. 사랑은 그만큼 우주가 기를 모아줘야 가능한 것이다.

 

“잘 살펴보면 주변에서 연리목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운명을 살피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삼청공원에서 단풍나무가 많이 모인 곳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단풍나무는 단풍나무과의 나무로 만지면 매끈한 특징이 있다. 별모양의 잎을 품은 단풍나무다. 이것이 가을이 되면 아주 빨갛게 변해서 우리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한다. 빨갛기 전의 단풍나무는 어찌 저다지도 푸르른가. 그 빛깔의 변화만큼 우리네 삶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르다.

 

“주변 가까운 곳에 자신만의 단풍 명소를 만드는 것도 괜찮다. 단풍마다 색과 잎이 다르니 그것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다. 내장산에 갔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단풍을 이기려고 할까. (웃음) 단풍보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는 사람을 빗댄 말이었다.”

 

장세이는 아까시나무 앞에 멈춰서 혼인목에 대한 이야기도 이었다. 하늘에서 꽃비가 떨어지는 것 같은 아까시나무와 가지가 낭창낭창한 말채나무가 혼인목으로 살고 있다. 둘 모두 크게 자라고 있으며 간격이 밀착돼 있다. 연리목과 어떻게 다를까. 연리목과 비슷한 조건을 갖고 있으나 다른 점은 서로 종이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혼인목은 종이 다르기 때문에 가까이 있다고 해도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창경궁에서 아주 큰 혼인목을 볼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창경궁에서 볼 수 있는 혼인목은 느타나무와 회화나무가 혼인을 올렸다. 다만 삼청공원의 아까시나무와 말채나무는 쉽게 예측하진 못하고 지켜봐야 한단다.

 

“혼인목은 가까이 자란 나무이되, 종이 다른 나무 사이에서만 가능합니다. 둘은 절대 한 그루가 될 수 없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입니다.”(327쪽)

 

“혼인목 중 한 나무를 베면 나머지 한 나무가 곧 따라 죽는다고 한다. 혼인목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렇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런 혼인목이 되기 위해서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경쟁을 통해 한 나무만 살아남는 것이 좋은지, 고통을 겪으면서 함께 자라는 것이 좋은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이파리가 꽃 같은 가죽나무 앞에서도 멈춰 선다. 암수딴그루인 가죽나무이기에 하나가 있으면 주변에 다른 하나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다. 저자는 발아율이 좋아서 근방에 어린 가죽나무가 자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가죽나무 이파리는 홀수깃꼴겹잎이며 한 잎자루에 작은 잎에 많이 붙어 있다. 저자는 왜 홑잎도 있는데 겹잎을 택했는지 생각해볼 것을 권했다.

 

“가죽나무 잎은 깃꼴겹잎인데, 깃꼴은 새의 깃 모양이라는 뜻이고, 겹잎은 한 개의 잎자루에 여러 장의 작은 잎이 달리는 것을 말한다. 가죽나무 잎은 하나의 잎자루에 적게는 13개, 많게는 25개까지 달린다. 작은 잎은 잎자루를 중심으로 쌍으로 달리다가 잎자루 끝에 한 장이 더 달려 늘 홀수다.”(147쪽)

 

칠엽수는 잎사귀가 7개여서 칠엽수다. 작은 잎이 대개 7장인데, 드물게 5장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칠엽수는 무엇보다 잘 자라는 덕분에 가로수로도 활용된다. 가로수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 공해에 강할 것. 속성으로 잘 자랄 것. 이파리가 넓고 미관상 호감을 줄 것. 저자는 파리 상젤리제 거리의 칠엽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파리 샹젤리제의 가로수는 마로니에, 곧 가시칠엽수이며 서양칠엽수라고도 부르는 나무다. 열매에 가시가 있다. 어릴 때는 귀여운데 크면 가시가 두드러진다. 찔리면 피가 날 정도로 아프다. 이게 가로수가 될 수 있느냐고도 물어봤는데, 가시에 찔려서 크게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 야자수도 가로수로 쓰이기도 하니까. 자, 여기서 가로수와 관련한 질문을 하겠다. 왜 우리는 그늘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고마운 가로수를 괴롭히는 걸까?”  

 

이어서 만난 것은 호두나무였다. 이날 나무 산책의 마지막 나무였는데 열매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나무다. 홀수깃꼴겹잎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호두나무가 있던 장소는 컨테이너 박스가 있었다고 한다. 컨테이너 박스에 가려져 호두나무는 결실을 보지 못했으나 컨테이너 박스가 없어지면서 보란 듯이 자신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저자는 질문을 던졌다. “이 호두나무는 어떻게 여기서 살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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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그렇게 물어본 데는 이유가 있다. 호두나무는 도심에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이 어떻게 자라게 됐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저자는 아이들과 나눈 수업의 에피소드를 예로 든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소중한 돌을 찾아오라는 과제를 남겼다. 아이들은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돌의 모양을 살피고, 냄새도 맡고, 맛을 보는 등 돌과 자신의 관계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것은 단순히 돌을 찾는 수업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수업이었던 것.

 

“호두나무도 그렇게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모양을 보고 이름을 아는 것은 관계의 시작이다. 그렇게 자주 만나고 어루만지면서 이야기를 만들면 좋겠다. 오늘 내가 던진 질문은 답이 없다. 그 모든 것은 신의 선사다. 나무도 저마다의 개성을 갖고 있다. 나무가 못 생겼다, 지저분하게 생겼다고 표현도 하는데 미추 개념을 자연에 그대로 대입하기보다는 그런 특징 하나하나를 고유의 개성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가죽나무는 소태나무과(소태처럼 쓰다 할 때 그 소태)답게 쓴맛이 나서 못 먹는다. 게다가 이파리 뒷면에 사마귀처럼 툭 불거진 선점이 있는데, 특유의 냄새가 나 더 못 먹겠다고 한다. 한데 먹을 수 없다고 가짜라 하는 건 가혹하게도 허기진 발상 아닌가. 나무는 사람 먹으라고 사는 게 아니니 말이다.”(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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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는 나무장세이 저 | 목수책방
이 책은 서울에서 살아가는 나무 이야기다. 제호의 첫 머리에 등장하는 ‘서울’은 ‘나무’와 함께 책의 큰 축이다. 서울의 흔한 길과 그 길이 지나는 동네, 서울을 숨 쉬게 하는 크고 작은 공원,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스에 역사성과 균형감을 선사하는 조선의 궁궐까지 서울의 근간을 이루는 공간이 주 무대다. 어찌하여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살게 되었는지 연유를 되짚으며 자연스레 나무가 살아가는 길과 공원, 궁궐의 내력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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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연애, 그 찌질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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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날도 아닌 날’이었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것 같은 농담 같은 날. 지난 5월 30일이 그랬다면 그랬다. 지나가는 봄날이 아쉽다며 술 한 잔 당기기에도 좋을 날, ‘앨리스’라는 필명으로 ‘주색(酒色)’을 감칠맛 나게 발설하는 최고운과 기생충학으로 뜬 인기 작가 서민이 서울 혜화동 벙커1에서 입담을 펼쳤다. 최고운의 에세이『아무 날도 아닌 날』출간기념으로 열린 북토크쇼. 바갈라딘의 사회로 최고운과 서민과 함께 술 한 잔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날, 독자들은 기분 좋게 취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

 

서민 : 30대에 들개처럼 지냈었다. 술 마시고 자고 일어나면 기차역에 있고(웃음). 이 무렵에 최고운 작가가 함께 술을 마셔주면서 격려해줬다.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최고운 :스무 살 무렵에 남자는 여자보다 살짝 하등하다고 생각했었다. 동년배 남자들은 유치하고 어려 보였다. 그래서 동년배 남자는 함께 놀기만 하는 존재라고 여겼고 당시의 이상형은 ‘가방끈’ 짧고 얼굴 예쁜 남자라고 말했었다. 그런 때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서민 작가를 만났고 우정을 쌓았다. 지금은 자주 보지는 못하나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 불쑥 연락해도 답을 준다.

 

서민 교수가 『아무 날도 아닌 날』에 대한 리뷰를 남기면서 여성 작가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깨고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의 글쓰기를 응원했다. 서민은 이 책을 읽은 감상이 어떠했으며 최고운 저자는 첫 책을 낸 소회가 어떤가.

 

서민 :책을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20년 전 『마태우스』라는 소설을 낸 적이 있었다. 절판된 책인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면 부끄러워서 훔치고 싶다(웃음). 그런데 최고운의 『아무 날도 아닌 날』은 20년이 지나도 부끄럽지 않은 책을 낸 것 같아서 부럽다.

 

최고운 : 10여 년 전 어딘가에 기고를 해서 첫 고료로 4만 원을 받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오프에 기고를 꾸준히 해왔다. 책은 온라인에 쓴 글과 달리 종이에 박히는데, 내가 어떻게 책을 써,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직장생활을 그만뒀었는데 출판사에서 타이밍에 맞게 연락이 왔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제안에 이렇게 책이 나왔다.

 

책을 내고는 기대하지 못한 반응도 벌어진다. 강연도 하게 되는데, 책을 내고 첫 강연에서 화장을 하지 말고 브래지어를 벗자는 말을 했다고 하더라. 
 
최고운 :강연 제안을 받았었는데, 부끄럽고 부족하다고 해서 시도하지도 않으면 영원히 할 수가 없잖나.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며 강연 요청을 수락했다. 책에는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고 썼지만, 실은 그런 것은 타고난 기질도 있지만 어렸을 때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한국에는 젊은 여성들에게 과하게 집중된 제약 같은 게 있다. 그런 것에서 나를 조금씩 내려놓기 위해 화장에 너무 신경 쓰지 말기로 하고, 브래지어는 남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을 옥죈다. 속옷을 입지 말고 화장을 하지 말자는 얘기는 이전부터 있었는데, 사적인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첫 강연에서 그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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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오뎅 바 마담이 되겠다고 저자 소개에 써놨는데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 있나?

 

최고운 : 출판사에서 저자 소개 글을 보내라기에 술과 개와 남자와 일기쓰기를 좋아한다고 보냈더니 출판사에서 난감해하더라. 좀 더 써달라고 해서 좀 더 덧붙인 것이 지금의 소개 글이 됐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나는 늘 술이 생각난다. 이 음식에는 어떤 술이 어울릴지를 생각한다. 장난처럼 ‘술안주 포토그래퍼’라고 썼는데, 누가 진지하게 언제부터 그런 직업을 갖게 됐냐고 묻기도 하더라(웃음). 북유럽의 오뎅 바 마담은 그저 꿈이다. 나는 추운 것을 못 참아서 북유럽에 놔두면 못 살 것이다. 북유럽 음식이 별로인 것 같아서 오뎅 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썼다.

 

술을 꽤 좋아하는데 주량이 어떻게 되나?

 

최고운 :계속 마신다. 책을 내고 나서 동아일보 인터뷰를 했다. 기사가 나고 이튿날 어머니가 지인과 먼 친척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았나 보더라. 기사에 내가 술잔을 들고 찍은 사진이 나갔는데, 어머니가 그걸 보고는 10년 동안 술을 주야장천 마시더니 신문에 났다며 좋아하셨다. 스무 살 무렵에는 소주 7병 정도를 마셨다. 지금은 절반 정도 마시지 않을까 싶다. 컨디션이 좋으면 폭탄주 40잔 정도는 먹기도 하고. 술집에 가면 메뉴판을 펴서 주류는 위에서부터 한 병씩 시키기도 하고 달력에 술 먹은 날을 동그라미를 치기도 했었다.

 

서민 : 아버지가 소주 10병 정도 드셨다. 그런데 나는 소주 2병을 마시면 잔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이 늘 부러웠다. 한때 술을 잘 마시려고 체중을 불린 적도 있었는데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더라. 최근 아내와 술을 마시지 않기로 약속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

 

책을 보면 최고운 저자의 금주 결심도 나오는데, 실제로 술을 끊어보기도 했나?

 

최고운 : 술을 끊어본 적도 있다. 세달 정도? 중간 중간 휴지기를 주는데 이 기간에는 일주일에 세 번은 무조건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는 이유는 건강하게 잘 마시기 위해서(웃음). 너무 술을 마셨다 싶을 때는 금주 결심을 할 때도 있다. 지금까지 마신 술값을 계산해 보면 나는 중형차 정도를 뽑고도 남지 않았을까 싶다.

 

술 먹고 진상 짓도 했을 것 같은데.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은 내 얘기인데 이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이다. 남는 건 없는데 웃으며 재밌게 넘겼다거나 찡하게 남았다는 독자도 있었다. 목차만 봐도 부럽다는 분도 있었고 다양한 감상이 있었다. 일단 내 얘기이지만 실수담 같은 것은 재밌게 포장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술 아닌 연애 이야기도 빼먹을 수 없겠다. 연애를 끊임없이 하는 원천이 있다면?

 

최고운 : 감정을 숨기거나 묵혀 놓지 못한다. 내가 속마음을 숨기는 ‘포커페이스’와는 거리가 멀다. 연애는 특히 그게 안 돼서 뒤끝이 없다. 연애가 끝나면 나도 힘이 든다. 그래서 바닥을 쳤다가도 곧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다음 연애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알면 주변에 그런 사람이 보인다. 내가 평소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고 취미 등이 있으면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소개팅은 한 번도 해보질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소개팅이나 선은 거의 외모와 스펙 중심인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술, 개, 여행 등에 주목한다. 그런 것에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발견한다. 어렸을 때는 남자를 하등한 존재로 봤다. 스무 살 무렵에 아우디를 타고 다니던 남자가 내게 대쉬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차는 네 아버지 것이지 네 콘텐츠가 아니라며 튕겼다. 지금은 그것도 네 콘텐츠라며 받아들였겠지만(웃음).

 

연애는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책에 연애의 끝에 대한 기준을 말하기도 했다.

 

최고운 : 지나온 세월이나 시간을 놓는 것은 힘들다. 나는 상황에 따라 결혼했다가도 이혼할 수도 있고 그 이후의 삶도 있다고 보는 사람이 삶에 더 충실하다고 본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이 따지고 들면 모두 기회비용인데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가 그것을 멈추지 못하고 미련이 남아서 질질 끄는 것도 좋지 않다고 본다. 사람의 마음이 떠나거나 변한 것은 숨길 수 없다. 그만 만나자는 사람에게 매달려도 봤다. 그거라도 안하면 후회가 더 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매달렸다가 훌훌 털고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쁜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 여자든 남자든 자기 팔자는 자기가 꼰다. 나쁘고 이상한 남자한테 꼬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서민 교수는 결혼을 했는데, 결혼은 연애와 어떤 다른 지점이 있을까

 

서민 : 결혼은 극한의 인내심이 필요하다(웃음).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애인보다 더 편한 친구여서 결혼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결혼은 자기랑 맞는 사람과 하면 학대나 구타 등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웃음). 그런데 결혼하지 않으면 남들이 딱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면 결혼도 해보는 것도 좋다(웃음). 
 
연애할 때 꼭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최고운 :나는 욕을 너무 잘 하는데(웃음) 나처럼 욕하는 남자를 만나진 않았다. 내가 감정적이고 거친 부분도 있지만, 운전할 때 성격이 나오는 남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연애를 시작할 때 사소한 것에 넘어가는데 헤어질 때 보면 그 사소하다고 여겼던 부분에서 위기가 오더라.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서민 :공무원과 초등학교 교사가 좋다는 남자는 피하는 게 좋겠다. 그건 맞벌이는 좋지만 집안일은 하지 않겠다는 얘기거든(웃음). 가사 일을 함께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데, 집안일을 많이 하겠다는 공증을 꼭 받아야 한다(웃음).

 

왜 우리는 연애를 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최고운 : 같은 실수를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고 차이가 있다. 물론 똑같은 수렁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반복이라고는 해도 하나는 내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내가 싫다고 한 부분이 자꾸 보이는 것은 같은 실수에 빠진다기보다 애정의 유효기간이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 상담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상담하는 것이 의아하다고 했는데.

 

최고운 : 라디오나 TV 등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의 연애사를 사연으로 보내곤 하는데, 그게 의아하다. 나를 몰라서 객관적으로 말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겠지만 100%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일부 각색하거나 이미 답을 갖고 있는데 확인을 받고 싶은 경우도 있다. 차라리 술을 한잔 마시면서 주변 사람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다.

 

스무 살 때는 서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지만 서른이 되니 마흔을 바라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최고운 : 지금 나는 삼심대 후반이라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 때는 서른이면 어른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따져보면 십대 때 어른이었던 사람은 스물한 살 스물두 살이었던 거지. 서른이 되니 곧 마흔인데 그 나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 윤여정씨가 한 프로그램에서 스무 살이 남긴 고민에 대해 나도 예순 일곱을 처음 사는 것이고, 너도 스무 살을 처음 사는 것이니 같은 입장이라고 말했었는데, 그 말에 공감한다.

 

서민 : 삼십대 때는 사십대가 완전 늙은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사십대가 돼도 사랑, 욕망, 아름다움 다 있더라. 오십대도 그런 것들이 나를 기다리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산다. 육십, 칠십 역시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책에 세월호 이야기를 넣었다.

 

최고운 :책의 전체적인 콘셉트와 다르긴 한데 그 꼭지는 꼭 넣고 싶었다. 나는 혼자 잘 놀고 즐기는 편이다. 그럼에도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인연은 생길 수밖에 없고, 어느 날은 길에서 모르는 사람인데 내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더라. 평범하고 약한 존재끼리 연대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 얘기를 넣었다. 

 

“언제나 싫은 것을 찾아내는 데 망설이지 않았고, 적절하게 욕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끔은 모나고 까칠한 성격을 조금은 둥글고 모나게 만들고 싶기도 했다. 살다 보니 호불호가 확실한 것을 상당수의 사람들이 불편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결국엔 무례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모난 돌에 정 맞는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가파르고 험한 길을 만나게 되면 누구든 모난 돌에 발 디딘다.”(12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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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날도 아닌 날최고운 저 | 라의눈
이 책은 실직, 실연, 연애, 섹스의 함정에 숱하게 빠졌다가 다시 기어 나오기를 반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효와 남 탓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현재까지의 저자의 삶을 술과 안주로 축약한 것이다. 여타 에세이들의 흔한 모르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나 교훈 혹은 일말의 깨달음이나 감동 보다는, 언제나 마음대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저자의 ‘에로하고 싶지만 코믹한 날들’의 기록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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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드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물인터넷(IoT)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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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T(Internet of Things). 사물인터넷은 센서들로 이뤄진 데이터 네트워크, 기기가 통신을 기반으로 서비스가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정의는 낯설지만 사물인터넷은 이미 우리 생활에 발 들이기를 시작했다.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사물인터넷의 세계를 우리는 이미 접하고 있지 않는가. 로봇 청소기, 드론을 비롯하여 음식물의 유통기한을 알려주는 냉장고, 온도를 측정하는 프라이팬 등은 사물인터넷 초보 단계일 뿐이다. 수면자의 생체 리듬 체크 센서가 내장된 침대, 일기예보 정보 등을 파악하는 스프링클러, 유방암 자가진단이 가능한 브라, 근육 상태를 점검해주는 운동복 등 사물인터넷 기술이 적용되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안전성이나 사생활 침해 등과 같은 문제 제기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물인터넷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


『사물인터넷 실천과 상상력』을 쓴 커넥팅랩은 주요 IT기업의 실무자들이 참여하는 모바일 전문 포럼이다. 편석준, 이정용, 고광석, 김준섭은 책을 통해 우리 삶을 바꿀 사물인터넷의 개념과 구성, 실제 사례들을 보여주고, 사물인터넷 시장의 전망을 다루었다. 특별히 실제 사물인터넷을 바라보는 각 영역(서울시, 사물인터넷 협회, 기업 등)과의 인터뷰를 싣고 사물인터넷에 관한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전략)사물인터넷의 기반 중 하나는 개인들의 일상 데이터를 수집해 서비스화하는 것이다. 가령, 음식 소비량과 버리는 낭비량을 데이터화하는 방법으로 식품 구매량과 빈도를 조절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냉장고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가전제품이나 가구의 노후화를 측정해 교체 주기를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합리적 판단에 대한 수치화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낭만적인 충동구매를 줄이는 것이다. (45~46쪽)

 

지난 5월 20일, 신촌 다래헌에 사물인터넷을 둘러싼 생태계와 전망을 심도 있게 다루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평일 저녁, 넓은 강의실이 사물인터넷에 관심 있는 학생, 직장인,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강의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 되었는데 1부는 김준섭 저자가 사물인터넷의 정의와 전망에 대해, 2부는 이정용 저자가 실제 사물인터넷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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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인터넷 세상을 상상하다


한 남자가 여자 친구와 집에서 데이트 할 계획이라고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그 순간 집 안에 있는 각종 기기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청소기가 청소를 시작하고, 냉장고는 보관중인 식재료를 살핀 후 메뉴 및 구매 목록을 구성한다. 바깥 기온을 점검해 집 안의 최적 온도를 맞춰놓는 일도 진행될 것이다.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 같은 이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사물인터넷에 관한 뉴스를 마주한다. 화재를 예방하는 사물인터넷, 공기 오염을 측정하는 사물인터넷, 미아방지를 위한 사물인터넷 등은 바로 얼마 전 뉴스에 검색된 내용들이다. 지금도 새로운 사물인터넷이 개발되고 있다. 실시간으로 변모하는 시장이다. 그만큼 산업 전망이 밝은 것. 세계 유수 기업들이 사물인터넷 시장에 앞 다투어 진출하고, 시장을 선점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현재 사물인터넷의 4대 비즈니스라고 지칭하는 것은 헬스케어, 스마트카, 스마트홈, 스마트시티 등의 네 가지 영역이다. 저자 김준섭은 이를 둘러싼 지금의 환경을 ‘바벨탑 상황’으로 본다. 기기 간 커뮤니케이션에 장벽이 있는 상태기 때문이다. 업계가 서로 경쟁하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세계 표준으로 구축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지금 사물인터넷이라는 개념이 워낙 익숙한 상태다 보니 먼저 선점하려는 업체들이 많다. 일단 사물인터넷에 어떤 주체들이 들어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한 김준섭 저자는 구글, 아마존, 인텔, SK텔레콤, KT, 마이크로소프트사처럼 글로벌 거대 기업들의 서비스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을 강조해 설명했다. 향후 120조 시장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 아래 특히 이들 기업들은 산업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통해 사물인터넷 시장 장악에 도전하고 있다.

 

시계의 사물인터넷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 워치는 기존 시계 기능에다가 사람의 생체 정보 획득(심박수 등) 및 결제 기능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담은 융합 상품으로 변화하고 있다. (중략)기존 시계 업체들의 대응은 미진한 편이다. 이와 같은 형세가 지속된다면, 기존 시계 업체들은 사물인터넷 시대에 단순 하청업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250~251쪽)

 

All-seen Alliance, OIC, Thread Group 등이 네트워크 표준화를 위해 각 산업의 대형 기업들과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을 설명한 김준섭 저자는 어떤 기업이 이길 것이냐는 누가 세 불리기를 빨리 하느냐에 달렸다고 전망했다. 더불어 이런 상황에서 스타트업 기업들이 사물인터넷 시장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특정 데이터에 종속되지 않는 서비스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사물인터넷 기술, ‘센서’


사물인터넷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센서’라는 단어다. 사물인터넷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센서’이기도 하다. ‘연결’이 주요한 키워드인 탓이다. 그 가운데 인간의 오감과 관련한 센서 외에 새로운 센서가 있다는 사실은 사물인터넷을 바라보는 관점에 새로운 상상력을 부여하는 부분이다. 질병을 예방하고, 적극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놀라운 센서들이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MEMS(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s, 미세전자기계시스템) 같은 경우가 그렇다. 초소형 센서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이를 통한 융합 센서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저전력, 초소형화, 대량 생산의 강점을 가지고 센서 대부분이 멤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책에서는 ‘센서의 어머니’라 표현하고 있다.

 

멤스는 작은 실리콘 칩 위에 마이크로 단위의 작은 부품과 이들을 연결하는 마이크로 회로들로 제작되며 3차원 형태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동전의 10분의 1보다 더 작은 크기로도 제작할 수 있어 여러 개의 센서를 결합해 모듈화하는 데도 편리하다. 또한 대량 생산이 용이해 가격 또한 저렴해질 수 있다. (65~66쪽)

 

자이로 센서는 아이폰이 등장했을 당시 크게 관심을 받았던 센서다. 위치와 방향 설정의 용도로 주로 사용되는 센서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모션을 통한 모바일 게임을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가속도 센서, 레이저 센서 등과 같은 기술은 사물인터넷이 넓은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센서들이다. 


“하나의 디바이스 안에 가속도, 압력 센서를 적용해서 다양한 제품들을 출력할 수 있는 서비스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스마트 스트리트처럼 거리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센서 기술의 발달을 통해 가능했다.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정말 다양한 센서들이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한 이정용 저자는 상상력을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사물인터넷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센서 관련 국내 기업은 거의 전무한 현실이다. 현재 국내 센서 기업들은 주로 외국 기업이 보유한 원천 기술을 수입해 패키징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많은 언론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저자는 독창적 센서 개발이 미진한 상태에서 상황을 타계할 방법은 ‘융합’이라고 설명한다.

 

(전략)다양한 주변 인프라나 IT 기술을 결합하는 기술력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통신망을 구축해놓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유선 인터넷과 무선 인터넷 망이 가장 잘 깔려 있는 나라다. 이를 활용해 선진국의 센서를 수입하고 네트워크 기술을 접목해 다시 수출하는 것도 사물인터넷 강국이 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8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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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인터넷을 활용한 사례들


백문이 불여일견. 지금 등장하고 있는 사례들을 통해 사물인터넷을 더 자세히 알고 실감할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라이프 벌브였다. 이는 전구 안에 화재 경보 시스템을 넣어둔 서비스로 연기감지 센서, 일산화탄소 센서, 온습도 센서, 인체감지 센서, 조도 센서 등이 포함되어 있는 기술이다. 특히 이 기업은 아웃도어 캠핑용 랜턴을 개발했다. 얼마 전 강화도 캠핑장에서 있었던 화재 사건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정용 저자는“스타트업 회사들이 다른 산업에 응용하는 경우가 많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다양한 센서들을 보고 제품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라며 라이프 벌브를 좋은 사례로 소개했다.


반려동물의 건강관리가 가능한 서비스는 어떤가. 동물의 건강관리 솔루션 펫피트가 그 예다. 목걸이 안에 3축 가속기가 들어있어 칼로리를 계산한다. 국내 스타트업 기업이 개발한 이 기술은 스마트 밴드, 스마트 와치와 같은 계산으로 반려동물의 건강관리에 대한 높은 관심에 따라 전망이 밝을 것이라 저자는 예상했다.


그 밖에도 이정용 저자는 적정 중량을 체크, 비율에 맞는 칵테일을 마실 수 있도록 한 칵테일 제조 제품과 온도 센서를 두고 특정 온도가 되면 알람이 울려서 뒤집도록 하는 프라이팬, 암모니아와 유기 화학물 센서를 탑재해 고기가 상했는지 측정하는 기계, 요리법을 설명해주는 오븐 등 기발하고 실용적인 다양한 사물인터넷 사례를 소개했다.

 

저자들은 책 제목과 같이 사물인터넷을 둘러싼 ‘상상력’을 자극하며 시종일관 흥미로운 주제를 제시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쏟아진 질문들은 즉 특허 문제, 사업 분야, 창업에 도움이 될 지원센터 등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로 독자들의 궁금증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보여주었다.

 

사물인터넷이 향후 광범위한 산업에 적용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나 문제점이 분명 있을 것 같다. 가정 내에서 사용하는 제품들이 무척 많기도 한데, 우려되는 문제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김준섭: 기업들과 인터뷰한 결과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보안이다. 사람이 집에 있다, 없다에서부터 개인의 생체정보 등을 담기 때문에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뢰성이다. 실제 움직임이 사물인터넷 개발자가 원하던 움직임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잘못 움직였을 때 사람을 해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고광석:전자파 우려가 가장 많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IoT 제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생아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발달과정에 맞춘 제품 사례가 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기기들도 많기 때문에 전자파에 대한 우려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네트워크 기술에서는 저전력 블루투스 기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기존 제품들에 비해 전자파 발생이 적은 편이다. 전자파에 대한 우려는 개발자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최근 많이 해소되고 있다고 답할 수 있다. 웨어러블 제품도 마찬가지다. 아직 검증된 제품이 아닌데다 네트워크에 연결되고, 칩이 많이 들어감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최근 인체에 무해한 소재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향후 좀 더 나은 기술이 개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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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인터넷 실천과 상상력 편석준,이정용,고광석,김준섭 공저 | 미래의창
2014년에 출간한 《사물인터넷》이 사물인터넷의 기본 개념과 전체적인 시장 동향을 살펴봤다면 이번에 출간하는 《사물인터넷, 실천과 상상력》은 국내외 사물인터넷 시장 참여자들의 실제 사례를 살펴보고 그들이 만들어낸 변화를 감지한다. 또한 23개 사물인터넷 관련 기업 및 단체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앞으로 사물인터넷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이며 시장의 전개 방향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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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세계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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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스탭 동료로 처음 만났다. 드물게 비혼주의자였던 두 사람은 죽이 척척 맞았다. 한 사람이 연애하자며 말을 꺼냈고 의기투합. 연애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됐다.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도 비슷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던 결혼(식)의 방식도 같았다. 이럴 수가. 천생연분ㆍ비혼주의자였던 두 사람, 2년의 연애를 거치며 결혼을 했다.

 

결혼식도 두 사람을 닮았다. 결혼식의 과도한 비용을 들게끔 조장하기도 하는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를 뺀 대안 결혼식. 기름기를 쏙 뺐다. 청첩장 대신 청첩북을 만들고, 예식장 아닌 인도식 레스토랑에서 하객을 맞았다. 웨딩사진, 예물, 예단, 그들에겐 필요하지 않았다. 덧붙여 흔해빠지고 식상한 ‘검은머리 파뿌리’가 아닌 둘만의 ‘결혼선언문’도 만들었다. 김은덕-백종민 부부는 이렇게 선언했다.“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선택한 배우자와 평등한 관계를 이루고 우리만의 가정을 이끌어 나갈 뜻을 밝히고자 <결혼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편과 아내이기 이전에 독립된 개체로서 평등한 관계로 살아갈 것(1항)”이라고 나아가는 결혼선언문에서 눈이 딱 멈추는 흥미로운 지점은 4항이다.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세계여행의 꿈을 실현해 아르헨티나로 떠나 1인분에 1kg이라는 소고기를 맘껏 먹을 것입니다.” 드넓은 초원지대인 팜파스에서 자유롭게 자라기에 육질이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이 좋다는 아르헨티나 소고기.

 

“종민씨, 소고기 좋아해요? 아르헨티나 소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나중에 같이 먹으러 갈래요?” 결혼 전 프러포즈 아닌 프러포즈 같은 프러포즈의 속살에는 세계여행을 함께하자는 바람이 실렸다. 세계여행.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것으로 들먹일 만한 아이템.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닌 것. 당초 결혼 5년 후에나 가자고 꿈처럼 묻어 놓은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이 모든 것을 바꿨다. 무척 좋았던 그 신혼여행 덕분에 둘은 다시 의기투합했다. 이렇게 좋은데, 굳이 5년이 왜 필요해. 1년 뒤에 바로 가자! 

 

10개월을 준비했다. 김은덕-백종민 부부는 4천만 원을 마련했다. 신혼집 전세 계약을 해지한 금액. 세계여행이라는 아이템에 너무 적은 금액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들은 여느 세계여행과 다른 방식을 택했다. 한 달에 한 도시! 단순한 여행객이 아닌 한 도시에서 한 달 동안 생활자로 살아보기로 한 것. 숙박비, 항공료, 식비, 생활비 모두 합쳐 두 사람이 한 달에 쓸 수 있는 돈은 166만 원. 그것을 한 달로 나누면 하루 5만 원 남짓. 집을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는 개념의 에어비앤비를 활용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도시를 여행하면서 세계를 누빈 이들은 『한 달에 한 도시』라는 제목으로 유럽편과 남미편을 내놨다. 지난 6월 4일, 서울 논현동에서 이들의 삶과 여행이 궁금한 독자들이 김은덕, 백종민 저자를 만났다. 그리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들의 여행에 동참했다.

 

 

세계여행의 준비는 이렇게

 

한 달에 한 도시였지만 무턱대고 떠날 순 없었다. 철저한 준비를 해야 했다. 이들은 떠나기 전 여행에세이를 많이 읽었다. 그것을 통해 어떻게 여행하면 좋을지 가닥을 잡았다. 천천히 여행하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습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재밌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여행의 기록을 출판사에 보내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자비출판이라도 하고자 마음먹었다. 여행 전부터 꾸준히 기록을 했고, 여행 3개월 후 모아놓은 기록을 출판사에 보냈고, 첫 타석에서 안타를 쳤다. 실은 ‘한 달에 한 도시’ 콘셉트는 결여와 결핍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여행 경비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은 금액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동거리를 줄이기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각각 2천만 원을 썼다. 365일로 나누면 하루 5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먹고 자고 문화 등을 즐기려면 부족한 듯싶지만 한 달에 한 도시에 살면서 경비를 줄일 수 있는 여러 방법도 찾았다. 경비를 줄이려면 예약은 필수다. 치밀한 계획을 했다. 유럽 숙소, 비행기, 공연 등을 미리 예약해서 할인을 받았다. 첫 여행의 총 경비는 4천만 원이었는데 알뜰하게 썼다.” 

 

물론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지만 자세한 취향까지 똑같을 순 없었다. 공통적으로 가고 싶은 곳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함께 가고 싶은 도시는 우선순위로 놓았다. 나머지를 놓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배틀’이 벌어졌다. 충분한 근거를 갖고 설득해야 했기에 가고자 하는 곳의 인문사회, 역사 등을 공부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것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공부하면서 새롭게 안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공부한 것도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런데 그들이라고 떠나기 전 마냥 설레기만 했을까. 불안이 없었을까. 모아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라 전 재산을 털어서 가는 세계여행. 여행 후 돌아왔을 때 들어갈 직장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은 한국에 사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고 미래의 불안을 현재로 당겨와 살 것도 아니었다. 

 

“전 재산을 갖고 떠나니까 불안감이 있었다. 돌아올 때는 그 불안감이 2배로 커진다. 사실 우리보다 걱정이 더 많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겉으로는 승낙하셨지만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는 가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고 말씀하시더라. 여행 시작 때는 같이 떠나자고 말씀드려서 일주일동안 도쿄를 함께 여행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여행을 할 것인지 보여드리면서 안심을 시켜드렸다. 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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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여행이 시작됐다. 백종민 저자는 자신들의 세계여행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유럽과 남미 어디에서 묵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매핑도 공개했다. 특히 대서양횡단 크루즈는 백종민 저자에게 놀라움과 감격이었다. 생애 첫 크루즈를 통해 찍은 영상을 독자들에게 공개했다.
 
세상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2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닌 부부. 뿌리내리고 살아볼까 생각했던 도시들도 있었다. 한 도시에 한 달을 묵는 것은 자신들에게 적당했다. 지루하지 않은지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관찰자와 생활자 중간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에 한 달은 충분한 시간이었고 좋았다는 것.

 

“24개국이라는 숫자만 보면 세계여행치고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한 달에 한 도시에서 살면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얼 먹고살고 소비 패턴과 정치ㆍ경제는 어떤지도 봤다. 동네 주민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한 달을 여행하면 일정한 패턴이 생기는데 첫 주는 내가 사는 동네를 탐색한다. 시장과 슈퍼, 정기교통권을 어디서 사고 맛집을 파악한다. 둘째 주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도서관, 박물관 등에 다닌다. 셋째 주는 대중교통을 타고 외곽으로 여행을 다녔다. 둘째 주까지 살다보면 동네 사람들이 좋은 곳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갔다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려주는 것도 즐거웠다. 마지막 주는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집 주인과 마지막 식사도 하고 단골 가게 주인에게 인사하는 등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서로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었다. 한 달을 이렇게 지내면 길지 않다. 우리는 이를 소용돌이 패턴이라고 불렀다. 지내다보면 정이 안 가는 도시가 없다.”

 

그들 각자가 애정한 도시를 세 개씩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백종민 : 터키 이스탄불


“동생이 터키에서 이주노동자로 살고 있는데, 터키에는 세 번이나 갔다. 터키에서 사귄 친구가 자신의 부모가 살고 있다며 가보라고 권해서 지중해와 만나는 터키 남부로 갔었다. 우리는 이들을 터키 부모님이라 부른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갔고, 남미 여행을 끝내면서 또 가고, 부모님도 터키 부모님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가면서 총 세 번을 갔다”

 

김은덕 : 스페인 세비야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이다. 하몽(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시킨 스페인의 생햄)을 먹었는데 정말 입에서 살살 녹더라. 여행하면서 들고 다니면서 먹을 생각도 했는데, 비행기 방역 체계 때문에 포기했다(웃음). 하몽과 백포도주 궁합이 잘 맞는데, 하몽 때문이라도 다시 이곳에 가고 싶다. 하몽을 얇게 썰어서 빵 위에 얹어 먹기도 하는데 정말 맛있다.”

 

백종민 : 이란 테헤란


“여자에게는 불편함이 많은 나라인데도 추천한 것은 환대의 문화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교통수단을 타든 ‘웰컴 투 이란’이라는 말을 붙인다. 사람들은 여행하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말한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면 또 자기 집에 오라고 한다. 한국에선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궁금해서 가봤다. 가서 보니 이들은 낯선 사람이 오면 마냥 반가워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틀에 한 번씩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었다. 집에 가서는 춤추고 함께 즐겼다. 덕분에 테헤란에선 돈이 50만원밖에 들지 않았다(웃음). 이런 환대의 문화를 꼭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김은덕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하면서 고기는 두 곳이 좋았다. 이탈리아 피렌체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피렌체는 화덕에 구워 양념이 나오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갈비 통째로 숯불에 구워먹는데 소들이 행복하게 자라서 그럴까. 육질이 죽인다(웃음). 고기만 놓고 보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최고다. 100년 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대거 아르헨티나로 오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가져왔다고 하더라. 재료가 풍부하니 음식의 풍미가 살아있고 가격도 유럽에 비해 절반이다. 1kg짜리 아르헨티나 고기는 레스토랑에서 한국 돈으로 5천원이다. 가서 꼭 먹어봐라(웃음).”

 

백종민 : 대만 타이베이


“대만은 중국 문화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에 받아들인 일본 문화, 한류문화가 잘 어우러져 있다. 특히 음식도 빼먹을 수 없는데, 먹는 것에 대해선 자부심이 강해서 2대는 기본이고, 맛있는 집이 지천에 깔렸다. 관광지 아닌 동네 작은 식당에 가도 품위 넘치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숙박료는 한국과 비슷하나 음식 값은 한국의 절반가량이니 배부르게 여행할 수 있는 도시다.”

 

김은덕 : 볼리비아 따리하


“볼리비아는 작은 도시들이 예쁘다. 볼리비아는 고도가 높고 척박한데 남부에 위치한 따리하는 해발 2천 미터 정도라서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다. 볼리비아에서 유일하게 와인이 생산되는 곳인데 기온이 포근하고 하늘이 맑고 청명하다. 사람들의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늘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고, 아이들과 어른이 웃고 있다. 대부분의 볼리비아는 고도가 꽤 높고 척박한데 이곳은 지상낙원 같았다(웃음).”

 

물론 이들도 여행 도중에 위기가 찾아왔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나와 상대방의 밑바닥을 보기도 했다. 이혼을 꺼내기도 했다. 하긴 여행도 사람살이의 한 단면 아니던가. 그러면서 서로 더 깊어졌다. 상대방을 내게 맞는 사람으로 바꾸려는 생각을 버렸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법도 배우고 서로 부딪히지 않는 선도 찾았다. 세계여행이 준 성찰과 선물이었다.

 

“파라과이에서 권태기가 찾아왔다. 여행이 길어지니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볼리비아에서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전역을 배낭여행으로 돌았다. 그러면서 권태기가 걷혔다(웃음).”

 

 

지금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기

 

하루 2만원이 되지 않는, 어쩌면 구질구질한 생활에서도 이들이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던 이유는 뭘까. 이들의 답변은 명확하다. 지금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유럽, 남미, 아시아를 각각 8개월씩 돌아다니며 다시 들어온 한국.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먹고살아요?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됐다. 돈 없는 부부의 우아한 서울살이에 집중하고 있다. 돌아와서 통장을 찍어보니 0원이 찍히더라. 부모에게 돈을 조금 빌리고 출판사에서 준 돈으로 집을 계약했다. 부모가 같이 살자고 했으나 우리 생각을 펼칠 수 없을 것 같아서 독립했다. 일을 찾아봐야 하는데 여행하면서 인이 박혔는지 ‘나인투식스’의 삶을 살기는 싫더라(웃음). 대책 없는 삶속에서 결정하고 내린 우리의 결론은 소비도 최소화하자! 자발적 가난뱅이를 자처하기로 했다. 어떻게 살아나가고 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블로그를 통해서 쓰고 있다.”

 

서울에서 돈 쓰는 패턴을 들여다봤다. 여행 때와 다르지 않더라. 60만 원짜리 월세방. 하루 2만 원짜리 숙박료를 지불하는 셈이었다. 통신비로는 5만원 선불 유심을 샀다. 1년에 200분 통화. 거의 받기만 하는 셈이다. 5km 안에선 걸어 다니고 세탁기 없이 살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여행 중에 머리카락을 스스로 잘랐듯 미용실 가는 비용도 쓰지 않을 생각이다. 여행 중 음식, 술집은 그닥 드나들지 않았듯 카페, 술집, 음식점은 최대한 자제할 요량이다. 그러니 세계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서울살이다. 그래서 서울을 여행하면서 살기로 했다!

 

“서울을 다시 보게 됐다. 그동안 서울을 너무 천대한 것이 아닌가 싶더라. 세계여행의 무대를 서울로 옮겼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행하면서는 각자 노트북을 한 대씩 들고 다녔다. 일주일 중 이틀을 기록에 할애하고 닷새를 여행에 할애했다. 글 쓰다가 안 되면 서로 화내기도 했다(웃음). 일기도 안 쓰던 사람이 여행하면서 기록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 덕으로 책도 냈고. 서울살이도 일상적으로 기록에 남기고 있다. 다른 삶의 형태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주변에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과도 연대하려고 한다.”

 

그들에게 다시 여행의 계획을 물었다. 당연히 다시 나가고 싶다는 답이 나온다. 다만 언젠가는 남의 돈으로 나가는 것이 꿈이라며 웃는다. 무엇보다 세계여행을 통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국이 싫었었는데 다시 좋아할 이유를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김은덕-백종민 부부는 그렇게 서울을 여행하고 있다. 그들의 서울살이 역시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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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도시 김은덕,백종민 공저 | 이야기나무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행을 충동질하게 만드는 이 도시들에서 김은덕?백종민 작가들은 한 달씩 머물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두 사람을 현지인의 일상 속에 녹아들게 했고 관찰자가 아닌 생활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생활자가 된 작가들은 어떤 여행기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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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 “나만의 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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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더위를 삭힌 어느 여름밤, 김민정 시인이 한 칼럼을 낭독했다. 한 일간지에 실린 박상미의 칼럼 <열중하는 얼굴들>이었다.


“(전략) 갤러리에서도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림을 보던 한 회사원이 가격을 묻는다. 그 눈빛에는 집중된 열망과 함께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다. 그림의 가격을 듣고 나면 미묘한 실망의 기색이 얼굴을 스친다. 그림은 한 켤레의 구두와는 달라서 순간의 구매 충동을 누르면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욕망하는 순간의 얼굴은 새 구두를 원할 때의 그것과는 왠지 종류가 다른 듯하다. 마치 강의를 들으며 집중하는 사람처럼, 고대 국가의 신비로운 이름을 가진 왕들의 얘기에 몰입하는 사람처럼, 멀리 있는 것을 열망하는 얼굴이다. 어쩌면 내가 왜 저 그림을 원하는지, 자신에 대한 아주 사적인 생각이 스쳐가는지도 모른다. 역시 아름답다.”

 

그 낭독, 여름밤의 후텁지근함을 날리는 통풍창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글을 읽는 사람의 얼굴이 그럴까. 역시 아름답다. 취향』의 작가 박상미가 뉴욕을 ‘사적으로’ 보듬은 『나의 사적인 도시』가 독자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의 절반은 김민정 시인의 공이다. 박상미 작가도 김민정 시인의 칼럼 낭독에 화답하듯, 그것을 잊지 않고 언급했다. 박상미만의 특별한 뉴욕, 그래서 사적인 뉴욕은 그저 블로그 속에서만 숨을 쉴 뻔 했다. 첫 번째 책처럼 느끼며 암담하고 즐거웠던 작업은 이제 독자들과 만나 어느덧 3쇄를 찍었다.

 

“(블로그의) 원고를 출력해서 내 앞에 나타나서 깜짝 놀랐고 감동이었다. 친하긴 해도 그렇게 뽑아올 줄은 몰랐다(웃음). 원고뭉치가 거실과 작업실에 계속 머무르면서 나오게 된 책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왔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다. 주변에서 따뜻하게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좋은 건지 창피한 건지 모르겠다(웃음). 나는 게으른 필자인데 블로그는 열심히 한다. 트위터도 했었는데 정신이 사나 워서 나랑 맞질 않아서 중단했다. 블로그는 계속 할 생각이다.”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원고 뭉치를 가져다준 그 누군가의 덕분이다. 일도 일이지만 그 친구는 나의 ‘사적인’ 친구다. 우리는 처음 만날 때부터 ‘사적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새록새록 새로운 비밀들을 공유하고, 새록새록 비밀스럽게 아껴왔다. 내가 발 디딜 힘도 없을 때 곁에 머물러 준 친구다.”(11쪽) 

 

두 사람은 그렇게 친구다.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 갤러리스트로서 뉴욕과 서울을 오가는 박상미와 시인이자 출판인이며 작가 섭외를 위해 뉴욕을 다녀온 김민정이 지난 6월 3일, 독자들과 만났다. 서울 창성동, 박상미가 운영하는 소규모 프라이빗 갤러리 ‘토마스 파크(Thomas Park)’에서였다. ‘박상미의 읽기와 보기’라는 주제를 내걸고, 그들은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북토크를 오가며 독자들과 교감을 나눴다. 단언컨대, 두 사람은 사랑하는 친구 사이였다. 그 사랑은 그들만의 것이어서 누군가 표절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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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의 읽기와 보기
 
갤러리 토마스 파크에는 던컨 한나의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박상미는 한나의 그림을 가리키며 독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에드워드 호퍼의 이름을 호명했다.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불리는 호퍼를 좋아했다. 그 애호는 호퍼에 대한 책을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빈방의 빛』(마크 스트랜드 지음/박상미 옮김|한길아트 펴냄, 2007)은 그렇게 한국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박상미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호퍼 사랑은 출판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가 번역을 할 때에는 호퍼에 대한 책이 한국에는 없었다. 번역을 하는 동안 호퍼에 대한 다른 책이 나와서 빈방의 빛』한국에서 출간된 호퍼에 대한 두 번째 책이 됐다. 한나는 그런 호퍼와 어떤 점에서 통하는 것일까.

 

“호퍼가 있는 그대로 미국의 풍경을 그렸다면 던컨 한나는 노스탤지어의 풍경을 그렸다. 동경하던 대상이나 지역을 그렸다. 동시대 미술에서 여성의 누드에 대해 개념적인 누드를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한나는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이 그리는 여성을 그렸다. 그래서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한나는 내 오랜 지인이면서 다독가다. 책을 읽거나 공상했던 풍경들도 그렸다. 자기만의 픽션으로 세상을 만든다. 장면 장면이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장면이 연상 작용을 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보면 좋겠다.”

 

“친구의 말대로 던컨 한나의 그림은 순수함과 과거가 그 키워드이다. 어린 시절, 기억, 잃어버린 순수, 이런 종류의 노스탤지어나 멜랑콜리랑 연결되는 정서를 다소 무심하게, 하지만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그려내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중략) 던컨은 그 이미지들을 마치 책 속의 삽화처럼 그린다. 팝아트의 영향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록 속 그림들이 실물보다 멋져 보이기도 한다. 다 갖고 싶어진다.”(220쪽)

 

‘읽기와 보기’라는 주제에 맞춰 갤러리 곳곳에 자리한 전시물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었다. 박상미는 현대미술은 보기에 따라 황당한 것이 많다며 20세기 예술의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든 마르셀 뒤샹의 ‘샘(Fontaine, 1917)’을 언급했다. 샘은 변기였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물건을 선언하듯이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했던 뒤샹은 당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뒤샹의 샘 이후) 선언을 하면 예술이 될 수 있는 세계가 됐다. 그래서 예술을 어렵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럴 땐 뒤샹을 생각해라(웃음). 기존의 생각을 파괴한 것이다. 험블한 오브제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있다. 작가는 선배 작가의 영향을 받거나 선배 작가에게 반항을 한다. 그런 게 현대미술의 한 장면이다. 이게 예술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작품을 한다.”

 

토마스 파크는 그런 작품으로 가득했다. 박상미는 평소 친분이 있는 설치미술 작가에게 테이블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했다. 그 작가는 테이블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상미의 제안에 작가는 동료 예술가 다섯을 동원해 한 테이블을 각자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면서 새로운 테이블을 탄생시켜다. 그것은 박상미의 동반자가 됐다. 처음 만든 것치곤 굉장히 잘 만들었다는 것이 박상미의 평가였다. 무엇보다 예술가들이 조금씩 십시일반 도와준 것이 무척 좋았다.

벽은 홍승혜 화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냥 흰 벽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박상미가 그림을 걸기 위해서는 흰 벽을 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의뢰했다. 그랬더니 홍 화가는 흰색 캔버스를 엎어놓은 것처럼 벽을 만들었다. 토마스 파크는 그래서 홍승혜 작가의 작업 위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 홍 작가 왈, 누군가의 프레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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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던컨 한나의 그림은 정지한 장면 같다. 영화 한 장면을 스톱시키고 그림을 그린 느낌을 받았는데, 던컨 한나가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건가?

 

한나가 책도 좋아하지만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그의 그림은 잡지에서 본 이미지도 있고 영화 속 이미지도 있다. 한나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영화까지 섭렵해서 본다. 아트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그렇게 영화에 깊이 발을 들이고 있어서인지 내가 처음 들어보는 영화배우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더라. 굉장히 박학다식하다. (그는 몇 살인가?) 쉰다섯이다. 여기 걸린 한나의 작품 하나는 400만원이 넘는 가격인데 컬렉터에게 팔렸다. 그런데 내게 괜찮은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작품을 산 컬렉터에게 부탁을 했다. 그림은 1년 정도 지인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여행을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촬영도 하고 이야기도 쓸 계획이다.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50만 원짜리 재킷은 쉽게 사나 그림은 그 가격에 쉽게 사지 않는다.

 

지금 번역 업체에 다니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디자인이나 예술 쪽 번역을 하고 싶은데, 전공이 그쪽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번역을 처음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미국에서 호퍼에 대한 책을 보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샘플 번역을 해서 출판사에 보냈는데 답이 왔고, 번역에 대한 생각도 없었는데 그렇게 됐다. 그때 인터넷을 참조해 기획서도 썼었다. 출판사는 항상 번역자를 찾고 있다. 그런데 서로 못 만나기도 한다. 좋아하는 책을 번역해서 (출판사에) 많이 보여주라. 단 번역을 잘 해야겠지. 번역하겠다는 분들에게 꼭 해주는 얘기가 있는데 기획력을 갖추면 좋다. 남이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책을 발굴하는 것도 기획의 일환이고 자신이 직접 만들면 좋겠다. 내가 번역한 것을 누구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하게 된다.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실력이 는다.

 

책을 통해 얘기된 ‘서틀티(subtlety)’는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가치는 아닌 것 같다. 그런 경험을 알고 싶고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서틀티는 미묘함, 섬세함 등으로 번역하는데,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차이가 작아서 구분할 수 없을 때 이 단어를 쓴다. 서틀티는 잘 보면 볼 수 있다. 난해함은 난해한 것이어서 모른다. 좋은 작품에는 미묘함이 도사리고 있다. 섬세하게 잘 보지 않으면 알아내기 힘든 요소들이 있다. 항상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느끼려고 노력하면 그것이 서틀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사람의 성향이나 모든 것과 관련이 있는데 극단적인 예를 들면 ‘나 여깄어’라고 소리 지르는 것보다 내가 잘 봐줬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리처드 터틀의 작업이 서틀티의 미학을 보여준다. 한국에도 번역된 책인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라는 책이 내 미학 형성에 도움을 줬다. 건축학과 학생의 필독서로 취향에 관한 책이다. 개인적인 미학에 대한 책으로 다른 사람이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난 이게 이래서 좋아, 라고 말한다.

 

“subtlety는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다. 종종 미묘함이라 번역되고 상황에 따라 다른 말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번역할 때마다 항상 부족한 감이 있다.(중략) 모든 경우에 있어 subtlety의 핵심은 존재하는 어떤 차이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연하게 보이지 않기에 단순하게 보는 것 이상의 ‘봄’을 요구하는 것.”(34쪽)

 

종이책을 읽는 사람이 계속 줄고 가구당 책을 사는 비용도 줄고 있다. 종이책의 미래와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뉴욕에서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책을 많이 보고 있다. 서울보다 책을 보는 사람이 훨씬 많다. 뉴욕 지하철에서는 책 읽는 사람을 보면 무슨 책을 읽는지 힐긋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좋은 책 같으면 그 책을 사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은 뉴욕에서도 킨들(주. 전자책 단말기)을 많이 보더라. 많은 사람들이 전 시대보다 지금 시대가 쇄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선 시대보다 저질이 돼가고 수준도 낮고 천박해지는 것 같아도 엄마아빠 세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항상 어느 시대나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있다. 종이책에서 킨들이 나오고 스마트폰을 통해 책을 읽는 시대가 됐는데, 종이책을 좋아하지만 이런 현상을 나쁘게 보진 않는다.

 

김민정 : 18년 정도 활자판에 있는데 매년 듣는 말이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이다. 책을 안 보는 건 대통령의 문제라고 본다(웃음). 우리는 대통령이 무슨 책을 보는지 모른다. 정치인 중에도 책보는 사람이 없다. 오마바는 휴가를 갈 때도 휴가지에서 보는 책이라고 리스트가 뜨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다. 옷을 새로 사는 것보다 책을 사면 더 좋겠다. TV에도 나가서도 같은 이야길 했다. 정치인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데, 우리가 책을 보지 않아서 문제라고 말하는 게 문제라고 본다.

 

서울과 뉴욕의 흐름이나 문화, 모임 등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차이가 많다. 우리가 뉴욕을 따라가는 부분도 있고, 휴대폰 등 뉴욕이 한국의 기술적인 면을 따라가는 부분도 있다. 뉴욕에서는 책이 나오면 낭독회를 연다. 필자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읽고 독자들이 질문하고 답변하는 낭독회가 흔하다. 한국에도 낭독회가 요즘 종종 열리는 것 같더라. 미국은 토론 문화라 모여서 떠들고 파티를 잘 한다. 우리도 조금씩 그러다가 지금 자연스러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뉴욕에서 15년을 살다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한국이 천국처럼 느껴진 지점도 있다. 의료보험 제도가 무척 좋고(웃음)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기 부여가 잘 돼 있어서 그런지 잘 도와준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뉴욕에서는 한 달이 걸릴 일도 서울에선 하루 만에 되는 경우도 있더라. 다만 사람들이 피곤해하는 것 같은데 꾀는 안 피우고 일상적인 일을 처리할 때 있어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많이 준다. 꼭 돈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뉴욕, 런던 등 세계적인 도시는 이제 발전의 끝인가, 하는 느낌을 주나 한국은 훨씬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뉴욕에서 힘든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무엇으로 위로를 받았는지 궁금하다.

 

위로라는 말이 한국에서 특히 많이 쓰는 것 같다. 많이 힘들다는 얘기지. 아플 때는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나, 뉴욕에 살면서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일상에서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갔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 오니 힐링, 위로 등의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 즐거움이 많이 없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즐거움을 찾아가는 생활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남의 말에 쉽게 좌우되지 않고 자신만의 취향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쉽지는 않다. 좌우명이 뭔지 알고 싶다. 

 

예전에 졸업하고 사은회를 했었는데 교수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그 말씀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살면 살수록 이 문장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가 많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인간적이 되어라. 사람이니까 기계가 아니니까. 인간이 하는 일이니까 이해를 하라는 말인 것도 같다. 상황이 올 때마다 이 말을 자주 생각한다. 모든 것은 사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는 말도 통하지 않을까. 나만의 것인 어떤 것에서 좋은 것이 나온다. 남이 뭐라고 한다고 흔들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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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도시 박상미 저 | 난다
저자 박상미의 신간 『나의 사적인 도시』는 뉴요커로 오래 살던 저자가 뉴욕에서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모든 것을 정리해나간 ‘진짜배기’ 뉴욕 이야기로 지난 2005년부터 2010년간 뉴욕에서 써내려간 블로그의 글 A4 700여 장을 다시금 가다듬어 출간한 책이다. 『나의 사적인 도시』의 표지로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아티스트이자 삽화가 솔 스타인버그의 작품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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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도스토예프스키 씨, 용서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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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당신은 설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목은 들어봤을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 천착했던 문제, 즉 인간의 본성과 죄, 용서에 대한 끝없는 탐구에 대해서도 대략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우리는 매일 인간 존재의 증명을 재확인하며 살고 있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이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므로 더더욱 유의미한데,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단연 탁월한 시선은 변함없이 부조리하고 추악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커다란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예스 24와 민음사가 함께 진행하는 2015 세계문학 고전학교 5월의 강의는 ‘도스토예프스키’로 진행되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지하로부터의 수기』, 『악령』등을 번역하고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김연경 번역가가 ‘죄와 벌,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그는 “여러분에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최대한 가깝게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며 서두를 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비단 러시아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될 만큼 위대한 작가입니다. 독일이 괴테를 갖고,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갖고 선진국 반열에 올라가듯 러시아는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지면서 다른 나라의 문학이 아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만 보면 19세기 러시아문학사가 정리가 되죠. 유럽 문학의 소설사가 정리가 되고요.”

 

바실리 페로프(Vasily Grigorevich Perov)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를 보면 넓은 이마, 푹 들어간 눈의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림은 작가가 『악령』을 쓸 당시 그려진 모습인데,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모습, 고독하고 심오하고 예민한 작가의 모습이다.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에요. 어딘가 러시아적이고 뭔가 심오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도 이미지 메이킹이 중요하다는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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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세계


김연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세계를 몇 가지 주제로 설명했다. 가장 먼저 꼽은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이다.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톨스토이를 꼽을 수 있을 터다. 그중 톨스토이가 평균의 인간을 그렸던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그렸다.

 

“톨스토이는 도덕성이나 정신세계에 있어 평균의 인간,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의 중산층들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전부 건전하기도 하고요. 평범하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립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보면 그나마 불륜이 인생의 사건인 거예요. 그에 반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경우 극도의 범죄자들을 그립니다.”

 

두 번째는 ‘도발적인 소재들’인데, 이는 앞서 말한 ‘일반적이지 않은 주인공들’과도 맥이 닿아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궁핍하고 불안한 등장인물들이 저지르는 살인, 자살, 강간 등 굉장히 도발적인 범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이런 소재로 소설을 쓰면 삼류가 되기 쉬운데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쓰면 범죄 소설도 『죄와 벌』이 되죠. 연애 소설도 종교 소설이 되고, 철학 소설이 된다는 것을 『백치』가 보여주고요. 『악령』같은 경우, 정치 테러를 다룬 정치 소설입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가 쓰면 정치 팸플릿이 되는 게 아니라 철학 소설이 됩니다.”

 

세 번째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의 특징은 ‘종교적’이라는 점이다. 이를 김연경은 ‘기독교의 러시아화, 러시아의 기독교화’라고 표현한다. 또한 종교적인 암시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소설이 대표적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가 988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입니다. 자기들만의 기독교를 만든 거죠. 러시아 정교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의 러시아화이기도 하고, 러시아의 기독교화이기도 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 구원, 선악과 윤리, 성(聖)과 속(俗), 폭력과 성스러움 등 요즘이라면 정말 생각하기 힘든 주제들을 소설에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 도스토예프스키


이 위대한 작가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나. 작가를 둘러싼 삶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김연경은 작가의 부모 이미지를 보여주며 특징을 설명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중인 계급인 군의관이었다. 당시 중인 계급이 모두 그렇듯 신분 상승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화두였다. 절대적으로 자식교육에 몰입했던 것도 그런 중인들의 특징이었다.

 

아버지는 무척 꼬장꼬장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돈을 열심히 모아, 모스크바 근처에 영지도 하나 사게 되는데요. 그곳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체르마쉬냐’의 모델이라고 얘기를 해요.”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귀족이 아니었던 자신의 신분에 대해 커다란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19세기는 특히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므로 작가로 등단한 이후에도 그런 감각은 계속되었다. 톨스토이와 대조적인 면모가 이 부분에서도 나온다.

 

“톨스토이는 백작이었어요. 갖고 있던 영지가 경상남도보다 작지 않거든요. 가만히 앉아서 영지 수입만 가지고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던 거죠. 투르게네프 역시 지주 귀족 작가입니다. 굉장한 부자여서 20대에 어머니가 용돈으로 1년에 6천 루블을 줬다고 나오는데요. 그보다 30, 40년 뒤에 쓰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보면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이네 마네 하면서 문제 삼는 돈이 겨우 3천 루블이에요. 빈부의 차가 얼마나 컸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계급적 특성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가난이라는 큰 화두를 던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난은 결코 미학으로서의 가난이 아니다. 정확한 현실로서의 가난이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둘러 취직을 해야 했다. 건축공학을 전공한 작가는 그러나 그것에 뜻이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결국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가게 된다. 가난을 등에 지고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젊은 청년의 입장을 상상해보자.

 

“19세기에 남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월급을 받던 자리를 관둔 채 전업 작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요즘과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나는 노동하는 작가다’라고 말했어요. ‘나는 작가 프롤레타리아다. 나에게 글을 청탁한 사람은 먼저 돈을 줘야 한다’고요. 글을 써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이 직업이 아니던 시절 최초로 직업인으로서 문학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문학을 성스러운 경지로 올린 위대한 작가가 또 도스토예프스키다.


알려진 대로 그는 간질을 앓았는데, 그 정도가 심각해서 며칠 씩 앓아눕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병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우리 생각과 다르게 굉장히 수다스러운 작가였고요. 자신의 병에 대해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프로이트가 1920년대에 쓴 유명한 논문 중에 ‘친부 살해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는데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간질이 두 종류인데, 정말 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와 심리적 정신적인 과도한 어떤 이유로 간질 발작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했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후자라고 했죠. 지금이야 정확한 원인을 쉽게 밝혀낼 수 있지만 말이에요. 어쨌든 이 위대한 작가는 간질마저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후기작을 쓸 때는 특히나 간질 발작을 많이 앓았더라고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쓸 때도 한 번 발작이 시작되면 3~4일을 앓아누웠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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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선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살피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형선고의 경험이 아닐까. 그는 페트라세프스키 서클에 모여 좌익 서적을 읽었다. 금서를 읽고, 금지하는 이야기를 한 죄로 체포된다.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한다.
 
“왕은 애초에 사형 집행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니콜라이 1세가 왕위에 올라올 때부터 젊은이들이 워낙 데모를 많이 하니까 겁을 주려고 그랬던 거죠.”

 

그러나 작가에게 이와 같은 일들은 엄청난 촉매제로 작용한다. 사형 집행 당시의 경험과 유형 생활을 거치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깊이 있게 탐구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여러 사연들을 접하며 후에 쓰는 작품에 주요한 장치들을 만들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옴스크 감옥에 있으면서 인간 연구를 제대로 하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른바 정치범입니다. 그러나 주변에는 정치범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흔히 말하는 흉악범, 살인범들이 넘쳐났단 말이죠. 그곳에서 작가는 인간과 환경, 범죄,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이 연구하게 돼요. 유형 이후에 쓰는 작품들에서 그런 것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작가가 유형 이후에 발표한 『죽음의 집의 기록』은 그가 감옥에서 겪은 인간들에 관한 내용이 모두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큰 화제를 낳기도 한다.    


인간에 대해, 작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범죄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로 길러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갖고 소설에 형상화시킨 것도 그런 맥락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 역시 그런 작가의 연구 관찰 결과였다.

 

“19세기 러시아의 출판 시장은 무척 협소했을 겁니다. 독자들의 문맹률도 굉장히 높았고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초판을 2천인가 3천부 찍었다고 하거든요. 그게 일주일 안에 다 매진이 되었다고 해요. 이건 엄청난 반응이죠. 당시에는 독자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또 하나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이 독자들이 굉장히 지적인 독자층이라는 것이죠. 오늘날의 독서 대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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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품들


“독자로서 보아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책을 한 번 들면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글재주가 뛰어났던 거죠. 유형살이 이후에는 여기에 깊이까지 더해지게 됩니다. 만일 사형을 당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사에서 ‘고골에 이어 사실주의의 문을 연 작가’ 정도로 정리가 되었겠죠. 하지만 작가는 살았고, 이후 놀랄만한 작품을 쓰게 됩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그것이다. 초기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없고, 후기 도스토예프스키에게만 있는, 철학과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이 작품에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이 책이 무척 시사적인 책입니다. 1860년대에 관한 시사적, 정치적인 책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인 책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작가의 필력과 사유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것이죠. 앙드레 지드 같은 프랑스 작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무척 좋아했는데 특히 이 소설을 무척 좋아했어요.”

 

동시에 작가는 『죄와 벌』 작업을 한다. 이 두 작품을 함께 읽어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이론적인 테제를 담았다면 『죄와 벌』은 실상이라고 볼 수 있다. 지하생활자가 페테르부르크 거리로 나와서 일어나는 일이『죄와 벌』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고 김연경은 설명했다.

 

우리가 아는 도스토예프스키는『죄와 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전형적인 전근대적 인물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등장하는데, 이 주인공에게서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을 엿볼 수 있다.

 

“귀족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작위도 없고, 땅도 없는 평민이지만 신분 상승을 원해요. 그렇지만 속물적인 성공을 꿈꾸기엔 너무 고결한 영혼을 가졌고요. 그런 20대 청년이 펜으로 세계와 승부하기로 했을 때 그 꿈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생 최고의 대단한 도박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라스콜리니코프도 비슷해요.”

 

이를 두고 김연경은 ‘현재의 도스토예프스키가 과거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건네는 악수’로 표현했다.

 

『죄와 벌』의 힘은 또 있다. 이 작품은 일종의 ‘범죄소설’인데, 통상의 범죄 소설, 범죄 영화 등은 ‘누가 어떻게 살해 되었나’를 보여주는데 집중되어 있다. 플롯 역시 누가, 왜, 로 진행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정 반대로 접근한다. 첫 장면에서 살인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려준다.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하는 힘은 오로지 하나, ‘왜 죽였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플롯이에요. 심리적인 조서 형식인데요, 그러니까 소설 작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작품은 아주 계획적으로 쓴 소설도 아니거든요.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위대한 작품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작가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 『백치』『악령』을 거쳐 대작『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세상에 남긴다.

 

“이 작품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여러 작품을 읽으려 하지 말고 이 작품 하나를 여러 번 읽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지하듯,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친부살해 테마를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테마, 패륜이다. 김연경은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친부살해의 주제를 가장 잘 형상화한 작가 셋을 꼽으라면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닐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는 극장 드라마였죠. 『햄릿』도 셰익스피어가 속한 시대보다 훨씬 이전 시대를 취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리얼리티의 감각이 덜 한 거죠. 주제에 더 집중할 수 있고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입니다. 짧게 쓴 것도 아니고요. 이 주제를 소설로 써냈다는 자체가 놀라운 대목입니다.”

 

정치범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에서 역시 정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는 사실 황제를 죽이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을 죽이는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것은 살부(殺父)를 다룬 소설이면서, 혁명을 다룬 소설이죠. 사실 궁극적으로는 반혁명입니다. 아버지를 죽이면 안 된다, 혁명하면 안 된다는 거죠. 신을 죽이려는 생각을 한다고 죽어지는 신도 아니거니와 그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특히 무신론자 이반을 들어 설명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반에게 “모든 것이 허용 된다”는 도발적인 사상,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 나를 낳아준 아비를 죽일 수도 있는 자유였다. 하지만 이반은 아비가 살해되자 당황한다. 여기서 독자는 스메르쟈코프의 섬뜩한 대사를 만나게 된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자기 입으로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정작 도련님 자신이 말입죠?”(『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 259쪽)

 

이 외에도 줄거리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이야기가 제각각 살아 움직이는 작품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죄와 벌, 신의 존재와 그 가치 등 대단히 철학적인 물음을 내포한 이 위대한 작품은 결국 ‘도스토예프스키식 신곡’일지도 모른다.

 

강연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소화하기에도 벅찰 만큼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참석자들의 질문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했다.

 

2015 세계문학 고전학교 6월 이야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6월 25일(목)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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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스토예프스키 저/김연경 역 | 민음사
출간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작품이 최고의 고전으로 불리는 것은, 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러시아뿐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를 다루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여전히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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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우리가 사랑했던 수전 손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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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자, 열정적이자, 깨어 있자.

 

20세기 미국의 최고 지성이었던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삶의 좌표는 이처럼 명확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랑했으며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는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작가를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기득권의 지배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마음의 목록을 지닌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손택은 100% 작가였다.

 

하나의 에피소드. 손택은 9ㆍ11에 대처하는 부시행정부와 당시 미국 사회에 불어 닥친 반이성적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들은 그에게 “애국심이 없다” “미국 정부에서 하는 일이면 무조건 비판만 한다”며 공격했다. 그러나 손택은 꺾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다큐 영화 <수전 손택에 관하여(REGARDING SUSAN SONTAG)>는 손택과 보수 인사들의 논쟁을 통해 왜 손택이 비판적 지성일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난 5월 20일은 스크린을 통해 수전 손택을 다시 만난 날이었다. 『수전 손택의 말』출간기념으로 마음산책이 마련한 다큐 상영회는 그래서 특별했다. 레드빅스페이스 상영장은 손택을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정신의 뜨거운 고양’을 꾀하고 싶은 이들과 함께했던 상영회는 11년 전 세상을 떠난 손택이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사회학자 노명우의 말에는 그런 벅참이 묻어 있었다. “세상의 글 쓰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잘난 사람이 있고 똑똑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잘난 사람의 글을 보면 글 자체에만 관심이 갈 뿐 책을 덮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라면 다르다. 텍스트를 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이런 사유나 생각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내게 수전 손택은 후자다. 인간으로서의 손택은 어떤 사람이며, 말할 때 어떤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목소리로 말을 할까 궁금하다. 오늘은 그런 궁금증과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이날 행사 부제를 붙이자면 ‘우리가 사랑했던 수전 손택에 대하여’가 아닐까. “살아 있어서 기뻐요.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어서 행복해요”라고 손택의 목소리로 시작한 다큐는 단순히 그에 대한 찬양으로 채우지 않는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 등을 통해 그를 입체적으로 탐구한다. 변덕도 부리고 사랑 때문에 아프고 힘든 손택의 인간적인 면모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생생한 그의 육성 인터뷰는 우리가 사랑했던 손택을 한뼘 더 가까이 느끼도록 만든다.

 

“사람은 세계가 아니고 세계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고 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요. 그게 바로 작가의 일입니다. 작가는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요.”(29쪽)

 

 

노명우와 김선형, 손택을 말하다 
 
다큐 상영이 끝나고 노명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수전 손택의 말』을 읽은 어느 날 밤, 와인병을 땄다. 그가 혼자서 와인을 마시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인데, 그땐 그랬다. 그는 그때는 외로웠지만 이날 다큐를 함께 본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소감부터 꺼냈다. 다큐를 보고 든 생각을 하나둘 풀어놓기 시작했다.

 

“남자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던지곤 하는 질문이 있다. ‘왜 인문학자에는 여성들이 없을까.’ 처음에는 온화한 형태로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 질문은 폭력적으로 변한다. 이 질문을 던지면서 여자에겐 무엇이 없는가, 여자는 왜 부족한 존재인가 등 매우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990년대 손택을 처음 읽었다. 1964년 <파리잔 리뷰> 가을호에 실은 「‘캠프’에 대한 단상」(주. 캠프는 당시 게이들의 하위문화에서 떠돌던 속어)이었는데, 문화적인 맥락에서 퀴어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후 『해석에 반대한다』『은유로서의 질병』『사진에 관하여』『타인의 고통』등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즉, 왜 남자는 수잔 손택처럼 글을 쓰지 못하는가, 로 바뀌었다. 손택을 통해 그전에 던진 질문이 무의미하고 잘못됐음을 반성하게 됐다. 또 『수전 손택의 말』과 다큐를 보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 에로스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남자 지식인으로서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보통 남자들은 글을 쓰고 일을 한다는 것은 공적인 문제이며 사랑과 에로스는 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남자들이 공적인 문제가 사적인 것을 압도하고 자신을 중성화시키고 관념적으로 거세된 존재로 만든다면, 손택은 두 가지가 분리돼 있지 않은 사람이다.”

 

노명우가 특히 책에서 공감하면서 읽은 구절은 이것이었다. ““무엇이 나를 강인하다고 느끼게 하는가?” 손택은 일기에서 이렇게 묻고 스스로 답했다.“사랑과 일에 빠져 있는 것”과 “정신의 뜨거운 고양”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라고. 분명 손택에게는 사랑하고 욕망하고 사고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동일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었다.”(9쪽)

 

“손택은 앎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가 지닌 묘한 설득력, 손택의 메시지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손택에게 앎이란 연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았다. 다큐를 보면 손택의 ‘인간 편력’이 나오는데 그런 것이 힘이자 에너지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다. 다큐를 보면서 사랑을 끊임없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지식인에게 앎이 에로스적인 구애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은 어떤 관념적인 흥분의 동기보다 더 훌륭하고 구체적이다. 그 결과로 나온 텍스트가 다른 사람과 교류될 때 어떤 텍스트보다 힘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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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수전 손택의 말』을 옮긴 번역가 김선형도 손택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에게 이번 책은 손택의 일기를 옮긴 『다시 태어나다』에 이어 두 번째로 손택을 옮긴 것이다. 첫 작업을 할 때는 힘이 들었다고 했다. 일기에는 문맥이 없기에 어떤 상황에서 무슨 기분으로 일기나 노트를 썼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번역이 단순히 옮기는 것이 아님을 느끼고 있고, 책이 위치한 시간적 공간적 인간적 맥락이 진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택이 시사하는 바라면, 진실을 본다는 것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이다. 요즘 소통 채널이 많아지고 있음에도 그 채널들이 오히려 서로를 소통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수록 참여라는 것이 총체적 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그게 역사의식이고 현실의식이고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만들고 인간이 인간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이나 사회현상도 단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김선형이 번역을 하면서 손택에 대해 느낀 것이라며, 손택은 삶이 복잡하다는 사실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사랑과 삶, 공부하는 것,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대중문화도 즐기고 향유하는 손택이 더욱 알고 싶어졌다. 손택은 어떤 사람이며, 손택은 어떤 태도로 어떻게 말하는지, 손택이 한국어로 말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손택을 직접 앞에서 보면 그는 정말 사자 같은 사람일 것 같다(웃음). 지금은 과거보다 총체성을 이야기하는 담론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피상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손택은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미가 여전히 살아있는 지식인이 아닐까 싶다.”

 

노명우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는 쉽다. 입장을 쉽게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이나 입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에 도달하기까지 사유라는 긴 과정이 더 중요하다. 손택의 삶의 전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택이 생각, 사유, 앎에 대한 욕망을 사랑에 비교한 것은 그런 맥락이 아닐까. 사람은 사랑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놓칠 수 없다. 어떤 사랑도 바라지 않는다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사랑을 갈망하고 찾고 사랑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것이다. 손택은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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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에 대해 묻고 답하다

 

친아버지를 여읜 것이 손택의 성정체성에 미친 영향이 있었는지 궁금하고, 손택은 진실을 집요하게 추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택이 추구한 진실은 어떤 측면에서의 진실이었을까.

 

김선형 :손택은 어렸을 때 계부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 계부는 교외 주택가에 안주하는 부르주아지로서의 삶을 살았고 손택도 그런 것에 대해 감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손택의 일기를 보면 지적인 호기심이 없는 안정된 부르주아지의 삶을 경멸하는 것도 나온다. 천재가 사춘기를 겪을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손택이 추구한 삶은 안락한 부르주아지의 것과는 멀다. 성정체성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모르겠다.

 

노명우 : 진리는 외형적 실체가 있다기보다 사유하는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닐까 싶다. 다큐에 “나는 주류에 저항하는 것이 좋아요, 반대할 수 있는 입장이 좋은 것이죠”라는 말이 나온다. 주류도 변한다. 세월이 흐르고 주류는 바뀔 수 있고, 사회는 끊임없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필요하다. 손택은 그런 행위 즉, 특정 시기의 주류에 반대해서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활동이 지식인 또는 작가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이 손택에겐 진리가 아니었을까. 손택이 추구한 진리, 진실은 지식인이 지녀야 하는 입장, 태도에 대한 표명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손택이 다큐 말미에 꿈을 이뤘느냐는 질문에 허망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했는데 의외였다.

 

노명우 : 꿈이라는 것은 이루지 못하니까 꿈이 아닐까. 이룰 수 있는 거라면 계획이지, 꿈이 아니라고들 말한다. 꿈이 이룰 수 없다고 해서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이루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닐까.

 

손택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말하면서 참여를 강조한다. 손택은 유명 작가이나 평범한 장삼이사인 우리는 어떤 ‘참여’가 가능할까?

 

노명우 :참여가 정치적인 행동만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손택이 말한 것은 적시된 형태의 참여라기보다 ‘관여’라는 뜻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자, 내가 원하는 건 내 삶속에 현존하는 것이다. 지금 삶 속에 자기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말이다... 그게 바로 작가의 일이다.” 손택은 이것을 작가의 의무라고 말했지만 작가가 아니라도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요청되는 덕목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김선형 :손택이 참여라고 말할 때 ‘앙가주망’(주. 원래는 계약?구속의 뜻으로 사르트르가 자신의 논문에 이 말을 쓰면서 널리 퍼졌는데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가리킨다)이라는 단어를 썼다. 만사를 눈여겨보고 눈을 똑바로 뜬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은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으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인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총체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관점이 필요하고,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관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 

 

다큐는 손택의 사랑, 앎, 병에 대해 주목했다. 삶을 사랑하다보니 손택은 앞서갔고, 똑똑했으며 성적 정체성도 일찍 파악했다. 오만하다고 보일 수도 있으나 아프고 나서 삶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손택에게 있어 질병이 가진 의미가 궁금하다.

 

노명우 :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대상 자체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 경우 아버지가 지난달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고 형이 후두암으로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손택은 암 환자에게 보이는 주변의 은유에 주목한다. 형이 후두암 수술을 받으니 주변 사람들은 형의 평소 태도 등에서 문제를 찾아냈다. 암에 안 걸린 것이 신통 했어 혹은 그러니까 그렇잖아, 라고 말하더라. 암을 암 자체로 보지 않고 나를 포함해 은유로서 형의 암을 진단하더라. 암환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주변에서 병 그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은유를 떠올리는 것이다.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고 증상이 나타날 때 나도 ‘거봐, 아버지는 너무 단순하게 낚시만 하시니 치매에 걸리지’라면서 문제를 환원해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병으로 고통 받는 것도 있지만, 은유로서 작용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우리는 비만을 비만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게으름의 은유로 보거나 에이즈는 성적 타락함이나 문란함의 은유로 본다. 많은 사람들이 유방암이라고 하면 유방 절제, 여성성 소멸 등을 먼저 떠올린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도 투명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질병을 은유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대상을 투명하게 받아들이지 못함을 비판했다. 대상을 은유로 보기 때문에 놓치는 문제가 많다. 손택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도달해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로 인해 질병을 생각하기 시작한 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제게 사유할 거리니까요. 생각은 제가 그냥 하는 일의 일환입니다.”(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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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말수전 손택,조너선 콧 공저/김선형 역 | 마음산책
『수전 손택의 말』은 이런 수전 손택이 1978년 [롤링스톤]과 가졌던 인터뷰를 오롯이 담은 책이다. 다양한 매체의 인터뷰를 엮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인터뷰를 원래의 호흡대로 담았다. 인터뷰에서 수전 손택은 자신의 책들의 내용과 표지에 관한 소소하고 즐거운 에피소드를 늘어놓을 뿐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 그리고 글쓰기에 관한 지론은 물론이고 파리와 뉴욕 등 자신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도시들에 관해서도 서슴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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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시백 화백이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언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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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스무 권으로 완간돼 역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새 얼굴을 입었다. 새로워진 디자인과 재고증과 오류 수정 등 정교해진 내용의 개정판으로 재탄생한 것. 이에 지난 6월 22일, 서울 휴머니스트에서는『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개정판 출간기념 팟캐스트 공개방송이 열렸다.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는 물론 서울이나 수도권이 아닌 다른 지역의 독자들도 공개방송에 참여했다.

 

이날 공개방송은 김학원 대표(휴머니스트)의 사회로 ‘중년 역사 아이돌’ 박시백 화백을 비롯해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과),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조유식 대표(알라딘) 등이 함께했다. 팟캐스트 방송은 지난해 7월 22일, 마지막 공개방송 후 1년 만에 열린 특별 방송으로 진행됐다. 
 
이번 개정판을 통해 어떤 것이 바뀌었고 소회가 어떤지 듣고 싶다.  
 
박시백 : 지난 2013년 완간과 함께 팟캐스트를 했었다. 그 과정에서 개정 작업을 하기로 했었다. 개정 작업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새롭게 확인하거나 잘 몰랐던 것을 수정하고 연표 작업도 거쳤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작업 과정에서 노트에 기록하고 공부하면서 전체적인 구상과 작업을 했는데, 그 노트들이 아까웠다. 노트를 요약해서 만들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데 상당히 시간을 요하더라(웃음). 100권이 넘는 노트를 다시 공부하고, 이상한 것은 다시 확인하고 그러다 보니 1년 정도 걸렸다. 연표 작업에 공을 많이 들였다. 개정판은 편집자들이 정말 애를 많이 썼다. 연표 작업도 담당 편집자가『조선왕조실록』과 일일이 대조하고 공부하면서 편집 과정이 좀 걸렸다. 그런 노력덕분에 이렇게 개정판이 나왔다. 
 
이번에 202군데가 수정됐다는데, 가장 인상적으로 작업한 것을 꼽는다면?
 
중종 편을 그릴 때, 중종은 내 느낌대로 이미지를 살려서 캐릭터를 잡았다. 나중에 『선조실록』을 보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능이 파헤쳐졌다. 근처에 시신이 있었는데 중종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 진술이 내 그림과 상당히 비슷했다. 턱이 가늠하고 수염이 있었는데 다만 다른 점이라면 자색 수염이었고 양미간 점이 있었다고 돼 있더라. 수염을 자색으로 바꾸는 것은 포기하고 미간에 점만 찍었다(웃음). 또 하나, 영조와 왕권을 놓고 경쟁했던 경종에 대한 묘사를 찾아보니 그가 체구가 왕성했다고 돼 있더라. 병약한 인상이 강해서 당초 그림을 병약하게 그렸었는데, 틀린 거지. 왕성한 체구로는 그리지 않고 광대뼈를 다듬어서, 뽀샵 처리를 하면서 병약한 느낌이 들지 않게끔 수정했다(웃음). 
 
신병주 교수가 감수를 했는데, 개정판을 보니 어떤가?
 
신병주 : 표지가 ‘책등’으로 돼 있어서 진열하면 멋있을 것 같다. 오타 등도 반영이 됐고 인물사전도 감수했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정리한 수준이면 교정이나 감수를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심하게 표현하면 논문을 써왔더라(웃음). 너무 열심히 해서 내가 되레 말렸다. 내용 자체는 본문과 짝이 잘 맞는다. 왕별로 인물을 배치해놔서 찾기가 편하다. 보통 사전보다 공력이 많이 들어간 것이 인물 사전이다. 
 
이어 『종횡무진 한국사』『종횡무진 서양사』『종횡무진 동양사』 등의 박학다식 저술가로서 앞선 팟캐스트에 함께 출연했으나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난 남경태 선생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시간도 잠시 가졌다. 이날 공개방송의 주제는 ‘지금 우리 시대에 다시 불러오고 싶은 조선의 인물’로서 초대 손님들은 각자 세 명씩 꼽았다. 박시백 화백은 이이, 김육, 최명길을, 신병주 교수는 정도전, 남명 조식, 연암 박지원을 들었다. 조유식 대표는 정도전, 이방원, 황진이를 선택했으며 주영하 교수는 정도전의 스승이었던 목원 이색, 허균, 영조를 꼽았다. 
 
그 이유를 한 번 들어보자.   
 
주영하 :고려 중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시를 보면 그 속에는 인생과 삶이 담겨 있다. 덕분에 시를 통해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이색은 똑똑하기도 했지만 아버지 덕분에 중국에 조기 유학을 한 사람이었다. 중국에 가서 넓은 생각을 품었고, 북방과 남방의 음식까지 모든 것을 시에 담았다. 정도전이 아닌 그가 조선 건국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조선시대 음식문화가 국제적인 모습을 갖추지 않았을까. 이색이 증류주를 맛보고 한국에선 처음으로 글을 썼다. 그 글을 보고 눈물이 나더라. 그는 치아가 좋지 않았는데도 계속 먹고 버텼다(웃음). 
 
조유식 :정도전이라면 요즘 같은 어려운 정국과 상황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정도전을 불렀는데 이방원이 없으면 섭섭할 거 같아서. 두 사람도 리턴 매치를 원할 것 같다. 이방원에겐 선거 등 합법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주고 싶다. 현재 기준에서 정도전은 야당, 이방원은 여당일 것이다. 정도전이 한 번 더 질 것 같은데, 또 다시 살아나면 삼세판으로 이기지 않을까(웃음). 
 
신병주 :조선 건국의 주역이니 정도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가 밥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분이다(웃음). 정도전은 600년 전 인물이 이렇게 시대를 앞서갔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사람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을 전개하고 국민과 국가의 시스템을 만들어 놨다. 정도전을 제거해도 그 시스템이 그대로 갔음을 감안하면, 정도전이 그 초석을 잡았다. 조선은 정도전 덕분에 기본적으로 시작이 잘 된 왕조다. 
 
박시백 :정도전은 책에서 호방하고 낭만적으로 그렸었다. 한편으로 너무 정공법으로 달려 나간 사람이다. 정치 감각적으로 약한 면도 있었다. 정도전은 스스로 조선의 장자방(장량?유방의 책사)이라고 했었지만 장자방의 길을 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려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역성혁명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비전이 확고했다. 그 길을 가다가 이방원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서 아쉽다. 
 
신병주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등에 가려있기는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도 남명 조식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박시백 화백이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만들었다. 조식의 특징도 잘 묘사돼 있다. 유학자, 성리학자라고 하면 공부만 하고 이론 투쟁만 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조식은 그렇지 않다. 칼을 찬 학자였다. 잘못된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저항했다. 그런 학자가 조선시대 학자의 기본 모습일 수도 있다. 중기까지만 해도 문무를 겸한 선비형 학자가 많았다. 요즘 시대에도 행동하고 실천하고 헌신하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식은 꼭 불러와야 한다고 본다. 그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박시백 : 지금 이 방송이 조상에 대한 헌정 방송이 아니니까, 약간 까자면 이황과 조식의 관계를 보면 재밌다. 두 사람은 서로 존대했지만 실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좌두 이황, 우두 조식이라 불렸지만 이황이 전국구 스타로 따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한번은 조식이 편지를 보내길, 이황이 젊은 세대에게 겉멋을 들게 하고 있다고 비판하자, 이황도 아주 넓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조용히 있었겠지만, 조식이 무슨 도를 알겠느냐며 맞받아쳤다. 두 사람이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도 평생 동안 서로 얼굴을 한 번 보지 않았다. 
 
책을 통해 이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재조명이 된 것 같다. 허균을 꼽은 이유도 듣고 싶다. 
 
박시백 :지금 세상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이다. 대부분 역사책은 이이의 철학 위주로 설명돼 있고 그의 정책은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실록을 공부하면서 이이의 철학보다 발자취를 봤다. 두 가지가 놀라웠다. 하나는 조선이 건국하고 200년이 지나니 모순이 곪을 대로 곪고 있다고 판단해 이이는 경장(更張?점진적인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린다. 조정에서 거의 일관되게, 개혁적 지향을 갖고 경장을 주장한다. 이이에 대해 서인 정권의 영수처럼 여기나 사실은 동서분당의 와중에서 일관되게 분당을 막고 통합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치적 역량은 따르지 못해서 이이는 적을 많이 두고 세력을 양산하지 못했다.  
 
주영하 : 허균이 혁명을 꿈꿨다고는 하나 마지막에 쓴 책인 『한정록』을 보면 유유자적하게 사는 법을 담았다. 그는 마음 가는 대로 쉬면서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혁명이 아닌 유유자적하게 사는 법에 대한 생각에 대해 듣고 싶어서 그를 꼽았다. 『한정록』에는 농법도 있고 시골에서 잘 살기와 같은 것도 있다. 실학서에 앞선 농서의 편찬자라고 볼 수도 있다. 
 
신병주 : 신사임당은 현모양처 이미지로 각인돼 있지만 실제로는 센 사람이었다. 현모일지는 몰라도 남편과는 많이 다퉜고, 양처는 아니었다. 이이도 모범생 같지만 초반에는 일탈도 많이 했다. 당시 불온서적이었던 노장사상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 그 책들을 읽다가 아니다 싶어서 스스로 학문을 세웠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최명길도 이전의 다른 역사책과 다르게 조명한 인물이다. 김육을 꼽은 이유도 함께 말해달라. 
 
박시백 : 최명길이라고 하면 보통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 영수로 배웠다. 최명길은 당대 지식인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친명사대 이데올로기가 강해서 최명길의 주장은 동의받기 어려웠다. 정유재란 병자호란 모두 조선에서 미리 막을 수 있었다. 최명길은 진짜 척화를 할 것이면 압록강변에서 진을 치고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의 유일하게 최명길 홀로 그런 주장을 펴나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마무리 된 후 최명길은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그때 명나라가 망한 상태는 아니었는데 청 태종에게 항복할 때 요건 중 하나가 명나라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최명길이 명나라와 통교를 책임지고 진행하나 명나라 장수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최명길도 잡혀 간다. 이때 최명길은 모든 것은 자신이 진두지휘했다며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현실주의적 입장이었고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먼저 앞세웠다. 정말 위험할 때는 책임지고 나서서 일을 해결했다. 모범적인 정치인의 표상이다. 지금처럼 국제 정세가 민감하게 돌아갈 때 친중이나 친미의 차원이 아니라 국제 정세 변화를 냉철하게 읽고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서 최명길을 호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책임지는 정치인의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김육도 지금 꼭 필요한 사람이다. 대동법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부자 등의 반대로 주춤했었는데 효종 때 김육이 책임지고 충청도로 확대하고 호남까지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김육의 태도가 중요하다. 수령이나 부자는 대동법 확대를 계속 반대한다. 김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료 조사를 통해 근거를 들이밀며 반대 주장을 약화시켰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정착시켰고, 호남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영조나 황진이를 든 이유도 말해준다면? 
 
주영하 : 영조는 식탁에 많이 쌓아놓고 먹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영조는 절식을 했는데 그게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지금도 영조처럼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영조가 성격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웃음). 장수한 이유로 까탈스럽고 자신밖에 안 믿는 성격도 있지 않았나 싶다. 적게 먹고 오래 살면서도 글을 많이 쓴 임금이 영조다.  
 
조유식 :황진이가 천하의 미인이라서, 서경덕, 벽계수 등을 무너뜨렸다고 해서 보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웃음).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여...”라고 시작하는 황진이의 유명한 시가 있다. 이 정도로 한글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조가 있었나 싶다. 내용을 꼼꼼하게 따지면 굉장히 야한 시인데, 황진이는 이를 격조 있게 표현해 냈다. 황진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시였고, 문학적으로도 뛰어나고 격조 있는 사람이어서 꼭 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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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물었다  
 
박시백 화백은 어느 왕을 가장 좋아하는지, 이유도 함께 듣고 싶다. 
 
박시백 : 세종대왕을 가장 좋아한다. 세종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을 관철해나가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런 천재는 대개 독단에 빠지기 쉬운데 세종은 신하들과 충분히 토론하고 설득해서 결론을 내리고, 결론이 난 것은 자신이 직접 체크하면서 완수했다. 굉장히 놀라운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었다. 역사에서 보기 힘든 리더십을 체현한 사람이었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지만, 역사 속에서 이 순간만큼은 안타깝다, 그런 순간이 있다면?
 
박시백 : 문종이 좀 더 살았다면 어땠을까 싶다. 조선 초기 정치는 세종이 구축해놓았는데 문종이 살아 있었다면 그 토대에서 좀 더 잘 돌아가지 않았을까. 수양대군이 집권을 하면서 세종 때 갖춰진 시스템이 무너졌다. 수양대군은 인치, 왕 혼자의 캐릭터에 의해 가는 정치를 펼쳤고, 그것이 상당기간 가지 않았나 싶다. 문종의 죽음이 안타깝다. 
 
신병주 : 역사에서 가정을 말하기 어렵지만, 최근 역사 교사들 사이에 역사의 가정을 언급하면서 나온 얘기가 흥미로웠다. 이례적으로 소현세자의 죽음을 언급했다.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왕이 됐다면 북학이 빨리 오면서 근대화가 빨라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소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각도 있는 것 같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총리로 추천할 만한 분이 있다면 누군지 말해 달라. 
 
주영하 : 총리가 힘이 없잖나. 누구를 앉혀 본들 다를까 싶다(웃음).


조유식 : 저는 박시백 화백님을 추천하고 싶다(웃음). 역사를 꿰뚫어보고 계시고.


박시백 : 나는 동네 이장도 자신 없는 사람이라 사양하겠다. 최명길을 추천하고 싶다.


신병주 : 내가 최고의 재상으로 꼽는 사람이 이원익이다. 선조-광해군-인조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번의 영의정을 역임할 정도로 역량이 뛰어나고 청렴한 분이었다. 드라마 <징비록>에서 이원익이 비중 있게 나오지 않아서 안타까운데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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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15년 개정판 세트박시백 글,그림 | 휴머니스트
조선사가 지식인 문화에 머물고 대중들에게는 아직 생소했던 시절, 조선사로 가는 길목을 시원하게 열어준 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2001년을 시작으로 10여 년을 조선사에만 바쳤던 박시백 화백은 방대한 분량과 편년체 서술로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만화로 재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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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환상,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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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인한 불안이 일상과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 시절.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을 다룬 『불안들』(레나타 살레츨 지음/박광호 옮김|후마니타스 펴냄)이 출간됐다. 이 책의 저자인 레나타 살레츨은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불안이 오늘날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현대자본주의가 불안을 어떻게 조장하고 확산하는지 보여준다.

 

지난 6월 19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는 『불안들』출간 기념 로쟈의 특별 강연이 펼쳐졌다. 로쟈는 이날 불안과 환상의 차이와 함께 불안의 정체와 구조를 언급하면서 불안과 환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지점에 대해 말했다.

 

로쟈에 의하면 레나타 살레츨은 과거 지젝과 부부였으며, 지젝은 물론 믈라덴 돌라르 등과 함께 ‘슬로베니아 정신분석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학파의 이론적인 배경은 독일 철학, 특히 헤겔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이다. 독보적으로 많은 책을 펴낸 지젝에 비해 살레츨은 저작물이 많지 않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책은 미학관련서인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이었고『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난해 나왔다. 이어 『불안들』이 나왔는데 원제는 ‘불안에 대하여’라는 것이 로쟈의 설명이다.

 

“국내 출간 순서는 반대였지만 2004년에 『불안들』이 먼저 나오고 살레츨이 가장 최근에 낸 책인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2010년에 출간됐다. 두 책은 약간 중첩되는 내용이 있다. 한국에 소개된 것은 반대였는데 『불안들』을 먼저 읽고『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읽는 것이 순서상으로는 맞다. 불안들이 개괄서라면 디테일하게 다룬 것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다.”

 

 

살레츨과『불안들』에 대하여

 

『불안들』은 불안을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도 함께 다뤘다. 불안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면서 사랑에서의 불안을 다룬 장에선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소설을 분석 자료로 삼았다. 로쟈에 의하면 이는 사회학적 저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방식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읽으면 좋다는 것. 이 책은 불안과 환상을 대비한 것이 전체의 1/5에 달한다. 특히 두 번째 단락(자료)을 보면 메르스 때문에 불안해하는 지금 우리에게 어필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

 

“살레츨은 1장에서 불안에 대해 개괄한다. 20세기를 나눠서 불안이 어떤 양상으로 달라져 왔는지 짚어준다. 지표가 돼주는 것이 대중문화, 특히 할리우드 영화다. 라캉 정신분석이나 헤겔 철학을 추상적으로 이해시키긴 어렵기 때문에 대중문화를 통해서 이를 분석한다. 지젝이 그랬고 살레츨도 마찬가지다. 대중문화는 수단 정도가 아닌 그 자체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살레츨의 책은 지젝의 독자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작은 차이가 있다면 살레츨은 (슬로베니아 정신분석학파의) 다른 멤버에 비해 철학적 기반이 약간 약하다. 살레츨은 사회학을 기반으로 하고 범죄학을 다루는 학자다. 상대적으로 지젝에 비해 쉽다. 『불안들』에는 헤겔이 언급되지 않고 라캉만 들어가 있다. 지젝의 책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웃음). 지젝과 비교하자면 지젝보다 좀 더 온건하고 단정하다. 즉 지젝이 현란하고 광범위하다면 살레츨은 파격적이거나 괴팍한 것은 없다.”

 

로쟈는 이 책의 두 가지 초점이 △라캉의 정신분석이 불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서론에서 오늘날의 불안은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하고 개별 장마다 주제를 다루면서 필요할 때마다 라캉의 정신분석을 끄집어낸다고 덧붙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불안은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불안과 다르다.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불안 개념은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에서 정의하는 불안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 프로이트가 정의한 불안은 2가지로 처음 불안에 대한 언급이후 다시 업데이트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라캉은 그것을 좀 더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로쟈는 우리가 라캉을 읽을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했다.

 

“1901년에 태어난 라캉은 프랑스에서 일컫기를 20세기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캐치 프레이즈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라캉은 1930년대 정신의학 공부를 하면서 편집증 환자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그가 쓴 논문을 집대성한 책이 800쪽 이상 방대한 분량의 『에크리』(1966)인데 국내엔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이 어렵고 한국어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러시아판도 없다. 세미나를 모은 책이 좀 있을 뿐이다. 라캉을 읽는다는 것은『에크리』를 읽거나 세미나를 읽는 것이다. 해설서는 몇 권 나와 있다.”

 

그렇다면 라캉에 기반을 둔 지젝은 어떤 존재일까. 로쟈는 지젝은 라캉을 일기 위한 우회로라고 전했다. 지젝의 프리즘으로 라캉을 읽는 것이며 살레츨을 통해서도 라캉을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지젝이 지은 『HOW TO READ 라캉』은 라캉 입문서이나 이 책을 읽을 때도 라캉을 조금이라고 알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이해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통합된 사회’는 그저 환상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말하면서 언어학을 통해서 돌아간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반복할 뿐이라고 겸손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프로이트의 거세에 대해 라캉은 상징적 거세라고 말했으며 프로이트의 ‘자아(나)’에 대해서 라캉은 주체라고 표현했다. 로쟈는 라캉을 읽으면 프로이트를 읽게 되며, 지젝부터 먼저 읽으면서 라캉에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라캉에게 현실은 언어로 형성된 현실이다. 상징계다. 언어로 구축된 질서다. 상상계에서는 이름이 의미가 없는데 상징계에서는 자기 자리가 할당되고 역할도 배분된다. 우리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상징계다. 체면, 위신 등이 이것과 연결된다. 혼자 유아독존 할 수 있다면 상상계다. 우리는 뭔가 금지되고 억압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불만을 갖는다. 이것이 신경증이다. 신경증에는 히스테리와 강박증이 있다. 대체적으로 여성에게는 히스테리가 남성에겐 강박증이 많다. 도착증은 억압이 불완전하게 수용된 경우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롭다. 금지가 잘 작동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신경증이다. 속으로 뭘 하고 싶어도 스스로 억압하고 검열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억압되지 않는 것, 그게 정신병이다. 정신병은 금지가 이뤄지지 않는다.”

 

로쟈는 경찰의 예를 들면서 자연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가 제복을 입는 순간 번듯해 보이고 권력을 가진 자가 된다고 설명했다. 주체는 상징계에서 자리를 차지하면서 상징적 거세를 겪는다는 것. 그렇듯 주체가 분열돼 있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라고 로쟈는 말했다. 이어 대타자(주체가 말하는 존재로서 진입하게 되는 사회적ㆍ상징적 네트워크) 자체도 비일관적이며 분열돼 있다고 덧붙였다. 상징계의 결함. 즉 어릴 때 아버지는 완벽해보이지만 커서 보니 허술하고 결함이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적으로 잘 통합된 하나가 아니라 계급모순에 의해 쪼개져 있다. 통합된 사회는 환상이다. 실제는 쪼개져 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면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 등이 그렇다. 민족도 전형적인 환상이다.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어 할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이며 통합된 대한민국을 얘기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쪼개져 있고 분열돼 있다.”

 

 

주체의 불안을 막아주는 환상

 

불안은 여기서 나온다. 대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서 갖게 되는 것! 대타자는 주체에게 불안을 유발한다. 로쟈는 신을 생각해 보자고 권했다. 가령 기독교에서는 신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다. 계속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는 신경증자다. 답을 안다고 하면 도착증이다. 연애를 하면서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불안한 것이 신경증자의 것이다. 나는 안다고 확신하는 것이 역시 도착증자다. 그래서 신경증자들은 자기의 결여를 가리기 위해 환상을 가져온다. 『불안들』에서는 전장의 군인을 다뤘다. 환상은 불안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다만 완전하지 않아서 문제다. 충격에 의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

 

“환상은 주체의 불안을 막아 준다. 그래서 과거에 군 정신의학에서는 군인들에게 전투를 독려하는 데 환상의 힘을 사용했다. 예컨대 반나치 연합군들은 군인들이 처음에 살인을 주저하는 행동을 극복하도록 인위적으로 환상들을 만들어 냈다.”(75쪽)

 

로쟈는 우리가 가장 흔하게 갖는 환상의 예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들었다. 만남을 특별한 운명으로 만든다는 것. 그런 시나리오를 갖는다면 우리는 편하다. 환상은 주체의 불안을 막아준다. 사회 또한 아무 적대 없이 일관적이라고 생각하면 행복하다. ‘우리는 하나’라는 환상을 갖고 싶어 한다. 국가의 브레인은 그런 공작을 만든다. 가장 많이 동원하는 것이 스포츠 행사이며 국립묘지나 국민의례도 그런 공작에 의한 것이다. 선거후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안 하면 썰렁해진다는 것.

 

“환상은 견고하지 않다. 불현듯 깨질 수 있다. 사랑도 그렇고 국가에 대한 기대도 그렇다. 불안은 그런 것에 대비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불안은 외상으로부터 주체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환상은 불안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고 불안은 낭패를 피하게 해준다. 오늘날 많은 대중매체는 불안을 주체의 안녕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그린다. 불안을 제거한 사회가 반드시 더 좋은 사회는 아니다. 어느 정도 불안을 갖고 있는 것도 필요하다. 사랑에 빠졌을 때 불안은 필수적이다. 이것을 제거한 사랑은 도착증이나 신경증이다. 불안의 이점도 있다.”

 

라캉은 실패에 대한 불안보다는 성공에 대한 불안이 크다고 말한다. 다시 사랑을 떠올려보자. 이뤄지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는 것이 통상적이나 실제론 사랑이 이뤄져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놓고 우리는 불안해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남녀는 서로 다른 것을 기대한다. 남자는 여자를 숭고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나, 사랑받는 쪽에서는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지 물어본다. 반면 여성은 남성이 가진 상징적 권력에 끌린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설명이다. 라캉은 나의 결여를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로쟈는 이를 ‘뻥카 비슷한 것’이라며 줄 것이 없는데도 ‘자, 줄게’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사랑은 ‘대상애’다. 콩깍지 같은 것. 어느 순간 대상애는 대상으로 가면서 콩깍지가 벗겨진다.

 

“자기를 열락과 향락을 데려다줄 것처럼 보이는 대상에 가까이 가게 돼도 문제다. 불안은 그것을 유예시키는 것이다. 성공에 대한 불안이라고 말했는데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가까이 가려고 하면 깨진다. 그것이 불안의 기능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기억 회복 치료, 즉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이 나온다. 유사 심리치료와 같은 것인데 그걸 기억해냄으로써 치유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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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로쟈에게 묻다

 

상징계로부터의 일탈이 도착증이나 신경증으로만 해석되면 답이 없는 것은 아닐까.

 

혁명이나 변혁의 가능성에 대해 라캉 정신분석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라는 비판도 있었다. 실제로 라캉은 그런 쪽으로 보수적이었다. 라캉은 혁명이나 변혁에 회의적이었다. 다만 라캉은 68혁명에 대해 그들은 또 다른 주인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얼굴만 바뀌고 몸은 유지될 거라고 봤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그럼에도 라캉 이론에서 혁명이나 대안의 모색이 봉쇄된 것은 아니다. 지젝은 히스테리 환자에게서 가능성을 봤는데 대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포텐셜’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봤다.

 

얘기를 들으면서 ‘불안을 불안해하지 마라’는 쪽으로 정리가 됐다. 소설가 알롱 드 보통은 책을 통해 불안의 해소법을 소개했었는데, 보통과 살레츨의 불안을 비교할 수 있을까.

 

소비자본주의는 마케팅 등을 통해 불안을 제거하고 진정시키려고 하기도 한다. 마케터들이 그래서 『불안들』을 읽어볼 만할 것이다(웃음).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터들은 소비자를 과거의 구매자에서 사용자로 바꿔 문화적 경험을 소비하게끔 하는 전략을 쓴다. 그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불안 심리다. 불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가를 캐치해서 이용해먹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면 자기 보호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보통의 책은 잘 읽질 않아서 얘기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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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저/박광호 역 | 후마니타스
이 책은 패닉 상태에 빠진 우리 문화의 이면과 불안한 우리의 마음속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책임이 있는지 묻는다.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에 대해 우리가 꼭 제기해야 할 질문들을 던진다. 불안은 권위가 부재하기 때문인가, 너무 많기 때문인가? 미디어는 불안을 보도하는가, 만들어 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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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범신 “글을 쓴다는 건 자기 구원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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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3년. ‘글을 쓰는 것보다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더 힘들다면 글을 쓰라’고 얘기하는 작가 박범신. 그 자신이 그랬기 때문에 작가는 지금도 왕성한 창작열로 작품을 쓰는 중일 터다. 쓰지 않으면 힘들기 때문에 써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박범신에게 궁금한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기 위해 모인 100여 명의 독자들과 함께 작가는 집요함, 결핍, 불안, 자기 구원의 욕망 등에 대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스24와 문학동네가 함께한 소설학교 4편은 박범신 작가였다. 지난 6월 9일 정동에서 만난 박범신은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작가는 현재 논산에 거주하고 있는데, “남들이 짐작하듯 늙어서 유유자적하고, 무위자연하려고 내려간 것은 아니고요. 열심히 소설을 써보려 하니까 환경을 바꿔야겠더라고요.”라고 부연했다.


최근작 『주름』부터 시작해 『소금』, 『은교』, 『고산자』, 『촐라체』등 그는 대표적인 다작 작가다. 산문집까지 꼽는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진다. 환경을 바꿔가면서까지, 노년에 홀로 사는 환경을 만들면서까지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안 쓰면 굉장히 우울해져요.”


작가의 변이었다.


“글을 쓰면 놀라울 정도로 내 자신을 장악하게 됩니다.”는 작가는 다른 무엇도 아닌 글로써 자신을 통제한다고 말했다. 그가 홀로 논산으로 간 이유도 같았다. 불편한 상황을 감수하며 소설을 쓰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평생 그렇지만 은퇴 후 어떻게 문학적으로 나 자신을 긴장시킬 것인가 고민했어요. 데뷔43년 동안 지속적으로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내적 분열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매우 안정되고, 행복했다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지속적으로 불편하고, 불안하고, 행복해지지 않는 것이 글을 쓰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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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에 예민한

 

돈이 없던 시절에는 돈이 없어 불안했다. 그 힘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금전적 문제가 해결되어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것, ‘추락과 상실’을 매시간 반복하는 것을 작가는 ‘내적분열의 상태’로 표현했다.

 

“불안정한 상태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 있어요. 심리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으면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을 텐데, 불안정하면 몸이 앞으로 나가요. 추락과 상실을 반복하게 되면 자연히 앞으로 나가는 에너지가 생겨요.”

 

글을 쓰는 내내 그런 상태였다면 작가란 필시 편안한 직업은 아니다.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책이 많이 팔리고, 이름을 알렸지만 작가는 늘 허무하고 외로웠다. 상처 받기 쉬운 예민함이 그를 늘 결핍의 상태에 있게 했다.

 

“문학은 행복에서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글을 쓴다는 건 자기 구원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여러분도 다 아름답고, 멀쩡하게 앉아있지만 상처에 예민하거나 상처를 오래 간직하는 사람들일 거예요. 결핍에 예민한 사람들이 문학을 지향하게 되는 거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린 시절, 작가는 자나 깨나 동구 밖에 나와 강경, 논산 사이의 넓은 들판을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았다. 너무 멀어서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 기차를 보기 위해 어린 작가는 어두운 밤에 동구 밖에 쭈그려 앉아 기차 불빛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소망은 저 큰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 산 너머, 벽 너머로 가보는 것이 어린 시절의 가장 큰 꿈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저는 그런 것 같아요. 벽 너머, 어둠 너머, 언덕 너머, 산 너머가 궁금하고, 가보고 싶고, 그곳이 그리워서 글 쓰는 것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가난을 넘어서고 싶고, 부자유했을 때는 그것을 넘어 자유롭고 싶었고요. 요즘은 나이를 먹어서, 제가 꿈꾸는 것은 거의 생전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에요.”

 

작가는 초월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현상 너머, 죽음 너머의 세계가 궁금하다고 했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 가닿을 수 없는 초월적 세계에 대해 욕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이다.

 

“그것을 ‘갈망’이라고 해요. 1993년 절필 이후 3년을 쉬다가 이후에 쓴 소설은 대부분 ‘갈망’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어요. 초월의 세계에 대한 욕망을 제 나름대로 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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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 3부작


『촐라체』(2008), 『고산자』(2009), 『은교』(2010)는 박범신 작가의 ‘갈망 3부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닿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그것을 궁금해 하고, 그리워하는 작가의 욕망이 담긴 작품들이다.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 『은교』는 노작가가 어린 소녀를 열망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을 쓴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위험한 노인’이라고 여긴다며 농담으로 작품과 갈망에 관한 이야기를 열었다.

 

“노인의 머릿속에는 열일곱 살 처녀는 늘 열일곱 살 처녀인 줄로만 알고 있어요. 사실 노인이 욕망하는 것은 열일곱 살 처녀의 육체가 아니에요. 불멸의 젊음을 욕망한 거죠. ‘젊음’을 빼도 상관없어요. 불멸을 욕망한 거예요. 영원히 늙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 영원히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 말이죠.”

 

그 손등 위의 맥박은,
울근불근,
아주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뛰고 있었다. 네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았지. (중략)나는 보고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 『은교』, 93쪽)

 

작가는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고산자』, 『촐라체』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비애를 담은 소설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깊은 그리움, 그것으로 문학을 하는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도 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범신에게 궁금한 거의 모든 것


이야기를 마친 작가 박범신은 마이크를 독자들에게 넘겼다. 좋은 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독자들은 준비한 듯 질문을 쏟아냈다.

 

현재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 중인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초월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 아직 그 소설이 마무리 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소설 같았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꽃잎보다 붉던’이란 소설을 연재중입니다. 최백호의 노래를 듣다 구상했어요. <길 위에서>라는 곡인데요, 2절에 ‘꽃잎보다 붉던’이라는 가사가 나와요. 죽기 직전의 삶을 부른 노래예요.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한 노인 부부가 서서히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남편은 치매에 걸려 죽고, 여자 주인공 역시 치매에 걸렸습니다. 슬픈 이야기죠. 그러나 이것을 죽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러브스토리를 쓰려고 한 거예요. 여자는 오랫동안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치매에 걸린 뒤 5년 동안 깊이 사랑하게 되죠. 남편은 평생 아내를 사랑해서 헌신하고 인내하지만 치매에 걸린 후 아내를 괴롭혀요. 아내는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의 본심을 보면서 남편을 사랑하게 되죠.


사랑은 상대의 그늘을 보는 거지 가진 것을 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요즘은 상대가 가진 것을 보죠. 상대가 미모인가, 돈이 있나, 대학은 어디 나왔나, 집안은 어떤가, 이런 것을 다 보잖아요. 가진 것을 보고 사랑하면 가진 것이 사라졌을 때 사랑은 깨져요. 얼마 못 가요. 그렇게 사랑하면 안 돼요. 상대와 내가 수평을 이루는 것, 그 과정을 현재 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게 뭘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을 지켜가는 걸까, 이런 얘기를 쓰고 있어요. 사랑의 불완전성을 말하고 싶었고요. 그렇지만 어떻게 사는 동안 그것을 완성해갈 수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보는 소설입니다. 10월 쯤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억울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글로 풀 때가 있어요. 처음 글을 쓸 때 어떤 마음이셨는지요?


가난해서 부모님이 대학을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한 동네 살던 매형 어른이 대학을 가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드니 꼭 가라고, 교육대학을 가라고 해요. 당시 2년제였고, 등록금도 쌌으니까요. 그렇게 전주교육대학을 갔죠. 22살에 초등학교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무주에서도 가장 오지로 발령이 났죠.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이었어요. 5시만 되면 어두워지는데 라디오조차 없으니 너무 외로웠어요. 하숙방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없었어요. 뭐랄까, 유배된 느낌, 소외된 느낌이었어요. 좌우간 억울하거나, 버림받거나, 가난하거나, 감옥을 가거나, 이러면 작가가 되기 아주 좋은 조건이에요.(웃음)


예민한 젊은이였으니까 무척 외로웠죠. 처음엔 서울로 대학을 간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한 친구는 제가 보낸 2미터가 넘는 두루마리 편지를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원고지 300매 분량의 편지를 여자도 아닌 남자 친구에게 썼다니 미쳤죠.(웃음)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랬겠어요. 친구들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어요. 보내도 엽서 한 장 정도였죠. 자존심이 상해서 부치지 않을 편지를 노트에 쓰기 시작했어요. 어느 때는 예쁜 여자를 상상해서 편지를 길게 썼고요. 분하고 억울한 일을 엄마한테 이르는 편지도 쓰고요. 방학이 되자 친구가 놀러와 숨겨놓았던 그 노트를 읽었더라고요. 그 친구가 말했어요. “너 알고 봤더니 소설을 쓰는구나.” 그때 소설이라는 말이 마치 화인처럼 발등에 지져지는 것 같더라고요. 나의 정체성을 만나는 순간이었죠. 다음날 시골 문방구에서 제일 좋은 노트를 두 권 샀어요. 그걸 안고 돌아오는데 가슴이 정말 두근거렸어요. 누가 봤으면 눈빛이 아마 번쩍번쩍 했을 거예요. 책상에 앉아 노트 표지에 이렇게 썼어요. 소설. 어제까지는 의미 없는 넋두리를 썼는데 오늘부터는 이름이 붙은 거죠. 소설을 쓰면 더 밝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소설이라는 말이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 같았어요.

 

소설 작법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글이 써지지 않더라고요. 글을 쓰실 때 끝까지 어느 정도 구상을 하고 쓰시는지 아니면 쓰면서 구성을 해나가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나니까 진도가 안 나가더라고요. 어떤 이름이 붙어있는 글쓰기라는 건 그것을 구조화하는 것을 요구하거든요. 그래서 쓰기가 굉장히 두렵고 무서워지죠. 알다시피 오늘날 소설은 무한히 열린 구조예요. 소설이라는 게 정해져있는 규칙이 없어요. 소설 안에 희곡이 담길 수도 있고, 시도 담길 수 있고, 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쓸 수도 있어요. 반드시 두 인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기승전결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어떤 것을 담아내고 싶은가 하는 것에 대한 절실한 욕망을 품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형식은 쓰면 쓸수록 늘어요. 너무 완벽한 구성으로 완벽하게 구조화해서 담아야겠다는 마음에 눌리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는 것이죠. 세상이 주입한 생각을 버리고 정직해질 준비를 해야 해요. 진실로 말하고 싶은 것이 저 밑, 창자벽에 깔려있는데 대부분 ‘이런 얘기를 쓰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생각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보편적인 상상력 범위 내에 있는 이야기를 써요. 그러면 안 돼요.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 똥물이 줄줄 흐르는 창자벽에 있는 말들에 대해 정직해지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나만 알 수 있는 고유한 내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집요함 같은 게 중요하죠. 형식은 두 번째예요. 놀라운 기술을 구사해서 좋은 그릇에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좀 걸리죠. 많이 읽고, 많이 쓰다보면 저절로 형식을 알게 돼요. ‘소설 잘 쓰는 법’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을수록 손해예요. 자신만의 본질적인 말만 훼손될 뿐이죠. 마음속에 있는 상상을 찾아내려고 하는 집요함, 그게 중요해요. 쓰다보면 머지않아 형식은 균형을 맞추게 될 거예요. 남과 다르게 보려는 노력, 나의 고유한 말을 찾아내려는 욕망을 크게 갖는 게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고유어가 많아서 단박에 읽지를 못했어요. 사전을 찾아가며 읽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가끔 낯선 낱말이 나오죠? 직업적인 습관인데요. 글쎄요. 작가가 독자들이 모르는 낱말 한두 개 정도는 써먹어야 하지 않나요?(웃음) 문학을 하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언어에 대한 사랑이죠. 남의 말을 무심코 흘려듣는 사람은 글 쓰는 사람 중에 별로 없을 거예요. 특이한 표현이 나오면 귀가 번쩍 뜨이잖아요. 막내가 어렸을 때 “아빠, 다리가 반짝반짝해”라고 해요. 다리가 저리다는 뜻이었어요. 놀라운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수십 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안 잊어버려요. 어머니는 그랬어요. “나 죽으면 제사상에 아무거나 놓지 말고 투구 대가리 높은 이팝에다 수저 꽂아도 자빠지지 않게 고깃국 한 그릇 놓아다오.”라고요. 투구 대가리라는 건 고봉밥을 말하죠. 수저 꽂아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들어간 국을 원하신 거고요. 질기고 오랜 가난을 단 한 문장으로 말하신 거예요. 절실하게 나오는 한 문장은 잊을 수가 없어요. 가장 좋은 문장은 절실하게 나오는 문장이거든요. 어둠 속에 홀로 떨어져있을 때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엄마’라고 부른다면 그 ‘엄마’는 어떤 과학도 이길 수가 없어요.


언어감각에 대해 무심한 사람은 작가가 되기 힘들겠죠. 술집에서 놀다가도 멋진 말이 나오면 단번에 기억하죠. 낯선 낱말이 나오거나 신선한 비유가 나오면 아무리 취해도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요. 언어에 대한 예민함, 그것은 모든 작가들이 가진 기본이라고 할 수 있죠. 사라지고 있는 언어를 되살려 쓰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고요.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고 하셨는데요. 행복하신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 행복해 보이나요? 환경적으로 저는 불행할 이유가 없어요. 예전처럼 가난하지도 않고, 아내에게 버림 받지도 않았고요.(웃음) 그런데 행복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불행해서가 아니라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죠. 작년 겨울이었어요. 집 앞을 산책하는데 한 중년 여자가 길에서 그렇게 소리를 내서 울더라고요.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요. 그 여자가 나를 불행하게 했어요. 왜 우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요. 제 단편들은 다 그런 것들이죠. 「우리들의 장례식」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직장에 다니며 야간에 대학원을 다니던 때였는데 피곤했는지 버스 안에서 졸았어요. 내릴 곳을 지나쳐 내렸는데 어딘지 모르겠더라고요. 달동네였어요. 눈도 푸슬푸슬 내리고요. 그런데 가다 보니까 하얀 나무 관이 골목길에 세워져있어요. 수업에 늦었지만 너무 이상하니까 나도 모르게 거길 간 거예요. 문 열린 부엌에서 중년 부부가 저녁을 먹고 있더라고요. 가난한 판잣집이었죠. 왜 나무 관을 이곳에 놓았느냐고 물었더니 방 안에 관이 들어가질 않아서 그랬다고 해요. 죽은 사람은 집 안에 있고 다음날 염을 해서 길에서 관에 넣으려고 한 거죠. 저는 분노로 치를 떨었어요. 세상엔 여전히 너무 많은 것들이 부족하고, 삶 자체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죠. 그것을 발견하고, 느끼고, 감정이입해서 나의 슬픔, 나의 상처로 할 수만 있다면 글감은 떨어지지 않아요. 세상에는 마음 아픈 일이 널려있어요.


결핍으로 글을 쓰라고 해서 내 자신이 불행해지라는 것은 아니에요. 삶에 대해 뜨겁게, 마음 아프게 볼 수 있는 순정을 가진다면 결코 글감은 부족해지지 않죠. 부족해지기는커녕 절박함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글을 쓰는 사람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 무감하지 않다는 기본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신문 한 줄에도 장편 소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어요. 예민하게 본다면 말이에요. 공감능력이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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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박범신 저 | 한겨레출판
장편소설『주름』은 어느 일상적인 50대 중반 남자의 파멸과 생성에 관한 기록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한 남자와 여자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문득, 시인이자 화가인 천예린을 사랑하게 된 주조회사 자금담당 이사인 김진영은 그녀를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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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엘리엇이 삼성 家 합병에 반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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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사 문제도 쉽고 간결하게 ‘풀어주는’ 인기 블로그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 일명 <뻔지르>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지난 8년 동안 블로거 ‘보헤미안’이 들려주었던 경제 시사 역사에 대한 생각들을 책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안에 담아낸 것이다. 저자는 경제 전문가도 아니고 역사 전공자도 아니며 기자로 활동한 적도 없지만, 그렇기에 <뻔지르>의 이야기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바로 그 매력이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에서도 빛을 발한다.

 

“어떤 시사나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주장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나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구나 활발하게 토론하면서 사회적 담론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고요. 그래서 블로그와 책의 이름을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는 모두가 한 번쯤 궁금해 했던 이야기, 그러나 간단한 해답을 찾기는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자는 당연한 것일까?”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기업의 이익을 곧 국가의 이익으로 봐야 하는지’ ‘대학교가 하숙집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와 같은 각종 의문들에 답한다. “시아파와 수니파, 이들은 왜 끊임없이 싸우는가?” “영화 <300>과 페르시아 전쟁” 이야기에서는 세계 역사를 짚어보고 “뮤지컬 <명성황후>와 그녀의 호칭” “<징비록>과 과대평가된 유성룡?”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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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열쇠는 국민연금이 쥐고 있다?


지난 20일 이루어진 독자들과의 만남에서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최근 이슈로 떠오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천재 수학소녀의 거짓말 논란’에 대해 저자는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한편 솔직한 견해를 밝혔다. 특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문제에 있어서는 범 삼성 가와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갈등을 조명했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의 주식을 네 번째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엇이 말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왜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에 비해서 적은 비율을 가지고 합병해야 하냐는 것이죠.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은 1 대 0.35입니다. 국내법으로 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죠. 주가를 기준으로 합병 비율을 정하니까요. 그런데 삼성물산을 구성하고 있는 주주들과 기관들의 가치를 보면 주가만 반영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큽니다. 더 나아가서 2014년 기준으로 삼성물산의 연 매출은 제일모직보다 5배가 많습니다. 순이익도 제일모직보다 3배 이상 많고요.”

 

삼성 측은 이번 합병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경영상의 효율은 표면적인 명분일 뿐 실제로는 이재용 부회장의 기업 내 장악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저자인 보헤미안 역시“이번 합병은 삼성 가의 지배 구조를 조금 더 탄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광고주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은 언론들이 삼성의 편을 들고 있죠. 예를 들면 엘리엇이 ISD 제소를 못할 거라고 예상하는 거예요. ISD는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 소송을 거는 것인 만큼, 삼성이라는 한 회사의 일에 대해서 ISD 제소를 할 수는 없을 거라고 바라보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삼성물산의 주요 주주 중에 국민연금이 있거든요. 결국은 국민연금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서 합병이 결정 나게 되어 있는데, 만약 국민연금이 삼성 측에 서서 합병이 성사되면 ‘국가 기관이 기업의 편을 들어줘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손실을 봤다’는 식으로 충분히 제소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만약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ISD 제소가 현실화될 경우, 소송에서 패소하면 국가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연금으로서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 아울러 ‘엘리엇이 ISD 제소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맹신할 수도 없다.

 

“주주총회가 7월에 열리는데, 제 예상으로는 어떻게든 삼성과 엘리엇이 합의점을 찾을 것 같습니다. 양측 모두 문제를 빨리 마무리 지어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합병이 된다 하더라도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사건건 경영에 개입하게 될 텐데요. 그러니 삼성 입장에서는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원하는 만큼 대가를 지불하고 내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삼성이 그 정도의 자본이 있느냐가 문제인데,  회사에는 돈이 있겠지만 이재용 부회장에게 그만한 비용이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1년 동안 경제 신문을 구독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블로그 <뻔지르>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저자는 한 가지 팁을 알려주었다. 경제 문제를 비롯해서 특정 이슈를 이해하려면 ‘누가 이득을 보는가?(Cui bono?)’라는 질문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그를 둘러싼 엘리엇 매니지먼트와의 갈등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했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한 것은 경제신문 때문이었습니다. 일부러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 일반인과 자신을 구분 짓고 지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일부 전문가들의 모습이 경제신문에서도 느껴졌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쉽게 경제에 접근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블로그를 운영하게 된 소박한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시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시사와 경제, 책 등 다양한 주제가 있는 버라이어티한 블로그가 되었습니다. (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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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


이어서 그는 ‘천재 수학소녀의 거짓말 논란’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교에 동시 합격했다는 이유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떠오르고 언론들은 사실 확인도 없이 앞 다투어 보도했던 일련의 해프닝 속에서,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와 기능이 마비된 언론의 오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확인이잖아요. 그런데 경향신문이 나서기 전까지 어떤 언론도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내보냈어요. 여기에는 믿을만한 사람의 이야기니까, 라는 믿음이 깔려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소녀가 미국의 과학고에 재학 중인 것은 사실이고, 소녀의 아버지는 전 중앙일보 기자로 현재 넥센의 전무이사니까요. 그런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그냥 기사를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학벌사회라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게 돼서 씁쓸했습니다.”

 

저자는 “소녀가 이슈가 될 수 있었던 우리 사회의 민낯과 그걸 확산시켰던 언론의 민낯을 한 번 더 짚어보는 게 발전적인 방향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말을 끝으로 강연을 마쳤다. 그리고『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를 향한 독자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만이 가진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저자의 입장에서 장점을 말하기가 부끄러운데요(웃음). 책을 쓰고 난 후에 저 스스로는 ‘깊이가 부족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 부분을 장점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선뜻 손이 간다는 느낌이랄까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깊게 들어가지 않더라도 쉽게 맥락만 짚고 넘어갈 수 있게 해준다고 평가해주시는 분들이 계셨거든요. 그런 점에서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역시 접근성과 친밀도인 것 같습니다.

 

경제, 시사와 함께 역사 이야기를 실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역사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사극 같은 걸 보면서 ‘이게 정말 역사적 사실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그런 정보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게 됐어요. 그 글들을 책에 수록한 이유는 역사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죠. 역사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고, 역사를 통해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을 조금은 고쳐나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서 포함시켰어요. 개인적으로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많은 기사들 중에서 어떤 기사를 읽어야 할지, 기사를 읽으면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기 검색어와 관련해서 검색되는 기사들은 보시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웃음). 포털 사이트의 뉴스 카테고리에 들어가셔서 보시는 게 좋아요. 작은 팁을 알려드리자면, 지면 검색을 활용하시면 종이 신문에 나왔던 뉴스만 검색해서 보실 수 있거든요. 그러면 소위 낚시용 기사라고 하는 것들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이 날의 만남을 마무리하며 저자 보헤미안은 독자들이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를 통해서 역사적 사실과 국내외의 다양한 이슈들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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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보헤미안 저 | 베프북스
블로그 월평균 방문자 수 15만 명! 시사?인문?경제 부문 화제의 블로그 ‘뻔지르’ 운영자 보헤미안이 어렵게만 보이는 시사와 경제, 역사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혹은 잘못 알고 있는 시사 상식들을 바로 잡아준다! 저자의 유쾌하고도 간단명료한 설명에 빠져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 보면, 시사를 보는 눈이 열리고 새로운 관심과 흥미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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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씨, 고통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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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24와 민음사가 함께 진행하는 2015 세계문학 고전학교 6월의 강의, 주인공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최근 『태도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펴내고 강의 진행을 맡은 작가 임경선은 “결국 하루키의 소설과 여러 글 속에 담긴 그의 생각, 인생의 고통에 관한 담론들이 이번 에세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그가 ‘하루키’를 이야기하기 위해 ‘고통’이란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고통이란 단어가 하루키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강의의 문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 그에게 ‘고통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하루키는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우선 자기 개인의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까 한다는 임경선은 먼저 작가의 삶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본인 스스로 ‘상처 입은 기억이 없다’고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런 그에게 닥친 첫 번째 고통은 무엇이었나.

 

 

하루키, 고통의 시작


“도쿄 와세다 대학교에 가면서부터예요. 1960년대 말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80년대 학생운동처럼 전공투(‘전학공투회의’의 약칭)라고 해서 반미, 반제국주의와 같이 전반적으로 기성세대를 반대하는 학원분쟁의 폭풍이 몰아칠 무렵이었어요. 학생들이 기세등등한 분위기였죠.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하루키는 데모 조직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생운동을 지지하고 있었고, 개인적인 단위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문제는 전공투 안에 존재했던 계파 갈등이었다. 대립이 심해지며 그로 인해 사람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루키가 소속되어 있던 문학부의 한 강의실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비운동권 학생이 살해된 것이었는데, 그 사건을 겪으며 하루키는 처음으로 큰 환멸을 느낀다.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운동권 방식에 환멸을 느낀 거예요. 이어 정의를 부르짖던 운동권 학생들이 일 년 후 전공투 바람이 잠잠해지자 갑자기 취직을 위해 ‘리크루트 수트’라고 하는 감색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서 그토록 욕했던 대기업에 입사하려고 절절매는 모습을 봐요. 거기서 또 한 번 환멸을 강하게 느끼죠. 이 부조리함, 이 비열함,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말이에요.”

 

일찍이 하루키는 삶의 부조리를 발견했고, 환멸을 느낀다. 작가는 ‘저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빚을 내 도쿄 외곽에 재즈 카페를 차린 것은 그런 맥락이었다. 이때부터 하루키에게도 진짜 ‘고통의 시간’,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22살부터 29살까지 카페를 운영했어요. 그 나이면 청춘을 만끽할 때잖아요. 그는 그 시기에 아침부터 밤늦도록 육체노동을 하고 취객들을 내쫓기도 하며 보냈어요. 일단 빚이 많았고요. 시간적, 경제적으로 ‘즐긴다’고 할 여유는 전혀 없었죠. 당연한 얘기지만 고생은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고 그는 얘기합니다.”

 

하루키는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정신없이 관통하고, 살아남는다. 그의 나이 29살, 새로운 풍경이 그를 둘러쌌다. 이제는 글을 써볼 수 있겠다, 하는 실감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때가 왔다, 이제 할 수 있겠다, 해도 되겠다, 하는 그런 확실한 감각을 갖게 된 거죠. 그래서 지금 누군가가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느낀다면 그 당시의 하루키는 이렇게 말을 건넬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여러모로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결실을 맺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힘내서 견뎌주세요’라고요.”

 

임경선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두 가지 청년기의 경험이 소설가가 된 이후 그의 작품을 지탱하는 큰 경험치라고 설명했다. 어떤 육체적 고생을 통해 얻은, 인생철학의 뼈대를 구축한 단단함과 부조리하고 공정하지 못한 비겁함에 대한 치 떨리는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 작가의 가치관을 형성했으리라는 것이다.

 

“여러분도 10대, 20대의 예민한 시기에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후의 삶에도 자신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경험을 하실 거예요. 그처럼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어떤 것들은 계속 남아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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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소설 속 고통의 몇 가지 주제들


‘고통’과 ‘자기 치유’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관통하는 큰 주제라고 임경선은 설명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끌어안고 살고 있는 일종의 암흑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진지하게 관찰해서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그대로 리얼하게 쓰고 싶다. 해석하거나 설명하지 않고.’라고요. 저는 이걸 다른 표현으로 ‘자기 안의 지옥’이라고 항상 얘기해요.”

 

인간이 갖고 있는 암흑, 내재된 어둠에 관심을 가졌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린 소설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그가 다룬 고통의 몇 가지 주제들이 보일 것이다.

 

가장 먼저 『해변의 카프카』에서 그린 고통은 ‘성장의 고통’이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고통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시각을 바꾸고, 내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한 걸음 나오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답이 없어 보이는 이 좁은 세계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라도 있다는 것이 책에서 말하는 첫 번째 고통에 대한 안내라고 할 수 있어요.”

 

‘껍데기’라고 하는 상징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그 껍데기를 깨는 경험을 함으로써 성장한다. 피부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를 깨는 데에는 그만큼의 고통이 따른다.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고, 자신을 지난 자에게 상처럼 ‘성장’이라는 선물을 준다. 15세에 가출을 감행한 소년 ‘카프카’처럼 말이다.


『해변의 카프카』가 다루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힘이나 피할 수 없는 폭력이 있는데, 이때 체념하지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라고 임경선은 덧붙였다.

 

“안 될 거야, 혹은 넌 할 수 있어, 이 둘 모두도 아니죠. 조건부 희망을 준 거예요. 네가 어떻게 한다면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라는 건데요. 구체성과 현실성이라는 것을 함께 가져가야 하는 거예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린 고통은 ‘상실의 고통’이다.

 

“일본에서 나왔을 때 하루키가 커버 디자인과 띠지 카피(‘이것은 100% 연애 소설입니다’)를 아내와 함께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루키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은 연애의 모습이 아니라 상처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즉, 상실의 고통을 겪어도 계속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이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싶었다고 얘기해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죽음과 함께 많이 등장하는 것이 ‘섹스’다. 임경선은 “섹스는 격한 상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혹은 삶을 지탱시키는 행위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임경선은 죽음의 반댓말을 ‘섹스’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 행위가 가장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실낙원』 같은 작품에서 장례식 이후 정사 장면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저는 그것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해요. 죽음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나면 삶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노르웨이의 숲』에는 네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하츠미. 이 여자들의 고통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무게감을 갖는다. 나오코는 롤모델 같았던 모범생 언니가 17살에 아무런 기미도 없이 자살하고, 자신의 쌍생아 같은 남자친구 기즈키 역시 자살하면서 엄청난 ‘상실의 고통’을 경험한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밝은 미도리 역시 고통스럽다. 미도리의 부모는 차례대로 병에 걸려 죽고, 미도리가 좋아하는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좋아한다. 거짓된 폭로에 상처 받는 레이코와 남자친구의 성적 방탕에 상처를 입는 하츠미의 고통역시 조금도 가볍지 않다.


그렇지만 이 작품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이 작품이 대박이 나면서 하루키의 일상이 흔들립니다. 평론가들이 비난하고, 가까웠던 사람이 멀어지고, 부모님과도 갈등을 겪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하루키가 쓰려고 했던 작품이 아니었어요. 판타지만 쓰느냐는 지적에 리얼리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썼던 것이고, 무엇보다 이 작품은 자신의 트라우마적 경험의 언어화라는 자기 구제의 작업이었어요. 한마디로 자기 얘기를 쓴 것이죠.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이 팔린 거예요.”

 

매 신간을 낼 때마다 엄청난 독자들의 환영을 받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 국내에서도 출간 소식으로 큰 화제를 낳았던 것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다. 하루키가 이 작품에서 그린 고통은 ‘소외의 고통’이었다.

 

“중요한 것은 쓰쿠루가 핀란드까지 가서 얘기를 듣지만 모든 것을 납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에요. 깔끔하게 해결되고, 상황을 100% 납득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이해는 하기로 하고 그래도 나는 내 인생을 한 걸음 걸어간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점이에요.”

 

임경선은 모든 것을 해결한 다음에 걸음을 걷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 해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직 온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이 상황에서도 걷겠다, 는 자세에 대해 강조했다. 걷다보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하루키가 전하는 고통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자신이 완전치 못한 상태라 하더라도 일단 나아가보는 것, 그것이 고통을 좀 더 정직하게, 솔직하게 다루게 되는 태도가 아닐까.

 

여자들에게 버림 받은 중년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작품들로 채워진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그린 고통은 ‘버려짐의 고통’이다.

 

“주인공들은 특이한 점이 있어요. 여자가 떠나간 고통을 줄이기 위해 평범한 남자가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해요. 굉장히 침착해요. 울부짖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여자를 괴롭히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여자가 떠나갔는지는 굉장히 상세하게 묘사했는데, 왜 떠나갔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루키는 여기서 고통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경험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것은 상처 받을 때는 제대로 상처 받는 쪽이 낫다, 라는 거예요.”

 

상처 앞에서 의연한 척 하는 태도, 최대한 자제하는 태도가 더 성숙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하루키 역시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자제하면 자제할수록 더 깊이 상처 받는다. 자신의 아픔, 상처, 감정을 억누르는 일을 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여자 없는 남자들』을 통해 하고 있다.

 

“쉽게 말해 괜찮은 척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플 때는 제대로 아파하는 것, 애도의 기간을 갖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어른이니까’ 할 필요 없어요. 그건 나이와 상관없이 괴로운 거거든요.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표현하는 일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외의 작품들


‘고통’이라는 주제를 다룬 하루키의 작품들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단편 「침묵」은 하루키가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쓴 것인데, 부조리한 폭력, 그에 동조하는 비열한 불특정다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소설이다. 특히 임경선은 이 단편에 애착을 갖는다고 말했다.

 

“진짜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에요. 비열한 불특정다수, 숨어있는 익명의 사람들의 폭력이 현실에서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쿄기담집』에 수록된 「하나레이 해변」은 고통의 아름다운 휘발 방식에 대해 그리고 있다. 하와이에서 서핑하다 죽은 아들의 기일에 하와이에 건너가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떤 식으로 소화하고, 휘발하는지 묵직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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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주변부속 이야기들


궁금한 점이 있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이렇게 ‘살림력’이 강한가. 이들은 굉장히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일상생활을 유지하는데 애를 쓴다. 일상적인 것들을 유지한다는 것, 이것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괜히 그런 게 아니에요. 일상에 부조리하게 닥치는 고통의 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해요. 이른바 『댄스 댄스 댄스』에 ‘문화적 눈 치우기’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누군가는 눈을 치워야 하죠. 그런 것처럼 한 사람의 사사로운 헌신, 그 노동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거예요. 요리도 열심히 하고요.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절대 새로 장을 봐서 보란 듯이 요리하지 않고요.(웃음) 무심하게 냉장고를 열어보고 있는 재료로 뚝딱 만듭니다. 이 행동은 하루키의 세계관과 연결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자원으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완성할 것, ‘냉장고를 부탁해’적 세계관이라고 임경선은 유쾌하게 말했다. 가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은 삶에 대한 꽤 의미 있는 태도가 아닐까. 청소도 마찬가지다. 삶을 유지하는 꾸준함, 그것이 삶에 주는 힘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 임경선은 고통과 공정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정하다. 그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불공평하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어떤 종류의 공정함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요. 하루키는 공정함을 무척이나 추구합니다. 고통에 대처함에 있어서도 그렇고요. 또한 ‘세상에는 여러 가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있지만 역시 세상을 볼 때는 공평하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뭔가를 한 경우에도 왜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가능하면 그 사람의 입장, 사정을 이해해보려는 자세’를 말한 것이죠.”

 

피해자의 입장에 놓였더라도 가급적 공정함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러한 하루키의 태도는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을 다룬 르포르타주 『언더 그라운드』를 씀과 동시에 옴진리교 신도들(가해자)을 인터뷰한 『약속된 장소에서』를 연이어 쓰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단한 거예요. 명백한 피해자, 명백한 악(惡)으로 보이지만 작가로서는 이쪽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 짓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니까요. 이런 태도는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2009년) 당시의 수상 소감과 일맥상통하죠.”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 당시 하루키는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새겨두는 말이 있다. 혹시 여기에 단단한 벽이 있고 그에 부딪히는 알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알의 편에 설 것이다”라고 말해 큰 이슈가 되었다. 임경선은 이것이 흔히 해석하듯, 단순히 강자와 약자에 관해서 한 이야기만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루키는 이렇게 말해놓고도 알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할까 또 생각해본다고 했어요. 100% 알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본인도 무조건 알의 편에 설 자신은 없다고 했습니다. 알을 지지한다는 것은 절대 감상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하고 있어요. 그것은 나름의 결심과 마지막까지 책임을 치를 각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요.”

 

‘나는 약한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약한 것은 옳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약한 것이 옳든 그르든 약한 편에 서겠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루키에게는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약하다’는 명제를 품고 있다. 다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중 한 대목을 보아도 그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강한 인간 따위 그 어디에도 없어. 강한 척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소설가, 작가이기 때문에 약함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이 있고, 그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약함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약한 부분이 고통 받고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그 부분을 통해 다른 세상을 열게 되겠죠. 그게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원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대개 고통을 통해 배운다. 그것도 무척 깊은 고통으로부터.”


깊은 고통에 대면하는 것, 일상성을 유지하는 것, 고통을 지나 살아남는 것, 하루키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들이다. 그의 작품들에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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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임경선 저 | 한겨레출판
《태도에 관하여》는 저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신뢰하게 된 삶의 다섯 가지 태도들에 관하여 쓴 솔직하고 명쾌한 에세이다.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태도(attitude)는 ‘어떻게’라는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문제이자, 그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고유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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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사랑을 잃게 만드는 7가지 잘못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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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은 적확했다. 『밥벌이의 지겨움』이었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아무렴. 밥벌이에 대체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어야 할 사람살이. 그렇다면 이 지겨운 밥벌이, 도리가 없다손 어떻게 견디고 버텨야 하는가. 정신과 의사 김병수(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학과) 는 이렇게 말한다. “이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버텨라. 그 또한 당신의 권리다.” 그가 쓴 버텨낼 권리』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으로서 밥벌이의 고단함을 버텨내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일종의 연서다. 이 책은 직장에서 부딪히는 일과 스테레스의 본질을 밝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김병수 저자는 밥벌이의 고단함은 일에 대한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분석을 내놨다. 지난 7월 8일,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버텨낼 권리』저자 특강을 통해서였다. 그는 ‘어떻게 일을 사랑할 것인가 : 일에 대한 사랑을 잃게 만드는 7가지 생각’이라는 주제로 독자들과 만났다.

 

그에게 많은 직장인이 상담을 요청하는데, 그런 상담의 공통점이 있다. 일하기 싫다, 일에 대한 열정이 식는다, 일할 맛이 안 난다, 등과 같은 호소부터 하고 본다. 직장에 들어가기도 힘든 시절, 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의아했다. 일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왜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할까? 왜 일에 대한 사랑을 잃게 될까?

 

“일은 자기 정체성의 일부이며 대인관계이며 내 삶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일에 문제가 생기면 정체성, 대인관계 더 나아가 삶이 흔들린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일이다. 일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면 의욕저하의 악순환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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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오해와 미신

 

1. 스트레스가 없어져야 행복할 수 있다

 

김병수는 본질적으로 사람은 불행한 존재이며 행복하기 어렵다는 말부터 꺼낸다. 이윤, 경쟁, 효율을 따지는 사회에서 행복하기는 어렵다는 것. 회사는 이윤 추구를 위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만들고 정서 노동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에게 경쟁은 물론 과중한 업무를 정당화하기 위해 불안을 조장한다. 즉, 일을 통제 수단으로 삼는다. 더구나 심심함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여서 심심하면 여유롭기보다 불안을 가진다. 여유가 생기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고 느낄 정도다. 그러니 사는 것이 곧 스트레스다. 

 

“스트레스의 본질은 간단하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한다. 선택권이 있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선택하고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크게 발생한다. 착하게 살아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힘든 일은 눈 먼 미친 소가 나를 뒤에서 받듯이 생긴다. 힘든 일은 그렇게 찾아온다.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것과 무관하다.”

 

고로 저자에 의하면, 괴로운 것이 정상이다. 50년간 고해성사를 받아 온 신부에게 그동안의 깨달음을 물었다. 신부는 답했다. “우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사실은 성숙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비효율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즉 관계를 회피한다거나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술로 풀기,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기, 우울하다고 충동적인 선택을 하는 것 등을 하지 않아야 한다. 변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릴수록 지치고 에너지 소비가 더욱 크다. 쓸데없이 힘을 빼지 않기.

 

“불안하고 우울해도 행복할 수 있다. 스트레스는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약간 괴로운 것이 정상이고 스트레스는 풀 수 없으므로 안고 가는 것이 좋다.”

 

2. 갈등은 완전히 해소해야 한다

 

김병수는“갈등은 푸는 것이 아니라 품고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에서 괴로운 건 일보다 사람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갈등이 쉬이 풀리지 않는 이유도 상황 때문이 아닌 대부분 성격 갈등이기 때문. 어렵게 생각하지 말 것. 그냥 못마땅한 것이다. 괴롭다고 느끼는 건 기본적인 신뢰에 금이 간 ‘본질적인 갈등’이어서 그렇다. 이는 해결되기 어렵다. 해결하려다 오해가 더 쌓인다. ‘허위 갈등’이 대부분이다.

 

“자기 계발서가 왜 해결책이 아니냐면 대인 관계의 문제는 사랑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기술의 문제, 요령의 문제가 아니다. 친해지고 싶은, 신뢰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버려두는 게 나을 수 있다. 갈등을 없애고 모든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미움 받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힘들다.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좋다. 그래도 화해하고 싶다면, ‘안타깝다, 누가 너를 그렇게 키웠더냐’라고 불쌍히 여기고 마음으로 안아주는 상상을 해라.”

 

3. 옳은 말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저자는 확고하게 말했다.“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믿음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은 더더욱 바뀌지 않는다.” 강한 신념이나 믿음의 발생 계통을 따라가면 응당 이유가 있고, 그런 믿음이 인생에 도움이 됐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생각을 고치라고 말한다면? 저항하고 멀어진다. 

 

그는 ‘심리적 역반응’ 이론을 꺼냈다. 즉, 청개구리 심보(행동)다.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고 도전받는다고 느끼면 자신이 가진 문제 행동에 대한 매력과 그것을 행하는 빈도가 오히려 증가한다는 것. 즉 ‘술 마시지 마라’고 하면 술에 대한 욕구가 더 커지는 것과 같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바꾸려면 말이나 논리가 아닌 정서나 감정을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라리 손 한 번 잡아주고 안아주는 것이 좋다는 것. 그래서 옳은 말이 아닌 말하는 톤이 더 중요하다는 것. 콘텐츠가 아니라 톤과 속도, 표정이나 제스처가 더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핵심은 마음이며, 저자는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1) 그럴 수도 있겠다. 
2) 그래도 나는 (그리고 너는) 잘하고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OO를 원한다.

 

“불꽃이 튀는 애정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가끔 만나서 술 한 잔 하는 친구가 오래간다. 심심한 관계가 좋다. 누군가와 심심하다고 하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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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도 모르는) 내 자신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저자에게 상담 오는 사람의 20%는 ‘내 성격은 왜 이럴까요? 좀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내 마음이 너무 여려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자기초점적주의’라고 설명했다. 외부에서 생성되는 정보가 아닌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좋지 않다. 자신에 대해 생각할수록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자의 결론은 단순하다. 자신에 대한 생각이 적어질수록 행복해진다. 자신에게 파고든다고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고로 성격을 바꾸겠다, 내 자신을 바꾸겠다고 파고들지 않기를 권했다. 특히 해병대에 성격 개조한다고 가는 건 아니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성격을 개조한다고 애쓰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좋다. 그게 자신을 위한 길이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마라. 콤플렉스는 안고 사는 것이다. 이런 것에 집착하면 일에 쏟아야할 에너지를 소모하고 지친다. 내가 누구인지 너무 관심 갖지 마라. 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나에 대해 관심이 크게 없다. 소심한지 여린지 성격이 어떤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재능이란 버티다보면 생기는 것이다. 재능이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실수를 통해 생겨나는 것이다.”

 

5.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속적으로 성공해야 한다

 

월마트 창시자인 샘 월튼.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 나는 내 삶의 우선순위를 잘못 골랐다.” 샘 월튼은 친구도 별로 없었고, 자식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손자들 이름도 외우지 못했다. 

 

저자는 ‘유사 존중’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업적에 기초한 자기 가치는 유사 존중일뿐 진짜가 아니라는 것. 외모, 재능, 명성이나 재산 위에 자기 가치감의 기초를 놓을 수는 없다. 유사 존중에 기초해서 살면 나이 들어서 후회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 유사 존중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잘못된 믿음이 있다. 인정받지 않으면 자기 삶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 실패할 거야, 부족한 사람이야, 버림받을 거야, 사랑받지 못할 거야, 와 같은 자기 비난에 익숙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것.

 

저자는 가수 김창완이 인터뷰를 통해 했던 말을 건넸다. “나의 실수, 편견, 부족함까지 내가 나를 못마땅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 그것도 최선의 삶에 다 들어가는 거다. 그런 것들을 싹 빼면 자기 삶이 완벽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허접함과 못마땅함이 포함될 때 그제야 그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김창완)

 

“백번 양보해서 내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이것을 없애거나 몰아내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자기 존중이 필요하다. 그래도 나는 예뻐! 자기 자신을 칭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한다.”

 

6. 마음은 순수하고, 한결 같아야 한다

 

저자에게 이런 상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꾸 야한 생각이 나요, 그 사람 주먹으로 한 번 때려주고 싶어요,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바뀌어요. 그리고는 묻는다. 제가 정상인가요?

 

“마음은 원래 순수하지 않다. 사람이 성적, 공격적, 의심, 혐오, 비도덕적 생각을 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이다. 또 대부분의 선택은 확고하지 않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고민한다. 원하지만 원하지 않는 마음이 정상이다. 어떤 것에 대해 100% 분명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이다. 양가감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는 항상 일관되고 한결 같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인지 부조화를 받아 들이라고 권했다. 가치관, 신념이 일관돼야 한다는 것은 강박이며 다중 인격자가 돼야 한다는 것. 그것을 ‘자기 복잡성’이라고 표현했다.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묘사가 서로 다를수록(모순될수록) 자기 복잡성은 높아지며, 이런 사람일수록 건강하고 우울증에 덜 걸리며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을 가진다.

 

“나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라! 사람은 원래 순수하지 않다.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정상이다.”

 

7. “왜 일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취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Conformity) 구조 조직에 대해 복종한다(Submission).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허무감이 따른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 실존적 공허에서 비롯된 신경증이 따른다. 이를 다른 것으로 채워보고자 쇼핑에 중독되거나 술을 마시거나 새로운 연애에 빠지는 등 엉뚱한 자극을 찾는다. 본질을 놓치고 자극을 찾는다.

 

저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기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2013년 한 신문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인용했다. “난 50년 동안 이 세상 어린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단다’라는 걸 전하고 싶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어  『장사의 신』에서 우노 다카시가 일에 대해 했던 말도 전했다. “이자카야는 손님이 놀러오는 곳, 즐겁게 먹고 마시는 곳”이라며 대표 메뉴 몇 가지만 잘하면 음식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술집은 주인의 인생을 파는 곳”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나에게 일은 경험의 확장과 선한 영향력이다. 여러분이 사는 동안 실현시키고 싶은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도 해보고 일과 내 삶에 관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스토리나 키워드가 있으면 일을 즐길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없으면 견디기 어렵다. 일과 내 삶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라. 그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바로 내 진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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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낼 권리김병수 저 | 위즈덤하우스
한때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고,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회사를 다니게 되었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행복은커녕 왜 회사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한 걸까? 이 책은 힘들다고 쉽게 회사를 그만둘 수도, 일을 놓아버릴 수도 없는 직장인들에게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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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의 세 남자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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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PD 셋이 방송이 아니라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시끌벅적 거친 말과 유쾌한 폭소가 오간다. 마치 탁구 경기를 하는 듯 주고받는 말들이 빠르고 재치 있다.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의 이야기다. 이들의 팟캐스트 이름은 <씨네타운 나인틴>. 팟캐스트 좀 듣는다는 사람들은 이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약 2년 전부터는 SBS FM에 <씨네타운 S>라는 이름으로 정규편성 되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방송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 넋을 놓고 그저 남자 셋이 모여 정신없이 떠는 수다에 끌려가게 된다. 낄낄거리고, 맞장구를 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이렇게 많은 팬들이 열광하고(저자들도 알만큼 자주 보는 팬들이 있다!), 책을 내고, 여기저기서 관심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남자 셋은 흡사 친구들끼리 술자리에 모여 떠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저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베테랑 라디오 PD의 내공이 묻어난다. 지식도 풍부하다. 그야말로 ‘듣는 맛’이 있다.


이들 셋이 자신을 키운 책들, 그 책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책 『빨간 책』을 출간했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부터 『체 게바라 평전』, 『코스모스』, 『허삼관 매혈기』와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까지 폭 넓은 이들의 독서편력이 엿보인다. 더불어 이 목록을 따라 한 사람의 일기를 들춰보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돌아보니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 중에서 권장도서는 한 권도 없었다. 모두 어느 지점에서 지나치게 튀어나온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모범생 친구보다는 삐딱한 친구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처럼. 이제 소개할 몇 권의 책들이 바로 그 삐딱한 녀석들이다. (5~6쪽)

 

지난 5월 14일 이재익, 김훈종, 이승훈 세 사람이 모여 자신을 키운 책, 그들의 팟캐스트, 현재의 관심사와 사소한 고민들까지 넘나드는 유쾌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시종일관 시끄럽고, 유쾌한 자리였다. ‘빨간’ 책을 쓴 사람들답게 말도 거침없었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내던진 욕설을 담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이들의 한바탕 수다를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가 보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책을 다 읽은 열일곱 살 소년은 한참 동안 전율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다른 어떤 철학책을 읽었을 때보다 더 강렬한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일종의 축복이었다. 모두가 염원하는 영생의 삶을 이룬 휘스카보다 내가 더 행복하다는 깨달음!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오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아마 엄마나 선생님에게 들었으면 달팽이관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진부한 교훈이 뼛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176쪽)

 

먼저 이날 북토크가 진행된 합정 빨간책방에 특별히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등장했다. 그는 마침 이 책이 다양한 책들을 다루고 있어서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책을 보고 제일 놀란 건 이 세 분이 지식이었구나, 이 분들이 책을 읽으시는구나 하는 거였어요(웃음). 세 분의 개성을 비교해가면서 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라고 감상을 전했다.
 
이승훈 PD가 이재익 PD에게 먼저 물었다. 가장 말하고 싶은 에피소드는 무엇이었을까? 이재익 PD는 망설임 없이 친구 어머니와 있었던 에피소드(‘금서의 추억 하나’)를 꼽았다.

 

테니스코치 살인사건 이후 나는 <황홀한 사춘기>를 당시 우리 반 부반장 이용* 군에게 넘겼다. (중략) 며칠 뒤 용*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낙담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대사를 꺼냈다.


“재익아, 정말 미안한데. 우리 엄마가 너 좀 보재.”


오, 신이시여! 이놈이 나에게서 넘겨받은 <황홀한 사춘기>(를 포함한 몇 권의 야설)를 엄마한테 들킨 것이었다. (71쪽)

 

이재익 PD는 이어 김훈종 PD의 에피소드 중 인상적이었던 내용에 대한 감상도 함께 말했다.


“어렸을 때 램덩크』를 다 가지고 있는 여자가 이상형이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그런 여자와 결혼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무슨 문장을 붙였느냐하면 ‘이제 여러분의 선택은 두 가지다. 토하거나, 욕하거나’(웃음) 그 문장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그렇다면 김훈종 PD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무엇일까?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말했잖아요. ‘어떤 책을 사서 제목과 목차만 읽으면 그 책의 반을 읽은 것’이라고요. 이 『빨간 책』 같은 경우에는 목차만 읽으시면 다 읽으신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목차에 있는 책들을 먼저 읽으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김훈종 PD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라고 자신을 설명하면서 “이재익 PD와 비교하면, 제가 1년에 읽는 책이 이재익 PD가 한 계절에 쓰는 책보다 적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직장인인 터라 책을 쓰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는 것 역시 익숙치 않아 힘들었다고도 전했다.

 

“제 것 빼고는 다 좋은 것 같습니다.(웃음)”라고 말하는 이승훈 PD에 대해 이재익 PD는 ‘어떤 게임이든 상식의 힘은 크다’(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의 에피소드를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꼽았다. 내가 잘 아는 것에 투자하라는 조언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을 통해 피터 린치는 상식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중략)알 수 없는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회사의 주식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아는 회사,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을 파는 회사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자신이 많이 먹고, 쓰고, 입는 물건을 파는 회사,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는 회사의 주식을 놔두고 왜 굳이 자신이 잘 모르는 회사를 연구해서 투자하려고 하는가? (218~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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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를 키운 ‘빨간 책’들


이재익 PD는 20여 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펴낸 소설가이자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 전방위 작가다. 그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나의 경전’이라고 고백하고, 갓 등단해서 만난 젊은 시인과의 술자리를 추억하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를 이야기하고, 나이트클럽 룸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읽던 호기 넘치던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한다.


『삼국지』를 사랑해서 중문과에 입학했지만, 중국어를 잘하기는커녕 중국에 발도 못 붙여본 사짜 중국 전문가’라는 수식의 김훈종 PD. 그는 배낭여행에 관심 없던 청년의 피를 확 돌게 만들었던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과 ‘썸’타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앞둔 열다섯 소년이 발견한 『사랑의 단상』에 관한 난해한 기억을 읊는다.

 

흥미롭게도 이승훈 PD는 강풀의『26』을 제일 처음 소개하는 작품으로 하면 책을 내겠다고 했고, 협의를 거쳐 『빨간 책』에서 가장 처음 소개하는 책으로 최규석의 『100도씨』를 선택했다.

 

잘못은 저지르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후에 그 잘못을 어떻게 사죄하고 벌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해를 위해 내 나름대로 아주 작은 돌이라도 놓아보고자 이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시공사에서 낸 책에서, 뒤에 내가 이어서 소개할 ‘이 책’을 다룸으로써 그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단죄를 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아픈 80년대를 치유하는 데 깃털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한한 기쁨이 될 것이다. (11쪽)

 

책은 1부 ‘언제쯤 어른이 될까’, 2부 ‘그렇게 우리는 자란다’, 3부 ‘소년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로 구성되어 한 사람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 그 이후의 의식의 흐름이 엿보이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재익 PD는 “저는 초, 중학교 때 보던 책을 많이 실었고, 김훈종 PD는 중, 고등학교, 이승훈 PD는 비교적 고등학교, 대학교 이후에 보던 책을 실었습니다.”라고 설명하며 많은 분들이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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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 이재익,김훈종,이승훈 공저 | 시공사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고로 어린 시절 어른들이 추천하는 책이란 무난한 책 일색이었다. 균형 잡힌 가치관을 담고,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책들. 이른바 권장도서. 내가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권장도서는 따분하기 짝이 없다. 당연하지, 모범생 친구가 따분한 것과 같은 이치다. 돌아보니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 중에서 권장도서는 한 권도 없었다. 모범생 친구보다는 삐딱한 친구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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